1. 빈둥빈둥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듯한 맨살의 빈터.
그 게으름뱅이 같은 허허벌판이 인간의 등이다. 하지만 목과 두 손을 옆에서 거느린다. 그곳 근처의 여러 근육을 함께 불러내 쉬지 않고 움직인다. 스스로 지붕이 되면서 중추, 척추, 요추라는 26개 기둥을 세워 놓고 일종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한다.
옛날엔 서울역 플랫폼에서 일하던 지게꾼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곳. 이삿짐 나는 사람에겐 늘 살림살이의 무게를 달아 저울추가 매달려 있었던 신체적 공간이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구절은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말이다.
2. 무뚝뚝하고 소리 낼 줄 모르며, 허약함에선 동물의 등이 단연 일등이다. 우두머리에게 덤비다 힘에 부친, 서열 두 번째 개코원숭이가 등을 땅에 댄 뒤 가슴을 하늘 쪽으로 내보이는 본능도 그 방증이다. 눈이 스르르 감기는 애견이 등을 주인에게 가까이 갖다 대는 건 철석같이 믿는다는 의미다. 한없이 나약한 곳이라 믿는 자에게만 등을 보이는 동물은 인간을 닮았다.
몰래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엔 과녁이 되는 것도 이 영역이다. “등 치고 간 빼먹는다”는 속담은 말할 줄 몰라서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불쌍한 그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3. 가파르게 비탈진 곳이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고독감이 쌓이는 곳일까. 그래서 나비 타투(tatoo)를 그려 넣는 걸까. 아니다. 외로울 틈이 없는 가장 뚝심 센 몸의 한 부분이다.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일 때, 조용히 받쳐주기만 하는 듯하지만 공감해 주는 센스를 지녔다.
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두 사람 관계가 틀어질 때는 침대에서도 등을 진다. 등끼리라도 마주 보고 화해를 시켜보자는 속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가려워요. 효자손 불러 줘’라고 할 때도 감정을 드러낸다. 패션 욕구도 강하다. 훤히 그 빈터를 드러내 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을 졸라서 등 패인 티로 배꼽티에 도발하기도 한다.
4. 네모난 그 영역은 일상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에 실질적으로 관여한다. 디오스크 앞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라’는 뇌의 지시에 따라 양손이 움직인다. 그때 실질적으로 원격조정 하는 건 등이다. 들판에서 호미와 삽질을 하는 농부를 보라. 겉으론 양손이 하는 것 같지만 뒤에서 등이 컨트롤하는 것이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음식을 편하고 쉽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플라스틱보다 연한 그곳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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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불어오는 슬픔과 외로움의 바람을 막아주는 앞쪽 방파제가 가슴이라면 뒤쪽엔 등이 떠받친다. 그때 가슴 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는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게 충격을 줄여준다.
잠잘 땐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두고 나면 허수아비조차 보이지 않는 쓸쓸한 빈터가 된다. 하지만 그 시간도 쉬지 않는다. 그곳을 따스하게 데워, 다음날 일하는 데 드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5. 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의 평수(坪數)를 차지하는 만큼 그 밥값을 한다. 그는 침묵으로 일할 때가 많다. 비 올 때 우산을 받치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눈에 안 띄게 한몫한다. 머리와 두 허벅지를 이어주는 출렁다리가 될 때도 있다. 춤을 추고 포옹할 때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니 가능한 일이다. ’기(氣)죽지 말고 고개를 들라!‘ 할 때도 그 빈터는 목 근육을 떠받친다.
왜 신(神)은 텅 빈 거기에 눈을 달아 놓지 않았을까. 신은 등이 자기 모습을 거울로만 살짝 보게 했다. 신(神)은 그곳을 평평하게 만들어 놓고 아무런 흔적도, 궁금증도 거기에 남기지 않았다. ‘등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르페우스의 아내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그리스 신화를 말해주기 위해서다. .
6. 한때 육 남매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을 아버지의 등. 공중목욕탕에서 가끔 보았다. 50센티미터 떨어져 밀어주기 하던 곳. 그때 땀이 발효된 희끄무레한 부스러기를 등은 밑으로 떨어뜨렸다. 쏟아낸 그 피부의 부산물은 ’거룩한 등‘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일생동안 헝겊 쪼가리로 가리고 일만 시키고 별로 관심 없는 곳. 인간에게 자기 존재를 부각하는 때가 딱 한번 있다. 아파서 드러누울 때다. 주인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이다.
7. 누구나 이 세상 소풍 나올 때 등에 메었던 가방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내려놓고 간다. 그 등마저 텅 비워야 한다. 나이 들어 등이 휘어지는 건 평생의 무게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구부러지는 건 젊은 날의 자그마하고 덜 익은 열매가 커지고 익어가기 때문이다. 등어리는 나이 듦의 품격을 침묵으로 말한다.
<2024년 5월 26일 11.8 매>
----[등어리는 빈터] 수필은 현재, 수정 및 오자 탈자 교정 중입니다
----관찰노트
등어리가 배꼽에 도발할 때
어느 여인이 등어리 쪽
푹 파인 옷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그 등어리가 말한다
외로워서 세상 빛을 보고 싶었어요.
어둠속에서만 사니 사람 얼굴이 궁금했어요.
밤하늘 가로등 불빛에 반사돼
노인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젊은이들 가슴이 두근거린다
등어리가 배꼽에게 던진 말
배꼽티처럼 등어리티, 내 패션이야
내 삶은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