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어꾼)-신성애
잔설 사이로 갯버들이 눈을 뜨려 뒤척이는 날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순박한 얼굴의 크메르인을 새아기로 맞아들였다. 자꾸만 나이들어가는 둘째를 결혼시키며 틈틈이 배운 캄보디아 말로 대화를 시도했다. 행여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맛있어, 층안?” 하고 숟가락이 올라갈 때마다 물었다. 며느리는 말수는 적었지만 살가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엄마 아빠라고 불러주며 웃는 모습에 집안은 서둘러 봄날이 온 것 같았다.
더운 나라에서 왔으니 얼마나 추울까. 방안의 온도를 높이고 손이 시릴세라 부엌일은 아예 시키지도 않았다. 잠을 잘 자고 밥만 잘 먹어도 어여쁜 며느리였다. 행여 맘 상하고 외로움을 탈까. 온가족의 신경이 한군데로 모아졌다. 날 풀리고 꽃피면 몸과 마음이 물이 올라 나긋나긋해 지리라. 기대하는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며칠이 지나자 며느리는 방안에서 나올줄 몰랐다. 무엇이 못마땅한지 밥 먹으라고 불러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하루 종일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는 소리만 들렸다. “섭섭하이, 수오수다이”라는 캄보디아 인사말이 수없이 오갔다. 누구와 무슨 말을 하는 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가”하고 다정하게 불러봐도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무슨 영문인 줄 몰라 식구들이 서로 눈으로 묻고 답했다. 방문을 와락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말을 하면 “한국사람, 캄보디아 사람 달라요”하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기 일 쑤였다. 뾰족한 말투, 생전 들어 본적 없는 말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드라마를 많이 본 탓일까. 한국시어머니는 잔소리꾼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딸이 없는 집에 들어온 며느리인 만큼 맘껏 봐주자 마음을 다잡아도 역부족이었다.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도 아예 커튼을 치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입을 닫고 만국 공통어 보디랭귀지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가까운 다문화센터에 전화를 했다. 한국 정착을 위하여 우리의 문화와 예절,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처음에는 자가용으로 센터를 오가며 수업을 받았다. 기다리는 시간에 다른 다문화가정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 사는 일이 어느 집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버스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혼자 다니도록 하였다.
며느리의 짧은 치마에 이국적인 짙은 화장은 동네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밖으로 내돌리는 그릇은 깨어진다며 바깥으로 보내지 말라고 당부를했다. 나가서 깨어질 그릇이라면 집안에 둔다고 무사할리 있겠는가. 이웃의 염려를 애써 무시하며 인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알게 모르게 보내는 미덥지 않은 시선에 혹여 주눅 들지 않을까 오히려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배움의 시간이 길어지면 세상 보는 눈도 깊고 넓어지리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시어른이 며느리를 부를 때 “아가 ”라는 말을 썼다. 아기처럼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다. 말이 통하고나니 며느리는 “아가”라는 말을 어린아이로 알아듣고 화를 냈다고 한다. 시집온 사람을 아기취급하며 무시하는 줄 알았다고 멋쩍게 말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속을 끓이고 얼굴 붉힌 일이 내게도 얼마나 많았던가.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맞추어 세상을 본다. 어린 나이에 머나먼 낯선 곳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온 그 용기가 얼마나 가상한가. 나라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선뜻 나서지 못 할일이었다. 말귀를 알아들으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때로는 얼토당토 않는 고집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한걸음 물러서 보면 수긍 가는 일이 많아졌다. 시간은 때때로 마법 같은 치료제이다. “고맙다.( 어꾼)”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게 상책인줄 서서히 알아갔다.
태기가 있어 병원에 가니 까만 점 하나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점으로 나타난 잉태의 흔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은 우주로 탈바꿈해왔다.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키운 생명은 조금 일찍이 밖으로 나올 채비를 했다. 밤새도록 진통하는 며느리를 가슴에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탯줄로 이어진 두 호흡이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한여름 새벽녘 청량한 기운을 타고 손자는 우리 곁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든든한 끈 하나가 매듭을 지어 가족으로 들어앉았다.
지난해 다문화 센터에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캄보디아 중국 ,베트남 필리핀 네팔에서 온 다섯 가족이 함께하는 가족캠프였다. 사전에 부부교육, 고부교육을 한 달간 받으며 다양한 문화를 배웠다. 서로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게임과 놀이를 하며 조금씩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큰손자는 내 손을 잡고 겅중겅중 뛰고 작은놈은 엄마 품에 안겨 세상구경을 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수족관에서 돌고래 쇼를 보며 환성을 지르고, 어른들은 오름을 돌아보는 레일 바이크를 타며 동심으로 돌아갔다. 삼대가 함께하는 모처럼의 나들이 길에 모든 시름 내려놓고 온전히 한 가족이 되었다. 손발이 되어준 센터 직원들 덕분에 생전 처음 대접받았다는 느낌이었다. 지역의 다문화센터는 튼튼한 가족으로 거듭나는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며느리는 친구들과 여럿이 모여 캄보디아 음식을 해먹을 때 유난히 얼굴이 밝아진다. 부엌에는 코끝을 자극하는 고유한 향이 가득 퍼지고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진다. 오랜만에 접하는 쁘라흑과 까미를 곁들인 쌀국수에 젓가락들이 춤을 춘다. 한 식구가 되어 재잘거리는 말투 속에 한국말이 섞이는걸 보면 이제는 거의 우리사회에 녹아 든 것 같다. 향수에 젖은 그들에게 기꺼이 친정엄마가 되고 마음자리도 내 주고 싶어지는 날이다.
돌아서서 생각하면 그 동안 며느리도 나만큼 속을 끓였을 거다. 세속에 닳고 닳아 근력이 생긴 나보단 며느리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화가 나면 생 속으로 속사포처럼 쏘아대는서툰 한국말도 거슬리기는커녕 그저 대견하기만하다. 외출을 할라치면 다른 사람보다 예뻐야 한다며 한사코 팩을 부쳐주는 며늘아기다. 어우렁더우렁 서로의 편이 되어 보듬으며 한세상 살아보는 거다.
산골짝 외딴집에 아이들이 없다면 얼마나 적적할까.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는 손자들이 소란을 떤다. 서로 타겠다고 투덕거리다가 큰놈이 동생을 태우고 힘겹게 페달을 밟는다. 형제는 서로 도우며 골짜기를 웃음소리로 채울 것이다. "할머니 사랑해요." 수시로 뺨에 뽀뽀하는 살가운 녀석들, 머리가 아프다고 찡그리면 반창고를 이마에 붙여준다. 아무리 말해도 넘치지 않고 찰기 가득한 말. 어제도 오늘도 아가야 “고맙다(.어꾼) ”
어꾼- 캄보디아말로 고맙다는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