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실학자의 대표격 인물이다.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현재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 자는 미용(美庸) · 송보(頌甫), 초자는 귀농(歸農), 호는 다산 (茶山) · 삼미(三眉) · 여유당(與猶堂) · 사암(俟菴) · 자하도인(紫霞道人) · 탁옹(籜翁) · 태수(苔叟) · 문암일인(門巖逸人) · 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 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기에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개혁안을 정리해 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저술을 통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했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됐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됐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둘째부인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국문학사를 공부할 때 꼭 나오는 문인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손녀이다.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양반이며 이전까지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집안은 당시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부친의 관리 생활을 보고 자람으로써 백성 중에 사회적 약자들인 궁민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다. 외가의 학문과 친가의 실천이 다산의 이론과 실천에 도움을 준 것이다.
□ 생애
어릴 적 정약용은 매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일화로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큼직하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또래들이 마치 눈썹같다고 그를 삼미, 말 그대로 눈썹이 3개라고 놀리듯이 불렀는데 화내지도 않고 "어 그러냐? 그래"라고 대했다고 한다. 아예 스스로를 삼미(三眉)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는 통에 놀리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3등 7위로 입격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익의 성호학파 중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서파에 속한다. 이는 당시 남인들의 복잡한 혼맥도와도 연결된다. 이익의 종손이 이가환이다. 이가환의 외조카가 이승훈, 이가환 누이 아들이 이벽이다. 이벽이 정약용 누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성균관 유생 시절 때 성균관 우수학생들을 모아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정조는 정약용을 처음 보았다. 이후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정조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았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툭하면 1등을 먹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지는 것이다.
정약용의 대과 불합격이 남인인 그를 견제한 노론의 입김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음모론이 있다. 하필 남인 영수인 채제공이 주재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사실이 음모론의 주된 근거가 된다. 음모론에 대응하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사암연보의 기록을 토대로 남인 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될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는 주장을 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의 반응을 보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당시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였던 최태성도 이 주장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 2위(아원)로 급제하고 등용됐지만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받고 해미에 유배된지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조가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하자 거중기와 녹로(轆轤 현재 굴착기와 유사한 발명품)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했다.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파직됐는데도 화려하게 부활해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데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은 것을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다. 훗날 정조실록을 편찬하는 편찬 위원까지 참여한 것이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다.
이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현재 경북 포항시 장기면)에 유배됐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됐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강진이 외가 지역인데다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었다.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었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게 지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노론에서 악연인 서용보와 친했지만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어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정약용을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가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으며 현재도 시중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1818년 8월에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다름 아닌 60주년 결혼 기념일(회혼일)이었다. 정약용이 죽은 2년 후 15세에 약혼을 맺었던 부인 홍씨도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1910년 8월 20일 조정에서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와 소울메이트로 알려졌다. 젋은 시절부터 술자리와 개인적인 자리까지 항상 불렀다고 한다. 정조 사후 박해를 받지만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달라진다. 헌종은 안동 김씨를 밟으며 개혁을 추진하던 개혁 군주였고 김정희, 조병헌 등 유배를 갔던 개혁적 성향의 선비를 데려와 개혁을 추진했다. 일설에 정약용이 죽은 줄 모르고 벼슬을 다시 제수하려 했으나 죽은 것을 알고 슬퍼했다는 야사가 전해온다.
□ 정약용 생애 네 단계 정리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정약용은 16세인 1776년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도 이익의 유서를 배우게 됐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정약용 자신이 훗날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된 단초가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 연구했다. 1789년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면서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화성(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벽(李檗) ·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신자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면서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할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했다. 1801년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 정계와 결별하게 됐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는 1818년까지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로 유배됐다가 곧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했다.
또한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면서 개혁안을 정리했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經世遺表) · 흠흠신서(欽欽新書) ·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일표이서(一表二書)를 통해 제시됐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는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대부분이 유배기에 작성한 것이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했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 · 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당시 만들어졌다.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했다. 조선학 운동의 목적에서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1938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도 있다.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지만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西學)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