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안명옥(安命玉, 1797-1849)이 쓴 탐진안씨 족보 서문은 족보 간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쓴 것으로 보이나, 실제 족보로는 간행되지 못하고,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족보 서문과 함께 《탐진세고(耽津世稿)》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려 간행된 것같다. 이 서문은 1849년 이전에 쓰인 것이 분명하므로, 탐진안씨가 순흥분파라는 말이 나오는 가장 초기의 문헌으로 보인다. 안원린(安元璘)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탐진군(眈津君)으로만 칭했다. 탐진세고(耽津世稿) : 국립중앙도서관 탐진세고(耽津世稿) : 한국국학진흥원 탐진세고(耽津世稿)는 간행연도가 불명이나 서문, 발문 등의 글로 보아 1800년대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본격적으로 순흥분파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권1에 나오는 세계도(世系圖)에는 순흥안씨로 부터 탐진안씨가 분파하는 계보가 자세히 실려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에는 이만각(李晩慤, 1815-1874)의 탐진세고 발문까지만 있고, 그 뒤에 나오는 안명옥(安命玉, 1797-1849)과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족보 서문은 누락되어 있다.
안명옥과 이원조의 족보 서문은 이후 강진안씨세보(康津安氏世譜) 계미보(癸未譜, 1883)에 서문으로 실렸다. 아마도 이때문에 이후 인출된 탐진세고(耽津世稿)에서는 제외된 것같다. 족보의 서문은 책의 성격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탐진안씨 세보(耽津安氏 世譜) 서문 - 안명옥(安命玉)
이목은(李牧隱)이 근재(謹齋, 安軸)의 세 아들이 과거에 오름을 축하하는 시서(詩序)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근재(安軸) 선생의 아드님으로 지금 밀직(密直)으로 있는 분(安宗源)은 나와 동년진사(同年進士)이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先親, 安軸)께서는 3형제가 과거로 출세하여 재상(宰相)의 지위를 이루었으며, 내 아들도 세 사람이 모두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였고, 문성공(文成公, 안향)의 손자인 정당공(政堂公)도 세 아들을 두었는데, 또한 모두 과거에 올랐다.’ 하였다.” 위의 정당공은 바로 겸재공(謙齋公, 안목)이니, 겸재공이 세 아들을 두심은 위와 같이 명백한데도 다만 순성군(順城君, 안원숭) 한 분만이 족보에 보이고 있는 것은 자손들이 흩어져있어서 보첩을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선군자(先親, 安在默)께서는 일찍이 회헌선조(晦軒先祖, 안향)의 연보(年譜) 한 편과 시문(詩文) 및 제현(諸賢)들이 기술한 것을 뽑아서 합하여 《실기(實記)》 한 권을 만드셨는데, 주자(朱子)의 연보에 세계(世系)를 겸하여 붙인 예를 따라 세계를 기록하였다. 이때 보성(寶城)의 종인(宗人)인 모모(某某)씨가 죽성(竹城)의 세보(世譜) 한 책을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그 책에는 ‘별장공(別將公, 安子美)을 시조(始祖)로 하였고, 겸재공(안목)의 아드님인 순성군(안원숭)을 장자로 하였으며, 죽성군(안원형)을 차자(次子)로 하였다. 죽성군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시호(諡號)가 문혜공(文惠公)이었는데, 국가에 공로가 있어 죽성군으로 옮겨 봉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손들이 죽성군을 처음 봉함을 받아 옮긴 시조로 삼고 족보를 따로 했다.’하였다. 그렇다면 순흥안씨의 족보에 함께 기록하지 않음은 진실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제 초계(草溪)의 종인(宗人)인 석기(碩璣)와 사흡(思翕)씨가 또 그 집안의 세계 한 책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그 책에는 ‘순성군(順城君, 안원숭) 죽성군(竹城君, 안원형) 탐진군(眈津君)을 같은 형제로 하고, 탐진군은 공로로써 탐진군으로 옮겨 봉해졌으므로 그 자손들이 옛 족보에 기재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목은(牧隱)의 시서(詩序)에 말씀한 ‘정당공의 세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는 말씀은 여합부절(如合符節)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세대가 점점 멀어짐에 보첩을 구비하지 못하여 자손들이 각기 관향을 달리하여 순흥안씨와 함께 족보를 하지 못함이 애석하다.
석기 · 사흡 두 종인은 탐진군 이상은 관향이 순흥임을 자세히 기록하여 선계(先系)가 나온 바를 분명히 하고는, 나에게 한 말을 써서 책머리에 기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이에 선군자(先君子)께서 일찍이 죽성군 자손의 파보에 서문을 쓰신 예를 따라, 대략 그 전말을 써서 다음 날에 고증하고 신빙하는 자료로 삼게 하는 바이다.
순성군(안원숭)의 후손 진사(進士) 명옥(命玉)은 삼가 서(序)하다.
耽津安氏世譜序 謹按李牧隱賀謹齋三子登科詩序有曰謹齋先生之嗣今密直公穡同年進士也甞曰吾先君三昆季由科第顯致位宰相吾子三人皆僥倖末第族祖文成公之孫政堂公有三子皆亦登第云政堂公卽謙齋公也謙齋公之有三子若是其明白昭然而只有順城君一人見於譜者由子孫散在 譜牒未裒也先君子甞撰輯晦軒先祖年譜一編及詩文諸賢記述合爲實記一編遂依朱子年譜兼附世系之例載錄世系之時寶城宗人某某甫來示竹城世譜一册其書以別將公爲初祖而謙齋公子行順城君爲長竹城君爲次官門下侍中諡文惠有功移封竹城君其子孫因以竹城爲始封移籍之祖而別其譜則順興之譜未之同錄者固無足恠也今者草溪宗人碩璣思翕甫又來示其家世系一本其本以順城竹城耽津爲兄弟而以功移封耽津君故其子孫不載於舊譜云則牧隱詩序所云政堂公三子登科若合符契惜乎世代逾遠譜牒未備其子孫各爲異貫不與同譜於順興也碩璣思翕兩宗人備書耽津君以上貫順興以明先系之所自出要不佞一言以弁其卷首辭不獲謹依先君子序竹城子孫派譜例略書其顛末以爲後日考信之資云耳
順城君後孫進士 命玉 謹序
[주석] * 제목의 잘못 해석: 하근재삼자등과시서(賀謹齋三子登科詩序) : 이는 잘못된 말이고, 실제로는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이 아닌 그의 아들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의 세아들 등과를 축하하는 시의 서문이다. 원제목은 '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 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임. 안응창(安應昌, 1603~1680)도 순흥안씨 기해보(已亥譜, 1659년)의 안원숭(安元崇) 기록에서 똑같은 서문의 제목 실수를 범했다.
*제목의 죽계란씨는 죽계안씨 그대로입니다, 근재로 자의로 고치면 안됩니다. 죽계안씨는 순흥안씨가 시작되기 전의 명칭으로 죽계는 풍기의 옛 지명이며 죽계천이 남아있다. 여기서 죽계는 안축의 호가 아니고 순흥안씨 이전의 본관(지역)을 지칭합니다. 죽계안씨 삼자등과에 나오는 인물은 안종원의 아버지 3형제 (안축, 안보, 안집), 안종원의 아들 3형제 (안경온, 안경량, 안경공), 안원숭의 3형제 (안원(초명 안정), 안조동, 안수)이다. 안종원 아들의 급제년은 안경온(1362년), 안경량(1374년), 안경공(1376년), 안원숭 아들의 급제년은 안원(1374년), 안조동(1376년), 안수(374년)이다. 안종원의 아들 뿐만 아니라 안원숭의 아들도 1376년에 모두 급제히여, 안종원의 아들 경량과 경공이 목은 이색을 찾아가 축하시를 부탁하였다. 축하시 중에 안종원의 아들 3형제가 급제하였고, 문성공의 자손인 정당공의 세 아들이 있는데 또 급제하였다고 쓰여있다. 시간 배열상으로 정당공은 이색과 함께 현직에 있는 안원숭이고 그 아들 3인이 1374년과 1376년에 동시에 급제한 것이다. 목은이 그당대의 3형제 급제자 명단을 전부 조사하라고 하였고 '하죽계안씨삼자시서'에 급제자 명단이 21개 집안과 이름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그런데 1341년에 동시에 급제했다는 안원숭, 안원형, 안원린은 이 명단에 없다. 이색과 안원숭은 동시대 사람인데 모를리가 없다. 안원숭, 안원형, 안원린 3인 동시 급제는 없습니다.
*탐진세고의 해석은 그 시의 내용을 전부 해석하지 하여 보여주지 않고 자의로 해석한 결과이다. 족사를 만드는 분들이 여러 분이 같이 공부했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인데 후에 수 많은 논란을 야기시켜 아쉽다. 순흥안씨 족보에 안원숭은 외아들이고, 1363년 당대에 이새이 지은 '김태현처 개성왕씨 묘지명'에도 안원숭은 외아들이다. 1358년 김태현 묘지명에도 안목의 손자 3인이 과거에 급제했다고 나온다. 안목의 아들 3인이 동시에 1341년에 동시에 급제했다면 빼 먹었을 수가 없다. 원숭, 원형, 원린 3인 동시 급제는 없고 안원숭은 외아들입니다.
*안원형은 실존인물입니다. 죽성군을 봉군 받았으면 관향이 죽주나 죽산일텐데 왜 순흥이 되는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증손자의 안복초 묘지명과 이승소의 삼탄집 문고에서 광산군 봉군을 받았고 죽산안씨 후예라고 기록되어 죽산안씨로 돌아 갔습니다. 그러면 원숭, 원형, 원린 3형제론은 붕괴됩니다. 물론 3형제 동시 급제도없습니다. 그리고 안원숭은 외아들입니다.
*안원린은 누구인가? 안원린은 탐진안씨 헌납공파에서 첫 족보에의 서문에 탐진군이 언급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탐진군이 누구인가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엣기록에 안원륜이란 이름과 안덕린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에 맞추어 안원린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원린은 고려사 등 그 어디에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탐진군은 누구인가요? 오성군 안우의 오성이 탐진이고 오성군이 탐진군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본관 중에는 출신지역을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세종조의 예문관 대재학 안지도 본관이 탐진인데 출신지가 탐진이라 1414년 문과 급제시에 그렇게 적었을 것입니다.
* 恠 : 怪의 이체자
: 佞의 이체자
* 원문보기 : 순흥안씨일파죽산탐진족보(順興安氏一派竹山耽津族譜) 총록 역대 순흥보 서문 (맨뒤의 서문) : 일본 동경대학 : 탐진안씨족보 서문 - 안명옥 (순흥안씨참판공파족보 順興安氏參判公派族譜, 1980) : 로그인 후 열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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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옥(安命玉, 1797-1849)은 순흥1파 갑신보( 1824년)와 경인보(1830년) 간행을 주관하고, 《회헌실기(晦軒實記)》 편찬에도 간여한 안재묵(安在默, 1767~?)의 아들이며, 안종약(安從約) - 경(璟) - 인후(仁厚) - 성(珹) - 순좌(舜佐) - 기(玘)의 후손이다.
순흥안씨 찬성공파 인터넷 족보 검색에서 찾을 수 있다.
晦軒先生實記 : (幷)竹溪誌 / 安克權 編; 安在默 增補 1884 文成公實紀. 1-2 / 安在默 編 1895
------------------------------------- 탐진세고(耽津世稿)의 족보 서문
국립중앙도서관이나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탐진세고(耽津世稿)에는 맨 뒷부분에 있어야할 족보 서문이 없다. 아래 경매 사이트에 올라있는 탐진세고 이미지에 족보 서문의 일부가 보인다.
고목판본 안사룡(安思龍)안후곤(安厚坤) 탐진세고(耽津世稿) 磊谷逸稿 권3,4終 1책 > 고서적 : 옛날물건 (판매 사이트) https://www.yetnal.co.kr/shop/item.php?it_id=1689169622
책의 맨 뒤 이만각(李晩慤, 1815-1874)의 탐진세고 발문 뒤에 안명옥(安命玉, 1797-1849)의 탐진 족보 서문 앞부분과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족보 서문 뒷부분 일부가 있음. 왼편이 안명옥의 탐진 족보 서문 앞부분. 이만각(李晩慤, 1815-1874)의 탐진세고 발문 뒤에 실려 있다. 오른편이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족보 서문 뒷부분 -------------------------------------
아래는 순흥안씨일파죽산탐진족보(順興安氏一派竹山耽津族譜, 1980년, 경신보庚申譜)에 실린 안명옥(安命玉)의 탐진안씨 족보 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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