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복선:
의정부교구 하느님의 종 및 순교 사적지에 대한 심포지엄
⌜의정부교구 신앙의 유산 조명⌟
-거룩한 발자취를 따라서-
장미 향 짙은 5월 성모성월 묵주기도가 결실을 맺을 즈음, 매일 오후 3시에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와 자비의 하느님 기도 힘이 깔려 있는 위로와 희망의 땅 양주 순교성지에서 2023년 5월26일 오후 2시에 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가 주최하고 교구 교회사연구소가 주관하는 의정부교구 하느님의 종 및 순교 사적지에 대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특별히 이번 심포지엄은 의정부 교구 신앙의 유산인 순교 사적지와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통해 교구 신자들의 순교 신심을 북돋우는데 의미를 두었으며, 교구 내 신앙의 유산과 시복을 앞둔 하느님의 종에 대한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다.
더불어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우리 교구의 신앙 유산을 발굴하고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신자들에게 우리 교구의 신앙 역사를 알려줄 뿐 아니라 교구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심포지엄에서는 첫 번째로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의 신앙과 한국교회의 인식’에 대해 양인성 박사가 발표했다. 두 번째로 ‘양주 지역 신앙의 전파에 대한 연구’와 ‘하느님의 종 피 카타리나와 광탄 분수리 묘비와 묘소에 관한 연구’를 서종태 박사가 발표했다. 끝으로 ‘갈곡리, 신암리 공소 하느님의 종들의 생애와 한국전쟁의 과제 - 김치오 베네딕도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를 중심으로’는 김정숙 박사가 발표했다.
김정숙 박사의 이번 연구 논문을 살펴보면서, 모르는 부분을 자세히 알게 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갈곡리 출신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용호 주교와 동료 순교자’(34번째)로, 동생 김치오 베네딕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는 ‘홍료 순교자’(2번째), 신암리 공소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25번째)그룹에 속함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들의 모범은 “영적인 풍요로움과 복음화를 위한 탁월한 수단”의 원천이 될 것이다. 이 세 하느님의 종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며, 그들의 순교 사건은 한민족의 비극임을 절감하게 되고, 김 마리안나 수녀의 영성과 피살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연약한 인간의 심정이 북받쳐 눈물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이분들이 남긴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1927년 신암리 본당 재정적 궁핍으로 ‘한 사람당 한 끼에 한 숟가락씩’ 절미 운동을 전개했다는 내용을 보고 공동체의 강한 결집력과 애덕실천을 느끼며, 교우촌 신앙선조들은 이미 앞서서 공동선 실천에 앞장서셨던 분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민족복음화 역사의 등불 역할을 하신 하느님의 종 이벽 세레자 요한 신앙선조가 있었고, 탁월한 지혜로 주문모신부를 보살피며 앞장서서 선교의 네트워크를 조성하여 도운 신유박해 당시의 여성 회장이었던 순교자 강완숙 골롬바 역시 모두 평신도 신분이었으며, 순교자들의 모범은 한국의 복음화 과업에서 교회의 스승들이고 수호자들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우리시대의 최 근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고 호소하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복음 선교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온 교회와 함께 언제나 준비되어 있고 풍성하게 여겨지는 영혼의 수확을 위하여 더욱 많은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 할 것이다.
다함께 생각해 볼 질문을 드려봅니다.
자신의 신앙실천에서 심한시련을 체험하고 있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기우:
감사합니다. 구복선 로사님의 초대로 저도 양주 순교성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교회사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경기도 송추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가 있다는 사실은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더불어 그분에 대한 시복시성심사가 시작되었음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백년 박해 기간 중에 자신의 소신과 민족과 나라에 대한 츙정을 글로 써서 항변한 의인이요 진리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런데 명과 청왕조도 받아들인 천주교를 치졸한 논리와 정적 숙청의 빌미로 박해하였는데, 결국 1876년 일본 군함이 개국을 강요하여 맺은 강화도 조약에서 황사영의 주장대로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교회가 받은 박해의 실상과 저항의 진실을 올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작금의 교회 현실을 타개하고 순교자들이 꿈ㄲ 었던 복음화에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훈:
저희 본당 신부님의 동기되시는 한국외방선교회의 이 다니엘 신부님을 잠깐 만나 나누었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광주교구의 신학대학을 다니다 대학원 과정을 수원교구로 옮겼다합니다. 마침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의 은사 되시는 심상태 몬시뇰신부님한테서 수업하였다고 해서 처음부터 선교사로 근무하게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사제가 공무로 자리를 비우게 되어 휴가 나오신 바람에 미사를 대신 집전하게 되었는데 저희 pr.의 성모성월 묵주기도 당번이라 평일 미사를 오랜만에 참석하게 되어 그동안 말로만 듣다가 첫대면하게 되었으나 여러 곳으로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서 뛰어다니시기에 차분히 시간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도요한신부님의 평소 지론인 아시아의 복음화에 한국교회가 봉사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교황청의 시각을 이미 1975년부터 故 최재선주교님이"한국외방선교회"를 출범해서 어려운 이웃 국가를 도우면서 복음화 선교를 시작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과거 어려움을 이겨내고 잘 살게 된 한국 교회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외방선교회 선교사분들의 어려운 체험사례를 몇가지 공유해봅니다. 아울러 이미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믿음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알바트로스 새에 관한 영상도 공유해 봅니다.
https://news.cpbc.co.kr/article/190951
https://youtu.be/DHPpxhXSlRY
황경훈:
김태훈 선생님의 귀한 글과 영상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기우 신부님의 아시아 복음화와 관련해서 약간 길지만 제 생각을 나눠보고 이와 관련해 이번에 열리는 아시아 복음화와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선교 사제가 주로 성사집행과 같은 ‘말씀 선교’에 중심을 둔다면 수도자와 평신도는 좀 더 다양한 선교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종교문화적 다양성, 가난, 복잡한 정치체제 등은 아시아에서 복음선교 활동이 직접적인 말씀선포 뿐만 아니라 나라나 지역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선교활동이 필요로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외국 선교사들이 교육, 의료, 복지 분야에서 요구되는 활동을 해왔던 것과 비슷하게, 이제 한국 선교사들도 아시아에 파견돼 그러한 분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적, 질적인 면에서 한국 교회가 받은 정도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과 『찬미받으소서』등 주요 문헌에서 선교를 ‘온전한 인간발전’(integral human development)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면서 복음선교 활동이 물질적 지원과 협력을 넘어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인간발전을 위한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황청내 ‘복음화성’을 몇 개의 기구와 통합해 ‘온전한 인간발전부’로 개편하심으로써 인간발전이라는 복음화 활동이 중요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절대적으로 가난한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여전히 물질적 차원의 인간발전에 더 힘써야 하는 한편, 종교문화적 다양성에서 강한 자기정체성과 자긍심을 찾는 동남아 나라들에서는 종교문화적 포용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문화적, 영적 인간발전이 더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여러 차원의 복음화 활동은 단계적이 아니라 한 몸으로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 강조점이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복음화’를 이렇게 전인적, 통합적, 총제척 인간발전이라는 폭넓은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우선 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나라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령 동아시아는 이번 ‘미사일 오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한반도는 여전히 가공할 핵전쟁의 위협에 놓여 있고,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 국가에서는 이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강제 결혼(조혼)의 위협에 처한 어린이가 50퍼센트가 수직 상승했다는 보고가 있는 상황이고, 또 파키스탄과 같은 남아시아 국가에서는 지난해 8월에 닥친 홍수로 나라의 1/3이 물에 잠기는 등 재해와 빈곤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기우 신부님께서 평화의 집을 ‘아시아 복음화’ 차원에서 전망하고 계시다면 이런 접근을 좀 더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시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침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이 심상태 몬시뇰님의 관심과 지원으로 창립된지 10주년을 맞아 ‘아시아복음화와 시노달리타스’라는 주제로 6월 7-9일까지 국제 심포지엄을 열게 됐습니다. 앞서 언급한 복음화에 대한 전망 말고도 ‘예언적 대화로서의 복음화’,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실현하는 복음화’, ‘우정으로서의 복음화’ 등 이 분야 여러 전문가와 석학으로부터 복음화와 선교에 대한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관련 포스터를 붙이오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가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김태훈:
황 연구원님의 글을 읽고 나니 복음화를 全人的, 총체적 인간발전이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란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국가별로 강조점을 달리 해서 접근해야하고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각기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황경훈:
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물론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미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민족들의 발전>(1967)에서 제시되었고 그 뒤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사회적 관심>(1984년), 베네딕토 16세의 <진리안의 사랑>(2009)에서 더 깊이 논의되어 오다가 현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2013)-<찬미받으소서>(2015)-<모든형제들에서>(2020)에서 심화, 확장, 통합된 것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집이 아시아 복음화를 자기전망으로 갖고자 한다고 할 때, 이런 교회의 빛나는 전통을 고려하면서 이를 아시아의 상황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아시아가 일종의 종교문화적 '미로'여서 자칫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길을 못찾거나 입구는 찾았는데 출구를 찾지 못하는, 그래서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여러 부문에서 흔히 목격된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평화의 집이 그 대상을 아시아 청소년과 청년으로 하고 있다면 이들을 대상으로 자선, 의료, 복지 같은 고전적인 복음선교 분야에 헌신할지 아니면 교육 훈련이나 여성, 또는 다른 분야를 중심으로 할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지역적으로도 광대하므로 특정 지역에 대한 선후완급을 정하는 것도 평화의 집이 계획 및 활동 수립에 있어 아시아적 자기 지평을 갖는데 필요해 보입니다. 이상 약간의 보충 설명이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평화의 집--> 희망의 집
이기우:
https://youtube.com/watch?v=rZR0pPFTuhk&feature=share
아시아의 복음화와 이를 위한 교회쇄신 과제를 푸는 데 있어서 하나의 팁입니다.
김태훈:
You never fail until you stop trying. - 아인슈타인-
시험과 연구는 어떻게 다른가?
이런 내용에 끌려 의학 연구 논문작성에 시간을 보내는 자녀한테도 전달하고픈 생각이 듭니다
이기우: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유용한 사고방식입니다.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이룩하면서 종교와 맺은 관계를 관찰해 보면, 국가의 발전 단계에 필요한 공동선이 핵심 변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는 개인히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동선이 종교를 대하는 핵심 변수였던 사례를 몇 가지 들 수 있습니다. 공동선에 유용하면 종교를 수용하고 해로우면 박해합니다.
1. 우선 아브라함을 통해 개인적으로만 믿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을 섬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들이 히브리 노예로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체험한 열 가지 재앙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고 불 기둥의 보호를 받는다거나 홍해가 갈라져서 마른 땅을 밝고 시나이 광야로 건너가거나 그 황량한 땅에서 만나라는 음식을 받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는 샘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에서 체험한 여러 기적 덕분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 이를 공인하고 국교로까지 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전쟁을 치루고 제국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가 유용하다고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 민족이 로마제국의 강역을 차지하게 된 시절에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을 하게 된 이유 역시 자신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문명을 이룩하는 데 유용하리라고 판단한 때문입니다.
3. 이렇게 하여 유럽 대륙이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자리를 잡고 중세 천년 동안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교의 본산이었던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문화 수준보다 우월했던 이슬람 문명을 이룩하였습니다. 마호멧이 제공한 이슬람교가 당시 서아시아 지역 거주민들의 공동선에 유용하였기 때문입니다.
4. 한민족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은 고구려 소수림왕이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유학을 받아들이게 된 고려 말기에는 불교의 종교성보다 유학의 합리성이 국가 운영에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이어서 세워진 조선왕조는 아예 유학을 유교로까지 숭상하여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5. 애초에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가 힌두교에 밀려 중국으로 쫓겨난 배경에는 인간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힌두교가 불교보다 더 우월하고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수월하였기 땜분입니다. 또한 중국에서 유학이 진흥된 배경 역시 공자와 맹자 등 유학의 사상가들이 국가 발달에 필요한 공동선의 이치를 체계적으로 제공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불교를 수입하고 신도를 유지하려는 이유 또한 자신들의 국가 운영과 문명 발달에 필요한 공동선의 이치를 그 종교들이 제공하였기 때문이고, 그러한 단계와 상관없이 들어와서 세력을 넓히려던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것도 자신들의 공동선에 해가 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6. 현재 아시아에는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유교 등 전통적이고 고등한 종교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종교들이 고대 이후에는 아시아인들의 국가 형성과 문명 발달에 필요한 공동선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그러한 목표를 이룩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선을 저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그들 종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과 민족들이 산업화는 물론 민주화에 있어서 답보상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신정국가도 있고(이란), 전제왕정을 유지하거나(태국, 일본), 일당독재를 지속하거나(북한, 중국) 군사독재로 국민을 억압하는(미얀마) 등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들이 많습니다.
7. 인류가 역사상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검증한 바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문명이 사람들에게 공동선을 증진시키고 행복을 제공할 수 있다는 데로 모아집니다. 그러므로 여러 정치체제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아시아 대륙에서 복음화를 하기 위해서도, 근세 이후처럼 그리스도교를 전투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신자들을 늘리게 하는 전략은 무용지물임이 증명된 바 있고, 오히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본연의 선교, 즉 그들의 문명이 공동선을 이룩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랑만이 유용할 것입니다. 이제 복음화란 유럽 백인들이 중세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고수했던 ‘유럽화’가 아니요, ‘백인문명 답습’도 아니며, 그리스도교 신자 증가도 아님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8. 결론: 20세기의 성인들 중에는 아시아의 복음화와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보여준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권에서 참된 이웃이 되어 주고자 했던 샤를르 드 푸꼬, 힌두 문명권에서 더 좋은 힌두교인과 더 나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를 촉구했던 마더 데레사, 중국인보다 더 중국적이었고 중국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뱅상 뢰브가 그들입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선각자들도 유학자들이었고 보유론적 노선 위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한민족이 품격있는 문화를 유지 보전하면서도 고상한 하느님 신앙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하여 헌신했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정약용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선의 조건을 알아내기 위하여 18년의 유배 생활동안 저술활동에 몰두하기도 했었습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백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전서가 그 산물입니다. 제도교회에서는 아직도 그를 배교자로 치부하고 있으나, 오늘날 신앙 토착화와 민족 복음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복음화에 이르는 도정에 있어서는 사표와 귀감이 되는 위인이고, 진정으로 천주교 교리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한 수준에 있어서 우리보다 더 앞서간 선구자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공유해 드린 황농문 박사의 경험과 주장은 아시아 복음화와 이를 위한 교회쇄신의 목표를 내세운 우리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팁입니다. 몰입하는 사고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으고 실사구시의 방식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드디어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
김태훈: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96240
장후남:
안녕하세요?
6월 6일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워크숍에 다녀왔습니다.
정리한 파일을 올립니다.
돌아봄 -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워크숍
1. 2022년 11월 초. 위기의 한국 교회와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모여 몇 차례 회의가 있었다.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를 향해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모아 완성의 길을 걷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모범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자.”는 취지로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이 함께 모이기 힘든 상황으로 SNS 전국 네트워크 조직을 통한 참여 확대 방안이 필요했다. 이에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모아 구체화하기 위한 워크숍을 마련했다.
2. 2023년 6월 6일 오전 10시 10분 대한문 앞에 워크숍 참가자들이 모였다. 두 대의 승합차로 이동, 한 시간 후에 천안 작은형제회 피정 센터에 도착했다. 진행 팀에서 준비한 점심은 예상 참석 인원 20여 명이 30명이 되어 저녁 먹거리로 가져왔다는 삼계탕도 점심이 되었다. 이기우 신부님, 피정 센터의 석일웅 수사님을 포함한 여자 16명, 남자 14명이 참석했다.
3. 오후 2시 10분. ‘주님의 기도’로 시작 → 워크숍 취지 설명(김지현 유스티노) → 참석자 인사 나눔 → 조별 토의 → 조별 발표 → 자유토의 → 기타 알림 → 이기우 신부님 말씀 → 단체 사진 촬영 → 저녁 식사 → 서울 출발 순서로 이어졌다.
4. 식사와 인사 나눔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열정을 갖고 일하는 참석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관심과 갈망이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이라는 명제에 녹아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기우 신부님의 ‘흑석동 성경 강학회’ 유튜브 강의에 올린 워크숍 알림만으로 자발적으로 참석한 이도 있었다. 진리를 찾아 나섰던 초기 한국 천주교회 신앙 선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5. 토의에 대하여/ 주요 키워드 “사회 복음화”
(1) 조 구분은 6월 6일 축일인 성인 네 분의 이름으로 필립보 조, 바올리나 조, 꼬까 조, 노르베르토 조로 나누었다.
(2) 토의 형식은 4개 조에 각 1개의 주제가 있고, 참석자는 자유롭게 관심 주제가 있는 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조에서 뽑은 진행자와 60분 동안 주제 토의를 마치면 서기 한 명이 전체 모임에서 발표했다.
(3) 각 조의 나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필립보 조: 창립 선언문에 들어갈 내용과 교회에 바라는 지향 등
2) 바올리나 조: 조직 기구, 즉 논의 및 결정 구조, 규약 등
3) 코까 조: 추진할 프로그램(의미를 담은 미사 전례, 흥미 있는 주제, 토크 콘서트 등)
4) 노르베르토 조: 홍보활동. SNS 전국 네트워크 방안, 어떤 방법, 어떤 활동 매체를 활용할 것인가?
(4) 조별 토의와 발표로 참석자들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6. 토의 결과 지향하는 바를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첨부 참고>
(1) 활동 지향의 외연을 넓히자
(2) 수평적, 원형 중심적 구조를 갖춘다.
(3) 젊은이들 유입에 필요한 가치 있는 것 찾는 방안 모색한다.
(4)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교회를 지향한다. (냉담자와 청소년 포함)
(5) 기존 사회운동 조직과 차별성을 둔다.
(6) 영성 생활을 심화한다.
(7) 다양하고 혁신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8) 좋은 신자, “예수의 길”이 지향하는 신앙인 상이 돼야 한다.
7. 토의 과정에서
(1) 교회 내에 이미 많은 사회 복음화를 지향하는 단체들이 있다. 그런데 새로 단체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
(2) 다양한 영역에서 교회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3) 기존의 사회운동 조직과 차별성이 필요하고 각각의 특성을 유지하며 공통점을 찾아내어 일치를 이루며 발전해야 한다고 보았다.
(4) 이 모임의 취지와 목표, 방향에 모호한 부분 많다. 보다 구체화,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8. 기타 사항,
(1) 7월 1일(토) 정동 작은형제회 교육회관에서 주제가 있는 미사와 함께 다음 과제를 논의한다.
(2)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은 8월 15일을 전후하여 서울에서 예정된 시국 미사 종료일에 오픈 예정으로 이날 모두 시국 미사에 참석한다. 아울러 참여 대상 확대를 위한 설문지를 배포할 예정이다.
(3) 단톡방을 만들어 알림 사항을 공유할 계획이다.
9. 이기우 신부님 말씀 정리
이곳에 처음 와서 첫눈에 들어온 한옥과 소나무는 우리 것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석 수사님을 만난 것도 큰 기쁨이다.
저질스러운 정치가 일 년이나 지속되었고, 무능한 사목에 대해서는 훨씬 더 오래되었다. 새로운 사목이나 새로운 교회에 대한 노력이 안 보이던 차에 오늘의 워크솝을 만났다. 새로운 정치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목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리에 마티아 사도를 뽑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은 역사성은 존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기준이었다. 마티아 사도를 뽑은 이들은 예루살렘의 첫 초대 교회였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교회는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처럼 제2의 마티아 사도를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2의 마티아 사도이고 또 다른 열두 번째 사도일 수 있고 그렇게 자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이야기가 있는 복음을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기준이요 진리라고 보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교회는 같은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상대화되는 것이다.
240여 년 전에 이 땅에서 천주교를 시작한 선각자들도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들은 모두 젊은 층이었다. 그들의 패기가 한국 교회를 세운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당시 그들보다 더 나은 여건에 있다. 인정을 안 할 뿐이다. 이벽이 일 년 만에 문중 박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동료 선비들은 이벽이 하던 활동을 이어서 할 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교리와 성사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오히려 그들의 활동은 훨씬 더 조직적이고 전국적이어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교우촌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것이 박해 100년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대단한 기적이었다.
이런 상상력과 패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를 교회의 쇄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도피주의’다. 본당, 성당이라는 공간과 제도가 성직자 권위주의와 평신도 도피주의의 온상이다. 공간과 성직의 권위는 사실 복음에서 나온다. 복음에 대한 접근은 제한되거나 차단되어 있지 않고 얼마든지 열려있다. 신자들도 성경을 볼 수 있고, 성경에 대한 주석서 및 여러 강의, 강좌 등에 열려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 충분히 알면 훨씬 더 행동할 자유를 얻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있지 않다. 도피하고 있다.
지금 있는 본당 구조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교회를 여러분이 현장에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대 한국 천주교회 선각자들 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과학적인 실사구시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로 전국 네트워크 “함께 걷은 예수의 길”을 이해한다.
피터 모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 사람으로 미국에서 도로시 데이를 만났다. 모린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고, 복음이 가진 위력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풍자하기를, 복음이라는 다이너마이트를 성직자들이 꽁꽁 묶어 땅에 묻어 두고 있다고 했다. 평신도들의 마음과 의식 안에 복음이라는 다이너마이트를 주면 그것으로 사회악의 벽을 깨뜨릴 수 있을 큰 힘이 복음에 있다고 말한 걸로 이해했다. 그분은 19세기 분이다. 지금 21세기 상황에서도 그대로 맞는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안에 복음의 위력이 자리하기를 바라며 함께 하겠다.
김태훈:
감사합니다.
김경미:
귀한 나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복선:
"위크숍 정리 파일"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내용정리 솜씨도 보배롭고,
신부님의 말씀은 황금처럼 빛납니다.
결속력이 눈에 환히보이는 월요일 밤입니다.
김지현:
< 가톨릭전국네트워크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소개 >
모두가 한국 천주교회의 위기를 얘기합니다. 제적 신자의 11.8%만이 성당에 나온다는 공식 통계는 단지 팬데믹의 영향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활기를 잃은지 오래이지만 제도교회, 성직자들의 경직된 사목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타성적으로 흘러갑니다.
교회쇄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도 사회의 일부이기에 빈부의 양극화, 황금만능의 세태와 주권재민 정신의 퇴행을 목격하며 사회교리에 입각한 실천적 영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는 적극적 사회복음화가 절실한 시대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 작년 11월 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쇄신과 천주교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두 번의 미사, 한 번의 기도회, 예일곱 번의 회의를 거쳐 방향 설정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지난 6월 6일, 천안 작은형제회 피정센터에서 서른 두명이 참석, 향후 방향을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워크숍을 가졌습니다.
워크숍에서는 모임의 취지 확인, 단체결성 로드맵 토의, 활동 내용별 방향모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정체성 확립을 통한 내적 성화를 기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90%에 달하는 냉담신자들과 청년세대에 대한 수용방안 마련, 활동매체 확정, 교구별 구성원 확보 등 전반적인 사항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1. 조직 골간 확정
2. 인적 구성
3. 역할분담
4. 주요 문건 작성
5. 소통매체 확정
6. 소공동체 분야와 담당 확정
7. 매체별 기본 콘텐츠 업로드
8. 단계별 사전 점검…등을 단계별로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의 길’이 주님께서 가리키고 일러주시는 길임을 믿고 온 힘을 기울여 함께 나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관심가져주시고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장 헐벗고 작은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다시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구복선:
단계별 진행계획을 보면서, 사회교리에 입각한 실천적 영성방향으로 힘차게 발돋음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김지현:
“어디쯤 가고 있을까?”
펜데믹을 거친 한국 천주교회는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요?
영세는 받았으나 그 가운데 12%도 안되는 신자만이 성당에 나온답니다. 단지 코로나 때문일까요?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천주교 영세를 받으셨거나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모두 오십시오.
만일 요즘들어 성당엘 안 가시는 ‘냉담신자’이시라면 꼭 오십시오.
같이 생각을 나눠보시지요.
정감있는 노래와 재미있는 이야기가 곁들여지는 자리이며,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황과 시대적 역할을 모색해 보는 자리입니다.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이야기가 있는 월례미사>는
특전미사로서 짧은 강연과 대화로
아기자기하게 진행됩니다.
미사는 서울대교구 이기우 신부님께서 집전하여 주십니다.
이 미사는 가톨릭전국네트워크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이 주관합니다.
이기우:
김지현 유스티노님의 부탁으로 '이야기가 있는 월례미사'의 주례와 강론을 준비하다보니, 자연히 그 날 7월 1일의 전례적 특성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숨겨진 특성이 '성혈의 영성'이었습니다. 그 날의 하이라이트는 미사가 아니라 초청연사의 강연이기에 10분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의 강론을 준비하고자 했지만, 교회의 역사에서 성혈의 영성을 발굴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꼬박 보름째 매달려서 겨우 강론 초고를 마련했는데, 이제 폐기해야 할 강론 준비 자료가 아까워서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성혈의 영성
7월 1일은 성혈 대축일이다. 지금은 교회전례력에 따라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 주일에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냄으로써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을 묶어서 같은 날에 지내고 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체축일과 성혈축일을 각각 다른 날에 기념을 해왔던 전통에 따라서, 세계 모든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와 성혈 가족 들은 여전히 7월 1일에 성혈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1. 성혈 영성의 배경
성체와 성혈은 성찬례에서 축성되고, 성찬례는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지내신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되었다. 성체의 배경으로는 생명의 빵에 대해 가르치신 빵의 기적 사건을 들 수 있고, 성혈의 배경으로는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치신 초막절 설교를 들 수 있다.
2. 생명의 물에 대한 초막절 설교(요한 7,37-39)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3. ‘생명의 물’에 관한 교부들의 주해
“축제가 끝나갈 즈음 우리 주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목마른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마실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에게는 물을 길을 물동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 생수의 샘이 그들 안에서 솟아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디디무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을 이사야서나 시편에서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정확한 출처가 어디인지 알기 어렵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 주님께서는 레위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축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거기서 구해야 하는 시내의 표상을 빌려 말씀하신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에 관해 말하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영적으로 목마르게 되는 일이 없다고 하신다(테오도루스). 그들에게서 솟아 나오는 생수는 성령이다(이레네우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는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하느님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다(암브로시우스). 생수는 불사(不死)라는 선물을 준다(오리게네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샘, 곧 영의 생수를 담고 있는 성경을 마시도록 불리었다. 물이 만물을 새롭게 하고 존속하게 하듯이, 성령께서는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이 샘물을 마시는 이들을 새롭게 하고 존속하게 하신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지혜는 생명의 샘이며(암브로시우스), 그것은 믿는 이들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성실한 선포 안에서 발견된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리하여 의로움의 길이 하느님의 선민들이 사는 메마른 광야에 솟아난다(이레네우스). 지금 예수님께서는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물론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기 전에도 줄곧 계셨지만,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오순절에 새로이 쏟아 부어질(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세례의 선물로 주어질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나 성령의 쏟아 부어짐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때에는 성령께서 인류 안에 완전하게 머무르실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4. 초막절 설교
초막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들이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초막을 세워 생활하다가 이동할 경우에는 다시 그 초막을 거두어야 했던 고생스런 시절을 회상시키고자 이레 동안 꼬박 열렸는데, 초막을 지어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바치다가, 여드레째 되는 날 집회를 열고 화제물(和祭物. 하느님께 속죄를 청하며 화해를 기원하는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레위 23,34-38). 이 제사의 지향은 초막을 세우고 거두곤 하던 고달픈 시나이 광야 시절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건축물로서의 집을 짓고 살게 된 이스라엘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 죽게 되면 집은 멀쩡해도 몸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므로, 궁극적으로 영원히 살게 될 천상의 집을 그리워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 여드레째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었는데, 이날 예수님께서 작정하셨던 가르침을 군중 앞에서 외치신 것이다. 요한복음 사가는 이 가르침을 풀이하여, 이 “생명의 물이란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9)고 주석을 달았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예수님께서 이 성령을 내려주시면, 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후 내세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여기서부터 그분의 현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기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초막절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성령께서 이룩하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믿는 이들 안에서 일으키실 거룩한 변화를 뜻한다. 사실, 생명의 물에 관한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은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과 짝을 이루어 성찬례 즉 성체와 성혈의 성사의 배경이 되어 주는 한편 이 두 가르침의 결정적인 열쇠인 성령께로 인도한다. 즉,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찬례에서 빵을 당신의 몸이라 부르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당신의 몸과 동일시하시면서 받아먹으라고 하신 후에, 다시 포도주를 당신의 피라 부르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실 당신의 피와 동일시하신 것처럼,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희생적 사랑으로 완성되신 그분의 삶은 생명의 빵과 물이 되어 성령으로 이를 받아 모시는 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빵을 받아 먹고 물을 받아 마심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모시는 이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그분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되는 일을 거룩한 변화라 부르는 것이다.
이로써 충분히 암시되었다시피, 성찬례의 성사적 근거로서는 제6장만이 아니라 제7장까지도 함께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이 성사에서 빵만이 아니라 포도주까지 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시며 축성하신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똑같이, “받아 먹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빵을 나누어 주시고는 “받아 마셔라” 하시며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도록 돌리셨다. 또한 생명의 빵이나 생명의 물이 모두,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거룩한 변화의 주체 역시 성령의 역할임도 빠짐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찬례를 흔히 ‘성체성사’라고 줄여서 부르지만, 정식 명칭으로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라고 불러야 올바른 표현이다.
5. 전례 안에서의 성혈 영성
가톨릭대사전에 의하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 석 상에서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마태 26,28)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혈은 사도시대 이래로 신자들의 흠숭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사 때 봉헌되는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로 변화되어 포도주의 외적 형상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과 마찬가지로 성혈을 받아 마심으로써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요한 6,54-56 참조).
6. 성혈 영성에 대한 교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가 생명처럼 받들어야 할 그리스도의 현존 표지에 대하여 전통적인 성체성사에 더하여, 말씀과 사랑을 균형 있게 강조하였다. 즉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며, 성찬례를 통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또한 미사에 담긴 전례 정신에 따라서 사랑을 행할 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행하여 공동체를 이루는 사도직 활동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현존 표지가 중세 이래 성체성사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던 전통을 성서적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이는 현대 교회에 매우 중요한 쇄신의 방향을 설정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현존 표지를 올바로 식별하기 위하여 성서 사도직 운동이 일어났고, 가난한 이들과 사랑으로 이루는 공동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 표지를 올바로 식별하기 위하여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과 이를 실천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 장애자 등 모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도직 관심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바로 잡혀야 할 균형은 성체와 성혈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2000년 대희년을 지낸 직후 복음화 제3천년기를 맞이하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3년에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vivit)을 통해서 성체성사가 교회를 살게 하는 신비의 핵심임을 강조한 바 있었다. 이 문헌의 제목이 상징적으로 나타내듯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와 성혈의 성사’는 어느 새 ‘성체성사’로 축소되어 있다.
하지만 성체의 배경으로서 인용되는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51)이라고 밝히신 신원인 것처럼, 성혈의 배경인 ‘생명의 물’에 대한 가르침의 근거 역시 그분이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하고 당신 자신의 신원과 직결시켜 ‘성령’으로 소개하신 데에 기인한다. 이를 두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9) 하고 진술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7. 성혈 영성의 교회적 의미
그리스도 현존의 주요한 표지인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있어서 성체의 신심과 성혈의 영성의 균형은 회복되어야 한다. 근세 이래 루터에 의한 교회 분열을 겪은 가톨릭교회가 성사를 폐기한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성체 신심을 엄격하게 강조하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함께 제정하신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성체성사’로만 축소시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면서 성혈을 영해주지 않음으로써 초래된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사목적인 폐해는 막대하다.
성혈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며, “죄를 없애주려고 흘리신” 그분의 피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약을 맺기 위한 거룩한 약속의 증표로서 ‘피’가 지닌 진정성과 엄숙함이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게다가 과학만능주의에 따른 무신론 풍조가 거세게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동안, 신앙인들마저도 쉽사리 성사 생활에 냉담하게 된 사태의 배후에 성혈 영성이 의미하는 계약과 죄 사함에 대한 진정성 있는 각오와 엄숙한 결의가 망각된 탓이 크다.
따라서 성혈을 받아 모시는 신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의 제자로서 인연을 맺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인연은 메시아와 메시아 백성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음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혈 흠숭을 게을리하는 사이에 교회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신앙적 주체성까지 희미해진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혈을 흠숭하는 배전(倍前)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제자로서 신앙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메시아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할 것이다. ‘피를 나누는 동지적 결속감과 진정성’으로 민족의 파스카 과제와 복음화 과업을 위하여 메시아적 백성으로 복무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