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35
초개 김영태 시인
김 송 배
대학로 옛 예총 건물 뒷길, 2층 총무부에서 내다보는 문예극장 길에 퇴근 시간이 임박해지면 어김없이 초개(草芥) 김영태(金榮泰) 시인이 꾸부정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학로 극장가를 헤매면서 무용공연을 감상하고 무용평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혜화동 성춘복 시인이 경영하는 시대문학(지금은 『문학시대』)사 편집실 한 귀퉁이에서 책상 하나에 의지하고 매일 출근해서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예술세계』주간으로 있을 때 그에게 ‘무용리뷰’를 청탁해서 장기간 집필한 적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잡지들이 원고료를 지불하지 못하는 영세성에 허덕이는 상황이지만, 『예술세계』에서는 많지는 않아도 원고료를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항상 인자한 인상으로 문인들뿐만 아니라, 무용가들과도 어울려서 담론으로 예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즐겨 쓰고 그 특유의 빙그레 웃음과 어눌한(아니 나직한) 어조로 해박한 예술적 감응을 논하고 있었다. 또한 무용공연 감상 시에는 미모의 여성무용가와 항상 동반하는 그의 멋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가끔 나의 사무실에 들려서 서로 안부를 전하면서 아직 남아있는 공연시간을 기다리면서 문단과 무용계에 대하여 현황을 알려주고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잡지 편집에 참고하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예술인(구용영감, 오리선생, 용래성님, 김수영, 김춘수, 김종길, 조병화, 성춘복, 이승훈, 정진규, 변종하, 장정일, 이성복 등의 시인들과 화가와 무용가, 작곡가, 영화배우 등등)들의 캐리커쳐로 어림잡아 1천 여명의 초상화를 남기고 그가 평소에 교감한 단평이나 인상기를 남기기도 했는데 나에게도 한 장 그려서 다음과 같은 촌평을 달아서『시대문학』에 게재하기도 했다. 나는 이 글을 2003년, 나의 작품들을 평해준 글을 모아서 발간한『김송배의 시세계』첫 페이지에 캐리커쳐와 함께 수록하였다.
松培도 머리가 까지고 있다 / 나보다 훨씬 연하인데 어쩔 수 없나보다 / 그가 『예술세계』주간인 된 이후 나는 6개월여 무용리뷰를 쓰고 있다. / 15장 정도가 분량인데 대개 40여장은 쓰고 있다. / 리뷰랄 작품들이 많고, 어차피 93년에 나올 무용평론집에 수록해야 할 작품평이기 때문이다. / 송배도 요즘 무용고연을 관람하는 것은 ‘춤의 해’ 한민족 춤제전을 위시해 그가 좌담을 주도해야 하는 의무 탓이다. / 92년 여름 그는 소련을 들렸다가 로마에서 옛 영화의 돌기둥과 만나고 있다.
‘몇 개의 기둥에서 멎는다 / 폐허, 그러나 그날의 영화 / 지금 사그라지려는 대리석 돌기둥, 돌부리에 / 신성한 저 자태 / 그날의 천연한 모습.’
그는 ‘로마여!’라고 심호흡을 한번 내쉰다. 로마에는 작곡가 레스피기가 악보에 옮긴 소나무들도 있다. 아스팔트 위의 그 소나무들도 그는 보았겠지...(95. 『시대문학』에서)
김영태 시인은 1936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99칸 부자집에서 서울 토박이로출생하여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59년에 『사상계』에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꽃씨를 받아둔다」 「雪景」「試鍊의 사과나무」가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박남수 시인은 ‘김군은 아직 대면은 없으나 퍽 생생한 시정신에 현혹되어 내보낸다.’라고 심사평을 썼다.
그는 이후 1965년 첫 시집『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을 비롯해서 17권과 『갈색 몸매들 아름다운 우산들』외 12권의 무용평론집을 발간하여 한국시인협회상과 현대문학상 그리고 서울문화예술평론상(무용부문)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아마도 그가 시에 전념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무용평을 쓰고 하니까 누군가가 질투를 했는지 다음과 같은 시를 시집『고래는 명상가』에 수록하기도 했다.
춤誌에 評을 쓰지 말라고 한다 / (또 누가 나를 씹나보다) / 가만히 있어도 씹고 / 자유로워도 씹고 / (스물 네해 월급 받다 혼자 된 지금) / 어떤 무용계 원로는 / 자네 방 수조고간은 고기들이 노니는 유리궁전이라며? 비꼰다 / 20년 된 녹물 쏟아지는 아파트 / 궁전은 아니고 유리구두 / 몇 켤레는 있다 / 구두 속 맨발이 투명해 보이는(「씹는 소리 1」중에서)
누군가가 상당한 질투를 했던 것 같다. 그는 ‘20년 된 녹물 쏟아지는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나름대로 예술의 본령(本領)을 전파고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그냥 두지 못하고 이러쿵하는 풍조가 우리 예술계에는 만연되어 있어서 일까.
그는 어느날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전화가 왔다. 혜화동 로타리를 지나 만해 한용운 생가 못가서 위치한 식당에서 돼지불고기 백반을 먹으면서 월간『춤』잡지에 권두시 한 편과 ‘시인이 무용가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란에 글을 쓰라고 했다. 시는 억지라도 맞추겠으나 무용가와 만나서 쓰는 글은 워낙 무용에 대한 문외한이라 거절했다. 며칠 후 다시 전화로 무용가 한 분이 나를 방문할 것이나 자료를 구하고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그 글을 며칠까지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무용가가 방문했다. 직접 무대에서 공연도 하지만 대학에서 무용도 강의를 하는 전미숙 무용가였다. 그의 프로필과 몇 마디의 질문을 던지고는 그가 현재 공연중인 「예감」과「소리 10-떠도는 노래」를 감상하기 위해서 문예극장 대극장으로 갔다. 지금까지 발레나 외국의 유명 작품은 몇 번 관람한 바 있지만 창작무용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전선생님의 그동안 경륜이 잘 말해고 있듯이 대범 속에서도 절제되고 섬세한 동작의 내적조화는 나의 심금을 환상의 경지로 충분히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약한 우리들 인간의 존재가치가 거대한 사회집단의 와중에서 희석되고 마멸되는 두려움이 응집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중략--무대의상이 암시하는 ‘애벌레’에서 시각과 접맥되는 상상력의 유발촉진은 큰 효과를 거두었고 한정된 작은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고뇌의 전개는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진솔한 형태로 ‘나’ 또는 ‘우리’의 공동체적 상실에서 보다 승화된 휴머니즘에 접근하는 지고의 순수 심성을 나에게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가 실린『춤』잡지를 들고 김영태 시인과 전미숙 무용가가 찾아왔다.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줄글도 잘 쓴다는 칭찬과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문학이나 무용이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향점은 동질의 휴머니티가 아닌가 하는 새로운 감응을 맛보기도 했다.
우리 문단에서 김영태 시인을 일러서 ‘폼생 폼사’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다. 멋을 잘 부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선 풍기는 외면의 멋은 누구도 비견이 안 되는 ‘폼’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볼품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휘날리면서 극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또한 그는 술은 한 잔도 못하지만 담배는 하루에 두 갑을 피우는 애연가였다.
그에게 어떤 탐방자가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언제까지나 풍경으로 남아 있다가 갈 겁니다. 항상 제 자리를 지키면서 조금 더 사람 가까이, 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고 대답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시달리다보니 열심히 노력할 시간이 없었다고 묘비명에 새기겠다’는 말로 문학에 열중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7월 12일 오전 3시 50분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향년 71세로 한생을 마감했다. 그는 평소에 ‘오규원의 옆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오규원 시인 옆에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