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상권 29. 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문: 요가에서 실패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또 요가에서 실패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M: 그건 단지 불완전의 문제일 뿐이야. 자신의 요가를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로 완성할 수 없었던 사람을 두고 요가에서 실패하였다고 하지. 그러나 그러한 실패는 단지 일시적일 뿐이야. 요가에는 패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어, 이 전투는 항상 이기게 되어 있어. 왜냐하면 이것은 참과 거짓 사이의 전투이기 때문이야. 거짓에게는 기회가 없어.
문: 누가 실패를 하는 것입니까? 자아입니까?
M: 그 질문은 잘못된 거야. 짧은 시간으로 보나 긴 시간으로 보나 실패의 문제는 없어, 이는 알지 못하는 나라로 멀고도 험한 여행을 하는 거와 같아. 셀 수 없이 많은 발자국 중에 목적지에 데려다 놓는 최후의 발자국은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 모든 발자국을 실패라고 할 순 없지. 장애물을 하나 피하려고 돌아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각각의 발자국이 목적지를 향하고 있음은 틀림없지 않아? 왜냐하면 언제나 움직이고 배우고 발견하고 펼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기 때문이야. 살아가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이지. 자아는 성공이나 실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법이 없거든. 이런 저런 것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있을 수 없어. 우리들의 본성은 성공이나 실패가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과 그런 것들은 삶의 씨줄과 날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 둘로부터 모두 배워서 그것을 넘어가야 해. 만약 거기서 배우지 못하면 되풀이하게 되지.
문: 뭘 배워야 합니까?
M: 자기 집착이 없이 사는 걸 배워야지. 그러려면 꿋꿋하고 두려움 없으며 언제나 승리하는 자신의 본성을 알아야 해. 일단 상상외에는 그 무엇도 자신을 괴롭힐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도록 해. 그렇게 되면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온갖 개념과 관념들을 무시하고 오직 진리에 의해 살게 되지.
문: 어떤 사람은 요가에서 성공하는데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이유가 뭔가요? 운명인가요? 성격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우연인가요?
M: 요가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없어. 단지 진행 정도의 문제일 뿐이야. 처음엔 늦고 끝엔 빠른 것이야. 충분히 성숙되면 깨달음이 폭발하지. 이건 자연스럽게 혹은 아주 조그마한 힌트에서 그냥 발생하게 되어 있어. 빠른 것이 느린 것보다 좋은 것은 아니야. 느린 성숙과 빠른 개화는 서로 거듭되는 것이야. 이 둘 모두가 자연스럽고 빠른 길이지.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실제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어, 의식이라는 큰 거울 속에서 여러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단지 기억만이 그것들에게 지속성을 주는 거야. 그리고 기억만이 물질이라 파괴될 수도 있고 없어지기도 하는 덧없는 것이지. 그러한 연약하고 허망한 기초위에 개인적인 존재감을 짓고 있으니 정말 덧없고 일시적인 꿈같은 일이야. "내가 무엇무엇"이라는 덧없는 생각이 순수 자각의 불변하는 상태를 방해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야.
문: 아이가 자랄 수밖에 없듯이 사람도 그 본성상 진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몰두할 필요가 있을까요? 요가의 필요가 설 자리가 없지 않습니까?
M: 진보라는 건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어. 그 무엇이나 진보에 기여하긴 해. 그러나 그런 건 무지의 진보야. 무지의 바램들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지만 언제나 구속이 될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구루가 나타나서 우리들에게 요가를 수행하도록 격려해야 셀 수 없는 무지의 밤이 사라질 때에 성숙이 이루어지지. 그때 지혜의 태양도 머지않아 떠오르게 돼. 그러나 진리의 면에서 보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어. 태양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으며 거기에는 밤이 없어. "나는 육신"이라는 생각에 가려진 마음이 끊임없이 환상의 실을 자아내는 것이야.
문: 만약 모든 것이 자연적인 과정의 일부라면 노력의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M: 노력 역시 자연스러움의 일부야. 그러나 무지가 완고해서 굳어지고 성격이 뒤틀리게 되면 노력과 노력에 의한 고통은 피할 수 없게 돼. 그리고 자연에 완전히 몸을 맡기면 노력이 없어지게 되지. 영적인 생활의 씨앗은 개화의 시점이 되기까지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자라게 되는 거야.
문: 가끔씩 위대하다는 인물들을 만나보면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유치하고 옹졸해지며 곧잘 싸움이나 하고 심술궂게 변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심하게 타락할 수가 있습니까?
M: 그 사람들은 육신을 완전히 컨트롤할 만큼 충분한 수행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야. 아니면 육신의 자연적인 노쇠를 방지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모든 관련 요소들을 이해하지 않고 결론을 내려선 안 돼. 무엇보다도 누가 낫고 못하다는 식으로 판단을 내리면 안 되지. 젊다는 것은 지혜의 문제라기보다는 생명력의 문제이니까.
문: 늙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조심성이나 분별력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까?
M: 의식과 무의식은 몸속에 있을 때에는 뇌의 조건에 달려 있는데 참자아는 그 둘 모두를 넘어서 있어. 뇌 속에도 마음속에도 있지 않지. 도구의 결함이 그 사용자의 결함을 꼭 말해주는 것은 아니야.
문: 제가 듣기로는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꼴 사나운 짓을 하지 않고 언제나 모범적으로만 행동하게 되어 있다던데요.
M: 모범을 세우는 게 누군데? 벗어난 사람이 왜 꼭 인습을 따라야 하나?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되는 순간 사람은 이미 자유롭지 못해. 그의 자유는 순간순간의 상황적 필요를 충족시킬 자유에 있는 것이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는 실제로는 구속이 되고, 반면에 해야 하는 옳은 일을 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이지.
문: 그러나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분간이 안 되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M: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보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아.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깨달음을 발설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운이 좋다고 봐야 해. 왜냐하면 그렇게 발설하는 것은 만난 사람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거든.
문: 주위를 둘러보면 불필요한 고통이 어찌나 많은지 섬뜩합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불치병 환자들로 가득 메워진 커다란 병원을 상상해 보세요. 만약 그들을 모두 죽여 그 고통을 끝낼 권리가 선생님께 주어져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M: 난 그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남겨 두겠어.
문: 하지만 고통을 겪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떤 식으로 운명에 개입하실 수가 있습니까?
M: 그들에게 발생하는 것 그대로가 운명이지. 업의 소멸을 방해하는 것은 불가능 해. 지금 자네 말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 전적으로 출생시에 결정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만약 그렇다면 운명을 결정하는 그 어떤 힘이 고통 받는 사람이 없도록 돌봐주지 않겠어?
문: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M: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야. 시간도 공간도 마음속에 있는 거라네. 인과의 법칙도 일종의 사고의 방식일 뿐이야. 실제로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이 하나일세. 다양성은 오직 마음 속에 있을 뿐이야.
문: 여전히 선생님께서는 불치병에 걸린 몸을 파괴해서라도 고통을 더는 쪽을 더 좋아하십니다.
M: 자네는 외부적으로 보고 있고 나는 내부에서 보고 있네. 나는 고통 받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 받는 사람일세. 나는 그것을 내면으로부터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아무런 노력 없이 옳은 일을 한다네. 나는 룰을 따르지도 제정하지도 않으며 믿음을 지니고 저항 없이 생명과 함께 흐른다네.
문: 하지만 선생님은 다른 사람을 많이 도울 수가 없습니다.
M: 난 도울 수 있어, 그리고 자네도 도울 수 있어, 모두 다 도울 수 있지. 그러나 고통은 계속 더 생겨난다네. 고통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만 가능해. 타인들이 할 수 있는 건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뿌리 깊은 어리석음이라는 고통의 원인을 도와주진 못하는 법이지.
문: 그 어리석음이 끝날 수는 있는 것입니까?
M: 개인의 경우에는 물론 가능하지만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매우 오랜 세월이 필요해. 그리고 창조에 있어서는 결코 가능치 못하지. 왜냐하면 창조는 그 자체가 무지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야. 물질 자체가 무지야. 알지 못함,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끝없는 고통의 원인일세.
문: 구세주라든가 신의 화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M: 그래서 구제를 했나? 그들이 왔다 갔지만 세계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야. 물론 그분들은 많은 일을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새로운 차원들을 열었지만 세계를 구원한다는 것은 과장이지.
문: 세계의 구원은 불가능합니까?
M: 어느 세계를 구하려는 건가? 자네 자신이 투사한 세계라면 자네 스스로 구해야 할 것이고, 나의 세계라면 나 스스로 구해야 할 것인데 나의 세계라면 난 나 자신과 분리된 세계는 알지 못하니 구하든 말든 내 마음일세.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네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전부인데. 자네가 세계를 구하는 것과 구해야 할 세계가 과연 있는지 어떤지 보게나.
문: 선생님은 선생님이 없으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위해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쇼를 끝내는 거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건 벗어나는 방식이 아닙니다. 세계를 제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지식이 세계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단지 설명만 해줄 뿐이지요. 왜 내가 이런 비참한 세계를 창조했으며 이를 변화시키려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그 모두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찬미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설마 그런 뜻은 아니시겠지요. 병과 그 원인에 대한 묘사가 병을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필요한 건 적합한 약입니다.
M: 묘사와 원인 규명은 둔감함과 어리석음에 의해 야기된 병을 치료할 수 있어, 결핍증은 부족한 요소를 공급해 주면 치료되는 것처럼 인생의 병은 지성적인 초연함이라는 약으로 치료되지.
문: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설교한다고 세상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냥 그럴 뿐입니다. 그들은 그대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M: 그들이 변하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분리감을 제거하면 갈등이 없을 거야.
문: 인쇄된 메시지는 종이와 잉크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요. 세계를 요소와 성질들로 분석함으로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 즉 세계의 의미를 놓치고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모든 것을 꿈으로 매도하는 것은 곤충의 꿈과 시인의 꿈의 차이를 무시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게 꿈이라 하더라도 다 같은 꿈은 아닙니다.
M: 꿈은 같지 않지만 꿈꾸는 사람은 하나야. 내가 곤충도 되고 시인도 되지만 진리의 입장에서 말하면 난 둘 다가 아니야. 난 모든 꿈을 넘어서 있다네. 난 모든 꿈을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근원의 빛일세. 꿈속과 외부, 그 양쪽 모두에 있지. 두통이 있는 사람이 그 통증이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통증 그 자체가 아님을 알듯이. 나도 꿈을 알고 내가 내 자신의 꿈을 꾸고 있음을 알고 내 자신이 꿈을 꾸지 않고 있음을 동시에 안다네. 난 꿈을 꾸는 동안의 나이며 꿈 이후의 나로서 존재하지만 내가 꿈속에 보는 것은 내가 아니지.
문: 그것은 모두 상상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둘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M: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지. 두 꿈 사이에서 꿈꾸지 않는 것도 꿈의 일부야 . 그러나 정(定)에 머물러 있음. 즉 진리 속에 무시간의 존재가 꿈꾸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꿈과 관계가 없어. 결코 꿈을 꾸지 않고 꿀 일도 없어.
문: 꿈과 꿈으로부터의 도피가 모두 상상이라면 벗어날 길은 무엇입니까?
M: 벗어날 길 같은 건 필요 없어. 벗어날 길이라는 것도 꿈의 일부라는 걸 모르겠나? 해야 할 일은 꿈을 꿈으로 보는 거지.
문: 제가 모든 걸 꿈으로 돌려버리면 그것이 저를 어디로 이끌겠습니까?
M: 어디로 이끌더라도 그건 꿈일세. 꿈을 넘어선다는 생각 자체가 환각이야. 왜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냥 자신이 세계라는 이름의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출구를 찾는 걸 멈추게. 꿈은 자네의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자네가 어떤 꿈은 좋아하고 어떤 꿈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모든 걸 사랑 하든가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든가 하여 불평을 멈추게. 꿈을 꿈으로 보게 되면 이미 필요한 일은 다한 거야.
문: 꿈은 생각 때문에 생깁니까?
M: 모든 것이 관념의 장난이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초월 삼매) 속에서는 아무것도 지각되지 않아. 근원적 관념은 바로 "내가 있음"이야. 그것이 순수한 의식상태를 흩어 놓아 무수한 감각, 지각, 느낌, 관념들을 쫓아다니게 하고, 그것들 모두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이루는 종자가 되는 것이야. " 내가 있음"은 주시로서 남지만 일체의 일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야.
문: 왜 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M: 자넨 또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관조자로 나누었군. 그 둘은 하나일세.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