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4월 8일
점심을 먹고 삼릉에서 멀지 않은 포석정을 방문했다
경주남산은 신라의 시작서부터 멸망까지 천년세월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품속에 신라의 희노애락을 모두 간직한 채
또 다른 천년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 속이 어떠할까?
신라를 창건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곳은 나정인데
이곳은 남산의 북쪽 끝자락과 경주시내 사이에 있으며
신라가 고려왕건에게 나라를 바쳐 멸망의 단초가 된 술자리 포석정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애 위치해 있다.
즉 신라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들이 남산의 품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포석정은 통일신라 시대에 나라의 의례 및 연회장소로 이용되었던 정자인데
55대 경애왕이 927년 이곳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후백제 견훤이 처들어와 경애왕을 체포한 뒤 "내 칼에 죽을거냐?
아니면 스스로 자결을 할 것이냐"며 칼을 던져주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곳으로
이후 경순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10년을 버티다가 결국 왕건에게 항복을 하므로써
천년왕국 신라가 멸망을 하게 됬다.
나라가 망하자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는 금강산 등 자연속으로 방랑을
하면서 생을 마감하는 가슴아픈 사연도 전해온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에는 포석정 주변나무에 새잎들이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어
마치 신라가 부활하는 기운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경애왕이 연회를 베풀던 시기는 낙엽마저 거의 다 떨어진 늦가을 이었으니
그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쐬~~ 했을까?
포석정을 나서 다음 목적지인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 감포로 향했다
점심먹고 난 뒤라 피로가 몰려오는데 문무대왕릉까지는 40여분을 가야해서
운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는 베테랑운전수 베테랑님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잠깐 눈을 붙혔다
경주시내에서 문무대왕릉까지 가는 길은 태백산맥의 꼬리부분을 넘어야 해서
꽤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베테랑님이 운전을 잘 해서인지
20여분동안 토막꿀잠을 자고 눈을 떠 보니 어~라~ 꼬부랑 산길은 어디로 가고
고속도로가 뻥하니 뚫려 있었다.
내가 와보지 못한사이 경주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감포로 가는 옛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감포는 행정구역상 경주시 감포읍으로 경주에 속하는 곳이나 큰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라 크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다
(참고로 경주시의 면적이 셔울시의 약 3배에 이를 정도로 꽤 넓은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신라의 최절정기 국정을 이끌었던 문무대왕릉이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신라 제29대 왕인 문무왕은 앞선 28대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660년)시키고
1년뒤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어받아 고구려까지 멸망시켜(668년)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루시고, 연합했던 당나라가 많은 간섭을 하려고 하자
당세력까지 몰아내고 통일신라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신 왕이시다
그래서 문무왕에게는 큰대자를 더해 문무대왕이라 칭하고 있다
이런 문무대왕에게도 골치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시로 출몰해서
약탈을 일삼고 살인을 저지르는 왜구의 침입이었다
그래서 문무대왕은 자신이 죽으면 동해바다의 해룡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아줄테니
나를 화장해서 바다에 수장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동해바다 암초사이에 문무대왕을
뫼시니 이곳이 바로 바다속에 있는문무대왕릉인 것이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관광객들이 제법 많고 주위가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둘러보니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왕님께인지 용왕님께 인지는 모르겠으나 구경하는 인파도 제법 된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 먹으라 했는데 일정이 바빠 기념사진 한 컷하고
문무대왕릉을 떠나서 감은사지로 향했다
문무대왕릉에서 자동차로 채10분도 안되는 곳에 있는 감은사지는
30대 신문왕이 아버지를 동해바다에 모시고 나서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시겠다는
그 큰 뜻에 감동받아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감은사라는 사찰을 짓고
감은사와 동해바다를 연결하는 수로를 만들어 해룡이 되신 아버지의 영혼이
드나들수 있도록 하고 신문왕도 이곳을 자주 찾아와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 곳인데
아쉽게도 절은 모두 소실되고 두개의 3층석탑만(국보 제112호)이 덩그러니 남아 있어
가슴을 시리게 하고 있지만 3층석탑을 가까이 가서 보면 그 무언가 모를 기개가 뿜어나고
아름다움까지 간직하고 있어 사진으로 보는 것하고는 큰 느낌의 차이를 갖게 합니다
3층석탑을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조그마한 가게에서 경주빵을 팔고 있어
한박스를 사서 나누어 먹었다. 요즈음은 경주빵이라는 이름으로 경주시내외에 온통
경주빵집들이 즐비한데 예전에는 이 빵을 황남빵이라 불리웠으며
옛 경주역 근처에 황남빵 본점이 있어 빵을 먹기 위해서는 본점까지 찾아가 사먹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름을 경주빵으로 바꾸고 너무 많은 빵가게가 생겨
그 희귀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그냥 추억속의 황남빵으로만 기억하고 싶어진다
감은사지를 나와 경주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의 소림사라 불리우는 골굴사를 들렀다
골굴사는 1500년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 사원이다
이곳에 있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이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여러 석굴속에 불상을 모셔놓은 특이한 절이다
또한 이곳은 스님들이 선무도라는 무술을 연마하는 곳이라서 한국의 소림사로 불리워
지기도 하는데 매주 토요일 오후에 선무도 시범공연이 있다고 해서 급히 달려갔지만
도착해보니 공연이 막 끝나 관중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많은 외국인들이 공연을 보고 내려오고 있어 물어보니까
이 곳이 외국에 많이 알려져 템플스테이하러 온 분들이란다
내가 이곳 골굴사를 방문할 에정이라고 소개를 하자 그런 절이 있는지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외국에까지 템플스테이가 알려져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걸 보면서 K-POP뿐만 아니라 K-CULTURE까지도 세게속으로
파고드는걸 느꼈고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한층 높아졌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템플스테이를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분이
해남 미황사에 계신 금강스님이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우리는 경주시내로 들어가 분황사와 황룡사터를 둘러볼 계획이다
가는 길목에 보문관광단지와 보문호수가 있는데 시간관계상 드라이브를 하면서 보고는
바로 분황사로 향했다
분황사~~~!!
여인이 독을 품고 지은 절 ~~ 분황사
분황사는 당시 신라의 최고 사찰이던 황룡사와 바로 붙어 있는 절로서
황룡사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당시 왕이던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무언가 복수심을 갖고 짓게한 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덕여왕이 왕이 되기 전 당태종으로부터 모란이 그려진 꽃그림을 선물받는데
가만히 그림을 보니 꽃에 벌,나비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꽃에 향기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 덕만(선덕여왕이 왕이 되기전 이름)은
당태종이 자신을 향기없는 여인으로 비하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에 독기를 품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유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지 않았는가
나 선덕은 향기있는 여자야라고 항변하면서 지은 절이 바로 분황사인 것이다
향기 분, 황제 황 즉 향기있는 황제의 절 분황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곳에는 절은 소실되어 없어지고 3층 탑만 남아있는데 탑이 특이하게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벽돌을 쌓아서 탑을 만드는 전탑(벽돌탑)이 유행했었는데
이때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았으나 선덕여왕은 당나라의 전탑보다 더 튼튼하고 멋지게
만들기 위해 돌을 깍아 하나하나 벽돌로 만들어 쌓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모전탑(벽돌을 본떠서 만든 탑)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본래 탑은 높게 쌓았었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분황사를 나오면 바로 앞에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신라시대 때 최고의 사찰이었던 황룡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황량한 벌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언젠가는 이 절에 대한 고증이 끝나고 재건축이 되어 멋진 한국의 대사찰로
부활하기를 기원해 본다
이 황룡사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 당시 목조로 만든 9층 목탑인데 고려 고종때인
1238년 몽고의 침략당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탑을 재현한 탑을 모기업이 보문단지 입구쪽에 만들어 놓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오르내릴 때 엘리베이터를 사용한다고 한다
왠일인지 입장을 할 수가 없어 우리는 그 옆을 지나가면서 겉만 보고 지나쳤다
시간을보니 아직 해가 남아 있어 김유신장군묘를 구경하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김유신장군묘는 경주시내에서 보면 하천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어 멀지 않았으나
우리가 찾아간 시간이 오후 6시가 넘어 관리인이 퇴근한 뒤라서 입장료를 내지않고
구경할 수가 있었다.
김유신장군은 너무 유명한 분이시라 별도로 소개를 안해도 될듯 싶어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장군의 탄생지가 경주가 아닌 충북 진천에 있는
태실이란 곳임을 알리기는 했다
몇년전 반딧불산악회에서 진천 농다리와 보현산 보탑사를 간 적이 있는데 그당시
보탑사 이동중에 잠시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홍무문을 지나 김유신묘까지는 짧은 거리이지만 멋진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김유신묘는 십이지신상으로 장식된 호석과 봉분을 둘러싼 회랑이 있어 왕릉에서나
볼 수 있는 양식인데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어 왕릉처럼 꾸며졌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명확한 사실은 세월속에 묻혀있어 알 수가 없다
김유신 묘에는 묘비가 2개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라 쓰여져 있고
다른 하나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 이라 적혀 있다
묘앞에서 어쩌다 청춘팀 우의를 다지기 위해 어깨동무를 한채 사진을 찍었다
김유신 장군묘를 나오니 어둠이 내려 가까운 곳에서 식사하기로 하고 보니
백미가라는 식당안내 표지가 있어 코다리찜과 쐬주 한잔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다른 여행지 같으면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가서 한잔하면서 쉴텐데
경주는 야경을 꼭 봐야할 곳이 있어서 저녁을 먹고 곧 바로 월정교를 보러 갔다
지금의 월정교는 2018년에 경주시에서 새로 지어 개통한 곳으로 밤이 되면
조명이 화려해 많은 인파가 구경을 나오고 있다
우리가 도착을 했을 때도 차량이 너무 많아 주차장을 비롯한 주변이 자동차홍수를 이뤄
길가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 걸어서 구경을 갔다
월정교를 구경하기에는 다리에서 100미터쯤 하류에 돌다리가 있는데 이 돌다리 위에서
야경을 찍는게 가장 멋지게 찍을 것 같다. 우리도 돌다리로 내려가 수많은 인파속에서
겨우 사진을 찍고 왔다
월정교는 신라 35대 경덕왕 19년 (760년)에 건립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궁궐인 월성과 경주남산을 이어주고 강 남쪽에 관아를 배치하여 궁과 관아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때 소실되었다가 남아있는 바닥 기초돌등을
근간으로 실측조사를 하여 2018년 복원이 완료 된 곳이다
월정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남천이라는 하천을 건너는데 문천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한다
당시 당나라의 현장법사한테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러 두번이나 유학길에 올랐다가
가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던 원효대사는 경주에 와서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줄 것인가? 나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깍으려 하네"
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는데 무열왕이 그 노래의 뜻을
"과부를 빌려주면 인재를 낳아줄 것이다"로 이해하고 마침 결혼한지 한달만에 사위가
백제와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청상과부가 되어있는 둘째딸 요석공주를 원효와 연을
맺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원효가 남산에서 궁궐쪽으로 이동하면서
문천교 아래로 넘어져 옷이 흠뻑 젖자 무열왕이 신하를 시켜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원효를 데려가도록 했다
요석궁에서 젖은 옷을 빨아 널고 요석공주와 식사를 같이 하게된 원효는 분냄새에 취하고
요석의 요염에 취해 스님으로서의 신분을 잠시 잊고 3박4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홀연히 길을 떠난다 요석은 아기를 잉태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최초의 우리글인
이두를 창시한 설총인 것이다
한편 원효대사는 전국을 떠돌며 120여개에 이르는 사찰을 창건했지만 요석공주와의
짧지만 강한 연을 잊지 못해 소요산에 기거할 때는 공주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을 짓고
요석공주에 대한 많은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원효대사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일화가 너무나 유명한데
인간사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 사상을 정립한 명승이시기도 하다
월정교를 벗어나 오늘 마지막 여행지인 동궁과 월지를 방문하였다
깊어가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들이 동궁과월지의 야경을 구경하려고
구름같이 몰려들어 입장권을 구입하는 매표소 앞에는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동궁이라 함은 예로부터 태자가 머물던 곳인데 떠오르는 태양처럼 앞으로의 미래를
책임질 자라 하여 왕궁의 동쪽에 궁을 지어 동쪽에 있는 궁 즉 동궁으로 불리운다
동궁과 붙어 있는 월지는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인데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어느 곳에서도 연못의 사면을 다 볼 수 없도록 하였으며 동서로 높낮이를 달리하여
물이 들어오는 곳과 물이 나가는 곳을 구분해 놓아 물이 정체되어 있지 않고
항상 흐름이 있도록 만들어 고인물이 되어 썩지 않도록 배려를 했다
이후 동궁이 쇠퇴되어 연못에는 갈대만 무성해지자 기러기와 오리들만 날아들어
한때는 기러기안 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라 불리워 졌는데
1970년대 발굴을 위해 물을 빼자 거대한 석축이 드러났는데 큰 돌을 가공해
가지런히 석축을 쌓고 출수구에는 궁남지와 같은 연못조경이 발견되므로써
통일신라시대에 고구려,백제출신 장인들이 모두 참여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를 다시 구현하면서 요즈음은 다시 안압지가 아닌 월지로 불리우게 되었다
조명이 아름답게 비추는 동궁과 월지를 둘러보고 조금 늦은 시간에 숙소인
성호리조트로 향했다. 숙소에 가서 몇명이서 아쉬움을 달래고자 맥주 한잔을
했는데 습관적으로 곧바로 곯아 떨어져 버렸다
첫댓글
즐거운 여행인것 같아요
멋지시구요
보기좋으세요
정성스럽게 작성된 포스팅 좋은글 경주가 이렇게 멋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