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그림 찾기 (9)
아나돗의 제사장, 예레미야 렘 1:1-10
1. 2020년 새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새로운 시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 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특별히 말씀을 꼭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큐티가 창세기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매일성경이 6년을 주기로 성경을 다 읽도록 구성이 되었는데 올해가 그 첫 해로 다시 창세기부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첫 해입니다. 다시 시작하기, 또는 이제 새로 시작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매일성경을 펼치면 그날 읽고 묵상할 본문의 말씀이 나와 있고, 그 옆에 오늘의 본문에 대한 짧은 해설이 다 나와 있습니다. 짧지만 아주 잘 요약된 일종의 주석이 나와 있습니다.
매일성경의 장점은 옆의 이 주석이 대단히 좋다는 것입니다. 다른 잡소리 일절 없고, 다른 어떤 큐티 책들은 잡소리가 너무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혹시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 아십니까? 일종의 큐티 책을 패러디한 일반 잡지라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매일 한 장씩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있는, 다양한 읽을 거리를 모아서 편집한 책인데, 뭐 여러 책에서 뽑아서 아무튼 좋은 생각들을 모아 놓은 겁니다. 어떤 큐티 책들은 이 ‘좋은 생각’과 다르지 않아서 성경본문을 펼쳐 놓고, 이런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글들을 쭉 모아 놓은, 그런 큐티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성경은 그런 잡소리가 일절 없습니다. 오직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아주 짧고도 핵심적인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짧게는 10분,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분 정도면 충분히 그날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십분 입니다. 하루에 십분도 시간을 안 내면서 우리가 어떻게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읽기만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매일 십 분의 시간을 꼭 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니까, 9절과 10절을 다시 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으면 크게 두 행위가 있습니다. 첫째는,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행위입니다. 우선은 이걸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의 첫째는 바로, 잘 망하는 겁니다. 잘 망하고, 잘 실패해야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미국 미사간주 엔아버에는 실패박물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 박물관을 세운 사람이 40년 동안 모은 약 7만개의 실패한 제품을 모아서 박물관으로 만들 겁니다, 거기에 보면, 크리스탈 펩시콜라, 콜라인데 크리스탈 아주 투명하고 맑은 콜라죠. 실패 했습니다. 또는 뭐 하인즈 케쳡인데 보라색 케쳡, 이것 역시 보라색이면 아이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만들었는데 대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뭐 연기 없는 담배 등 7만 가지가 넘는 실패작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진정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라는 것은 워낙 덩치가 크고 그 규모가 단단해서, 지금 실패의 교훈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 교훈을 적용하고 다시 바르게 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러나 이건 또 종교이기 때문에 사실은 언제라도 다시 시작해서 다시 경쟁하기는 쉽습니다. 그 종교 전체 다를 바꾸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작은 것부터 바꾸고,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는 이미 한국교회는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망했다, 한국교회는 망했다고 언제까지 그렇게 소리나 지르며 살 수는 없습니다. 당장 우리는 그렇다면 다음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또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여기에 답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 성경이 답을 합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둘 테니까 너는 이제 그것들을 뽑고, 너는 그것들을 파괴하고, 너는 그것들을 파멸하고, 너는 그것들을 넘어뜨려라.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잘 망해라는 겁니다. 잘 망해서 아주 깨끗하게 망해서 다시 세울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입에 있으면, 무엇보다 말씀에서 벗어난, 말씀과 다른, 말씀에는 전혀 역행하고 있는 일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걸 뽑아내고 파멸해야 하는 겁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성전중심주의가 그 첫 번째입니다. 이건 완전 유대교도 이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죠. 성전이 무너진 지 2000년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유대교는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종교입니다. 물론 그 말씀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이 아니라 토라, 마쉬나, 탈무드 등을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이후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또한 랍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성전중심의 이상한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고, 성전 건축을 독려하며 땅 사고 집 짓는 것이 마치 교회의 지상과제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땅 사고 집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땅이 보통의 것입니까? 한국에서 땅은 단순하게 그냥 땅이 아니지 않습니까? 땅은 투기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실 한국교회가 부자 교회가 된 것도 다 땅을 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들은 기를 쓰고 땅을 사 모으면서 성전 건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 투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투기를 부추키려고 십일조를 강조하고... 이게 다 성전중심주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너희들의 그 성전중심주의를 집어치워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뽑아야 하고, 파괴하고, 파멸해야 하고, 넘어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건설하고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씨앗을 심는 것은 다 역시 말씀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매일 성경을 폅시다. 하루 십분이라도 말씀 앞에 앉읍시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을 펴야, 우리 안의 잘못된 것들을 뽑아내고, 파멸도 할 수 있고 그리고 새롭게 건설하고 새로운 씨앗도 심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전중심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주일날 와서 이렇게 한번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 각자 흩어지면서부터 진짜가 시작되는 겁니다. 진짜로 한번 말씀 앞에 앉아 보십시오.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도 하십시오. 그래서 생기는 질문들을 다시 갖고 교회에 오셔서 그 질문들을 같이 풀어 놓고 서로 이야기도 하십시오. 그렇게 서로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며, 서로 질문하며 함께 고민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 자, 우리 새해에는 다 같이 말씀을 펴고, 그 말씀으로 함께 고민하고, 그 말씀으로 함께 힘을 얻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자, 오늘은 예레미야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숨은 그림 찾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할 수도 있습니다. 뭐 유명하다면 나름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뭐 눈물의 선지자라고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그뿐이지 않습니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그리고 끝입니다. 그것 말고 우리가 예레미야에 대해서 뭘 알고 있을까요? 사실 그것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던 그 때를 살았던 선지자였고, 그래서 그들과 같이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고, 그래서 뭐 나라 망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던 사람, 뒤이어지는 예레미야애가를 봐서도 알 수 있듯이, 애가가 따로 존재할 만큼,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울었던 사람... 뭐 그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또 이렇게, 짧지만 그 사람에 대한 짧은 배경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예레미야서 52장, 그리고 애가서 5장, 그리고 구약 외경으로 바룩서가 있는데 이 사람 바룩이 바로 예레미야의 제자였고 비서실장이었는데, 그가 남긴 바룩서가 몇 가지나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가장 중요한 역사서인 열왕기상하가 예레미야의 저술로 알려져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선지서들이 사실은 예레미야의 손을 거쳤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포로기에 성경을 수집하고, 성경을 썼던 사람이 대표적으로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라와 예레미야입니다.
사실은 이 두 사람, 에스라와 예레미야가 말씀의 종교로 유대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우리가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에스라와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 야곱, 뭐 다윗, 솔로몬 모두 다 사실은 에스라와 예레미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초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의 대부분은 에스라와 예레미야의 시각을 거쳐서 우리에게 온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겠습니까? 예, 바로 에스라와 예레미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제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보이시는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에스라를 생각하면서 그 주변인물로 야베스와 맛디댜를 생각했던 것이고, 예레미야를 살펴보기 이전에, 지난 시간에 레갑 족속을 먼저 살핀 이유가 다 거기에 있습니다. 야베스와 맛디댜는 에스라와 함께 말씀 사역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었고, 레갑 족속은 예레미야와 함께 서기관 종족으로 역시 말씀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역시 말씀 사역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겠습니까? 구약의 기초는 에스라와 예레미야다. 사실 여기에서 구약에 대한 이해가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 두 사람, 에스라와 예레미야. 하나님은 참 상반된 두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에스라와 예레미야는 비슷하지만 참 많이 다릅니다. 우선 에스라를 좀 봅시다. 1장1절, 드디어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서 5절, 성전을 재건하자는 열망이 생겨나고, 고레스가 성전 물건들도 내어주고 해서(7절)드디어 성전재건을 위한 제1차 바벨론 포로가 돌아옵니다. 2장을 볼까요. 누가 중심인물입니까? 스룹바벨을 중심으로(2절)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6장 15절과 16절을 볼까요. 그리고 성전봉헌식이 끝납니다. 그리고 7장 1절, 이 일후에...이제 에스라가 등판합니다. 이게 제2차 바벨론 포로귀환입니다. 먼저 에스라의 족보를 쭉 설명합니다. 그는 스라야의 아들, 이사랴의 손자, 힐기야의 증손이고, 살룸의 현손이고 사독의 5대손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에스라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란 말 입니다. 그리고 이제 5절을 보면 그는 비느하스의 14대손이고, 엘르아살의 15대 손이며, 아론의 16대손인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에스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만큼 정통적인 대제사장 가문, 사독 집안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한마디로 그 유명한, 사독 집안으로 오리지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으로 6절에 보면, 스스로 모세의 율법에도 익숙한 학자였고, 바벨론 왕과도 친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10절,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였고, 이제는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면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에스라와 함께 한 제2차 바벨론 포로귀환입니다.
3. 한편, 예레미야는 어떤 사람인가? 예레미야 1장 1절을 보면,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인 사람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열왕기상을 좀 봅시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혼란기에 접어듭니다. 솔로몬이 몇째입니까? 다윗의 아들은 총 17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정확하게는 사실 모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가 서로 다릅니다. 아무튼 솔로몬이 첫째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일찍 반란으로 죽은 압살롬이 있고, 그리고 유력한 자가 다윗이 학깃에게서 나은 아도니야 입니다. 1장 5-6절입니다. 그리고 7절과 8절입니다. 이렇게 아도니야 편에 국방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서고, 솔로몬 편에는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다윗의 용사들이 섭니다. 이렇게 두 제사장 가문이 각각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 편에, 제사장 사독은 솔로몬 편으로 서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2장 25절, 그리고 26, 27절. 제사장 아비아달은 죽음은 면했으나 아나돗에 유배되었고, 그 제사장 직분은 파면을 당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사람들이 바로 아나돗의 제사장이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면 당하고 유배를 당한 제사장들인 것이었습니다.반면에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제사장권은 그 이후 사독 가문에게로 넘어가서 쭉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쭉 사독 가문이 이스라엘의 제사장 가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그들이 또한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지요. 무슨 말이냐면 아나돗의 제사장들은 포로로 잡아가지도 안 했다는 겁니다. 실지로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400년이 흘렀습니다. 제사장 아닌 제사장으로 살아온 시간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제사장,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다시 1장 4절과 5절을 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말씀은, 내가 너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안다 예레미야야. 하나님, 저를 아십니까? 저는 아나돗의 제사장인데, 하나님 저를 아십니까? 그래서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말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입니다. 하나님, 저를 아신다고요? 저는 아나돗의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입니다. 여기 아이로 번역된 단어 ‘나아르’는 아직 공직에 나갈 준비가 안 된, 어린 나이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직 서른도 안됐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유대사회에서 레위인이나 선지나자 랍비나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서른은 돼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아직 나이 서른도 안 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린 아이였고, 무엇보다 그는 아나돗의 제사장이었습니다.
4. 그리고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제 유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니 누가 그 메시지를 좋아하겠습니까?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까? 그 메시지의 내용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예레미야는 최악의 상황에서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고, 이제 그는 엄청난 고난과 고독을, 사실상의 고립을 견뎌야 했습니다. 먼저 그는 아나돗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살해 위협을 아주 많이 당했습니다. 11장 21-23절, 18장 18절. 가뜩이나 아나돗 사람들은 사는 게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발 조용히, 말썽부리지 말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습니다. 12장 5절과 6절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성전 제사장들이 예레미야를 가만히 뒀겠습니까? 20장 1-2절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7-9절입니다. 주께서 나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내가 종일토록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나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겠다. 내가 다시는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다짐을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마음에 불 붙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골수에 사무쳐서 내가 견딜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뿐 입니까? 38장을 보면, 다시 또 구덩이에 갇히고(6절), (28절)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날까지 예레미야는 감옥 뜰에 갇혔습니다. 심지어 볼까요? 예레미야가 얼마나 괴로웠던지, 20장 14-18절을 봅시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독한 고난과 절망은 예레미야서 곳곳에서 그가 부르짖고 있는 부르짖음이 되고 그가 울고 있는 그의 울음이 됩니다.
25장을 볼까요. 3절부터 보면, 요시야 왕 13년째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지금까지 2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꾸준히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꾸준히, 끊임없이 그는 계속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23년째 이지요. 그는 평생 약 60년을 사역을 하는데, 60년간 사역을 했지만 사실상 그에게 사역의, 소위 말하는 열매라고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사실상 절망이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볼까요? 1장 7-10절을 다시 봅시다. 분명히 말씀하시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그러나 그야말로 함께 하시고, 그야말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딱 그대로만 지키셨습니다.
한마디로 예레미야의 삶은 끔찍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삶에서는 그 흔한 기적 같은 거 하나도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뭐 엘리야나 엘리사 같으면 얼마나 않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도무지 기적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았고, 가두는 대로 갇혔으며, 늘 끌려 다니며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삶은, 거절 받은 하나님의 사람,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표징, 그런 것 없습니다. 표적, 뭐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당시의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러니까 권력자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레미야의 편이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었을까? 도대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의 결과가 이토록 처참한 삶으로 마무리 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런 예레미야에 의해 구약성경의 절반 정도가 쓰여 지고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레미야가 왜 레갑 족속을 찾아갔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만큼 레갑 족속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성전이 망하고 있는 그 시대,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대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간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이제 이 민족 이스라엘이 망하고, 하나님 이제 이 성전이 다 무너질 텐데...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레미야가 찾은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예, 바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그래서 우리가 포로로 끌려간다고 할지라도, 예루살렘 성전, 저 거대한 이 우주가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의 주인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여전히 거기 계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영원토록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예레미야는 보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듣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레갑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 바룩과 더불어,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말씀을 모으고, 말씀을 쓰면서 이제 예레미야는 새롭게 시작 될 말씀의 시대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 열왕기상하, 바룩서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 아나돗 사람들입니다. 이 성전중심주의에서 쫓겨난 사람들,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전중심주의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이 성전은 곧 망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나 진짜로 그렇게 믿으십니까? 진짜로 그렇게 믿는다면 그 증거가 있어야지요. 그 증거는 바로 말씀에 얼마나 충성되고 말씀에 얼마나 헌신되어 있는가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일에 교회 오는, 여전한 성전중심주의 증거 말고, 우리가 흩어졌을 때 얼마나 말씀에 헌신되어 있느냐 하는 바로 그 증거 말입니다. 그 증거가 있어야 우리도 아나돗 사람의 자격이 있는 겁니다. 그 증거가 있어야 우리도 예레미야의 후예로서 자격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여전히 성전중심주의적 사고와 행동의 습관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교회에 막 불러 모아서 무언가를 거의 날마다 뭐를 해야 하고, 막 달달하고 다그치면서 또 성전의 무엇을 세워 나가고... 이래야 신앙생활 하는 것 같고, 십일조에, 건축헌금에, 각종 절기헌금과 감사헌금에... 매일 뭘 갖다 바쳐야 140,000으로 인정될 것 같고... 소위 말하는 수도에 살 것 같고... 뭐 그렇겠지요. 아직도 그렇습니까? 이젠 당연히 아니겠지요.
이제 우리도 3년차를 지나고 있습니다. 서당 개도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이제는 우리도 라면 정도는 끓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그 성전중심주의를 이제는 벗어납시다. 제가 분명히 말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교회라는 성전은 이미 망했고, 지금 망하고 있습니다. 망하는 것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잘 망하게 하는 것 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제발 우리 길을 갑시다. 아나돗의 제사장이 걸었던 길, 예레미야가 갔던 길, 에스라가 갔던 길... 그 새로운 길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교회는 망했지만 하나님이 망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성경말씀이 있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선 오늘도 매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겐 그래서 다시 레갑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고, 다시 예레미야의 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 예레미야의 길, 분명히 쉬운 길은 아니며, 고난과 고독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갑시다. 도저히 혼자서는 너무 외로워서,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갑시다. 우리 함께 예레미야의 뒤를 따라가는, 고독한 공동체 그러나 다함께 기쁨으로 걸어가는, 진리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이 새해 첫 주일에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