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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의혹 사건들 스크랩 스탈린 대학살은 우익의 날조
글벙어리 추천 5 조회 554 11.10.11 11:26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스탈린 대학살은 우익의 날조

서프라이즈 번호 84204  글쓴이 펌 조회 308  누리 60 (75/15)  등록일2007-10-27 09:35


** 출처 : http://yachess.com


스탈린의 학살은 진실인가?


필자: Mario Sousa (스웨덴 역사가 home: www.mariosousa.se ) 

번역: 김영진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과 솔제니친까지


소련의 스탈린 정권하에서 강제노역소에서 수백만이 감금과 기아로 죽었다고 이야기해진다.

혹시 스탈린 시대에 소련의 굴락(노동수용소)에서 반정부세력이 끔찍하게 학살되었다고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자본주의세계에서 이 이야기들은 간행물과 TV, 라디오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 사회주의의 희생자들 수는 지난 50년간 계속 치솟았다.


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일까?  누가 배후일까?

또한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공개된 소련의 기밀문서에는 이에 대한 어떤 정보가 있을까?  이 소문의 저서들은 항상 스탈린이 죽은 후에 문서들이 공개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왔다.  과연 그랬나?  사실로 밝혀졌을까?


다음의 글은 스탈린시대에 수백만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 대한 글이다.


본 저자는 소련의 문서보관소 자료를 기초로 했으며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감금된 죄수의 수와 그들의 복역년도, 스탈린 시대에 실제로 사형당한 자들의 수를 연구했다.  사실은 소문과 크게 다르다.


직접적인 역사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친까지가 범위이다.


1933년 독일에서는 수십 년 동안 그들 역사에 영향을 미칠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1월 30일에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폭력을 사용하고 법률을 무시하고 새로운 정부형태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정권을 장악하고자 나치는 3월 5일에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모든 선전방법을 동원하여 승리를 확보했다.  선거후 1주 후인 2월 27일 나치는 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이것을 공산당의 짓이라고 몰아붙였다.  다음 선거에서 나치는 1천 7백 3십만표와 288인의 대표로 48%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전의 11월에는 1천 1백 7십만표, 196대표).  공산당이 금지되자 나치는 빠르게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운동의 탄압으로 눈을 돌렸고,  첫번째의 집단수용소는 바로 좌익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하여 우익의 힘으로 의회에서의 나치의 힘은 막강해졌다.  3월 24일 히틀러는 그 자신에게 4년 동안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그때부터 이미 공산주의자와 좌익 사회주의자들 다음으로, 유태인에 대한 공개적인 감금에 들어갔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1918년도의 독일의 무장을 금지한 국제조약을 거부하였고 독일은 무서운 속도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련에서 죽었다고 하는 숫자가 덧붙여지기 시작한 정치적인 환경이다.


독일의 영역인 우크라이나


히틀러의 왼팔 괴벨스는 선전성의 장관이었는데 그는 나치의 이상을 독일인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넓은 '레벤슬라움'이라는 넓은 공간의 대독일제국에서 살게 될 인간들은 인종적으로 순수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이 '레벤슬라움'은 독일의 동쪽의 영역으로 실로 독일자체보다 컸으나, 아직 정복되지 않은 것이었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1925년에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이미 우크라이나를 독일인이 살아야할 땅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  우크라이나와 다른 동유럽의 땅들은 '제대로' 활용되려면 독일에 속해야했던 것이다.  나찌의 선전에 의하면, 독일민족을 위하여 나찌의 칼은 이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었다.  독일의 기술과 독일의 산업으로 우크라이나는 독일을 위한 곡식을 수확할 장소였다.  하지만 독일은 먼저 이 지역에서 '열등한' 슬라브인을 우크라이나에서 해방시켜 독일의 가정과 공장, 들판 등 그들이 독일경제에서 원하는 어느 곳이든지 집어넣어야 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소련의 지역들의 정복은 따라서 소련과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  이 전쟁은 사전에 치밀히 계획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괴벨스가 이끄는 나치의 선전성은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들에 의해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고 선전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아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선전의 목적은 세계로 하여금 나치가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진격시켜 '해방'시킬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는 커다란 돈을 들여서 이것을 영국언론을 통해 찍어냈지만,  별로 세계에 주목받지 못했다.   나치와 괴벨스는 그들의 작전에 필요한 소련에 관한 소문을 퍼뜨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도움은 바로 미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윌리엄 허스트 - 히틀러의 친구


William Randolph Hearst 가 바로 나치가 소련에게 가할 심리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낸 거부였다.  허스트는 잘 알려진 신문사 사장이었고 잘 알려진 '황색저널리즘'의 '대부'였다.  윌리엄 허스트는 1885년에 신문사편집장으로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 조지 허스트(George Hearst)는 광산업자이자 상원의원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신문사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그제미너(San Francisco Daily Examiner)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허스트 신문제국의 시작이기도 했는데 이 언론들은 북미인들의 사고방식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윌리엄 허스트는 상속받은  광산업관련의 소유주를 모두 매각하여 언론쪽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번째 구입 건은 New York Morning Journal이었는데 이 전통적인 신문을 완전히 선정잡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팔릴만한 이야기라면 다 샀고, 잔혹사건이나 범죄가 없을 때면 저널리스트나 사진사를 시켜서 적당히 꾸며내곤 했다.  '황색신문'의 역할이 그런 것이었다.  거짓말과 '조작된' 잔혹상들을 진실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허스트는 이런 거짓기사들로 백만장자가 되었고 언론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발돋움했다.  1935년에 그는 약 2억달러의 자산을 소유한 세계 최고 부자중 한명이 되었다.  그는 Morning Journal을 사들인 후, 미국의 주간, 일간 신문사들을 계속해 사들였다.  1940년대에 그는 25개의 일간 신문사들과 24개의 주간신문들, 12개의 라디오방송, 2개의 세계방송, 1개의 영화용 뉴스를 제작하는 곳(Cosmopolitan film company)은 물론 많은 다른 것들을 소유하게 된다.  게다가 세계의 수많은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허스트의 언론을 통해 정보를 받아 수없이 번역되고 출판되고 있었다.  이런 구조는 허스트의 제국이 미국의 정치, 즉 세계의 정치를 오랫동안 주무를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이 소련 편으로 참전하는데 반대한 것부터, 1950년대 반공주의자 맥카시측의 마녀사냥을 지원한 배후였던 것이다.


윌리엄 허스트의 시각은 극-보수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이며 반공주의적이었다.  그의 정치는 극우정치였다.  1934년 그는 독일을 여행하는데, 거기서 히틀러를 친구로서 접견한다.  이 여행 후에 허스트의 신문은 좀더 밀접해져서 언제나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기사를 싣고, 소련에 반하고 특히 스탈린을 반대했다. 허스트는 그의 신문을 나치의 선전을 투영하는데 이용했는데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링이 쓴 기사를 연재하였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항의하여 이런 기사들은 출판을 중지하고 가판대에서 뺐다.


그가 히틀러를 접견한 후, 허스트의 황색신문들은 소련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들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 살인, 학살, 노예행위, 지배층의 사치, 궁핍, 이런 것들은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보도가 되었다.  허스트는 이런 기사들을 나치의 정치경찰 게슈타포들로부터 건네받았다.   표지에는 소련의 그림과 커리커쳐로 스탈린이 단도를 쥐고 살인자로 그려진 그림이 붙어있었다.  이런 기사들은 매일같이 미국의 4천만독자와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기근에 관한 소문


허스트의 언론이 소련에 대해 최초 공격을 날린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으로 수백만이 죽었다는 것을 보도한 것이었다.  이 공격은 1935년 2월 8일에 시작되었는데 Chicago American 첫 표지의 헤드라인이 '소련에서 6백만이 기아로 죽다' 이었다.  나치의 정보에 기초하여 나치동조자이자 신문재벌인 허스트는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수백만을 죽였다라는 조작된 기사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사실은 매우 달랐다.  1930년대 초에 소련에서 있던 것은 커다란 계급투쟁으로 불쌍한 소작농들이 지주(Кулак)에 항거하여, 공동농장 꼴호즈를 일구는 투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거대한 투쟁은 직, 간접적으로 약 1억 2천만의 농부들이 궐기하였고 따라서 농업생산은 차질을 빚게 되고 어떤 지역에는 음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음식이 부족해지자 건강상태는 나빠졌고 따라서 전염병에 쉽게 감염되었다.  이 병들은 유감스럽게도 당시에 전역에 퍼졌다.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스페인감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2천만의 희생자를 냈지만 이들의 정부에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당시 이런 종류의 역병에 있어서 정부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역병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은 2차대전 중에 페니실린이 발명된 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1940년대 후반에야 대중이 구할 수 있었다.


허스트의 언론기사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이 죽고 있다고 확신했고,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했으며 삽화나 천박한 묘사까지 곁들여졌다.  허스트는 그들의 기사가 진짜같이 보이도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대중은 따라서 성공적으로 소련에 반대하게 되었다.  이것이 소련에서의 수백만이 죽었다는 소문이 가공된 첫번째 예이다.


윌리엄 허스트는 1951년에 베버리힐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가 남긴 언론제국은 그의 메시지를 세계에 계속해 전했다.  허스트재단은 100개의 기업과 15,000명을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했다.  오늘날의 허스트제국은 신문, 잡지, 서적, 라디오, TV, 케이블TV, 뉴스와 멀티미디어업체를 아우른다.


나치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선전전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나치의 거짓말은 CIA와 MI5에 의해 수거되어 소련에 대한 선전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었다.  2차대전 후에 시작된 맥카시 반공주의자들의 마녀사냥에도 우크라이나에서 기아로 죽은 수백만의 이야기가 거론되었다.  1953년에 이것을 주제로 한 책이 미국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크레믈린의 마수'로 이름 붙여졌다.  이 책은 2차대전 때 나치에 협조한 우크라이나출신의 미국망명자들에 의해 재정이 지원되었고 미국은 그들을 '민주주의자'로 포장하여 정치적인 망명의 은신처를 제공한다.


1980년 레이건대통령이 취임하자 그는 '반공 십자가원정'을 시작한다.  다시 우크라이나의 수백만 학살이 되살아났다.  1984년 한 하버드대 교수는 '러시아의 생활상'이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모두 1934년의 허스트출판의 책들에 근거한 가짜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1984년에 와서도 1930년대의 조작된 거짓말들을 끌어내었고, 이번에는 '명망있는' 미국 대학의 옷을 걸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6년에 다른 책이 나왔는데 '슬픔의 수확'(Harvest of Sorrow)이라는 이름의 책을 Robert Conquest라는 전직 영국첩보원이 지었다. 현재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대학교수다.  그의 책 저술로 그는 $80,000달러를 UNO(Ukraine National Organization)라는 단체로부터 받았는데 이 단체는 1986년에 비슷한 이름으로 'Harvest of Despair'라는 영화의 제작비를 댔는데 Conquest의 책을 근거로 했다.  이 당시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기아로 죽었다고 생각한 숫자는 무려 1천5백만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이 죽었다고 미국에서 허스트의 출판에 따라 책과 영화에서 앵무새처럼 반복되었지만 이 정보는 순전히 거짓이었다.  캐나다의 언론인 Douglas Tottle은 이 책을 면밀히 검토하여, '사기, 기아와 파시즘 - 우크라이나에서의 학살소문, 히틀러에서 하바드까지'  (Fraud, famine and fascism -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 1987) 을 낸다.  토틀은 이 자료들에 쓰인 끔찍한 굶주린 아이들의 사진이 실은 1922년에 찍힌 것으로 소련은 당시에 1918-1921년의 적백내전으로 8개 국가로부터 침입을 당하고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이었음을 밝혀낸다.  더글라스 토틀은 1934의 기근에 관련한 사실들을 제시하고 허스트 출간물들의 여러가지 거짓들을 밝혀냈다.    여러 해 동안 이 기근에 대하여 사진과 기사들을 보내온 사람들 중에는 토머스 월터(Thomas Walt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우크라이나에는 가본 적이 없고 모스크바에 고작 5일 체류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은 미국신문 The Nation지의 모스크바 취재원 Louis Fisher에 의해 밝혀졌다.  피셔는 또한 허스트출판의 진짜 모스크바취재원 M Parrot이 1933년의 풍작과 우크라이나의 발전에 대해 써 보낸 것들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음도 밝혀낸다.  토틀은 또한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해 쓴 '토머스 워커'라는 사람은 실제로는 Robert Green이라는 사람으로 이 사람은 콜로라도의 감옥에서 탈주한 탈옥범이었음을 밝혀낸다.  이 그린(워커)는 미국에 돌아와서 재판에 서게 되었는데, 우크라이나에는 근처도 가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우크라이나에서 1930년대에 있던 기아로 인한 사망은 1987년에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허스트, 나치, 첩보원 콘퀘스트가 거짓말과 기록의 조작으로 수많은 사람을 속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나치 허스트의 거짓말은 수없이 우익으로부터 돈을 받는 저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허스트출판은 미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있고 세계에 뉴스기관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게슈타포의 거대한 메가폰이 될 수 있었다.  독점자본을 가진 세계에서는 허스트의 출판이 게슈타포의 거짓말을 수십개의 신문사와 라디오채널들, 그리고 나중에는 TV를 동원해서 '진실'로 뒤바꿀 수 있는 것이다.  게슈타포가 사라진 후에도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방하기 위한 추악한 선전전은 계속되었는데, 그 역할은 바로 CIA가 담당하게 됐다.


소문의 중심, 로버트 콘퀘스트 (Robert Conquest)


이 시점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람은 로버트 콘퀘스트이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소련에서 수백만이 죽었다고 말한 사람의 2,3명의 저자중 한명이다.  그는 실은 2차대전 때부터 소련에 관한 거짓말을 만들어낸 주범이다.  콘퀘스트는 주로 '대숙청 The Great Terror(1969)과 슬픔의 수확 Harvest of Sorrow(1986)의 저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 망명하였으며 우익에 속하고 나치에 협조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굴락 노동수용소에서 1936-38년 사이에 수백만명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썼다.  콘퀘스트가 인용한 많은 사람들은 실은 우크라이나에서 1942년에 있었던 유태인학살을 주도하거나 가담한 사람들이다.  그중 한명은 Mykola Lebed인데 나치 점령하의 Lvov에서 안보담당으로서 1942년에 유태인을 혹독히 처형한 주동자였다.  1949년에 CIA는 Lebed를 정보조작의 용도로 쓰기위해 미국으로 데려간다.


콘퀘스트의 책들은 광신적인 반공주의를 보여주는 문체로 써졌다.  콘퀘스트는 1969년도 책에서  1932-1933년간 소련에서 기아로 죽은 사람들은 5백만에서 6백만으로 그중 반이 우크라이나에서 죽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983년 레이건의 '반공 십자가원정'때가 오자, 콘퀘스트는 기아를 1937년까지 늘려잡고 1천 4백만으로 늘린다.  이런 증언은 큰 보상이 있었다.  그는 1986년, 그는 레이건의 소련의 미국침략에 대응할 선거캠페인을 위한 자료를 쓰는 계약을 맺게 된다.  이 글 제목은 '러시안들이 침략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생존자의 핸드북' 이었다!  역사학자가 쓰기로는 우스꽝스러운 단어들이었다.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거짓말로 밥을 벌어먹는 것이 직업이 된 사람의 경력으로는 놀랄 일이 아니지만, 이 사람은 먼저 비밀요원이었다가 작가로, 그다음에는 스템포드 대학교수가 되었다.  콘퀘스트의 이 과거는 1978년 1월 27일 영국 가디안(Guardian)지에 의해 밝혀졌는데, 그는 원래 영국비밀첩보부의 정보조작부인 In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요원이었다.  IRD부서는 1947년에 만들어졌는데 (원래는 Communist Ination Burea-공산주의자정보부- 였다.)  이 부서는 정치인과 언론인들같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에게 가공된 이야기를 주입시켜 세계의 공산화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부서였다.  IRD의 활동영역은 영국의 활동영역만큼 컸고 1977년 극우세력과의 연계가 들통 남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에 밝혀진 IRD가 기사를 주는 주소록상의 언론인명단은 100명을 넘었다.  이런 기사뿌리기는 몇 영국신문들에는 일상사였다.  Financial Times, The Times, Economist, Daily Mail, Daily Mirror, The Express, The Guardian 등등이었다.  따라서 가디안지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은 비밀정보부가 어떻게 대중이 취하는 뉴스들을 조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였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1956년 설립당시부터 IRD를 위해 일했는데,  거기서의 콘퀘스트의 일은 소련에 관한 '검은 역사'를 가공해 내고 언론인들을 통해 배포하여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IRD를 떠난 후에도 책들을 비밀요원의 도움을 받아 IRD에 의해 제안된 책을 집필했다.  그의 'The Great Terror'는  1937년에 있었던 소련의 정권다툼에 관한 우익적인 견해였는데, 사실은 비밀요원의 보고서를 정리한 것이었다.  이 책은 IRD의 도움으로 써지고 출판되었다.  3번째 저서는 CIA에서 나온 자료로 쓴 것으로 Praeger출판에서 나왔다.  콘퀘스트의 책은 대학교수들이나 출판이나 라디오,TV 관련자들이 콘퀘스트와 극우주의자들의 거짓말들이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콘퀘스트는 현재에도 소련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우익역사가로 남아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항상 소련에서 삶과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 거론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람중 한명은 러시아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다.  그는 1960년대 말에 그의 책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이 반 소련선전을 살포하는 반혁명활동을 한 것으로 1946년부터 노동수용소에서 8년간을 복역했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2차대전 때 나치독일과의 전쟁은 소련정부가 히틀러와 협상에 성공했다면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솔제니친은 스탈린이 소련국민들에 대해 끔찍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보다 더 나쁘다는 시각이다.  솔제니친은 나치를 옹호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그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솔제니친은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인가 하에 소련에서 1962년부터 출판되었는데, 첫째 책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죄수의 하루를 묘사한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솔제니친의 문건을 스탈린의 사회주의 업적을 비방하는데 사용했다.  1970년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그 후 그의 노동수용소에 관한 글은 자본주의세계에서 대량으로 출판되었고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여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싸울 제국주의의 강력하고 유용한 도구로 추가된다.  1974년 솔제니친은 소련국적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이민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 때는 이미 그는 자본주의언론에 의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위대한 전사로 인식되게 됐다.  그의 나치옹호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전쟁에 방해되므로 묻혀지게 된다.


미국에서 솔제니친은 중요한 강연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1975년의 AFL-CIO 회담의 주요 연사로 초빙되었고, 1975년 7월 15일 그는 미국 상원에서 세계정세에 대해 강연하게 된다.  그의 강연은 자극적이고 격렬한 방식으로 빠르게 반응을 끌어냈다.  미국이 진 전쟁인 베트남을 다시 공격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뿐 아니다.  포르투갈에서는 40년간 지속된 파시즘 후에 좌익장교들이 1974년에 민중혁명을 일으켰는데, 솔제니친은 거기에 미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그들이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강연에서 솔제니친은 줄 곳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식민지들이 해방된 것에 대해 씁쓸해 했다.


솔제니친 강연들의 핵심은 언제나 사회주의에 대한 추악한 공격이었다. - 그에 의하면 소련에서 수백만이 처형됐다는 것으로 시작해서 북 베트남에서 수천만의 미국인들이 감금되고 노예로 부려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북베트남에서 혹사되는 미국인들의 이미지는 이어서 베트남에 관한 람보류의 필름들로 만들어지게 된다.  소련과 미국간에 있어 평화를 주장하는 미국언론인들은 그에 의하면 잠재적인 반역자로 말해졌다.  솔제니친은 또한 소련보다 군사적 우위를 갖기 위해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에 의하면 소련이 비행기와 탱크에 있어 5~7배나 더 많고 게다가 '짧게 말해' 핵무기도 소련이 갖은 것이 2,3배 혹은 5배까지 강하다는 것이었다.  솔제니친의 소련에 관한 강연은 극우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파시즘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옹호하다.


프랑코가 1975년에 사망한 후, 스페인의 파시스트정권은 정치적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다.  1976년 초에 일어난 사건들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프랑코의 후계자 후안 카를로스왕은 소요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민주적 조치'를 허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페인역사상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마드리드에 나타난다.  그리고 3월 20일 토요일 밤 피크타임에 방영된 Directisimo라는 프로그램에서 (1976년 스페인신문 ABC와 Ya지의 3월 21일자 참고) 인터뷰를 한다.


솔제니친은 사전에 질문이 준비되었고, 그는 온갖 선동적인 발언을 한다.  그의 의도는 왕의 '민주적 조치'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솔제니친은 민주개혁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의 TV인터뷰에서 1억 1천만명의 러시아인들이 사회주의 때문에 희생되었고 이것을 스페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비교했다.  또한 스페인을 독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상주의자들'의 '진보'라고 몰아부쳤다.  그가 '진보'라고 지칭한 것은 민주적 반대파를 모두 싸잡는 것이었다. - 자유주의자건, 사회민주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다 말이다.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가을, 세계는 스페인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프랑코정권 때 처형된 반파쇼세력을 말한다.] 줄 곳, 이 진보세력은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테러리즘을 옹호 했습니다", "빠른 민주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내일이나 모레가 어떻게 될지 압니까?  내일 스페인이 민주화가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다음날  민주주의가 전제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기자들이 조심스럽게 그의 말이 자유가 없는 나라들의 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지구상에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는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러시아요!"


솔제니친의 이 TV인터뷰는 스페인의 파시즘에 대한 정면적인 옹호였고 여태껏 그는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역주: 현재 사망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 18년간의 망명생활에서 대중의 눈에서 사라지게 됐고, 자본주의 정부로부터 전격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사회주의와의 전쟁에 있어, 솔제니친과 같은 사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과 같은 존재였지만 모든 것에 그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자본주의화된 새 러시아에 있어, 서방이 지지하는 정치집단이라는  것은 오직 그런 집단들의 비호아래에서 사업에서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일 뿐이다.  러시아에 있어 파시즘은 당연히 사업에 좋을리가 없다.  따라서 솔제니친의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계획은 서방의 이익에 있어서 죽은 시체 고추만지기나 다름이 없었다.  솔제니친의 바램은 러시아에 러시아정교와 손을 맞잡은 짜르의 전제왕권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고 오만한 제국주의자들조차 그 정도로 정치적 멍청함을 지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서방에서 솔제니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둔한 극우세력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나치와 경찰 그리고 파시스트(극우주의자)들


이렇게 윌리엄 허스트, 첩보원 로버트 콘퀘스트, 파시스트 솔제니친 바로 이들이 소련에서 수백만이 죽었다고 한 사람들이 소련에서 수백만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 주요 정보제공자들이다.  콘퀘스트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정보가 직접적으로 자본주의세계의 대중매체에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대학들에서는 아예 한 교과과정으로 개설되기도 했다.  콘퀘스트의 저작은 그 자체가 1급사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70년대에 콘퀘스트는 솔제니친과 조연급인 샤카로프, 로이 메드베데프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 후로, 세계의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소련에서 얼마나 죽고 처형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부르주아 언론으로부터 언제나 좋은 보상을 받게 됐다.


하지만 사실은 드디어 이 역사의 사기꾼들의 면전에 밝혀지게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당의 기밀문서들을 공개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명령으로 공개된 기밀서류들에 기록된 역사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허위를 밝혀낸 기밀문서들.


소련에서 얼마가 죽었다는 등의 추정은 언제나 소련을 비방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거기에 대한 소련측의 어떤 해명이나 부인도 자본주의언론은 싣지 않았다.  그 반대로 철저히 무시한 반면, 자본으로 매수된 '전문가'들은 그들의 소설을 퍼트리기 위해 얼마든지 지면을 채울 수 있었다.  완전히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만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솔제니친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허위의 통계적 근사치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백만을 만들어낸 사기적인 수법


콘퀘스트, 솔제니친, 메드베데프 등은 소련에서 출판된 조사자료를 자주 인용하였는데, 예를 들어 전국인구조사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인구증가율을 각 나라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인구증가율을 일률적으로 적용하였다.  그렇게 하여 몇년에 몇명이 살고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냈고, 실종자는 사회주의 때문에 죽거나 처형된 것으로 간주했다.  이 계산방법은 간단하지만 완전히 사기였다.  이런 종류의 설명으로 만일 서방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면, 절대로 통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다른 교수들이나 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그런 조작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소련'이었기 때문에 그 조작은 들어먹혔다.  또한 이들 교수들과 역사가들은 그들 연구의 진실함보다는 성과를 앞 다투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비난자들의 최종 결론 숫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로버트 콘퀘스트는 6백만이 1930년대 초에 기아로 사망했다고 했다. (1961년) 이 숫자를 콘퀘스트는 1천 4백만으로 늘어났다. (1986년) 노동수용소(굴락)에 관해서, 그는 당과 군 차원, 국가적 차원의 숙청이 일어나기 전인 1937년에 5백만이 수용되어 있다고 했다.  역시 그에 의하면, 숙청이 시작되자, 1937-38년 사이에 갑자기 7백만이 더 늘어난다. 합하면 1천 2백만이 1939년 노동수용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그에 의하면 노동수용소에는 정치범보다 일반사범이 훨씬 많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최소한 2천만~3천만의 죄수가 갇혀있게 된다.


역시 콘퀘스트에 의하면 1937에서 1938년사이에 1백만이 사형당했고 2백만은 기아로 죽었다고 했다. 그에 의한 1937-38년의 대숙청인원은 최종결론은 9백만이었고 이중 3백만은 감옥에서 죽었다. 이 숫자들로 콘퀘스트는 통계를 '수정'하여 볼셰비키들이 1930에서 1953년 사이에 적어도 1천 2백만의 정치범들을 사형시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930년대의 기근으로 죽은 숫자를 합하면 무려 2천 6백만명을 볼셰비키들이 죽인 것이다.  그의 최종결론에서 콘퀘스트는 1950년에 소련에는 1천 2백만의 정치범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곤 1937-38년의 숙청기간이 시작되자, 그는 7백만의 죄수가 더 생겼다고 쓰고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역시 콘퀘스트와 비슷한 통계방법을 쓰고 있는데 그는 상이한 결론들로부터 도출한 사이비과학적인 방법으로 더욱더 극단적인 결론을 도출해 냈다.  솔제니친은 콘퀘스트의 32-33년간의 6백만 아사설을 똑같이 적용했지만 1936-39의 기간에는 매년 최소한 1백만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들이 공동농장제의 시작부터 1953년 스탈린이 죽을때까지 6천6백만을 죽였고 그 외에도 2차대전때 죽은 4천 4백만의 러시아인도 소련정부책임이라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결론은 1억1천만의 러시아인이 사회주의의 희생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죄수에 관해서 그는 1953년에 2천5백만이 수용되어 있다고 말한다.


고르바초프, 문서보관소를 열다.


1960년대에 부르주아언론에 등장한 위의 상상의 숫자들은  언제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실은 매우 큰 돈을 뿌려서 조작된 산물이었다.


이 조작의 뒤에는 서방의 첩보기관이 있었는데, CIA와 MI5가 그들이다.  그들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은 지대하여 서방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숫자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오히려 급을 더해갔다.  소련에서는 솔제니친이나 다른 잘 알려진 안드레이 샤하로프나 로이 메드베데프 등의 '비방가'들의 망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1990년에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고르바초프하에서 새로 '자유 언론'이 열렸고, 사회주의에 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긍정적인 것으로 환영받았는데, 끔찍한 결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주의하에서 그렇게 죽고 투옥된 자들은 전무후무하게 뻥튀겨져서 공산주의자들의 희생자로 수천만명이 생겨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자유 언론의 광기는 콘퀘스트와 솔제니친의 거짓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고르바초프는 자유언론의 요구로 중앙위원회의 문서기록소를 역사연구를 위해 공개하였다.  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에 있어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기록실은 핵심적인 관건이었는데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문서가 공개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점이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수백만이 죽고 갇혔다고 말해온 사람들의 증언이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이  비방자들, 콘퀘스트, 샤할로프, 메드베데프등등 모두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문서보관소가 공개되고 실제 자료에 근거한 출판물들이 나오게 되었을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고르바초프의 자유언론과 이 비방자들은 문서보관소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러시아인 역사가인 젬스코브Zemskov, 두긴Dougin과 흘례브뉵Xlevnjuk은 1990년부터 과학잡지에 등장해 왔는데 완전히 소홀하게 지나가 버렸다. 이 연구는 '자유언론'에서 말하는 희생자와 아사자들의 숫자에 관한 한, 완전히 뻥튀기된 것과 정반대를 보여줬다.  따라서 그들의 기사는 출간되지 않게 되었고, 다수의 대중은 볼 구경할 수 없는 빈도가 낮은 과학잡지에 실리고 사라져 버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물은 선정적인 언론의 광기에는 맞설 수 없는 법이고, 솔제니친과 콘퀘스트의 거짓말은 구소련의 많은 지역에서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서방에서도 스탈린시대의 법형제도에 관한 연구논문들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왜일까?


러시아의 연구 결과


소련의 법형제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9천페이지에 달한다.  작성자가 많지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V.N. Zemskov, A.N. Dougin과 O.V. Xlevnjuk이다.  그들의 연구는 일부는 1990년에 출판되기 시작하여 1993년에는 거의 완성되어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이 조사는 서방에는 여러 서방국들의 협동작업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중 두개의 연구가 유명하다. 하나는 프랑스저널 (l'Histore 1993년 9월호)에 실린 논문으로 주요연구자는 프랑스과학연구센터,CNRS(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Nicholas Werth였다.  또 하나는 미국의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 실린 것으로 캘리포니아 리버데일의 역사학 교수J.Arch Getty가 CNRS연구자와 러시아 연구자인 러시아 역사학회(과학 아카데미의 일부)의 V.A.N. Zemskov와 공동연구한 것이다.  오늘 볼 수 있는 연구자료들은 위의 연구팀들이 연구하거나 그 연구팀원중 한명이 쓴 것들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 전에 필자가 밝힐 것은 위의 언급된 저자중 어느 한명도 사회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정치적 시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인물들이다.  이것은 다음의 글들이 소위 '공산주의적 음모'의 산물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들 연구자들은 줄곧 솔제니친, 콘퀘스트, 메드베데브등의 거짓말에 노출되었지만, 결과물들은 어떤 '선전propaganda'에도 스스로를 노출시킴 없이 학문에의 진실추구를 최선의 가치로 하여 연구한 결과였다.


이 연구는 매우 광범위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스탈린시대이고 이부분이 쟁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특정한 질문을 제시하고 이 저널들(l'Histore,  American Historial Review)에서 답을 찾는 식으로 밝히기로 하겠다.  이런 식으로 소비에트의 법형제도에 관해 가장 중요한 측면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소련의 형사제도는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나?

2. 정치범과 일반범은 얼마나 많이 수용되어 있었나?

3.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4. 1953년 스탈린사망 전까지 사형당한 사람, 특히 1937-38년의 대숙청기간의-은 얼마나 될까?

5. 형집행의 기간(재소기간)은 평균 얼마일까?


이런 질문들에 답함으로써 소련에서 죽었다는 2가지의 가장 대표적인 부류인, 1936-38년의 반혁명세력들과 1930년 꿀락(부농)의 경우를 살펴보려 한다.


형사제도로서의 노동수용소


먼저 소련의 형사제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1930년부터 소련의 형사제도는


구치소,

교화노동캠프(일명 굴락),교화노동부락,

특별공공지역과

벌금형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류된 자는 누구나 일반적인 구치소에 갇히게 되고 무죄인지 풀려날지 혹은 재판으로 갈지가 결정된다.  기소된 자는 무죄나 유죄를 재판에서 가리게 된다.  유죄인 자는 벌금형이나 일정기간 형을 살아야 한다. 드물게는 사형이 집행된다.  벌금은 일정기간 내에 그의 봉급의 일정 %로 정해진다. 범죄의 유형에 따라 다른 종류의 감옥에 처해진다.


굴락(교화노동캠프)은 사회에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가게 되는 곳이다. (살인, 강도, 강간, 경제사범 등) 물론 반혁명활동도 큰 비율을 차지한다.   또한 3년 이상의 형을 언도받은 자들도 굴락에 보내질 수 있다. 굴락에서 일정기간을 복역하면 노동캠프나 특별공공지역으로 보내지게 된다.


노동캠프는 매우 넓은 지대로써 죄수들이 매우 근접하여 감시를 받는다.  그들을 일하게 하고 사회로부터 짐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건강한 사람이 일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다.  요즘에는 노동을 하는 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몸을 굴려 일하는 것이 당연했다.  1940년에 존재한 노동캠프의 수는 53개였다.


노동부락은 425개가 있었고, 이것은 노동캠프보다 훨씬 작은 단위로, 완화된 규칙과 느슨한 감시가 행해진다.  여기에 보내지는 재소자들은 더 짧은 기간을 언도받은 경우다.  중대한 범죄를 짓거나 큰 정치범이 아닌 경우다.  그들은 공장이나 들판에서 자유롭게 일했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죄수가 노동으로 얻는 보수는 죄수의 것으로 일반 노동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특별공공지대는 보통 농업지역으로써 추방된자들이 생활하게 되는 곳이었다.  예를 들어 공동농장의 건설기에 토지가 몰수된 꿀락(부농)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다른 경범죄들도 이런 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9백만이 아니라 4십5만4천명


두번째 문제는 정치범은 얼마나 있었고, 일반범이 얼마나 있었는가이다.   다음은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 실린 자료다.  이 자료는 중앙정부에 의해 형사제도가 통합되었을 때인 1934년부터 스탈린이 사망한 해인 1953년까지 20년간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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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보는 법>

재소자수  -  교화노동캠프인원 - 반혁명죄 - 반혁명죄(%) - 사망자수 - 사망자수(%) - 출소자수 - 탈주자수 - 교화노동부락인원 - 구치소(감옥) - 합계 순


* 관심있는 독자를 위해, 위키페디아의 로버트 콘퀘스트에 대한 자료를 링크합니다.  책의 통계에 관한 장이 발췌되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추산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2000년인가 조지 부시한테 '자유훈장'을 받았습니다.)



참고문헌,

콘퀘스트의 Robert Conquest, The Harvest of Sorrow: Soviet Collectivization and the Terror-Famine (University of Alberta Press, 1986).


발췌문

http://www.ditext.com/conquest/16.html


이 표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일련의 결론들을 도출 할 수 있다.  먼저 콘퀘스트의 자료와 비교해 보자. 콘퀘스트는 1939년에 9백만의 정치범이 노동캠프에서 죽었고 1937-1939년사이에 3백만이 더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콘퀘스트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정치범의 수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정치범 외의 일반사범은 훨씬 더 많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기로는 1950년에 1천2백만의 정치범이 있다고 한다.   단지 사실을 비교하기만 해 봐도 그가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수치중 진실과 가까운 글자라곤 한자도 없을 정도다.  1939년 식민지와 감옥을 합쳐서 모두 2백만의 죄수가 있었다.  물론 454,000은 정치범이었다. 콘퀘스트가 주장하는 대로 9백만이 아니다.  1937-1939년 사이에 노동캠프와 부락에서 사망한 수는 3백만이 아니라 160,000명이다.  1950년에 노동캠프에 있던 정치범들은 1천2백만이 아니라, 578,000명이다.  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로버트 콘퀘스트는 공산주의에 반하는 우익의 선전을 대변하는 주동자라는 것이다.  우익의 지식인들 사이에 콘퀘스트는 거의 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솔제니친이 인용한 수치들 - 6천만이 노동캠프에서 죽었다는 - 은 말할 가치조차 없다.  이런 어이없는 주장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광포한 환상은 오로지 정신 나간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런 사기꾼들의 이야기를 젖혀놓고 좀더 이 통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자.  제일 먼저 할 일은, 법형체제에 잡힌 순수한 인원을 재어보는 것이다.  2천 5백만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감옥에 들어간 모든 이들은 어쨌건 모든 이에게 삶에 필요한 것을 불충분하게 주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천5백만은 이 사회에 대한 비판점을 제공한다.


대내외적인 위협


법형제도에 잡힌 인원은 합당하게 설명해 보자.  소련은 최근에 와서야 봉건제를 폐기한 나라로 인권에 대한 사회적 유산은 종종 사회에 부담이 됐다.  유물이 된 짜르체제에서 노동자들은 평생 깊은 궁핍속에 살아야 했고, 인간의 생명이란 거의 가치가 없었다.  강도나 폭력범죄들은 절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폭압적으로 처단되었다.  왕조에 대한 폭동은 보통 학살이나 종신에 가까운 투옥으로 진압되는 것이 일상사였다.  이런 관계가 사람들의 습관에 뿌리박혀 있어 변하기 어려운 긴 시간을 갖게 된 사실이, 소련의 사회와 그 죄수들을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소련에 대한 고찰에서 또 다른 고려점은 소련은 1930년대에 1억 6천에서 1억 7천의 인구를 갖고 있었는데 외세의 위협이 심각했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 유럽의 정치적 변화로 나치독일의 슬라브인에 대한 위협이 주요한 위협이었으며,  서방세계 자체가 국제적인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31년 스탈린의 다음 연설로 이어지게 만든다: " 우리는 선진국보다 50~100년정도 뒤져있습니다.  우리는 그 간극을 10년에 메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바로 10년 뒤, 6월 22일 소련은 나치독일과 그 동맹군들에게 공격당한다.  소련사회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있어 거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며 주요 자원들은 모두 앞으로 있을 나치에의 방어로 쓰이기 위한 대비로 쓰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게 일해야 했고, 개인적인 이익 면에서는 별로 생산하지 못했다.  1937년에 하루 7시간 근로규칙은 취소되었고 1939년에는 일요일도 근로일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커다란 전쟁을 당하는 20년동안(30년대와 40년대), 소련은 2천5백만의 사망자를 내고 나라의 절반이 불에 타는 동안, 사람들은 다른 길을 구하기 위해 매진하면서 범죄율이 올라가게 된다.


이 극단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소련이 투옥한 최대인원은 2백5십만정도이다. 이것은 성인인구의 2.4%에 해당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적은 것일까 많은 것일까? 한번 비교해 보자.


미국이 더 많다.


2억5천2백만(1996)의 인구를 갖은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부자며 세계자원의 60%를 소모하는 사람들이 감옥에 얼마나 갈까?   어떤 전쟁위협도 받지 않고 경제적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극심한 사회변화도 없는 나라가 말이다.


1997년 8월의 크지 않은 뉴스에서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전례없이 1996년에 5백5십만의 죄수가 갖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전년 1995년 대비로 200,000의 증가로 미국은 성인인구의 2.8%가 죄수이다.   이 수치는 연방정부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http://www.ojp.usdoj.gov/bjs/ )  현재 미국의 재소자들이 소련의 최고로 재소자가 많았던 때보다 3백만이나 더 많은 것이다!  소련에서는 최고 2.4%의 성인인구이고, 미국에서는 최고 2.8%며 계속 증가하고 있다. 미정부에서 1998년 1월 18일의 발표자료에 의하면 1997년의 재소자들은 96,100명정도 증가했다.


소련의 노동캠프에 관해서, 사실 정권이 재소자에 대하여 가혹하였고 처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의 현재의 폭력과, 약물, 매춘과 성노예행위 (미국교도소에서는 연간 290,000건의 강간이 일어난다.) 를 보자.  미국감옥에서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느 사회보다 부유하다고 하는 사회가 말이다!


중요한 이유 - 약제의 부족


이제 3번째 이유를 들어보자.  노동캠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나?  매년 5.2%(1934)에서 0.3%(1953)등으로 다르다.  노동캠프에서의 사망수는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에 의하여 야기되었다.  특히 전염병에 대비할 수 있는 약제의 부족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노동캠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대다수의 나라에서 발견되는 사회전반적인 문제였다.  2차대전 이후 항생제가 발견되자 이 상황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사실상 가장 나쁜 해들은 나치가 침략한 해들로 모든 소련인민들에게 극심한 열악한 환경들에 노출되게 된다.  이 4년동안, 반백만의 사람들이 노동캠프에서 사망하였다 - 이것은 문제의 3,40년대의 사망자수들중 반을 차지한다.  이 똑같은 기간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2천5백만이 죽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에 소련의 상황은 훨씬 개선되었고 항생제가 소개되자 감옥의 사망율은 0.3%로 현격히 떨어진다.


이제 4번째 문제로 넘어가자.  1953년 이전에, 특히 1937-38년의 대숙청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선고받았을까?  이미 콘퀘스트의 볼셰비키들이 1천2백만을 1930~1953년에 죽였다는 주장을 다루었다.  여기에서 1937~38년동안 1백만을 죽였다고 했다.  솔제니친의 주장은 1천만이 죽었으며 1937~38년동안 3백만이 죽었다고 한다.  소련에 대한 추악한 선전전에서 나온 다른 수치들은 더 과격한 것도 있다.  올가 샤투노브스까야의 예를 들면 그녀는 1937-38의 대숙청으로 7백만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서보관소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사형을 선고받은 수치는 여러가지 다른 기록보관소와 연구자들에 의한 자료를 추정치를 내기 위하여 집약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중복되어 세어져서 실제보다 더 높게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옐친에 의하여 소련의 문서보관소를 담당한 인물)은 1936년 10월 1일부터 1938년 9월 30일까지 30,514명이 군대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다고 한다.  KGB측에 의한 언론에 발표된 다른 정보에 의하면 1930-53년 동안 786,098명이 사형을 받았고 그중 1937-38년 동안에만 681,692명이 사형을 받았다고 한다.   KGB측의 수치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마지막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오로지 이 두해, 37년과 38년간에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을까가 의심이 될 것이다.  현재의 찬-자본주의로 변한 KGB가 반-자본주의KGB에 관해 옳바른 정보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1990년 2월에 친-자본주의의 KGB의 언론발표와 같이  사형을 받은 혁명사범의 수치보다 일반사범까지를 포함한 23년간의 수치도 마찬가지로 검증을 필요로 한다.  문서기록소와 교차해 봐도 전체 반 혁명죄와 일반사범의 사형언도숫자는 대략 일치한다.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37-38년의 사형선고수는 대략 100,000정도로 볼 수 있고, 서방의 선전에서 주장하듯 수백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염두에 둘 사실은 소련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집행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형선고는 실제에 있어서는 노동캠프의 노동으로 집행되었다. 또한 일반사범과 혁명사범의 구분이 있었다. 일반사범의 많은 수는 강간이나 살인등, 대부분의 다른 국가에서도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다.


질문 5: 평균재소기간은 얼마였나?  재소기간은 서방의 선전가들이 지어내 떠들기 좋아하는 가장 좋은 주제였다.  보통의 선입견은 소련에서 선고를 받으면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가면 못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사실이 아니다.  스탈린시대에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5년형을 살았다.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 실린 자료는 그 사실을 말해준다. 1936년에 형을 살던 사람들중 5년이나 그 이하의 징역이 82.4%였다.  5-10년이 17.6%이고 1937년 이전에는 10년이 법정 가능한 최고형이었다.  소련의 1936년, 인민재판소에서 반혁명사범에게 선고된 경우 5년이하가 44.2%, 5-10년이 50.7%이다. 굴락 노동 캠프에서의 재소를 선고받은 경우는 긴 재소기간을 선고받은 경우로, 1940년의 통계는 5년이하가 56.8%, 5-10년까지가 42.2%였다.  오직 1%만이 10년 이상을 살았다.


1939년부터는 (인민재판소가 아니라) 소비에트법정에 의한다. 재소기간은 5년형까지가 95.5%, 5-10년형이 4%, 10년 이상이 0.1%이다. 이렇게 보듯이 소련에서의 종신형이라는 것은 서방이 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위해 지어낸 하나의 전설에 가깝다.


소련에 대한 거짓말들  - 연구기록들에 관한 토의


러시아의 역사가들에 의한 연구결과는 서방의 자본주의세계의 대학들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가르쳐진 많은 것들과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한다.  냉전 50년간, 수 세대에 걸쳐, 소련에 관하여서는 오로지 거짓말만이 가르쳐졌고,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것은 프랑스나 미국측의 보고에서도 양산되었다.  여기에 재생산된, 수치나 자료와 표들은 전부 심각한 토론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이 재소자들이 범한 범죄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인지 거의 전혀 주목받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정치 선전은 소련의 재소자들을 항상 아무 죄없는 희생자로 다루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도둑, 강도와 강간자들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범죄자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미디어가 자국이라면 절대로 무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가 소련에서 행해진 것이기에 경우가 달랐다.  한번 이상의 강간을 행한 사람을 무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추악한 행위이다.  적어도 이러한 종류의 죄를 범한 죄인에 있어 소련의 법제를 말할 때에는 최소한의 상식을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꿀락(부농)과 반혁명죄


반혁명죄의 경우에는,  그들이 어떤 죄를 범했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2가지 예를 들겠다: 첫번째는 1930년대 초에 선고받은 꿀락(부농/지주)들이며 두번째는 1936-38년에 반혁명가들과 음모자들이다.


지금까지 인용해왔던 보고에 의하면 꿀락들(부농)은 381,000가족이 있었으며 1천8백만이 추방당했다고 보고되었다.  그중 작은 수만이 노동캠프나 노동부락에 재소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 처벌이 증가하게 되었을까?


러시안 부농 '꿀락'은 불쌍한 농민들을 수백년동안 억압하고 공공연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1927년 1억2천만 농민중 천만의 부농들은 호화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고 1억1천만은 궁핍에 떨고 있었다.  혁명 이전에 그들은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주들의 부는 가난한 농민들의 혹독한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공동농장을 만들기 시작하자, 꿀락들의 부는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꿀락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근을 이용하여 착취행위를 다시 세우려 했다.  무기를 든 꿀락들이 공동농장을 습격하여 농민들과 당원들을 죽이고 농토에 불을 지르고 일에 쓰는 가축들을 죽였다.  이 불쌍한 농민들에 기근을 일으켜서, 그들의 가난과 자신들의 지위를 영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건들은 이들 살인자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혁명을 지지하고 나서며 꿀락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여, 그들을 패퇴시키고, 감옥에 넣고 추방하거나 노동캠프형을 지운 것이다.


1천만 꿀락중, 1백8만이 추방되거나 유죄평결을 받았다. 소련의 지방들에서 1억 2천만의 인구가 합해 싸운 계급투쟁을 겪으면서 많은 부조리가 범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가난하고 탄압받은 사람들이,그들의 아이들이 문맹으로 굶어죽지 않는  삶을 찾기 위한 투쟁에 있어 그들이 충분히 '문명화'되지 않았다거나, 그들의 인민재판에 있어, 충분한 '자비'를 베푸는 법을 몰랐다고 탓할 수 있는가?  수백년 동안 문명의 전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문명화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가?  착취자 꿀락들이 언제 그들의 가난한 농민들을 그 끊임없는 세월동안 취함에 있어서 자비를 베푼 적이 있는가를 말해보라.


1937년의 대숙청


우리의 두번째 예인, 1936-38년의 재판기간동안 집행된 반혁명죄의 처벌은, 당 차원에서, 군대에서, 각 공화국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혁명사에서 근원한다.  수백만의 인민들이 짜르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는데 그들중 다수가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한다.   하지만 이 가입된 사람들 중에는 불행하게도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 외의 이유로 가입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계급투쟁이란 것은 새로운 투사들이 시험을 할 만한 기회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당에서 온 투사들도 볼셰비키당을 위해 싸운 사회주의자라면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  이 새로운 운동가들이 볼셰비키당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되어, 그들의 역량에 따라 계급투쟁을 전개할 무장군대와 지역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갓 태어난 소련의 역사에 있어 매우 힘겨운 시기였다.  싸울 사람이 부족했고, 단지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도 부족했고 이를 당에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두 진영으로 갈리는 모순적인 시간이 생겨나게 된다.  한측 진영은 싸움을 밀어붙여서 사회주의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측이었고 다른 한측은 사회주의를 실현하기에는 무르익지 않았고, 사회-민주주의를 하자는 측이었다.  이 아이디어의 기원은 1917년 당에 가입한 레온 트로츠키의 주장이었다. 트로츠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요한 볼셰비키인물들의 지지를 사서 입지를 굳혔다.  원래의 볼셰비키 계획에 대한 이러한 연대된 반대로 인해 1927년 9월 27일 표결로 정책을 결정하기로 한다.  이 표결의 결정 전에 당에서는 수년간 수많은 토론으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725,000표 중에 6,000표인 1%를 반대세력이 얻는다.


이 표결의 결과로, 이 반대파는 당에 반하는 정책의 실현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이 반대파의 주요 리더들을 축출하기로 결정한다.  그 주요 인물은 트로츠키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노비예프, 까메네브와 즈브도킨이 반성서(자아비판)를 쓰고 다른 퍄타코프, 라덱, 쁘레오브라진스키와 스미르노프 등 유명한 트로츠키주의자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들 모두가 다시 당원으로서 인정받고 다시 중요한 보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곧 이 반대파들의 자술서는 진실한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데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이 첨예할 때마다 이 반대파는 반혁명측을 들었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의 다수는 이후에 몇 번씩 다시 받아들여지면서 1937-38년동안 해결되기 전까지 이 상황이 지속된다.


산업에서의 사보타지


1934년 9월에 일어난 레닌그라드의 당의장 키로프의 암살은 그가 중앙위원회에 큰 역할을 하는 인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조사단이 구성되었고 당의 주도권을 폭력으로 장악하려는 음모를 꾀하는 비밀조직이 있음이 밝혀진다.  그들은 1927년에 중앙에서 밀려 난 이후,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산업계에서 반발이나, 테러, 그리고 부패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동자인 트로츠키는 그 활동을 해외로 넓힌다.  산업에 있어서의 사보타지는 소련에 있어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예를 들어 막대한 손실로서 중요한 기계시설이 엉망이 되어버리거나 광산과 공장에서 커다란 생산량의 하락이 있게 된다.


1934년에 이 문제들을 지적한 사람들 중에는 John Littlepage라는 미국인 엔지니어가 있었는데 소련에서의 계약근무로 온 기술자였다.  그는 1927-37년의 10년동안 소련의 산업계, 주로 금광에서 일했다.  그는 그의 책 '소련의 금광을 찾아서'-(In search of Soviet gold)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한, 소련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의 일을 위해서 소련의 산업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스탈린이 이 불만에 찬 혁명 공산주의자들이야 말로 자신의 가장 끔찍한 적이라는 것을 알기 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라 확신한다."


리틀페이지는 또한 이 책에서 그의 경험을 통해 해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음모에 대한 당시의 공식발표가 소련의 주요한 산업에 대한 사보타지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1931년 우랄과 카자흐스탄의 구리/동 광산에서 일할 때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이들 광산은 퍄타코프(중공업계 인민부위원장)하에 있는 단지의 일부였는데, 이 광산은 생산에서나 노동자들의 처우에 있어서나 끔찍한 수준이었다.  리틀페이지는 이 구리/동 광산단지의 최고 경영측에서부터 사보타지가 일어나고 있음을 결론내리고 있다.

우리가 리틀페이지의 책에서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반혁명행위에 필요한 물자를 어떻게 조달했는가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비밀리에 외국의 어떤 공장에서 특정한 기계를 사도록 했는데, 그 품질은 소련이 지불한 값어치보다 형편없는 품질의 것이었다.  외국의 계약자는 트로츠키의 조직에게 이러한 제조사로부터 계속 구입 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런 자금의 잉여물을 댓가로 지불하였다.


도적질과 부패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리틀페이지가 광산에 쓰일 광산용승강기의 매입과정을 독일 베를린에서 1931년 봄부터 관찰한 것이다.  소련의 대표측은 퍄타코프였고 리틀페이지는 이 엘리베이터의 품질확인과 매수를 확인하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리틀페이지는 질 낮고 소련의 목표에는 쓸모없는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사기를 발견했고 이를 퍄타코프와 다른 소련대표측에 알렸으나 차갑게 거부당했고, 파탸코프는 이러한 단점들을 간과하고, 승강기들을 사는데 승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틀페이지는 거부한다.  그는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다고 판단했고 개인간의 부패행위거나 대표측 전체가 승강기 제조업체로부터 매수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퍄타코프는 1937년의 재판에서 그의 트로츠키파와의 연계를 실토하였고,  리틀페이지가 베를린에서 목격한 행위들은 개인적 수준의 부패를 훨씬 뛰어넘는 것임이 밝혀진다.  여기에 얽힌 돈은 소련의 비밀반대파에게 지불되어 이것은 사보타지, 테러와 선전전에 쓰일 자금이었다.


쿠데타의 계획들


도적질과 사보타지, 부패만 해도 심각한 범죄일 것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반대파의 행위들은 그를 훨씬 넘었다.  반혁명음모는 쿠데타로서 소비에트지도층을 제거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중앙공산당위원회의 최고 요직의 인물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군사쿠데타의 측면에서는 투카체프스키를 선두로 하는 일단의 장성들에게서 나타났다.


그 자신도 트로츠키주의자로서 Isaac Deutscher는 스탈린과 소련에 반하는 책들을 집필했는데, 크레믈린을 뒤집을 쿠데타계획이 일어날 것이었고 그에 가장 중요한 군대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의 주요 대도시들의 군대였다.  Deutscher에 의하면 이 쿠데타는 투카체브스키장군에 더해 근위대 의장인 가마르닉, 레닌그라드 총사령관인 야키르장군, 모스크바군사학교의 사령관 우보레비치 장군 그리고 기병대장인 프리마코프가 가담한 계획이었다.


민간인들과 군대의 음모자들은 강한 친구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1938년 부카린의 공개재판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나치독일간의 협상과 공조로 소련을 반혁명쿠데타를 일으키고 우크라이나를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독일이 반혁명주의자들을 돕는 대가였다.  부카린은 트로츠키로부터 라덱이 받은 지시로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높은 직책을 꾀하고자 하는 음모가들은 사회주의를 위한다고 입발린 소리를 하면서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붕괴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두가 1930년대에 나치세력이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 유럽을 길들이고 커갈 때 일어난 일이다.


음모자들은 반역자로써 공개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사보타지나 테러, 부패와 살인으로 나라를 나치들의 손에 팔아넘기려 한 자들을 기다릴 것은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을 무고한 희생자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헛짚는 일이다.


수도없는 거짓말들


로버트 콘퀘스트의 붉은군대의 대숙청에 대한 거짓말 외에도 서방의 선전물의 거짓말은 많다.  콘퀘스트의 책 'The Great Terror'에서 1937년 7만의 장교들과 붉은군대의 근위대중 50% (즉, 15000의 장교와 20000의 근위대)가 정치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처형되거나 노동수용소에 종신투옥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 역시 그의 책의 다른 부분과 한치도 다름없이 순전히 거짓이다.


역사가 Roger Reese는 그의 책 'The Red Army and the Great Purges'라는 책에서 1937-38년의 군대에 있던 숙청에 있어 중요한 사실을 짚어준다.  붉은군대와 공군을 총괄하여 사람들 수는 1937년경에 144,300이며, 1939년에는 282,300으로 늘어난다. 1937-38년 숙청 사이에 34,300명의 장교와 근위대들은 정치적 이유로 추방된다.(이것은 13,000 장교, 4,700공군장교와 근위대들과 5,000정치근위대이다) 이것은 총 장교와 근위대의 7.7%의 비율로 콘퀘스트의 50%는 아니다.  물론, 이 7.7%중에는 반역자로 처단당한 이들도 있지만 다른 역사자료에서 보든, 대부분 단지 민간인으로 옷을 벗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다.  1937-38년의 재판이 피고에게 정당했는가?  예를 들어 최고의 반대파의 행동대를 맡았던 부카린의 예를 들어보자.  당시의 모스크바주재 미국대사에 의하면 당시의 저명한 변호사 Joseph Davies가 전체 재판을 지켜봤으며 아무런 제제 없이 그의 사건을 처리할 수 있었다.  Joseph Davies는 워싱톤으로 돌아온 후 당시의 재판에서 피고는 기소된 바대로 유죄임을 인정하였고, 재판을 참관한 외교관들의 일반적인 견해도 매우 심각한 음모가 드러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역사에서 배울 것


수천의 거짓의 기사들과 책들에서 스탈린 재임기의 소련의 법형제에 관한 토론에 있어, 수많은 거짓으로 이루어진 기사들과 책들이 쓰여 졌고, 수백의 영화들이 거짓된 인상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익은 그 라디오나 TV등 그들이 지배하는 언론을 통하여 혼돈을 일으키고 진실을 왜곡하여서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말들을 진실로 여기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특히 역사적 문제에 있어 그러하다.  어떠한 우익으로부터의 새로운 이론도 증명할 수 없다면 거짓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러한 주의성은 근거 있는 일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연구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익은 지난 50년간 해 온 거짓말을 그대로 다시 사실인 양 되풀이 하고 있다.  우익은 그 역사적 유산: 계속 덧붙여서 만들어진 거짓말을 사실화 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이 연구가 서방에 발표된 이후, 몇가지 책이 몇몇 국가에서 러시아의 이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오랜 거짓말들을 부흥시켜 대중에게 새로운 사실인양 포장하고 있다.  이런 잘 꾸며진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거짓말로 채워져 있다.


우익의 거짓말들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계속 지어내진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예를 들어 사회주의같은)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옛 거짓말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이다.


이러한 나라들의 모든 이들은 역사를 되돌아 볼 의무가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거짓말과 싸우기 위해, 공산주의신문들을 노동자계층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일궈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계급투쟁에 있어 새로운 힘으로 가까운 미래에 다시 일어설 수 있기 위하여 의심할 나위 없는 중대한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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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10.11 11:26

    첫댓글 과연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 11.10.11 11:40

    진실은 황색언론이죠 빨갱이,공산당,좌파,종북 공포심을 붇독아주고
    자본주의가 최고다는걸 선전해야 자본가계급에게 피빨리고 착취당하는것을 감추어야 하니까요
    울지 않는 아기 젓 안 준다.
    부르주아 독재국가 주둥아리 언론 놈들이
    민중을 지배계급으로 세뇌시켜 노동자가
    민주 노동당을 적대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 꼭두각시 인생들..
    한국은 노동력 착취시스템이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요.
    그 착취자본주의가 모범적으로 성공한 사례라 볼 수 있오.

  • 11.10.11 11:51

    2차세계대전도 미국때문에 이긴줄 알지만 스탈린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 물적,인적자원이 75%이상
    소모 됐다는것 베를린도 소련군이 점령하고 서부전선은 라인강에서 교착상태 독일군전력
    50만이상이 남아있었다는것 서부전선은 미,영,프랑스,호주,이탈리아,각식민지군대가 있었죠
    소련을 서방이 지원했다 ? 멀 지원 햇는지 오히려 소련이 영국에 군수물자 지원해줌
    태평양전쟁 히로시마,나카사키에 원폭이 떨어져도 일본인은 1억옥쇄를 외치며 귀축미영
    소련군 참전하자마자 무조건 항복 ㅎㅎ 물론 일,소불가침조약을 소련이 깻지만요 ^^
    독,소불가침조약은 독일이 ...그레서 한반도,베트남에서 젓된거임...미국놈들

  • 11.10.11 12:31

    미국놈들 1차세계대전도 눈치 살살보다가 연합국이 이길만하니 참전하고 2차세계대전도
    베트남전도 혼자서 못싸우고 이라크도 다국적군 아프카니스탄도 나토연합군
    (침략전쟁 꼽사리 딱가리용병 한국군 꼭 한다리 너음 요세버전 숟가락 노음) ...

    소련을 물고 넘어가야 미국이 살고 요세는 중국 못잡아먹어서 환장한 비열하고 야비한 국가죠 ...
    자유의십자가전쟁이라 아예 개가 풀뜯는 소리죠 ^^조폭처럼 ,양아치처럼 다구리만 터는놈 ...

  • 11.10.11 12:28

    사실 6.25는 세계3차대전이었습니다. 그 많은 국가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싸웠고 군사병력으로도 연합국이 더 많았지요. 중공군이 들어와서 인해전술이라고 한 것도 거짓이고요! 중국과 북한군 다 합쳐도 연합국이 훨씬 많았지요.

    미국이 제 3차 대전에서 지니까, 한국 내전으로 몰아부친거지요!

  • 11.10.11 12:06

    그런 진실들이 하나씩 튀어 나올때,마치 우리 인간은 1% 때문에 99%가 사육되어 지고 있다는 느낌.
    마치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것, 이럴때마다 매트릭스 라는 영화가 불현듯 생각납니다.

  • 11.10.11 22:48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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