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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가사지 |
엘레지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울분과 저항이 감추어진 노래로서 당싱 22세인 손목인의작곡으로 19세의 이난영이 노래하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목포의 눈물 1절>
호남 곡창에서 나온 기름진 쌀과 풍요로운 목화는 목포항구에서 일본으로 실려가고 부모 남편 형제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 항구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만 하였다. 일제시대의 항구는 눈물의 장소이며 눈물은 곧 항구였다.
삼백년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닲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2절>
한때는 일본경찰이 작가를 연행하여서 가사 내용이 불온한 냄새가 있다며 추궁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삼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게된 저간의 사정 속에서 삼백년 원한을 삼백년 원안풍으로 말꼬리를 돌리고, 님자취는 이순신장군의 넋과 정신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으며 유달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가르키는 것이 작사가의 숨은 의도임을 이 노래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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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노적봉'의 모습 |
노적봉은 유달산 입구에 있는 해발 60m 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의 전략으로 봉우리에 짚가리를 덮어서 왜군이 보기에는 산더미같은 군량미로 오인하여 후퇴하게 된 사정이 있다. 영산강에는 횟가루를 방류하여 마치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수많은 군사들이 주둔한 줄 안 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고 전하여 진다.
작사를 한 문일석은 본명이 윤재희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청년이었으며, OK레코드에서 현상모집한 "향토찬가 현상모집"에 '목포의 노래'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어 이것이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문일석은 26세에 요절하였다고 하는데 목포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1972년 사망)의 1남 2녀중 장남이라는 것이 목포의 연로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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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박향림 |
태양극장의 막간가수 출신인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이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하여 어머니는 극장주인 일본사람의 집에 일하러 제주도로 가고 없었다. 어머니가 그립기도 한 이난영은 목포 공립 보통학교(현 목포 북교 초등학교) 4학년때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게 되었다.
당시 극장에는 태양극장의 연극공연이 있었는데 노래에 소질이 있는 이난영을 극장주인 일본사람이 소개하여 태양극장에 입단을 하였다. 태양극장은 1923년 박승희등이 설립한 토월회의 후신으로 토월회가 경영난으로 해산한 후 박승희 단독으로 1932년에 설립한 흥행위주의 연극단체였다.
태양극장의 연기인들은 토월회의 연기자들을 대부분 흡수하였는데 강석연, 양백명(탈렌트 양택조의 부친), 이동호, 석금성, 강석재등 당시 일류 배우들이 많았다.
이난영이란 이름은 태양극장의 박승희가 지어준것으로 1933년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에서 처음으로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아리랑' '도라지타령'을 난영이란 예명으로 노래하였다.
"일본 교포의 초청으로 대판에 가서 '춘향전' 음반 12매로 취입할 때에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하여 ---"<사상계 1963.8 박승희 회고'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한 곡은 '지나간 옛꿈', '시드는 청춘'으로 1933년 8월에 태평레코드의 취입광고로 나와있다.
"16세때 세상물정을 아나요 대판에서 혼자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하며 --- 어느 흥행사에게 사기도 당했어요. 그때 OK레코드 사장 이철이 레코드 기획일로 대판에 왔어요.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나를 추천했어요"
<모던일본(마해송 주관):1940. 3 좌담회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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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사 스튜디오 모습 |
태양극장에서 배우들의 잔심부름과 빨래를 해주며 고생하던 16세의 소녀 이난영은 이철에 의해 OK레코드 전속가수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OK레코드의 데뷔곡으로 1933년 9월 '향수', 10월에는 '고적', 그리고 '불사조'가 11월 신보 명칭으로 광고가 나오면서 (10월 20일부터 발매) 인기를 끌어 가수 이난영이 알려지게 되었다. 1934년 동요작가 윤석중의 가사로 된 '봄맞이'가 계속 힛트하고 1935년 8월에년 대표곡 '목포의 눈물'이 대힛트하여 고복수와 함께 OK레코드의 간판스타가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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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
고복수가 '갈매기의 항구'를 취입하기 위해 노래 연습중이었는데 현상모집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에 마땅한 곡이 없자 '갈매기의 항구' 음악곡에 '목포의 노래' 가사를 입혀 '목포의 눈물'로 바꿔서 이난영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1936년대 이난영은 일본의 데이치구레코드에 7월 신보로 '이별의 뱃노래' '아리랑 노래'를 취입하였다. '이별의 뱃노래'는 '목포의 눈물'을 일본어로 번안한 가요이며 일본노래로 '바다의 고향', '석파의 노래' 등과 1938년에는 '백장미처녀'등 외 '봄마지'가 나왔는데 '봄마지'는 일본어로 번안 취입되었다.
1937년에는 '해조곡', 1939년에는 '다방의 푸른꿈'이 계속 힛트가 되었다. '다방의 푸른꿈'은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블루스 음악으로 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정확한 블루노트(BLUE NOTE)에 의한 작곡기법으로 구성되었다. <가요 평론가 황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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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이봉룡 남매 |
1942년에는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가 힛트가 되면서 인기의 열정이 식지않고 계속되었다.
8.15 해방이 되자 남편 김해송이 설립한 KPK악극단에서 뮤직컬쇼에 참여하면서 무대의상을 손수 만들면서 악극단의 뒷바라지까지 하는 얌전한 여성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의 비극은 김해송의 납북으로 엘레지 여왕 이난영을 엘레지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7남매를 데리고 피난지 부산의 판자집에서 회초리를 들어 피나게 노래공부를 시켰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미군부대에서 노래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시스터와 김보이스가 이난영의 아들딸로서 미국흥행사에 의하여 1959년 김시스터스는 라스베가스에서 명성을 떨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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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스터즈 |
김시스터스는 숙자, 애자, 민자로 민자는 이난영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며 1970년에 귀국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공연을 가졌다.
인기가수 이난영은 외로운 한송이 들국화 같은 여인으로서 항상 고독에 살아온 외로운 인생이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온 외로운 마음의 기둥인 남편 김해송과의 이별은 화려한 인기도 이난영의 마음을 메꾸지 못하였었다.
"이난영은 어릴때부터 얌전하고 눈물이 많았어요. 목포의 눈물이 나오기전이었지요. 극장 '단성사'에서 신무대의 공연시에 이난영이 특별출연하여 '봄맞이'와 '도라지타령'을 불렀어요. 너무 순진하고 화장도 못하여 내가 가르쳐 주었어요"<신카나리아 증언>
인기가수보다는 단란하게 살아가는 여인이 되고픈 소망이 염원이었을지도 모르는 이난영은 1965년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양주 한병이 딩굴고 있었는데 한잔의 술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눈을 감은 것이다. 장례식은 예총앞마당에서 연예협회주관으로 치루어졌다.
삼학도는 60년대 개발로 매립되어 산천은 변하고 사람도 가고 없지만 유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난영 기념비가 지나온 세월의 역사를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목포의 눈물(1935년 OK레코드,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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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노래비(유달산) |
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히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2. 삼벽연 원안풍은 노적봉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다방의 푸른꿈(1939년 OK레코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흘러간 꿈을 찾을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2. 저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밤
목메어 부른다
그리운 그밤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소리 실은 장미화러냐
시들은 사랑 뚫어진 그날밤
그대는 가고 나혼자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저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흘겨본 과거몽(1940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
1.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들창을 두들기는 낙엽은 추억이냐
정든땅 정든님을 천리밖에 내버리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왔던가
2.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천장에 섞여있는 연기는 꿈이려냐
정든 산천 정든 지붕 10년 넘어 밀쳐내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3.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거울에 사모치는 얼굴은 탄식이냐
정든길 정든하늘 타향길에 뿌리치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첫댓글 참 구슬픈 노래 한가랃 들으니,피곤히 쏴악 풀린듯 합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에 노래한곡 듯고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