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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메 송규호 선생의 삶과 문학
오 덕 렬
Ⅰ. 시작하는 말
한메 송규호(1921.9.4.∼2013.8.3.) 선생은 교육자요, 등산가요 수필가이다. 여산 송씨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29세손으로 소윤공파(少尹公派)이다. 전남 완도군 금일면 육산리(陸山里) 852번지에서 7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남 1녀를 두었다. 일곱 살이 되자 금당도(金塘島)에서 당숙이 훈도로 있는 청산도(靑山島)로 간다. 거기서 청산보통학교를 수료(1929)하고, 그후 광주고등보통학교, 흥문중학교(興文中學校, 일본), 조도전전문학교(早稻田專門學校, 일본)를 졸업한다.
한메는 산악인들이 불러준 호이다. 작품집 어디에도 호가 ‘한메’라고 나온 데는 없다. 수필집《산골에 묻힌 이야기》(’80) 속의 작품 <산영감>속에 처음 나타난다. 호를 얻은 것은 선생의 회갑 무렵이 된다.
“덕유산에서 동엽령으로 가는 능선길에서 개미등을 타고 백록담으로 오르는 모래밭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며, ‘한메 멸치젓 가져왔어? 상치쌈에는 멸치젓이 일품이여!’ 그는 내 얼굴만 보면 멸치젓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작품을 읽었을 때 ‘한메’가 호인가,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해 8월에 동두천으로 선생님을 뵈러 갔을 때, 소요산 계곡의 ‘미당식당’에서 물었다.
“한메가 호인가요.”
“규호가 ‘호’인데 뭐 또……. 그것은 산에 갈 때, 딴 사람들이 지어준 호여. 메는 산 아니라고…….”
그렇다. 한메 선생은 말없는 큰 산이다. 그때 말씀으로 울릉도를 두어 번 갔는데 다시 한 번 가보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성인봉을 다시 오르고 싶으신 것이다. 수필 선집도 준비 중이었다. 처음에 가제는《91고갯마루에서》였다. 두 살을 더 먹여 원고를 넘기고, 한 달여 만에 귀천하니, 유고집이 되고 말았다.
한메 선생의 키는 173cm이요, 30대 한창 시절에 몸무게 64Kg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 귀는 부처님 귀 같은데다가 말수가 적고 가끔 유머 섞어 짧은 말씀으로 웃기기도 하였다. 말씀을 하시려면 입안에 조금 머금었다가 하곤 한다. 사람들은 그런 한메 선생을 가끔 ‘생불(生佛)’이라 칭하기도 했고, 교직에서의 별호는 ‘논둑에 말뚝’이었다.
Ⅱ. 한메 선생의 삶과 문학
1. 한메 선생과 교육
한메 선생은 1948년 고향 완도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하여, 1987년 담양 고서중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직하게 된다. 40년 교직생활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곳은 광주고등학교이다. 1954년에 부임하여 7년간 근무하다가, 5·16 직후 도농(都農) 교류의 인사원칙에 의하여 농촌으로 가서 1년 반 있다가 다시 와 4년을 근무하게 된다. 여기서 필자와는 사제지간의 연이 맺어진다. 1학년 2학기 때 나가셨다가 3학년이 되던 3월에 다시 오신 것이다.
그때는 전출하거나 부임해 오신 선생님들은 꼭 이임·부임 인사말씀을 전교생 앞에서 하게 된다. 교장 선생님의 소개 순서는 교육과정 과목 순서대로, 국민윤리 다음으로 국어과 선생님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두 번째로 부임 인사말씀을 하게 되었다. 구령대에 올라선 한메 선생은 그때도 말을 머금고 있다가 간명한 인사말을 남겼다.
“가락해서 가고, 오락해서 온 송규호요.”
이상이었다. 상부 인사 발령에 의하여 1년 반 만에 다시 왔다는 뜻이다. 운동장에 모인 1천5백 제자들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 환영했다. 문예부 활동도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그동안 6회부터 18회까지 가르쳤으니 기른 제자들도 많았다. 마침 다형 김현승 시인이 조선대학교에 계셨을 때이니 손을 잡아주셔서 광주고등학교는 시인 사관학교라는 명성을 얻었던 시기였다.
학교에서는 문학의 맥을 잇기 위해 도서관 동에 <光高 문학관>을 개관(2007.5.) 하였다. 여기에는 한메 선생을 비롯하여 학교에 근무하셨던 은사 12분과 동문 문인 80분의 작품집과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후배들이 문인으로 배출되고 있으니 살아있는 문학관인 것이다.
한메 선생이 근무하던 동안에 선생의 시 <광고(光高)의 노래>가 교가로 제정·공포(’58.11.)되었는데, 그때 한메 선생은 37세였다.
2. 한메 선생의 생활 철학
2008년 5월이었다. 제자인 문순태-<타오르는 강>의 저자-가 운영하는『문학의집․생오지』에 오셨다. 문학 축제가 열린 것이다. 한메 선생은 초대 문인으로 소개되고, <나의 문학 나의 제자들〉을 내용으로 잠깐 말씀하셨다. 이 간단한 말씀 중에는 생활 철학이 담겨 있었다.
어금니 두 개가 빠져서 바람이 심하게 왔다갔다 합니다. 나이는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나 팔팔합니다. -그해 88세 미수(米壽)였다- 문순태(文淳太)는 문장에 ‘클태’를 받았으니 더 말할 것 없고…. 흉 하나 보자면, 하루는 방과 후던가 찾아왔어요.
“선생님 저 교도소에 한번 잡혀갔으면 쓰것습니다.”
“꼭 갔다와야 쓰것느냐?”
대답은 문순태가 할 얘기고…. ‘뭔가는 해내고 말 것이다.’ 생각했는데 여기까지는 해내고 말았습니다.
“아주 마음에 흡족합니다. 맘에 쏙 듭니다.”
지금부터 2분만 더 말하겠습니다.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회사나 공무원 생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서, 억압 없이, 나를 위해 사는 것, 마음 편하게, 거짓말 안 하고, 자연주의 자연스럽게 살다가, 생활 질서 무너지는 날 모든 것 무너집니다. 순리대로 물 흐르듯이……. 그저 생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격식이고 뭐고 없다. 군더더기 없이 하신 말씀이다. 이 짧은 말씀 속에 한메 선생의 많은 모습이 녹아 있다. 끝 부분에서는 삶의 철학이 다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아는 체 하지 않는다. 남의 이름을 거명하여 험담하지 않는다. 생활 질서 무너지는 날 모든 것 무너진다고 한 그 질서에 대한 언급을 작품에서 찾아보자.
“물레는 무명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틀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짜던 피륙을 끊어, 아들의 학업 중단을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의 물레는 미립으로 깨달은 질서의 바퀴를 타고, 쉰이 넘은 이 가슴 속에서 아직도 돌고 있는 것이다.” -
<물레의 노래>
“저렇게도 지천으로 많은 산이지마는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자연의 선물이요, 두고두고 배워야 할 아름다운 질서다.” -<지다 남은 달>
3. 한메 선생과 산(山)수필
제2 수필집<산골에 묻힌 이야기>(’80)부터는 산 수필이 대종을 이룬다. 한메 선생의 산에 대한 그리움은 어릴 적 청산도(靑山島)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우리의 조각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발막기미의 산마루에서 눈물로 지켜보고 계셨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할머님에 대한 그리움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낯선 산마루에 서서 금당도 쪽을 바라볼 적마다 할머니의 환상이 하늘 멀리 떠오르곤 하였다. 그 시절부터 이 손자에게는 산이 그리웠다. 산은 할머님을 만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버릇이 되어 아직껏 떠나 살고 있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산으로 간다.”
대표작 <메아리 없는 대봉산>은《무등수필》(제10호, 1999.11.20.)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수필의 전반부 1/3쯤-돌아가신 할머니께서는 딸만 여덟을 둔 나머지…(중략)…그러던 것이 어느덧 버릇이 되어 아직껏 떠나 살고 있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산으로 간다.-은《산골에 묻힌 이야기》(1980.)의 <책 머리에>의 글이다. 그렇고 보면 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20년 세월이 걸린 셈이 된다.
청산도 양지 마을의 뒷산에서 시작된 산에 오르는 일은 계속된다. 설날 새벽 무등산에선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무등산(1,187m) 700회 등정을 기념하기도 하고, <코카사스 일기초>에 보면 국제산악캠프대회에 한국에서 8명이 초청었다. 이 캠프에 참가한 것(’89.7∼8.)이, 69세 때였다. 잇콜호텔(2,200m)에 머물면서 아이봉(3,200m)을 한국 대표 산악인이이 되어 오르고, 73세 때(’94)는 터기의 최고봉인 아라랏산(5,265m)을 등정한다. 그리고 에베레스트의 베이스캠프(5,200m)를 오른 것은 2003년(82세)이다. <히말라야의 맨발 여인>에 보면 88세 때 ‘출판인 산악회’회원 몇 사람과 네팔의 안나푸르나 코스에 합류한다.
“차가운 새벽하늘에 어스름을 눈 비비며 일어나는 산과 산, 그토록 기다렸던 마차푸차레가 해발 6,993m의 높이로 허였게 우뚝 솟아오른다. 세모꼴로 빼어난 저 성스러운 정상에는 그 누구도 올라서서는 아니 되는 네팔의 상징이자 수호신이다. 그리고 동서로 길게 이어진 백설의 하늘금 위에 드디어 안나푸르나의 연봉을 비롯하여 마나슬루 등등이 줄을 지었다. 떠나오기 전에는 그리도 멀게 느껴졌던 히말라야가 이젠 아니 멀리서 저토록 빛나고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는 장엄하다기보다 그저 숭엄하고 성스러울 따름이다. 비록 이 시점에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더 바랄 것이 없을 성 싶은 신비로운 세계다.”
한메 선생의 등산은 그냥 타고 났다고 해야 풀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말이나 휴일에는 산으로 간다. 추석이고 설이고 상관없이 연휴는 등산의 좋은 기회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간첩으로 오인되어 주민의 신고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때마다 산속에서도 제자가 나타나서 쉽게 해결되는 걸 보면 한메 선생의 산행에 대해서는 하늘도 돕고 있는가 보다.
딸과 며느리와 함께 산을 오르기도 한다. 딸 ‘마나’와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을 오른 것은 그렇다고 치고, 작품에 나오는 정혜(貞惠)는 며느리다. 며느리와 함께 오른 소요산(逍遙山)의 한 봉우리인 공주봉 정수리(526m)에서다.
“정혜야/이만 내려가자꾸나./ 우리 공주 곁에 두고/ 없는 신라의 딸/ 요석이만 찾았구나.//
지난날, 일본 알프스 최고봉인 오쿠호다카다케(奧嵇高岳) 정상(3,190m)에서 인생 항로를 되돌아보던 그대가 아니더냐.” -<공주를 만나러>
이 세상에 며느리와 함께 3천m 이상의 산을 오른 분이 몇이나 될까? 한메 선생은 국내외의 산들을 두루 다녔다. 북극 마을 ‘배로’도 다녀왔다. 에베레스트 방면으로 아나푸르나 코스를 가기도 했다.
꼭 산이 높아서 좋은 글이 나오지는 않는 성 싶다. 사람의 감정은 묘한 것이어서 어릴 적에 오르던 동네 뒷산이 마음의 산이 되어 꿈이 되었나 보다. 대봉산은 등산의 씨가 되었고, 한메 선생의 대표작을 낳은 산이 되었다.
4. 한메 선생의 문학 세계
가. 제1 수필집《마음의 고향》
한메 선생의 첫 수필집은 당신 나이 53세 때 나온《마음의 고향》이다. 여기에는 58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초기 작품들이기 때문에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한메 선생의 초기 수필의 특징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은 평생 쓴 수필 525 편의 11%에 해당된다. 그중에서 산과 관련된 수필은 25편이고, 시수필은 35편이다. 이로 보면 초기부터 산과 시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에 드러내 놓고 말한 바는 없지만 한메 선생은 시에서 출발한 분이다. <광고(光高)의 노래>가 지어진 것은 제1 수필집이 나오기 16년 전(1958)이다. 이로 보아도 시에서 문필을 다졌던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표1> 제1 수필집《마음의 고향》분석
계 |
수 필 |
58편 중 시수필 |
비 고 | ||||
등산수필 |
山기행수필 |
일반수필 | |||||
고향 |
가족 |
기타 | |||||
58 편 |
17 |
8 |
3 |
1 |
29 |
35 수 |
|
100% |
29.3% |
13.8% |
5.2% |
1.7% |
53.0 |
60.3% |
- 등산 수필: 산의 정상을 오른 수필
- 산 기행 수필: 산을 찾은 것이 목적인 수필
- 시수필: 시로 쓴 수필이거나 시가 들어 있는 수필
특이한 점은 보통 수필가들이 즐겨 다루는 ‘고향’과 ‘가족’ 이야기가 미미하다는 것이다. 고향을 다룬 수필은 3편이다. 뒤에 쓴 <메아리 없는 대봉산>을 합하여 평생 4편이고, 가족 이야기는 1편뿐이다. 그만큼 山 수필가라는 뜻이다.《마음의 고향》의 <글머리에서>를 보자.
“이제까지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망설이다 보니,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에 쌓인 먼지를 털고 주섬주섬 긁어모아, 하나로 엮은 것이 그저 이런 대로《마음의 고향》이다.”
선생은 수필집의 출간이 늦어진 변을 말하고 있다. 천성 그대로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인 문체는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일관성을 보인다. 처음부터 틀이 잡혔다는 얘기가 된다. 그만큼 탄탄한 문장 수업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나. 12권의 수필집
자, 전체적인 흐름을 보자. <표2>에서 전체를 아우른 통계 수치를 보면 山수필 쪽으로 기울어짐을 볼 수 있다. 소재가 산이 아닌 일반 수필의 경우 제1 수필집에서 33편이었던 것이 총 수필에서는 93편이니 그 후 60편을 쓴 것이다.
<표2>제1 수필집의 수필(58편)과 총 수필(525편) 의 비교
계 |
수 필 |
시수필 | |||||
등산(登山)수필 |
山기행수필 |
일반수필 | |||||
고향 |
가족 |
기타 |
편수 |
% | |||
제1 수필집(58 편) |
17 |
8 |
3 |
1 |
29 |
35편 |
60.3% |
100% |
29.3% |
13.8% |
5.2% |
1.7% |
53.0 | ||
43.1% | |||||||
총 수필 (525 편) |
210 |
222 |
4 |
11 |
78 |
231편 |
44.0% |
100% |
40.0% |
42.3% |
0.8% |
2.1% |
14.9 | ||
82.3% |
17.7% |
소재가 山인 수필을 비교해 보면 제1 수필집에서는 43.1%였던 것이, 총 수필에서는 그 비율이 82.3%나 된다. 그만큼 세월이 갈수록 산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수필은 전체 525편 중에서 231편(44%)이나 된다. 미루어 보면 수필의 본질을 꿰뚫고 신변잡기가 아닌 창작 수필을 썼던 것이다. 이관희가 말하는 “창작문예수필은 이 같은 시적 발상을 산문으로 형상화하는 양식의 문학이다.”라는 이론을 작품으로 많은 부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족에 대하여 쓴 11편은 할머니 1편 <물레의 노래>, 어머니 4편, <어머니의 담뱃대>·<어머니와 놋화로>·<골무>·<주름살>, 한메 1편 <잊혀지지 않는 일>, 아내와 아들 1편 <다시 피는 꽃>, 며느리 1편 <공주를 만나러>, 딸 1편 <피아골에서>, 아들 딸 1편 <어설픈 이름장이>, 손녀 1편 <꽃바구니> 등이다. 또한 고향에 관한 수필 4편은 <고향 이야기> · <그리운 가락> · <밍근이> · <메아리 없는 대봉산> 들이다.
<표3> 수필 525편의 분석
작품 |
편수 |
등산(登山) 수필 |
산(山)기행 수필 |
일반 수필 |
비 고 | ||||
국내 |
국외 |
국내 |
외국 |
고향 (4) |
가족 (11) |
기타 | |||
계 |
525편 |
155 |
55 |
50 |
172 |
15편 |
78편 |
| |
210편 |
222편 | ||||||||
% |
100% |
29.5 |
10.5 |
9.5% |
32.8% |
2.9% |
14.9% | ||
40.0% |
42.3% |
17.8% |
평소 한메 선생은 수필 쓰는 일은 당신의 역사를 써나가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당신이 평생 쓴 수필 525편은 첫 수필집 이후 귀천할 때까지 어림잡아 40년간에 쓴 것이다. 이로 보면 1년에 평균 13편을 쓴 셈이다. 한 달에 한 편 꼴이라 생각하면 많은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많은 산을 오르고, 찾아 나선 산은 또 얼마인가. 그것도 반 이상은 외국 나들이다. 거기다가 꼬박꼬박 육필로 쓰는 선생을 생각하면 산을 오르고 수필을 쓰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도 같다.
<표4> 국외 산수필 227편의 국가별 수
나라 |
중국 |
일본 |
인도 |
몽골 |
대만 |
태국 |
북한 |
인도네시아 |
티베트 |
말레이시아 |
라오스 |
캄보디아 |
베트남 |
싱가폴 |
네팔 |
부탄 |
편수 |
71 |
64 |
8 |
3 |
2 |
3 |
3 |
4 |
2 |
2 |
1 |
2 |
1 |
1 |
1 |
1 |
나라 |
필리핀 |
뉴질랜드 |
소련 |
라자스탄 |
구루지아 |
호주 |
이집트 |
파프아뉴기니아 |
코카사스 |
터기 |
미국 |
카나다 |
브라질 |
멕시코 |
페루 |
프랑스 |
편수 |
1 |
1 |
3 |
1 |
1 |
1 |
1 |
1 |
1 |
1 |
13 |
1 |
4 |
1 |
2 |
3 |
나라 |
스위스 |
스페인 |
네델란드 |
영국 |
노르웨이 |
벨기에 |
덴마크 |
그리스 |
체코 |
오스트리아 |
헝가리 |
독일 |
케냐 |
계 |
나라 |
45 |
편수 |
227 | |||||||||||||||
편수 |
3 |
1 |
1 |
1 |
2 |
1 |
1 |
1 |
1 |
2 |
1 |
4 |
3 |
위의 <표4>는 외국 山수필 227편을 나라 별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45개 나라를 찾아가 대표적인 산을 올랐다. 아무래도 가까운 중국과 일본이 제일 많다. 5대양 6대주를 누볐지만 언어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어에 능통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 수필 속의 유머
“눈에 먼지 들어강께 그냥 있을 라네.”
오래 앉아계시는 것이 무리일 것 같아서 조금 누워 계시라고 권했을 때 하신 말씀이다. 귀천하기 한 달 전쯤의 일이다. 한메 선생의 자택 동두천시 지행동 송내주공 아파트 102동 1403호 한메 선생의 방에서 원고를 건네받을 때였다. 손수 가려 뽑은 수필 작품을 복사하거나 원고지에 다시 쓰셨던 것이다. 작품마다 봉투에 넣어 일련번호와 제명을 쓰시고는 끈으로 가새지게 묶었다.
“누구나 오면 넘겨줄 수 있어.”
이 말씀을 전화로 듣고 김선식-광주고 18회 제자- 수필과와 함께 뵙기도 하고, 원고도 받아오자는 길이었다.
작년에 소요산 골짜기에서부터 말씀하신 책이다. 그때는 소요산역에서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맞아주셨는데, 이번에는 방에 앉아서 “오는가…!”하고는 ‘씨익’ 웃어 보이셨다.
한메 선생은 늘 편안한 분이다. 말이 없이 그냥 앉아 있어도 부담이 없다. 언제 만나도 ‘어이, 잘 있는가?’ 한 마디 뿐이다. 글로 쓰는 것 말고는 당신의 희·로·애·락·애·오·욕은 술자리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씨익 웃는 일이 가장 반기는 인사법이다. 작품에 나타난 유머를 들어 보기로 한다.
“아니 순종.”
이 순종이라는 말에 그 친구 퍽 의아스럽다는 눈치였다.
“아니! 무슨 순종?”
“똥개 순종.” -<똥개 순종>
전망이 하도 좋아서 넋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모르는 사이에 뒤를 따른 J군의 나직한 목소리다.
“여기 계셨군요.”
“참, 내가 여기 있었던가!?” -<내연산 계곡>
이런 유머들은 글 곳곳에 만나게 되어 팍팍한 등산길에서도 혼자 비긋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한메 선생은 뜻밖의 사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며 웃긴다. 산행 중에 동삼(?)을 캐먹은 M씨가 쓰러져 누웠는데도 ‘삼의 효험이 너무 지나쳤던 모양’이라고 여긴다. 천불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굳은 혀가 풀리고 귀도 들린다는 그에게 한마다 한다.
“M씨, 그것은 동삼이 아니라, 더덕이었어요,”
“아니야, 진짜였어.”
그는 지금도, 동삼 덕분에 정력이 넘친다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슬쩍 웃는다. -<아니야 진짜였어>
라. 수필에 나타난 특징
한메 선생은 폭넓은 지식을 녹여내서 쉬운 우리말로 할아버지 얘기하듯 수필을 이어간다. 귀담아 듣지 않으면 그냥 맹물 한 모금 적신 것 같다. 별 맛을 느끼지 못한다. 주스나 맥주나, 양주 맛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그 맹물은 산을 오르다가 만난 석간수 한 잔 마시는 것 같은 그 맛인 것을……. 이 물이 없으면 목말라 죽는다. 한메 선생의 수필은 행간의 숨은 뜻을 곱씹으며 읽었을 때 ‘아, 이것이구나!’하고 혼자 미소를 짓게 한다. 톡 쏘는 맛이 얼른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서 수필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본다.
한메 선생의 초기 수필의 대상은 주로 우리의 예스러운 것과 하잘 것 없는 것들이다. 골무, 물레, 짚신, 쌈지, 울타리, 쓰레기, 지렁이 따위다. 시제[때매김]는 현재형[이제꼴]을 쓴것이 많은 편이다. 그것은 직접적이요, 인상적인 효과도 있지마는 처음부터 하나의 틀로 잡아보았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되도록이면 한자어를 피하여 순수한 우리말을 쓰고자 애쓴다. 물낯·물얼굴[水面], 바위낯, 하늘금[空際線], 드림자락[리본], 옛님네, 구들장논, 땀얼굴……. 수필 속에 시를 함께 쓴 시수필이 많다. 이것은 지루하게 느끼기 쉬운 산문에 어느 정도 변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것이었고, 아울러 여백과 함축 속에 감흥을 일으켜 시적 효과를 꾀하여 보자는 것이라 말한다. 수필적 자아 ‘나’를 쓰지 않는 것도 큰 특징이 아닐 수 없다.
마. 작품 속의 신선 사상
“에델바이스는 어느 구석에 피어 있는지 모르지만, 금시라도 선녀가 저녁 무지개를 타고 생긋 웃으며 내려 올 것만 같다.” - <지다 남은 달>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 자체가 신선 사상과 닿아 있다. 구름을 만나고 안개를 헤치니 바로 신선이 되는 것이다. 신선은 사람과 산마루가 만나는 게 아닌가[仙=人+山]. 한메 선생의 수필은 山수필이 전체 수필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것은 산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증거다. 산을 오르는 일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이 없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는 ‘방골산’을 찾는다. 공직에 있을 때는 주말을 이용했고, 휴일이면 산에 오른다. 추석이거나 설이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만큼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수필집《아득한 길》에 실려 있는 42편은 수필은 한국(10편), 중국(28편), 일본(4편)의 신선에 관한 수필들이다. 한·중·일 삼국의 신선 이야기를 모아놓은 테마 수필집인 셈이다.
“이제까지 전제한 사물 인식의 눈으로 보게 될 때, 그에게 자연물을 소재로 한 수필이 많다는 것은 그에게 그만큼 자연 친화적인 소성이 많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그의 심적 풍향(風向)에서 우리는 그의 원망(願望)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탁(濁)에서 청(淸)으로의 정화(淨化)요, 속(俗)에서 선(仙)으로의 탈속을 의미한다.”
황송문 시인의 송규호론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한메 선생은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할 때 일이다. 그 당시 시세로 집값이 한 1억 정도였다. 한 제자에게 “자네 맘대로 집 좀 팔아 줄랑가.” 하였다. 제자는 한 500을 더 얹어 사랑방 신문에 광고했다. 그만큼 깎아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깎아달라고 하면 한 2,3천 깎아주면 되는가?’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며칠 뒤에 ‘나 집 팔았네, 하시기에 얼마에 팔았느냐, 물으니 7천5백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신선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제일 잘 하신 일은 정년퇴직할 때 퇴직금을 연금으로 처리해 놓은 일이다. 알고 보면 그것도 당시 은행 금리가 15%를 넘었으니 거의 일시금으로 찾아 활용하는 분위기였다. 계산이 싫으니 연금으로 하였지만, 그 연금 때문에 마음 편하게 아껴 쓰며 모았다가 외국도 나가고, 93세까지 천수를 다하신 것이 아닐까.
Ⅲ. 끝맺는 말
수필이 걸어야 할 방향을 늘 수필로 말해 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시격(詩格)을 얻어야 한다고, 또 수필 문장은 정곡을 찔러 할 말만 하고 짧아야 한다고 말이다.
평생 12권의 수필에 525 편의 수필과 2권의 시집에 240 수의 시를 남겼다. 교육 40년, 정년퇴임사에서 ‘산을 오르고 글을 쓰는 데는 정년이 없다’며 퇴임 기념 등산으로 계방산(1,577m)을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은 정년이 있어 93세로 죽음 복도 타고 이승을 떠나셨다.
“한세상 山과 수필과 사랑에 빠진 한메 여기 잠들다.”
한메 선생의 큰 뜻은 어쩔 때는 상식을 뛰어넘어 우리는 깜짝깜짝 놀란다. 대봉산마루에서, 소요산에서, 이제는 백화산 자락에서 씨익 웃는 한메 선생! 보고 싶다.(2013.9.27. 수필문우회 집중토론)
1)전남 담양군 남면 만월리 생오지길 164-1
2)송규호, <책머리에>《산골에 묻힌 이야기》(서울: 교음사, 1980.) P. 2∼3.
3)----, <못 다한 산골 이야기>,《가랑잎 사연》(서울:범우사, 1986.), P. 223.
4)----, <소녀의 탑>,《세월의 뒤안길에서》(서울: 미리내, 2001.), PP. 364~365.
5)----, <에베레스트BC>, 《구름 따라 고개 넘어》(광주: 예원, 2006.), P. 20.
6)----, <히말라야의 맨발 여인>,《세월의 뒤안길에서》(서울: 미리내, 2001.), P. 185.
7)이관희,《형상과 개념》(부천: 도서출판 비유, 2010.), P. 60.
8)송규호, <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삶의 슬기>《수필문학의 이론》(서울: 춘추사, 1991.), P.364-366.
9)황송문, <송규호론-따뜻한 사물 인식의 눈>, 《추억의 그늘에서》(서울: 범우사,1985.),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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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렬 / 작가
수필가, 교육자,
(전)운남중교장
(전)광주고교장,
(전)광주문인협회 회장
(현)생오지 문예창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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