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위의 신발 한 짝
버린 걸까. 잃은 걸까.
진보라색 라벤더꽃 사이 돌담 위에 아기 신발 한 짝이 쓸쓸하게 울고 있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주워서 올려놓았나 보다. 이것을 찾지 못하면 나머지 한 짝도 무용지물일 텐데...
외로운 신발 한 짝을 보니 어릴 적 추위에 떨며 목청껏 부르던 김영일 작사, 나운영 작곡인 ‘구두 발자국’이라는 동요가 생각난다.
하아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누가 누가 새벽 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 발자국 소복소복/도련님 따라서 새벽길 갔나/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 발자국/
겨울 해 다 가도록 혼자 남았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쳤던 선생님, 교실이 없는 우리들(서울에서 수원으로 피난 온 초등학생들)은 수원중학교 운동장 층계에서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칠판을 걸 장소가 없어 매시간 음악만 가르쳤던 선생님과 그때 배운 노래는 70년이 지나도 생각나고 흥얼거리게 된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선생님도 울고 우리들도 춥고 서러워서 울었다.
피난 온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모아 준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전쟁의 고통을 감내하며 이겨내고 계신 선생님께서 집을 떠나온 철부지 어린이들이 얼마나 가엾고 애처로웠을까?
돌담 위의 쓸쓸한 신발 한 짝을 보니 떠오르는 생각이 또 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던 그날, 2007년 6월 2일 새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도 어머니는 다른 날과 같이 새벽 기도를 마치고 조용하게 주무시듯 하늘나라로 가셨다. 전날 저녁 늦게 돌아온 나에게 밥도 차려 주셨고 외국에 사는 딸과 외손녀에게 통화했다고 차근차근 말씀도 잘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잃은 나는 갑자기 성인의 자리에 있게 됐다.
아니 외톨이가 됐다. 버리고 간 신빌 한 짝이 된 것이다.
아내가 만든 음식 아니면 젓가락도 안 대는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 할머니를 수호신으로 알고 있는 내 딸의 보호자가 ‘나’라는 사실이 아득하고 깜깜했다. 더구나 아이가 유학 간 상태여서 할머니 가신 사실을 숨기려 했다가 탄로가 나서 전전긍긍했던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세상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급급해서 울 틈도 슬퍼할 새도 없었다. 신작로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던 쓸쓸함이 몰려와 넋을 잃었다.
그러다가 잡초에게도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우리 집 마당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의 부재가 거름이 되었는지 나의 홀로서기에 힘이 생겼다. 살아있음에 감사하자. 살아있다는 건 쉬지 않는 것, 생명은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니 나도 쉬지 않고 움직이기로 했다. 운동도 하고 성경책 필사도 하고 남대문 시장에 가서 재료 사다가 액세서리도 만들었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후배들이 불러내면 마다하지 않고 나가 영양가 없는 수다도 떨었다. 한때는 음식 만들기에 빠져 요리책도 뒤져보고 인터넷도 열어 봤다. 마침 요리책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후배가 있어 신간이 나오면 심심치 않게 보내주어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가끔 딸이 내게 요청을 한다.
“엄마가 만든 나물이 먹고 싶어요. 장조림, 멸치볶음, 뭇국, 된장찌개 다 생각나요. 한인 마트에 가서 재료 사다가 만들어 봐도 그 맛이 안 나요.”
기분이 좋아진 나는 서둘러 원하는 것은 뭐든지 만들어 보낸다. 만들 때도 기쁘고 보낼 때도 신이 난다. 나도 내가 만든 음식을 아이가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엄마가 외로울까 봐 걱정하는 아이에게 변하지 않는 대답.
“걱정하지 마. 엄마는 혼자서도 잘 놀아. 볼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보내며 매일 새벽 1 시간 이상 통화한다. 다행히 사위도 엄마가 만든 반찬을 맛있다고 먹으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오늘도 나는 연보라색 구름을 머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끌어낸 돌담 위의 외로운 아기 신발 한 짝이 주인을 찾았는지 궁금하다.
우리 어머니 새벽 기도 내용은 뭐였을까.
(2024. 7.2)
첫댓글 어머니의 부재로 시작된 엄 안젤라 선생님의 <혼자서 잘하기>의 힘찬 생활을 재밌게 읽습니다. 따님과 사위를 위한 요리 준비과정에서도 절절한 사랑을 느낍니다. 그 모두 "홀로서기"의 멋지고 아름다운 성취에서 나오는 거 네요^^ 늘 건강하시고 신앙심에서 오는 일상의 축복이 깃든 모습이 보입니다.
멋쟁이 할머니의 악세서리 만들기가 시작된 연유를 알았습니다. 전쟁은 이땅에 여러 흔적을 남긴 이야기, 어머니ㅡ나ㅡ따로 이어지는 성장통등등 진솔한 얘기를 읽었습니다.
안젤라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홀로 서기의 진수를 봅니다. 아기 신발 한 짝이 옛 추억을 불러 일으켰군요. 오랜만에 '구두 발자국'이란 노래 가사를 보니 정말 반갑네요. 현명하게 잘 지내시는 모습이 보기 줗고, 홀로 서기 위해 배울 점이란 생각 들어요.
선생님의 귀감이 되는 글 잘 감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