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 석탑 기행
정정길
청양에 현존하는 석탑은 모두 다섯인데 모두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몇 기의 석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우선 현재 남아 있는 석탑만이라도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다른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널리 알려서 이것의 역사적 가치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청양에 남은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서정리에 있는 9층 탑이다. 9층이라고 하니까 그 규모가 제법 클 것으로 여겨지나 생각보다는 자그마하고 아담한 맛이 있는 석탑이다.
층 하나의 크기가 경주 감은사지 석탑을 닮았더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하고 장엄한 석탑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화순 운주사 초입에 선 9층 탑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고 낮아서 볼품이 떨어지나 탑신에 비해 옥개석이 좁고 작으므로 추녀가 몹시 짧은 초가처럼 보이면서 아담한 맛이 난다.
석탑을 빙 돌아 낮은 철책이 돌려져 있고 잔디가 잘 다듬어져 있으며 도로변에 표지판도 세워져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도록 잘 배려되어 있었다.
다만 잔디밭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 탑돌이를 했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답사자의 발길을 무겁게 했다.
이처럼 문화재 표시나 안내가 잘 되어 있는 곳은 청양 석탑 다섯 중 유일한 사례로, 전북 부안과 전남 보성에 있는 석탑을 답사할 때가 떠올랐다.
이 무렵은 답사 초기였으므로 경험이 없고 지리에도 눈이 어두워 헛걸음질이 무던하게 많았는데 도로변에는 어김없이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서 별 고생 없이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재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아쉬운 것은 비지정 문화재를 따돌린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으나 중요한 보물급 문화재를 안내하는 표시커녕 그대로 방치한 곳이 더 많아 그나만 위안이 되었다.
서정리 석탑은 도로변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그 길을 지나치면서 눈에 쉽게 보여 다행스러웠으나 도림사지를 찾을 때에는, 지난날 숱하게 겪었던 고행이 새삼스럽게 되풀이 되는 것 같았다.
도림사지에 있다는 3층 석탑을 찾아 나선 것은 초가을 뙤약볕이 한창 기세를 올리는 한낮이었다.
이 석탑은 그 위치가 답사자에게 무지하게 심한 고행을 강요하고 있었다.
우선 석탑이 선 지역 자체를 외지인은 얼른 찾기 어렵고 안내하는 어떤 표시도 없어서 얼른 찾아갈 엄두를 내기 어렵다.
굳은 의지와 대단한 각오가 아니면 답사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궁극적인 도에 이르기 위해서 자초한 고행을 감내하는 구도의 길을 선택하듯 매우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9층 석탑이 있는 서정리에서 부여로 길을 잡아야 하고 미당에서 다시 은산 방향으로 돌렸다가 적곡리에서 다시 샛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서 길을 물을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무턱대고 남의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 중년 부인과 그 시어머니인 듯한 노파를 겨우 만나서 길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도로 공사를 하는지 바윗덩어리가 길을 막고, 엊그제 할퀴고 간 태풍이 데리고 온 폭우가 만들었는지 도로에는 물구덩이와 수렁이 널려 있었다.
간혹 지나치는 차라도 만나게 되면 비켜서는 양보 없이는 길은 막히게 마련되어 있었다.
묻고 또 물어 겨우 들어선 곳은 이름 모를 깊은 산골로 맑디맑은 물이 지천으로 흐르는 계곡 초입이었다.
등산객 출입이 잦은 듯 비포장 주차장은 널찍하나 너무 조용했다.
첩첩으로 둘러 선 산의 어디에 도림사지가 있고 어느 골짜기에 석탑은 서 있을까. 다만 막막할 따름인데 인기척이 났다.
지프가 하나 주차장에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생겼을 것이다.
그에게 도림사지를 물었더니 셋으로 갈려진 왼쪽 산골짜기를 손으로 가리키는데 도무지 난감할 뿐이다.
원시림 같은 숲속의 어디에서 석탑을 찾아야 할 것인지, 모래밭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놀이 같았다.
내심으론 안내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묻고 또 물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중간까지만 안내하겠단다.
이 정도만이라도 감지덕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업으로 버섯을 따는 농민이라고 했다.
청양을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모두들 친절하고 마음씨가 넉넉하면서 부드럽다는 것이었는데 이 중년 역시 매우 친절하고 자상해서 가까운 이웃을 만난 듯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50m는 넘고 100m는 못되는 거리라고 했다.
안심하고 들어선 등산로는 생각보다 거칠고 험했다. 가파르기로 하면, 지리산 법계사를 찾아가기 위해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것 같았고, 날씨가 사람을 괴롭히기로는 어느 8월 하순 경주 남산에서 천룡사지를 찾아 제대로 마련된 등산로가 아닌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오르던 산길과 같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천왕봉을 오를 때도, 남산을 오를 때도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높다는 정오에서 조금 기운 때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물이 깨끗하고 넉넉하다는 것이다.
법계사와 천룡사를 찾아 산에 올라갔을 때에는 입에 넣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맨손이었다.
목이 마를 대로 말랐지만 입술을 적실 것이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경주 남산을 오를 때에는 가뭄이 들어 논밭이 타들어 가던 때인지라 골짜기에 물기조차 없어 바짝 말랐었다.
경주 남산 계곡 어귀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 물 한 모금 적선을 부탁했으나 어찌나 완강하고 쌀쌀하게 거절하던지 기가 팍 죽어 침으로 입술을 적셔야 했었다.
버섯 따는 농민의 말마따나 50m는 넘고 500m가 넘었고 20분은 두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이 계곡도 ‘루사’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이 스쳐간 듯 아름드리 잡목이 드러누워 길을 막는 바람에 길은 더 험했다.
산딸기와 복분자의 날카로운 가시와, 칡덩굴을 비롯한 이름 모를 잡초 덩굴들이 엉켜 허리를 붙잡는 바람에 길은 더디었고 고통은 심했다.
고갯마루에 닿을락말락할 무렵 계곡 오른편에 대밭이 무성하고 거기 도림사지라는 안내판이 문득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 위쪽에 그토록 찾던 3층이 아담하게 앉아 하연 몸체를 보였다.
태풍과 폭우가 산천을 쥐어뜯은 뒤끝인지라 여기까지 손닿을 틈이 없었던 듯 표지판 앞은 대나무가 차지했고, 잡초가 무성해 보호 철책으로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심히 망설여졌다.
아까 버섯 따는 농민이 주의하라는 뜻으로 해 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뱀은 나무를 타지 않는다고 합디다만 이 산에서 사는 뱀은 유별나서 나뭇가지를 친친 감고 혀를 날름거린다..”
뱀이라면 질색인데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떻게 얼른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그다지 크지는 않으나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에 상처가 없고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석탑으로 요모조모 훑어보고 내려오는 길에서 북강 3층 석탑을 찾던 때가 떠올랐다.
그것은 5월 하순으로 더위가 지금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안내하는 어떤 표시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도 만날 수 없어 무턱대고 오르다가 암자에 들어가 물었더니, 몹시 귀찮다는 듯 턱으로 뒷산을 가리킬 뿐이었다.
암자 주인의 말대로라면 벌써 석탑을 만났어야 할 즈음인데 정상에 다 오르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나절을 모르고 헛걸음질만 한 것으로 여긴 뒤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내려오는 길인데 오른쪽 산등성이로 석탑의 맨 위층 꼭대기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기쁘던지 쌓인 피로를 ‘야호’하는 한 마디로 풀고 그 석탑을 빙빙 돌면서 겅중겅중 뛰었던 적이 있었다.
새벽에 나선 길로 공원으로 지정한 산줄기를 더듬어 겨우 석탑 하나를 찾은 성과로 만족하고 하루를 보냈지만 시간이 아깝다거나 아쉬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었다.
문화재 관리에 유난히 인색한 지방자치단체들의 메마른 정서는 어제오늘에 만들어진 못된 버릇이 아니므로 굳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전문가적 소양이 없는 지금의 상황을, 제도적 허점으로 탓을 돌리고 마는 것이 옳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청양 읍내 3층 석탑을 찾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재 담당자가 모른다면서, 청사 안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에게 목청껏 소리를 높여 묻는 것이 아닌가.
발품을 팔아 찾았더니 그 석탑은 그 사무소 건물의 바로 뒤에 있었는데도
…….
석탑 답사 초기, 화순 동복∙ 담양 무정 ∙곡성 오산을 찾을 때, 그리고 청양을 찾기 전날 서천 한산을 찾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 있었다.
청양 읍내리 3층 석탑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우산성 체육공원 안에 있는 봉안사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청양을 벗어나 부여로 향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은 영암 군청과 나란히 붙은 부속 건물에서도 가진 적이 있었다.
관내에 있는 역사적 자료를 모아 둔 시설이라면서 자랑이 대단하기에 안내를 맡은 이에게, 사진으로 큼직하게 찍어 걸어 둔 국가기정문화재인 석탑의 위치와 주소를 물었더니 모른다고 해서 가졌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돈을 얼마나 벌려고 석탑 사진을 찍느냐고 턱을 추켜들고 고리눈을 뜨던 어느 지방의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그래도 이 땅의 인심이 아직은 따뜻하고 외지인에게 친절하며 간혹 유물에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석탑 답사를 계속해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굳어지면서 용기를 가질 있어 다행이다. (01.10.)
첫댓글 경주 남산 계곡 어귀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 물 한 모금 적선을 부탁했으나
어찌나 완강하고 쌀쌀하게 거절하던지 기가 팍 죽어 침으로 입술을 적셔야 했었다
암자 스님이 왜 그렇게 쌀쌀 했을까요...?
참으로 고얀 분이십니다 ㅎㅎ
날씨도 무덥고 먹을 것도 넉넉지 않으셨을텐데 정말 어떤 사명감이 아니시라면 누가 그 길을 오를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격려와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머지않아 경주 석탑 2차 답사를 나가서 다시 천룡사 석탑을 갈 작정인데 이번에는 그 암자 부근을 피해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들러볼 것인가가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