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요약/ Andrew Ahn

[Andrew]

토론시간 매월 2회 첫째 셋째	한국	토요일	AM 8:30~10:00<4월2일부터 시행>
	캐나다	금요일	PM 18:30~20:00(동절기). 19:30~21:00(하절기)
	독일	금요일	PM 22:30~24:00(동절기), 23:30~01:00(하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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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요약/ Andrew Ahn

차 례 프라임스쿨 넥타이 추도식 진정한 추모 파티 후의 쓸쓸함 오래된 것과 새 친구 아버지의 서재 사진 세장이 가진 확률 멸종돼 가는 사람들 논쟁 불청객 반가운 손님 실버힐에서 보낸 오후 흉터 프라임 보이 제이 삼촌의 방 아카이브 초대 옛친구

9 21 29 43 62 77 96 128 144 162 181 191 203 219 225 240 251 261 270

프라임스쿨 벤치에서 실망과 기대 조금 다른 점심시간 유인 아버지의 문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해소 전진과 후퇴 미약한 빛 다른 길, 다른 목적지 갑작스러운 비 안개에 휩싸인 실버힐 패배 구토 재발 시험과 변화 뜨거운 감자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281 292 302 317 333 352 364 373 390 409 437 456 473 491 509 522 540 560 591

대립 영광을 위하여 결정 대결 다시 돌아온 새 영광의 그늘 카세트의 행방 프라임스쿨에서의 마지막 집으로 가는 길 호두나무 거리의 성탄절 유예의 시간 자기와의 화해 새로 쌓은 탑 그날의 재구성 버즈 아저씨의 방 12월 31일 똑바로 선 인간 다윈 영

611 625 637 642 656 668 680 709 719 729 737 750 763 775 795 808 821 833

P.9 프라임스쿨

옛 수도원 남학교지만 매월 둘째 금요일 저녁 자유가 있고, 프라임보이는 매주 토요일 아침에서 월요일 아침 등교할 수 있었다. 프라임스쿨의 자부심은 설립 이념에서 재능있는 아이 한 명을 전인격적으로 교육하여 미래 10,000명의 머리로 육성하는 데 있었다.

규칙 1) 국가 특권 지위 부여 2) 신분제 위상 3) 치열한 경쟁 입학 4) 13살 입학시험-1, 2, 3지구 중 1지구 남자 5만 명 중 200명 소년만 시험 허가. 2~3지구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 5) 자격-우수 성적, 추천서, 면접, 6) 14살 입학하여 20세에 졸업 7) 한 달에 1회 가정 귀가

7월 둘째 금요일 밤 동 기숙사 방에 다윈이 여학교 루미에게 인편으로 첫 연애편지를 쓰는데 예비 법학 논술보다 더 어렵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으면 오늘 저녁 전화해줘…….”

이 학교의 평은 법학자나 수학자는 될지 몰라도 시인은 못 된다고 소문이 났다.

P.21 넥타이 p.29 추도식

1지구에 두뇌의 뜻인 ‘호두나무 거리’가 있다.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와 오래 관계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역대 최연소 문교부 차관 니스는 휴일인 토요일도 반납하고 일하는 스타일인데 둘째 토요일 아내 마리와 다윈 영을 데리고 30년이 지난 친구 제니의 추도식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열여섯 살 된 다윈이 루미를 만날 설렘에 넥타이로 아버지께 부탁하자 “잘 매어지지 않는 일이 있지.” 하며 도와주셨다. 프라임스쿨 위원장인 아빠는 추도사를 했으며 제이 아저씨는 친구지만 인생의 스승처럼 존중하고 진정으로 사랑했다. 아빠 친구 버즈 아저씨에게 처음 인사를 하며 같은 학년 레오 마샬이 아들이라고 했다. 비프라임 출신들의 아들들이 프라임스쿨에 다닌다니 이런 일 없다고 아저씨는 놀라워했다. 그러나 다윈은 루미를 찾아 헤매다 그녀를 보고 금기시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순간 ‘아!’ 다윈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P. 43 진정한 추도식

루미가 보였다. 나 혼자 있어. 다윈은 아래층에 사람이 너무 많아 올라왔다고 했다. 루미도 “그래, 30년 전에 죽은 소년 추도식치고는 사람이 너무 많긴 하지?” 오랫동안 서 있는 신중한 다윈을 삼촌이 거했던 방으로 불러들여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니?" 루미가 물었다. 다윈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이라고 하자 “그럼 다윈 넌 영혼이 있는 사람이니?” 이 물음은 여자 친구가 있느냐는 뜻도 되어 화제를 돌렸다. “다윈, 난 죽음을 생각했어. 이 방에서 삼촌의 존재가 느껴지기 때문이야.” 그러자 “응 나도 너희 삼촌의 사랑을 받았다면 아저씨 영혼은 불멸이야.”라는 다윈의 말에 루미는 이 방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올 자격을 갖추었다고 확신했다. 앨범을 보이며 살해된 삼촌과 강도는 아는 사이라고 비밀까지 말했다. “다윈, 넌 미싱 링크란 게 뭔지 알아” 도둑이 가져갔을지 모를 앨범 속 없어진 사진 한 장을 지적하며 말했다.

“인류 진화의 퍼즐을 맞출 수 있는 잃어버린 연결고리? 합리적인 추측인지 아닌지는 실증적인 접근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

‘영혼’과 ‘실증적 접근’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다윈의 정신적인 포용력이 루미의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아빠가 들어와 니스 아저씨와 다윈을 배웅하였다. 제이 삼촌의 진정한 서른 번째 추도식은 지금부터였다. 창가 너머로 루미는 다윈의 눈빛에 미소를 보냈다.

P.62 파티 후의 쓸쓸함

7월의 둘째 일요일 바비큐 파티 준비하는 할아버지 러너는 비프라임 출신의 약점 딛고 아들 니스가 문교부의 혜안으로 불리는 것은 프라임 출신보다 더 명석하다는 것을 입증한 거고, 프라임스쿨 손자 다윈 역시 기특했다. 손님들이 “미래 세대는 저희 세대보다 성취감을 더 직접 느껴봐야 해요.”라는 말에 훌륭한 아들과 손자를 둔 러너의 어깨가 더 으쓱했다.

파티 후 삼대가 한자리에 모이자 니스는 기숙사의 다윈보다 실버 힐의 아버지가 더 자유롭다는 말을 차갑게 했다. 그러자 러너도 이제 제이 추도식 그만했으면 하고 니스에 권했다.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의 적군이다.”라는 문구처럼 파티 때와 사뭇 다른 적막감이 감돌았다. “아버지 때문에 속상하셨죠?” 지하실에 심부름 갔던 다윈의 말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 품에 안기며, “할아버지랑 아버지도 이렇게 안아 보신 적 있으세요?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와 전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걸요.” 집을 나서는 다윈의 따뜻한 체온이 그나마 손에 남아 쓸쓸한 마음을 감싸 주었다.

P.77 오래된 것과 새 친구

200여 년 전통의 물물교환. 각자 지니고 다니는 가문의 상징성 작은 물건을 영원한 우정의 징표로 교환한다. 행사는 제비 뽑기로 동기숙사와 서기숙사 대표가 ‘접대’와 ‘응대’를 정하였다. 접대는 탁자 위에 오래된 물건을 올려 놓고 응대는 자신의 물건과 합의로 물물교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교환자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다윈은 의류라 쓰고 빈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사이 루미가 나에게 영혼 있니 라고 물었을 때 편지를 주지못한 허탈감에 빠져 있는데 레오 마샬이 찾아왔다. 처음이지만 14살에 마음을 빼앗긴 루미가 언젠가 자기 집에 놀러 왔었다는 말에 자신이 점점 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둘의 교환이 성사되었다. 의류와 2년 지난 놀이공원 입장권 그러나 개의치 않고 가까운 새 친구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법규를 어기고 학교가 싫어져 기숙사를 빠져 나갔다가 징계를 받고 독방에서 후드를 빼앗겼다. 사과를 하는 레오에게 “물물교환한 이상 레오 네 후드인 걸.” 그러자 레오는 ‘아니, 우리의 후드였다’라고 했다.

P.96 아버지의 서재

샤워를 마치고 책상 위에 놓인 과학 시리즈 마지막 한 권이 있었다. 전에 아버지는 나이에 따라 선별해 주고, 어려운 책은 읽지 말고 제목만 봐도 좋다. 아이들은 책을 내려다보기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상상해야지. 그런데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 혹 루미집에 전화기를 들었다. 마침 루미가 받았다. “오늘이 프라임스쿨 휴가니까 혹시나 하고 전회기 옆에서 기다렸어. ‘후줄근한 옷’ 입고 내일 아침 여덟 시 센트럴 역에서 만나.” 급히 벤이 무언가 물고 달려 나갔다. 마침 업무로 늦었다며 아빠가 들어오시며 무슨 일이냐고 하셨다. 인사도 잊고 벤이 물고 있는 후두를 아버지께 보이며 “네? 레오는 교장 선생님께 압수 당했다고 했는데, 왜 이게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지난번에 어딘가에 두고 잊었는데 벤이 물어 감추었었나 보다. 넌 어디에서 찾았니?”라고 물으셨다. 다윈은 할아버지 집 지하실에서 찾았다고 했다. 다윈은 자기 때문에 레오는 물론 교장 선생님과 아버지께 물의를 일으켜 후드에 대해 다시 말하지 않았다. ‘후줄근한 옷’까지 준비해 놓고 내일 가족 모임에 갈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와 똑같이 아버지도 쾌히 승낙하셨다.

P.128 사진 세 장이 가진 확률

루미는 그림 앞에 서 있는 아빠가 이름 없는 호두 정물화에 끌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그림은 ‘조이 헌터’를 가장 잘 묘사한 초상화였다. 아무 야망도 없는 7급 공무원, 형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대해 분노 없는 진짜 시체. 그림처럼 답답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중앙 분수대 앞에 약속 전에 다윈이 먼저 기다렸다. 3 지구행 표를 다윈에게 주며 “얼른 가자.” 차창 너머 풍경에 관심이 없는 루미는 단지 제이 삼촌의 죽음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아무 생명력 없는 ‘호두 정물화’라고 생각했다. 다윈은 9 지구행 기차표를 샀다. 루미는 사진 세 장을 꺼냈다. D-9 표기와 희미한 주소가 있었다. 그 순간 다윈이 말했다. “루미 넌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놀라운 사람이야. 널 집에서 호랑이라 부르지.” 루미가 삼촌 생일과 눈이 닮았다고 할머니만 나를 리틀 제이라고도 해.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갑자기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앞에 와서 섰다. “거기서 너희들 무엇하니?”

P.144 멸종돼 가는 사람들

9지구에는 몇십 년 전에 목적지가 사라져 버스가 중단되었다. 구체적으로 뭘 위해 살인하나 살인도 얻을 게 있어야 하듯 목적지가 없는 곳이 되었다. 시동을 걸려 하자 루미는 가방에서 사진을 재빨리 꺼내 남자에게 보여주며, “이 벽에 쓰인 주소와 사람을 아세요? 할아버지는 사진작가인데 9지구 사셨을 때 많이 은혜받아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에게 보답하시려고 찾으세요.” 자신들이 1지구에서 왔다는 것을 의심 않고 그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말에 루미는 안심했고, 다윈은 9지구에서 마지막으로 40년 전에 출생이 멈췄다는 말에 멸종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D-9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 노인들은 고약한 냄새 풍기는 건물 세면 바닥에서 8지구가 배송하는 음식으로 겨우 살아갔다. 이들에게 사진 속 인물을 확인 결과 뺨에 점 있는 그를 비둘기똥이라고 불렀다. 아마 전쟁 중에 죽었을 거라고 했다. 다윈은 노인들을 보며 반감보다 동정심이 생겼다. 기차역으로 돌아오자 운전기사는 9지구 사람들이 강도나 살인자였다고 기억하지 말라 하고 돈을 받지 않았다. 루미는 “네가 오늘 나를 위해 시간 냈으니 다음에 네가 필요할 때 시간 내줄게.” 다윈은 곧바로 “그럼 다음 휴가 때 우리 할아버지 집에 같이 가줄래?” 주저 없이 루미는 “좋아.”라고 답했다.

P.162 논쟁

① 교수: 건축물에 울타리 친다면 1. 집 둘레 바짝 치면 안전하지만 불편하다. 2. 멀리 쳐 놓으면 자유롭지만, 안전에 위협받는다.

우리처럼 법은 사는 집에 튼튼한 울타리 쳐주는 역할이다. 이럴 때 행복하고 정의로운 재판관이 될 수 있다.

② 레오 마샬 : 누구나 이상적인 울타리를 가질 수 있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저는 동의 할 수 없어요. 법치 아래 특정 대상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부정한다는 게 맞겠죠. 진짜 재앙은 그 설계에서 배제된 자들이 12월에 다시 울타리를 부수는 일이겠죠.

③ 법학생 세 명 무리: 점심시간에 몰려와 “접시의 구성에 고기가 불공평하게 너무 1지구에만 몰려 있나? 수업시간에 자만심에서 설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게 문제겠지. 너 하나 때문에 수업 방해받아야 하니.”

④ 다윈: “나는 증인으로 너희가 먼저 도발했고, 레오는 피하고자 충분히 참고, 레오 아버지 일을 거론하며 레오에게 모욕을 주었지.”

레오야, 교수님도, 우리도, 다른 지구 사람들도 모두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자기 삶을 이어가는 것뿐이야. 악의 같은 건 전혀 없어. 다들 세계가 더 평화롭고 좋아지길 바라고 있지 않겠어? 너만큼 이 세상에 진지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다윈은 레오가 애교심이 있다는 것과 그가 가진 선명한 관점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레오는 어깨동무하며, “다른 사람들은 됐어. 친구는 한 명이 모두인 거니까.”

P.181 불청객

9월의 둘째 주 일요일 오전, 니스는 외출 준비하는데 희미한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한 여자아이가 소파에 앉아 태연히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너도 잘 지냈니? 그런데 우리 집에 어쩐 일이니…. 루미야?”

“언제 온거야?” 다윈이 놀라 물었다. “열 시 반인데 일찍 나와서 먼저 와 있었어. 내가 실례를 했나?”

니스는 다윈과 루미의 이야기를 듣다가 걱정스러웠다.

“차관님,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는데 어디 아프세요? 계속 미간도 찌푸리시고.” “…. 잠깐 두통이 와서…. 괜찮아.”

“다윈! 차 키가 안 보여.” 순진하게도 다윈은 정말로 차 키를 찾는 줄 알고 있었다.

침묵이 지나치게 길었는지 다윈이 “초대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니스는 다윈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식의 마음에 미심쩍은 조각을 흘리고 그 조각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저지르는 죄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죄였다. “그럴 리가 초대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그럼 이제 출발해요.”

다윈이 루미에게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지.” “차 키는 찾았어?” “아버지 주머니에 있었어.”

니스는 방에서 나가기 전 잠깐 크리스털 통에 얼굴을 비쳐 보았다. 다윈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면 여유롭게 웃어야 했다.

P.191 반가운 손님

“이번 달에도 차관님이 안 오시는 거예요?”라고 애나가 묻고 싶었다. 러너가 에둘러 “점심은 낚시 다녀와서 생각하지.”라고 대답했다. 지난달 니스가 폭언을 퍼부으며 다시 다윈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더니 다윈도 약속이 있어 취소했다. 손자와 할아버지의 만남을 막겠다는 것은 의절이었다. 남은 평생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지하실에 두 달간 빛을 못 본 바비큐 그릴이 보였다. “어르신, 차관님이 오셨어요. 다윈이 친구도 데려왔고요.” “루미 헌터라고 해요. 제이 아저씨 동생이신 조이 아저씨 딸이고요.” “할아버지, (반가운 손남)루미가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척박한 돌산 기슭에 한 무리의 산양 떼가 모여있는 사진이었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데다 희미하게 눈발까지 흩날리는 광경이 그들에게 닥친 운명이 녹록지 않음을 짐작게 하였다. 그리고 루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림> "제가 선물을 잘 가지고 왔네요. 현대미술관보다 작품을 알아주시는 할아버지 댁이 훌륭해요." 루미가 말했다.

대표

P.203 실버힐에서 보낸 오후

생물이 햇빛의 에너지를 받아 성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타인의 눈길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다. 타인의 시선을 끄는 데 실패한 사람은 식물처럼 우울하고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아빠 생각에 루미는 자기 생각을 중단시켰다. 다윈의 소개에 “프리메라에 다니는 루미헌터, 제이 아저씨의 조카 정도를 기대했는데 ‘조이 아저씨의 딸’은 만족지 못했다. 곧은 다리로 햇빛 아래를 똑바로 걷는 당당한 러너 할아버지와 방에 틀어박혀 우울한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자기 할아버지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되었다. 젊어서 너무 높이 난 탓에 나이가 들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밑으로 떨어지는 거라고 말한 아버지가 생각났다.

다윈이 궁금했던 할아버지의 후드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했다. 할아버지는 보육원 출신으로 열두세 살쯤에 극도로 타락한 9지구의 모든 어른과 대등해졌다고 생각했다. 그 후 양부모님을 만나 새 삶이 시작되었지만, 후드는 버리지 않고 침대 밑에 두고 잤다. 왜냐하면, 완벽한 세상에서 쫓겨나면 지긋지긋한 후드를 다시 입어야 했을 테니까. 몇 년이 지나자 아예 후드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이사 다니는 동안 사라져버렸겠지. 양부모님은 몇백만 년 전의 원시인 같다 하시면서도 그를 정성껏 가르쳤지. 후드 아닌 교복을 입게 되었어. 새 인생을 얻은 뒤 그는 죄를 깨우쳤다. <왜 훌륭하고 올바른 세상을 그렇게 증오하고 바꾸려고 했던 걸까? 왜 부모님같이 인자한 사람들을 우리의 적이라 하고 죽이려 했던 걸까? 진짜 죽어야 할 사람들은 나를 꼬드긴 아래쪽의 비열한 사람들인데….> 할아버지는 매일 밤 울었다.

루미는 물었다. “이 세상을 다 바꾸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였나요?”

루미야, 그건 하룻밤의 몽상일 뿐이란다. 이 완벽한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이고 폭동이지…….

“할아버지, 혹 읽지 말라는 책을 침대 밑에 숨겨두고 읽는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 세상이 궁금해서 몰래 집을 나가기도 하고….”

“난 부모님을 무척 존경했어. 그래서 두 분 실망하게 하려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 오히려 추천해준 책을 읽었어.”

루미는 처음부터 할아버지 이마에 깊게 팬 주름과 뺨 한가운데 희미한 흉터를 보며 모험심 넘치는 반항아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바른길을 걸으려고 했는지 궁금했다.

“부모님에 대한 존경은 두 번째야. 첫 번째는 내가 반항아나 밤거리 방황하는 삶을 스스로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이야기 하는 동안 발걸음은 벌써 마을 끝에 있는 공원을 돌아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P.219 흉터

늦은 오후 니스는 실버힐로 돌아왔다. 다시 오지 않겠다고 하고 온 것은 다윈 때문이었다. 안 오면 그가 역 추적하여 안 가는 이유와 후드 이야기를 캐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타협하는 편이 나았다. 하루에 두 번 아버지 집에 들어서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집 안에서 셋이 모여 우편함 지붕을 위해 비둘기 조각상을 만들고 있었다. 다윈은 둥지, 루미는 알 그리고 아버지는 비둘기. 아버지의 솜씨가 능수능란했다. 1지구대에 만년필이라면 몰라도 조각칼을 쥐어본 사람이 또 있을까. 갑자기 아버지가 비명을 질렀다. 칼날이 눈 밑을 스쳤다. 흉터 나면 어떡하나. 그런데 괜찮다고 하였다. 오히려 양쪽에 났으니 한쪽은 니스 차관 열여섯 살 때 과학 실험 중 강산이 튀어 큰 점이 생겼고, 오늘은 손자와 루미와 조각상을 만들다 생겼으니 영광의 상처라고 하였다.

“아버지 애들 앞에서는 옛날얘기 꺼내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니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에 이렇게 뻔뻔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저리가 났다. 그 뻔뻔한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란 사실에 더. 니스는 바닥에 떨어진 비둘기 조각상을 발로 툭 차 버린 뒤 안으로 들어가며 ‘아버지도 이 정도의 벌은 받아야 했다….’

P.225 프라임 보이

버즈 아저씨가 프라임스쿨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는데 다윈은 궁금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주로 작품이 위험한 곳이 배경인 데 반해 프라임스쿨은 평온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버즈는 달랐다. 10대가 바이크 호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보다 수도원 냄새가 밴 기숙사 학교에서 6년을 견디기가 더 위험하다고 했다. 100번 넘게 담을 넘었을 거라고 하는 아버지나 레오가 같은 말을 하고 있어 다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다윈은 마샬 레오를 이해해 줄 수 있었는데 버즈 아저씨는 오히려 아들이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과 행동 사이가 하늘과 땅이었다. 다윈에게 레오와 자연스럽게 친해질 기회가 있을 거라고 했던 버즈의 말대로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된 것을 다윈은 생각했다. 나아가 버즈는 레오가 프라임스쿨의 첫 퇴학생이 될 거라고 각오하는 반면 다윈은 결코 그럴 리 없을 거라는 의견을 냈다. “어린 시절 친구를 잃는 건 자신의 어린 시절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과도 같다.”라는 말이 떠올라 버즈는 삼총사 중에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임을 깨달았다. 형제처럼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지.

“다른 사람이라는 게 어떤 뜻인가요?” “제이의 죽음이 그 문이었어.”

아무튼, 그 문을 지나자 니스는 한순간에 어른이 되어 버렸지. 나도 내 방식대로 어른이 되며 아마 거기서부터 우리 길이 갈렸어.

다윈과 헤어진 뒤로 프라임에 불평하는 필립을 본다. 추도식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하고 뜻밖에 촬영 허가와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허용해 준 게 누구였나?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로서 25년 넘게 떠나버린 친구를 배려해준 니스의 덕분에 깊이 감사해야 했다.

“다윈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의 다정한 대화를 처음 보는 순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못 왔어요.”

“그런 배려해도 다 할 줄 아는구나. 태어날 때부터 프라임 보이로 낙점받아 놓은 아이더구나.” 레오는 보이지 않았다.

P.240 제이 삼촌의 방

루미는 눈을 떴다. 제이 삼촌이었다. 환청이 아니라 실제로 테이프에 녹음된 삼촌의 목소리였다. “어려운 문제야.”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일까? 수학 문제라도 풀고 있었던 걸까? 루미는 눈을 감았다. 30년 전 제이 삼촌이 녹음해 둔 라디오 음악이 흘러나왔다.

“땅거미가 질 무렵 날 뒤 따라오고 있는 외로운 친구를 봤어. 그와 평생을 같이 하게 될 걸 직감했지!”

루미는 제이 삼촌의 방보다 더 편안한 곳은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삼촌의 침대 위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본질적이었다. 학교와 정 반대 분위기였다. 프리메라 여학교가 천 팔백 장의 빼곡한 티슈처럼 경직되고 다 같은 모양 크기로 순결할 뿐 이 세계를 생각하고, 의심하고, 판단할 줄 아는 진정한 인간은 오직 루미 자신만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집에 놀러 오는 날이면 할머니로부터 종종 우편물 분류하는 부탁을 받았다. 그 중에 할아버지 사진 저작권 보관 기한이 아카이브라에서 5년마다 연장되었다. 루미는 아카이브에서 보낸 편지를 따로 챙겼다.

P. 251 아카이브

네온 강 동쪽 문화거리는 1년 내내 방문객들로 혼잡했지만 아카이브 역시 문화거리임에도 항상 한산했다. 루미는 점심 내내 할아버지 사진이 ‘12월의 폭동’보다 ‘국가 기록물로서 보존할 가지가 있는 자료’로 더 가치가 있다는 데 주목했다. 9지구 방문은 큰 소득 없었지만, 이번엔 ‘미싱 링크 missing link’(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예감이 들었다. 일반자료 검색에서, 없으면 특별검색에서 볼 수 있다는 데 병약하신 해리 헌터 할아버지가 저작자라 해도 안 되고 7급 아빠보다 높은 3급 공무원 이상이어야 가능했다. 폐관되어 정원 벤치에 앉았다. 그 순간 일요일에 초대해 주는 이웃이자 이 사회의 규칙을 만드는 권력자가 아주 가까이에 있어 벌떡 일어났다.

P.261 초대

늦여름 두 척의 전함처럼 호전적인 체육대회가 열렸다. 심지어 아버지도 출전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옆자리에 4학년 선배가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듯했다. 프라임 보이에게 연애는 금지된 조항이 아니었다. 다윈은 머릿속에 각인된 전화번호를 눌렀다. “제 전화예요?” 루미의 목소리이었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네가 전화해주길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 “내일 체육대회에 널 초대하고 싶어.” “정말, 그럼 혹시 내일 니스 아저씨도 오셔? 나랑 만날 시간도 있으시고?” “오시지. 그리고 할아버지도 오실 거야.” “좋아. 갈게.”

P. 271 옛 친구

체육대회가 열렸다. 버즈에게 기회였다. “니스, 다시 보게 돼서 반가워. 프라임스쿨 체육대회는 멋진 그림이 나올 거야.” 거의 30년 만에 느껴보는 품이었다. 얼마 전 버즈의 촬영은 학교 측이 제시한 지침을 준수하며 무사히 마쳤다고 니스는 들었다. 두 번째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땀으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예외적인 프라임 보이들이 잘 어울릴 그거로 생각했다…. 버즈의 제안으로 니스는 20분 정도 함께 산책하면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오솔길도 다 알고 무척 조사를 많이 했구나.” “명색이 다큐멘터리제작자인데 모두 다윈 덕분이야.” 길이 끝나갈 때쯤 가로막고 버즈는 말했다. “지금까지 온통 자녀 얘기뿐이었지. 우리에 대해 말하지 못했어. 이것만 봐도 너나 나나 우리 자신이 자유인양 굴고 있지만 버즈 마샬, 니스 영은 이런 족쇄에서 다시 자유로워져야 해.” “버즈, 난 너처럼 자의식이 높지는 않은 모양이야.” “니스 영, 넌 정말 훌륭한 어른이 됐구나. 마흔여섯이 됐는데 난 아직 아직 어린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다니.”

“인생이란 게 참 오묘하지. 우리 둘이 프라임스쿨을 걷는 게 말이야.” 프라임 출신도 아니면서 어른이 되어 이곳을 거점 삼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30년 전의 옛 친구가 유지하는 거리감을 어느 정도 느꼈을 것이다. 버즈가 포옹할 수 없게끔 악수로 인사할 때 “감독님과 위원장님으로 헤어져야 할 때군.”이라고 버즈가 말했다.

P.281 프라임스쿨 벤치에서

일반석에서 인사 나누는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니스가 자기에게 대하는 평소 모습과 딴판이란 것을 러너는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그 많은 생각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아들을 지치게 만드는 악이란 것도 알았다. 루미가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고 니스에 물었을 때 피하자 자기는 정부 기관에서 높은 직책을 맡게 될 때 진실 truth라고 했다. 그때 제3경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풀이 죽은 채 다윈이 왜 벤치에 앉아 있지?” “이제 막 시작했어요. 나중에 선수교체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냥 즐기세요.” 러너는 니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화가 났다. 그때 서기숙사 골이 터졌다. 레오 마샬이었다. 니스는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러너는 자기 아들의 첫 골 넣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을 버즈가 한없이 부러웠다. 후반전에도 풀이 죽어 있던 다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P.292 실망과 기대

축구 경기가 올해도 서기숙사의 승리로 끝났다. 최우수상은 골을 넣은 레오 마샬이었다. 다윈은 레오에게 다가가 축하하자 “경기에서 이긴 걸 저들은 기뻐하는 거야. 골 넣은 건 전혀 아니지.” 다윈은 인파 속에서 자신을 향하여 걸어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루미를 발견했다. “기껏 초대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여줘서 우습지?” “전혀, 누가 프라임 학교 학생을 비웃을 수 있겠어.” 루미가 고개를 저었다. “넌 아직도 아버지에 대해 옛날이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너도 휴일에 여전히 프리메라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 보니까 변한 건 별로 없어.” 레오와 루미가 냉소적으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다윈은 파도에 밀리는 조난자가 된 느낌이었다. 재미있게 놀다 가라는 말을 하고 레오가 인파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다윈을 루미가 부르며 다음 주 외출을 아저씨에게 둘이서 허락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둘째 주 금요일까지 견학 보고서를 써오라고 해서 친구랑 인류사 박물관에 가고 싶어요.” “다윈, 너도 가고 싶니?” “네, 가고 싶어요. 가 본 지도 오래잖아요.” “그래, 알았다. 바깥바람도 쐬고 이왕 나가는 것 인류사 박물관만 보지 말고 다른 곳들도 더 둘러보고 오렴.”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라고 루미가 인사하며 웃었다.

P.302 조금 다른 점심시간

1지구인들이 법에 대한 정체성의 뿌리를 단심제에서 찾았다. 3심제와 2심제가 하위 지구와 중위 지구의 법원이 정의를 판단할 때 실수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하여 1지구 법원에서는 결코 그런 실수가 전제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법이 내린 정의는 번복될 수 없고, 번복되어서도 안 되는 불변의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1지구 법원은 상위지구 사건의 경우 전원 합의체를 구성해 3심제를 거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이루어진 판결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법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되, 생활면에서 법원과 최대한 멀리했다.

점심시간이 20분쯤 남았을 때 “조이, 손님이 오셨어.” “ 지나가는 길에 네 생각이 나서.” 조이는 법원 건물 후미진 사무실까지 문교부 차관이 직접 찾아와“영광이네요.”하며 웃었다. “……. 요즈음 들어 루미랑 우리 다윈이 종종 연락하고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있어.” “그러는 모양이예요.” “어렸을 때 형이 제 친형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생각했어요.” “난 널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어. 참 이번 주 일요일에 루미가 다윈이랑 인류사 박물관에 갈 거라던 데, 들었어?” “속는 셈 치라니 무슨 말이에요?” “첫째주일요일엔인류사박물관이휴관이잖아.”

P.317 유인

“루미야. 잘 지냈어? 그런데 루미 너도 교복을 입고 나왔네.” “네가 교복을 입고 나올 거란 걸 잘 알고 있었거든.” “인류사 박물관은 휴관이던데?” 그 말을 들었는지 루미는 한적한 길로 다윈을 이끌며 말했다. “처음부터 갈 생각은 없었어. 물론 표도 끊지 않았고.” 루미는 준비했던 가장 중요한 말을 꺼냈다. “그럼 넌 전적으로 니스 아저씨의 영향을 받고 자란 거라 할 수 있겠네. 니스 아저씨는 과연 날 좋아하실까. 싫어하실까? 난 왜 아저씨가 날 싫어하는 것 같지. 단지 할아버지 댁 방문한 그날 하루만의 느낌으로 얻은 결론은 아니었어. 추도식 이외에 조이 가정과 별도로 만날 자리도 만들지 않았어. 난 날 싫어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어.” 종합자료실로 들어가자 루미는 마우스에서 손을 뗀 뒤 다윈에게 말했다. “다윈, 우리가 찾는 사진이 이곳에 저장돼있어. 그 사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이디를 발급받은 3급 이상의 공무원들뿐이래. 말도 안되는 일이지? 나는 아저씨가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특히 사진과 제이 삼촌의 죽음이 어떻게 연결된 건지 확실히 모르지만 말이야.”

“다윈,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어.”

P.333 아버지의 문

갑자기 검색실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폐쇄적인 공기는 외부가 아닌 루미의 눈동자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다윈, 왜 아무 말이 없어? 생각하고 있는 거야?” 지난 일주일 동안 만남을 기대하게 한 것은 오직 사진 찾는 방법 연구였다니 정말 다윈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루미의 시선을 바라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매듭이 단숨에 풀리는 것 같았다. 상쾌한 나무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좋아, 뭐부터 시작할까?”

아버지는 정리정돈이 서투르셨다. 그때였다. 정리 정돈하다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이 뚝 떨어지듯 특별한 대화 한 토막이 돌출했다. 「종의 기원」 아버지는 나에게 “이 세상 모든 질문의 해답이 되는 문구 같지 않니? 내가 인류의 비밀을 푸는 학자가 된 느낌이야.”라고 하셨다. “다윈처럼요?” 천천히 <종의 기원> 철자를 누르자 대답을 대신하였다. 종의 기원 출간 연도를 아느냐고 루미가 먼저 물었다.

“1859년.” 이때부터 루미에게 손을 비켜주자 ‘해리 헌터’이름을 쳤다. 60년 전의 겨울이 사진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1지구인이 가진 정의로운 사명감과 헌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문화훈장을 탔던 해리 할아버지를 다윈은 생각했다. 그녀는 사진 파일 번호는 있는데 두 장의 사진이 없는 것을 앨범과 비교하면서 범인은 9지구 사람이 아니라 1지구 그것도 상당히 권력있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했다.

P.352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

10월의 둘째 주 일요일. 레오는 늙어가는 건강 12월 칼바람 추위를 맞서 조깅하다가 니스와 다윈 위해 더 큰 파티 계획을 했다. 러너는 원대한 미래 상상한 일들이 지금까지 현실이 되어 있는 삶을 체득한 교훈을 되새겼다. 정오가 되기 전 니스와 다윈이 와서 점심을 같이 하며 이번에 낚시가 어떤지 물었다. 다윈과 니스 모두 승낙하였다. 기도 응답 중 하나님의 응답 같아 러너는 심장이 뛰었다. 낚시하면서 러너는 니스에게 사업한다며 신경써주지 못해 다윈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니스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어서 지금이 좋다고 하였다. “다윈, 아빠는 헐크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지…….” 러너의 말에 이어 다윈이 물었다. “진지하게 꾼 아빠의 꿈이 무엇이었나요?” “아카이브 관장이 되어야겠다고 , 문교부 직원이 되고 나서 더 높은 직급에 올라가야겠다 싶더구나.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데 글쎄. 꿈을 이루었는지 모르겠다.” 이어서 할아버지는 니스의 목적이 문교부 장관에 이어 대통령이지. 그때 비로소 꿈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들 거라고 하셨다. 아들과 손자가 양 옆에 있으니 호숫가에 노을이 내리는 풍광이 꼭 하늘에서 붉은 와인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좋은 시간을 보낸 만족감이 따뜻한 이불이 되어 온몸을 덮어 주었다. 그때 니스는 다윈의 말에 눈이 번쩍이었다. “아카이브에 저장된 자료를 삭제하는 일이 쉬운가요? 사실 루미는 제이 아저씨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어요.”

P.364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루미는 정부종합청사 단지에 있는 행정부 건물에서 ‘정보공개 청구자료’를 요구했다. 제이 삼촌울 살해한 사람이 1지구에 사는 3급 이상의 고위직 공무원이라는 확신이 든 순간 무언가를 움켜쥔 기분이었다. 신청 자격이 20세 이상이고 아빠의 신분증으로는 본인이 직접 해야 했다. 루미는 둘러 댔다. “방금 전까지 곁에 계셨어요. 주차문제로 자기에게 맡기고 급히 자리를 비웠어요.” 접수된 신청서는 열흘이 걸렸다. 수취 방법도 본인이어야 하는데 남자가 지나치게 오래 신분증을 확인하였다. “필요하시면 아빠 직장에 전화해 보세요. 전 루미 헌터고요. 프리메라 학생입니다.” 학생증을 내밀었다. 남자는 웃으며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는 딸이겠네요 이렇게 심부름도 하고.” 인적이 드문 벤치에 앉아 파일을 품에 앉고 루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멈춰있던 나침반이 드디어 움직이며 제대로 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P.372 해소

1) 10월 하순 무렵. 프라임스쿨 교복은 춘추복으로 바뀌고 11월 중순부터 15일간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혹독한 학년말 고사를 치른다. 혹 실패해도 재수강제도가 있었지만 가정의 명예 문제가 따라와 그건 법원 출두장과 같았다.

2) 다윈은 루미의 전화에서 <로이드 검사가 3학년 때 삼촌과 같은 반이었다고 했다.

3) 레오를 만났다. 지난해 체육대회 때 너는 루미와 함께 있었다며. 엄청 좋아했었겠네.

어쩐지 말에 가시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실제로 가시가 돋아 있으니까 가시는 실제 꽃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거 아냐

루미는 호감이 있으면 생각도 열려 있어 좋아. 그러나 자기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흔들면 완전히 적대적으로 바뀌지

레오는 루미가 제이 아저씨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프라임에 합격하고도 가지 않는 천재 삼촌을 자기와 생일 같다고 환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루미 헌터같이 자존감 높은 애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존감을 확인하려고 해

레오, 루미 좋아하니“? 그럼.

그러나 나는 루미 헌터보다 다윈 영을 가장 좋아하니까 염려하지 마. 알고 싶지 않은 나의 할아버지보다 늘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네가 부러워.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유래했지만 모든 인간은 새로운 존재잖아. 다윈은 영광으로만 이어진 존재야.

체육대회 때 할아버지, 아버지, 너 함께 있는 모습 보았어. 두 분 다 너에게 다정하시더라.

난 출전도 못했는걸.

다윈은 앨범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사진 한 장을 얻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P.390 전진과 후퇴

학년말 고사가 가까워지면 프리메가 여학교 내 위계질서는 사관학교를 연상시킬 정도로 엄격해 졌다. 그 중에 재학생과 졸업생 유대관계가 강한 자발적인 스터디 그룹이 심했다. 그런데도 루미는 혼자 공부하며 제이 삼촌과 같이 한다는데 더 위로가 되어 교문 밖을 나섰다. “검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20분 넘기면 안 됩니다.” “네, 제이 삼촌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나세요?” “9지구 후디에게 살해됐지. 7지구 밑으로는 블랙홀이라 검사로서 부끄럽지만 잡는 건 불가능하지. 우리 아버지는 특수부 검사로 지내셨어. 12월 폭동 가담자들을 반동분자라 부르며 색출하셨지. 별명이 재판관인 제이도 아버지와 면담하고 싶었지. 그러나 면담 전 몇 시간 앞두고 7월 10일 아버지의 날에 살해되었어.” 문을 노크하며 비서가 들어왔다. 루미가 검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까 같은 도전의 악수가 아니라 지금껏 삼촌을 훌륭한 친구로 기억해준 데 대한 진정어린 감사의 악수였다.

P. 409 미약한 빛

11월 둘째 토요일.

루미와의 약속 장소에 루미 아빠가 나오셨다. 루미가 시험공부를 해야 해서 대신 아저씨가 나와 놀랐듯 하구나. 그런데 실은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며 공원 근처 작고 조용한 카페로 갔다. 혹 루미가 너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다윈은 에둘러 “우리 서로 방해하는 퇴보적 관계가 아니지요.” “퇴보적이 아니면 어떤 관계이니?” “저흰 서로 영감을 줘요. 즉 서로에게 삶의 활기를 줘요.”“아저씨는 제가 루미 만나는 일에 마음이 안 드세요?” “그럴 리가. 당연히 환영할 일이지. 그런데 네가 잘 모르는 면이 있을 거야. 무모한 면이 용감하게, 영악한 면이 현명함으로 보일 수 있을 거야.” 다윈은 루미에 대해 늘 밝고, 자신감 있고, 진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조이 아저씨는 “진실이 드러나면 기대와 달리 행복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제이 아저씨가 프라임스쿨에 합격하고도 다니지 않은 것은 ‘친구들이랑 놀고 싶다는 이유였지만 실은 부정을 저지른 어머니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무차별 학대를 하였다. “앞으로 교회 같은 데 다니지 마.” 어머니는 노예처럼 순응했다. 8살 때부터 나에게 욕조에 빠뜨려 죽이려고도 했고, 구슬로 이마를 맞춰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것에 미안한 기색보다 “척결한 거야.”라며 이죽거렸다. 매일 나는 형을 죽이려 했지. 형에게 호두 알레르기가 있어 호두를 가루로 빻아 파스타에 넣으면 그날로 질식사하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다행히 9지대 신원 불명의 후디 교살 絞殺로 마무리되었고 제이 형은 내 곁에서 영영 떠나갔지. 그 후 나는 더 제이 헌터의 사냥감이 아니었다.

“아저씨, 제가 모르는 루미의 다른 면이란 어떤 건데요?” 루미는 제이 형의 생일에 우연히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리틀 제이, 호랑이 루미라고 불렀지. 학대했던 제이 형을 똑 닮았다 해서. 루미가 진실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니…. 아버지인 내가 폐기 처분하고 싶은 진실을? 나는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루미가 내 신분증을 훔치고, 네 아버지의 아이디까지 도용한 것을 보면 뭔가를 알아가는 것 같지만 절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야. 진실의 가치는 지나치게 과장 되었어.

“아저씨, 제가 모르는 루미의 다른 면이란 어떤 건데요?” 다시 물었다. 하나는 프리메라 교복에 대한 판타지지. 일요일에도 꼭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허황이지. 다음은 3년쯤 되니 프리메라 생활도 지루해지는지 자기가 돋보일 새 활력소로 제이 헌터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푸는 진짜 탐정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지. 다윈은 1년 추도식에서 잠깐 보는 자신을 이토록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조이 아저씨의 눈빛에서 읽었다. 그러나 루미에게서 비예측성과 돌발성은 제9지구 방문과 인류사 박물관에서 만남을 겪었기에 오히려 루미의 가장 매력으로 다가왔다. 만일 3급 이상의 공무원이 제이 아저씨를 살해했다면 조이 아저씨는 외면할 수 있을까?

다윈은 이제야 루미가 자기 아빠에게 가진 불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루미는 홀로 싸우는 혁명의 여전사이다. 그래서 다윈은 공원을 빠져나오는데 한결 발걸음이 가벼웠다.

P.437 다른 길, 다른 목적지

조이 아저씨의 불신과 염려는 오히려 시험공부에 전념하는 동기가 되게 하였다. ​루미와의 만남을 인정받았고 이제부터 루미의 판단이 옳다는 증명을 위하여 더 뛰어난 성적을 받아야 했다. “쉬어가면서 해. 너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세울 필요는 없어. 저녁 식사하러 가자.” 어느새 아빠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아빠는 부담을 주는 말보다 헷갈리는 이론을 명확하게, 두 주장 중 자신이 취하지 않은 반대 관점에서 제기할 수 있는 논거들을 제시해 시선을 넓혀주어 교수 못지않은 가장 신뢰할만한 과외선생님이자 상담사였다. <사과의 핵>이 식사 시간 주제가 되었다. 사회 정치는 제1지구 거, 경제활동은 2.3지구가 활발하고, 세금은 중·하위보다 1지구가 많이 내는 식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도 같은 목적지에서 만날 수 있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다를수록 더 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9지구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똑같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60년간 동떨어진 섬처럼 취급받는다는 것은 절망이 아닌가요. 아버지는 통제와 억압이 없다고 하셨지만, 자발적으로 가지 않게 하는 가장 강력한 통제와 억압이 아닌가요? 12월 폭동으로 1지구 사람들이 보이는 사물로 입은 피해도 크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과 멸종을 기다리는 9지구 사람들의 피해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반대에도 불구하고 2, 3지구 아이들을 받아주신 아버지가 9지구에 대해 관용이 없으실까? 다윈의 궁금증은 더했다. 그러면서 “제이 아저씨가 어쩌면 9지구 사람에게 살해당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다윈은 말했다.

아버지는 아카이브에서 아이디 도용하여 국가 기밀에 접근하는 범죄에 가담했으니 국정감사에서 좋은 볼거리가 펼쳐질 것이다.

“이 집에서 그 되바라진 계집애 얘기는 더 듣고 싶지 않구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잖니! 그만두자니까!”

9지구 사람들처럼 루미로부터 ‘악마적인 면’을 보는 것 같아 아버지의 적대감이 어디에 뿌리 내린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P.456 갑작스러운 비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그렇게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처음였다. 12월의 폭동과 9지구 이야기, 게다가 되바라진 계집애라니……. 다윈은 놀라웠다.

“니스 영, 그래봤자 넌 살인자뿐이야.” 문득문득 이런 목소리에 니스는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알고 있어. 그래 난 살인자야.”라고 인정하면 그 목소리는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 후로 30년, 소년으로 16년 그러니 니스는 살인자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기는커녕 살인자로 사는 삶만 더 늘어날 뿐이다. “제이, 이런 건 죄가 되지 않는 거야.” 길 위에 쓰레기 버리면 죄가 되고 야구 경기를 하다가 남의 유리창 깨면 죄가 아니다. 숨길 의도가 없으면 죄가 아니고, 숨길 의도가 있을 때 벌을 받게 된다고 제이가 말했다. 제이 아버지의 앨범에서 12월 폭동 사진 중 한 장에 찍혀있는 어린 후디가 나의 아버지였다. 제이의 추도식에 다윈은 제물이었기에 니스는 처음에 다윈과 함께했는데 그후로 매번 그를 데리고 갔다.

비가 오는 건가? 환기는 못 하겠군. 후드를 벗어야 해. 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런데 피로 얼룩진 후드가 나에게 이런 평온함을 선사할 줄이야. 꽤 괜찮아. "왜냐면 그게 너니까. 니스 영……. 살인자."

P.472 안개에 휩싸인 실버힐

러너는 젊었을 때 진짜 금과 다이아몬드를 좇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손에 잡히는 재물 보다 함께 기억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추억 한 조각이 훨씬 더 값졌다. 농무 濃霧 탓일까 ‘러너’라고 지어준 어머니의 뜻에 걸맞게 휑한 보석상자를 아쉬워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오늘부터 그 상자를 가득 채울 보석을 하나씩 캐고 제공하기 위해 뛰면 된다. 러너는 다윈이 교복 차림에 가방까지 메고 이렇게 아침 일찍 왔는지 궁금했다. “일찍 잠이 깨어 버스 타고 왔어요. 아버진 어제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아 아주머니에게 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내일 학교로 직접 간다고 아버지께 전해드리라고 마리 아주머니께 얘기했어요.” 집에 들어온 다윈은 구토하느라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헛구역을 하고 있었다. 다윈은 아빠도 16살 때 구역질을 했다기에 그 시점이 제이 아저씨 죽은 뒤냐고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구토와 반항, 교회도 잘 다니다가 가지 않기 시작했어. 고등학교 입학식 날 기절해서 쓰러지기도 했단다.

식사를 위해 러너는 다윈의 방을 열자 “제이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갑자기 다윈이 물었다. “한번은 니스가 제이를 집에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 죽었다더구나.” 러너는 검지를 입술에 대면서 다윈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니스에는 비밀이란다. 네 아버지 앞에서 제이를 안 좋게 말하면 큰일 나잖니. 니스는 제이가 하나님이라도 되는 줄 아니까.”

P.491 패배

프리메라 여학교의 3대 지표는 명예, 진리, 봉사이다. 불쑥 지도 선생님이 루미네 학급 소지품 검사가 있었다. 그때 루미의 가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문서 파일이 나왔다. 그때 지도 선생님은 국가기밀정보를 20세 이하이며 아빠의 신분증과 ID 도용하여 공개청구 파일을 받았기 때문에 아카이브에서 프리메라 여학교로 통보했다고 한다. 이 이유로 루미는 지도부실 앞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지도 교사는 관련자들의 처벌 당하는 일과 루미에게 학교를 떠날 각오를 하라고 하자 완전히 굳어졌다. 그 충격은 루미에게 두려움과 귀책감이었다. 결국, 사진이 삭제된 사실 역시 없다며 “아카이브에서 제안한 대로 하겠어요.” 루미는 잘못을 시인하고 파일을 찢게 하고, 루미와 다윈의 아빠에게 각각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에게도 아무런 징계가 없는 쪽으로 지도 교사의 말에 동의하였다. 파일을 찢는 순간 루미의 자존심도 찢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루미는 어디서부터 이 상처를 회복할까를 생각하다 다윈과 니스 아저씨께 빨리 사과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P.509 구토

다윈은 자신이 괴이한 가면을 쓴 무리에 끌려가는 듯 글자가 거꾸로 뒤집히고 있었다. 어지럼증이 더해 학교 복귀 후에도 여전히 구토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란 글씨가 휘갈겨 도서관에서 회랑으로 가는 길에 나타났다. 온종일 종교적인 건물에 둘러싸여도 유리창의 성화, 수도사 어록, 신학조차 들여다본 적이 없다. 아니 필요가 아니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격인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를.’

갑자기 뒤에서 레오 마샬이 왔다. “다윈 너도 내가 죽으면 30년간 추도식 하는 아빠처럼 해 줄 수 있어?” “너는 어때?” “아빠를 보니 자신이 없어. 서녘 하늘 새를 좀 봐.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도록 하고 싶어.” 다윈은 자기 눈에 아무리 봐도 죄를 지은 새가 괴로움에 못 이겨 스스로 불길을 향하여 뛰어드는 거밖에 보이지 않았다.”

P.522 재발

니스는 루미의 불현듯 방문을 받았다. “다윈 이야기라니 들어보자꾸나.” 루미는 신분증과 아이디 도용에 대해 더 않기로 약속했다며 먼저 니스 아저씨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니스는 더 짚고 싶었다. “그런데 약속은 그냥 약속이지 개인적으로 찾아온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 같구나.” “그건 절대 아닙니다. 프리메라 교복을 입었다는 것은 약속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나를 비웃고 조롱해요.” “누군데.” “우리 아빠요. 누군가 보고 전달했기에 지도 선생님이 제 가방을 검색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아저씨, 저는 제이 삼촌 살해범이 9지구 후디가 아니라 1지구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로이드 검사님이 아니었으면 제이 삼촌이 검사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살해 의심하던 인물인데 그렇지 않았어요……. 아저씨,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다른 사안 하나 더 있어요. “아저씨가 절 싫어한다는 생각요.” “아니…. 어떻게 널 싫어할 수 있겠니? 이렇게 제이를 닮았는데…….”

루미는 순간 당황한 것 같았으나 곧 환하게 웃으며 품에 안겼다. 발걸음을 멈춘 루미는 1층 로비까지 마중 나온 니스 아저씨에게 “저 사람들은 사법적 또는 양심적 관점에서 다 자격 있는 사람들일까요? 혹 저 사람이 삼촌을 죽인 사람은 아닐까 생각해요. 반드시, 기필코 잡아서…. 척결해야죠.” 집무실로 돌아오자 “장관님께서 전화 달라 하세요.” 어지럽고 역류로 화장실에 있는데 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P.540 시험과 변화

버즈의 촬영팀이 학년 말 고사장 마지막 날 이른 새벽 강당 문이 열리자 버즈는 촬영 시설만 해놓고 철수하였다. 시험에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강당은 누구에게도 개방을 않고 오직 프라임스쿨 보이와 입학, 종강, 졸업 그리고 학년 말 마지막 고사 때만 열었다. 시험 하나에서 세 과목을 보는데 그 전에 선배들에게 영광이 있고, 잘못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중요한 사항은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은 시험지 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답'이었다. 프라임의 정수인 시험 풍경을 신중하게 수첩에 적었다. 수학: 자신의 논리적 체계성, 외국어:자신의 포용 능력, 과학: 자신의 세계관 범위, 법학: 자신의 인간관의 근원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마지막을 기다릴 때 다윈이 나왔다. 지금까지 춥고 배고픈 사람이 다윈이라 버즈는 생각했다. 그리고 다윈은 프라임스쿨은 훌륭한 시설을 갖춘 보육원 이야기 같았다. 오늘의 법학 문제를 레오에게서 얻었다.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중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에 대해서 변론과 반론, 판결을 구하라> 버즈는 시험을 끝으로 촬영도 끝났다. 대강당 문을 열었다. 궁금증이 풀렸기에 한결 후련한 마음에 영감까지 받아 해설부터 모든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560 뜨거운 감자

학년말 고사 마지막 날. 서랍 속 제이 삼촌 사진을 아빠가 가져가고, 해리 헌터는 매춘 운운 하며 할머니 인격 모독하는 바람에 루미는 집을 나왔다. 다음 날 다윈 할아버지 댁에서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는 제이 삼촌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제이는 금목걸이와 학자 타입인 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더구나.” 루미는 비밀 상자를 러너 할아버지께 기꺼이 보여 드리고 싶었다. 1) 분실물은 앨범 속 사진 하나. 그 사람이 사진 하나 빼고 삼촌을 죽였다. (2) 12월 폭동 때 찍은 똑같은 사진이 아카이브에서도 삭제되었다. 루미는 12월 폭동 9지구 사람들이 성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살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자 러너는 방향을 바꾸어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였다. 루미는 격앙되었다. “후대에 역사가 평가받듯 뜨거운 불에서 꺼낸 감자를 손에 올려놓고 펼쳐볼 수 없잖아요.” 러너는 고아원에서 대장으로 세워줘서 삽시간에 9지구를 점령하고, 정부군을 압도하며 8, 7, 6, 5, 4지구까지 진격한 점을 말했다 “1지구까지 진격하고 후드는 어떻게 할까요. 제거해야지.” 러너는 막사 뒤에서 내내 구토를 하였다. 러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여자 아내를 만난 덕분에 새로운 세계와 미래 1지구까지 얻었다. 러너가 루미에게 본질을 물었다. “도대체 그 범인이 사진을 가져간 이유는 뭐라니?”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범인은 삼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그 사진 한 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P.590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12월 둘째 주 토요일. 내 집에 깃든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여 차라리 고아가 되고 싶었다. 한 달 동안 전화하지 않은 이유가 여자 친구 험담했다고 믿는 아버지 앞에서 더 신부 神父가 될 수 없었다. “루미의 허황한 생각에 질렸어요. 아버지는 친구를 내몰지 말지 결정의 선택에 맞닥뜨린 적 없으세요?” 밖의 선거 유세에서도 “척결! 척결!” 1지구가 다른 남은 폭동의 잔재 지구들을 척결·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이가 “세상에서 얼굴에 유일한 모양의 점을 가진 자를 목격한 증인이었다. 판사가 해리 아저씨의 사진을 보았다면 어떡하지.”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그 그림을 없애는 게 어떠냐고 몇 차례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내일 발표회에 리암의 아버지 특수부 윌슨 로이드 검사가 오기로 했다. “니스, 내일을 기대해.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는 아버지, 자기 과거를 위장하는 아버지, 척결에 나설 아버지까지 아버지들의 하는 일을 한꺼번에 잘 보여줄 수 있을 거야.” 앨범을 펼친 제이의 손은 정확히 아버지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게 우리 가족과의 마지막 저녁이에요.” 니스는 단호했다. “후디들이 1지구까지 와서 강도질을 벌이는군.” 이런 아버지의 비난은 오히려 어머니와 나까지 파멸시키는 진짜 강도가 아닌가? 계속 내 귓가에 울리며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이의 집에 도착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드 끈으로 제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 후 앨범에서 아버지의 얼굴 사진을 떼어 니스는 도망쳤다. 계속 사진과 기록 잔재를 없애려면 문교부 직원 자격을 위해 행정고시를 보고 10년 이상을 기다려 왔다. 아버지의 이러한 이중적인 고백에 푸른 독버섯이 돋아났다. 저녁때 다윈은 네온 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는데 루미 네 집 방향에서 내뿜는 날카로운 검은 유난히 밝고 예리한 느낌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동조자이다. 루미 헌터에 더 가까이할 수 없었다.”

P.611 대립

원로들과의 회의를 마친 니스는 네온 강 물결 따라 나아갔다. 다윈과도 넘지 못할 선으로 스트레스가 큰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자식과 적이 되다니 니스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동안 전화 메모를 둘러보다가 버즈 친구의 전화를 들었다. 다윈에게 무슨 문제가 있니? 자기는 다윈에게 내레이션을 맡기고 싶었는데 자기 혼자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이 소식에 니스도 프라임스쿨의 목소리를 대변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다윈이 맡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왜요? 프라임스쿨 위원장으로서 전혀 반대 관점을 취하시는군요. “아니야. 네 아버지로서 하는 말이다. 아버지도 제 나이 때 할아버지 허락 없이 여러 일을 하셨잖아요. “다윈은 그렇게 말한 뒤 대화의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니스도 더 다윈을 불러 세울 명분이 없었다.

P.625 영광을 위하여

둘째 주 일요일 정오러너는 니스와 다윈을 맞았다. 둘이 같이 내리면서도 거리를 두고 다가왔다. 식탁에서도 활기가 돌지 않았다. 니스는 그랬다 해도 다윈의 고정된 채 미동도 없는 눈동자란 아들보다 더 심각했다. 오래된 문제는 시간을 오래 들여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러너는 얼마 전 루미가 다녀간 일을 얘기했다. 먼저 다윈이 바짝 다가왔다. “루미가 왔었어요?” 니스도 루미가 왔었느냐고 물었다. “그래, 제이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할아버지, 절대 루미를 집에 들이지 마세요. 만나지 않을 거예요. 혹 루미가 ID 도용한 불법행위를 말했나요?” “아니다!” 니스도 불평했다. “아버지 열여섯 이후에 제 인생이란 게 있었나요? 아버지 저지른 잘못을 숨기기 위해 평생을 바쳤어요.” “니스야! 네 위의 장관, 대통령도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너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비리를 저질렀을 거야. 카멜레온이 제 몸 색깔 바꾼다고 누가 비난하더냐?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뿐이지. 혼탁한 세상에서 아무런 죄짓지 않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으냐?”

P.634 결정

다윈은 언제까지 아버지를 증오하고 구토만 하고 있을 것인가? 수천 수백만씩 살인자라 외쳤어도 왜 아버지의 살인한 이유를 찾는 일에 소홀했을까? 그러나 그 이면에도 나름의 개연성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처절한 고백, 할아버지를 위해 16세 이후 평생 바쳐온 인생이란 구토보다 처음으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크게 소리 내 울었다. 신도 아버지도 아닌 16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드렸다. 지난 30년간 죄의식으로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매년 7월 10일 추도식 예배에서 새롭게 출생신고하듯 자신의 정체를 확인해 온 것이다. 시험문제 해답을 얻었다. 아버지께 열여섯 살 이후의 인생을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아버지는 죗값 받고 자수시키자. 모든 진실을 밝히자. 레이 아저씨 살해와 사진과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 낱낱이 밝히자. 신뢰와 존경을 반납하자. 아버지는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죄를 회개한 아버지로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니 놀라울 정도로 평온함을 느꼈다.

P.642 대결

12월 둘째 주일 오후. 루미는 엄마와 할아버지 집 청소하러 갔다. 삼촌 방에 있는 테이프에서 삼촌의 목소리가 끊겼다. "할머니, 삼촌이 녹음하는 기계 있었나요?" "글쎄다. 버즈 아버지가 전자제품 훌륭한 발명가라 했어. 삼촌이 살해되던 날 라디오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두 가지 중 하나는 그날 밤 라디오를 듣지 않았고, 다음으로 한밤 음악 방송을 녹음한 뒤 카세트를 껐을 것이다. 2년 만에 레오에게 전화했다. 언젠가 레오는 “루미, 넌 네 삼촌을 비추는데 네가 가진 빚을 다 써버릴 것 같아.” 그 후 그는 점점 멀어져 갔다. “레오, 아빠 스튜디오 전화번호 좀 알려줘.” “버즈 감독님, 안녕하세요.” “루미였구나. 지금 바쁜데 다큐멘터리 제작 일정 때문에 정신없구나. 내레이션 다윈이 하는데 그러면 올 수 있으면 그날 오거라.” “누구니?” “레오” “프라임스쿨 학생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구나.” 아빠였다. 지는 해가 창을 넘어 아빠 얼굴 반쪽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이것이 루미는 대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실을 들여다볼 줄 아는 온전한 루미의 눈, 겉으로 드러나는 것밖에 못 보는 반쪽짜리 아빠의 눈. 진실이 드러나면 쓸모없는 눈까지 마저 찌르며 무릎 꿇어야 할 것이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P.656 다시 돌아온 새

니스는 10대 때 즐겨 부르던 노래와 가수를 떠올렸다. 벤 헐크 그는 뛰어난 음악가였다. 6지구 출신이었다. 그의 노래는 부모님 눈길을 피하고 싶었던 일 중의 하나였다. 전축 앞에서 ‘그림자’ 가사가 생각이 났다.

‘땅거미가 질 무렵 날 뒤 따라오고 있는 외로운 친구를 봤어. 그와 평생을 같이하게 될 걸 직감했지.’

차창을 두드린다. 저녁을 먹는 것보다 배고픈 채 음악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을 때가 있다. 그래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깜짝 놀라 니스는 해제 버튼을 눌렀다. 다윈이 들어오며 “아버지, 왜 여기 계세요.”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니스는 어릴 적 친구 얘기를 했다. 한해 마지막 날 양말 벗고 자기 숨은 죄가 측정되는 특수한 저울에 올라가야 한다고 했지. 3g 이상 뜨면 새해 맞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나. 처벌받아야 한 대. 그이가 제이 헌터였나요? 그렇지. 무척 순결한 친구였어. 그런데 죄에 대하여 처벌을 받으면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얘기니?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면 어제 나이든 원로들에게 속으로 아파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 사람은 어떤 벌을 받을까? 벌을 내릴 필요는 없어요.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잘못을 충분히 만회했으니까요. “우리 아들 너그러운 재판관이구나.” 러너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문을 두드렸다. 니스는 아버지를 보자 화해신청을 받아들였다.

P.668 영광의 그늘

금주에 프라임스쿨에 두 가지 소식이 번졌다. 하나는 월요일 오전에 다큐멘터리 해설자로 다윈의 선정 건이었다. 적대적인 여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이라는 강령은 하위 지구에 나도는 선거구호 아니었던가? 계급화의 정점에 서 있는 프라임스쿨에는 걸맞지 않아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금요일 오후 법학 통론에서 100점이 다윈 영뿐이었다. 담당 교수는 마지막까지 홀로 남았다가 변호하지 않은 답안에 시험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 변론, 반론, 판결을 맡게 되니까 한 사람이 동시에 수행하는 재판은 없지. 이 시험을 진짜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윈뿐이었다고 교수가 불러 미소지으며 말했다. 현관 앞에서 기다렸던 레오가 내레이션에 선정된 다윈을 축하해 주었다. 다윈은 아버지에게 “이젠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고 전화를 드렸다. 버즈 아저씨의 안내로 칭찬 속에서 1인칭 소년의 시점으로 쓴 원고가 몰입하게 되어 잘 마쳤다. 헤드폰을 벗고 고개를 드는 다윈에게 유리 벽 너머로 루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P.680 카세트의 행방

다윈은 루미와 버즈 아저씨 셋이서 스튜디오 맞은 편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루미는 물었다. “죽기 전 할머니로부터 돌려받은 고급 카세트에 녹음 중 중단된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지 않으세요?” “글쎄,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기숙사를 하도 싫어해서 제이는 프라임스쿨에 합격하고도 일반중학교에 갔으니까. 나는 불합격했지. 거기에다가 죽기 전날 니스와 셋이서 다음날 발표회가 있었는데 신청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다투고 나는 집으로 나왔지. 제이가 죽으며 니스와도 멀어지게 되었어. 30살 무렵 헌터 부인은 부정을 저질렀고 조이는 헌터씨 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지.”

“아저씨는 그 카세트 아직 버리지 않으셨죠?” “버리지 않았겠지만…. 범인이 9지구 후디 중 한 명을 어떻게 특정 지울 수 있어? 제이와 아는 사람이 범인이라니.” 그 때 버즈에게 9지구 사람들이 비둘기 똥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정면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제이가 떼어냈을 수도 있었겠다.”

다윈은 한마디도 제이 문제에 끼어들지도 않았고 식사도 한술 뜨지도 않았다. 루미는 버즈 아저씨에게 카세트 찾아주시라고 다시 당부하였다. 버즈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루미와 다윈을 태운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었다.

루미가 다윈에게 안 본 사이 넌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하자 그렇다며 새해에 루미가 자기를 끊을 거라고 말했다.

루미는 다윈과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현명하리라 판단되었다. 어렴풋이 삼촌의 모습이 보이었다.

P.708 프라임스쿨에서의 마지막

종업식으로 학교는 폭설까지 겹쳐 순백 동산으로 바뀌었다. 여기저기 주인 잃은 소지품들과 성서처럼 취급받던 서적들이 계단에 나뒹굴었다. 1년간 룸메이트 에단과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잎과 열매를 다 잃고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는 온몸으로 상실이 끝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다. 다윈은 이 위로를 마음에 새겼다. 레오가 찾아왔다. 오늘이 날 보는 마지막일 거야. 법학 과목 낙제했거든. 죄도 용서도 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 세상에 인간이 인간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고 썼는데 교수님은 0점이었나 봐. 늦지 않게 종업식에 참여하자. 대강당은 여전히 수도원 모습으로 천장엔 창조주의 뜻을 새긴 세계가 그려져 있었다. 다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 숙이고 두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P.719 집으로 가는 길

니스는 교장과 인사를 하고 축사하기 위해 강단에 섰다. “인생이란 과도기가 결코 없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현재는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고, 그 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생은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일을 위하여 희생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은 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완성되어 있다. 오늘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짝짝~~)

종업식이 다 끝나고 다윈과 둘이서 정문 밖 긴 가로수길을 걸었다. 제일 가까운 친구라도 모르는 면이 있다는 말에, “아빠, 저는 아빠가 제일 가까운데요. 그래 네가 나를 모르는 길이 있고 나 역시 나를 모르는 길도 있다. 그러면 무섭지 않으세요. 인간은 무서운 존재지. 제어되지도 않는…. 그래서 인간은 사랑. 사랑으로 산다. 그래서 사랑은 믿어도 된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초청하면 어때요. 우리 집으로 초청하자꾸나.

P.729 호두나무 거리의 성탄절

러너는 니스가 자기 집으로 초청했을 때 이제 각자 집에서 보내자는 뜻인 줄 알고 불쾌했었다. 멀리 니스와 다윈이 보였다. 니스는 문을 열어 주고 다윈은 내리자마자 할아버지 품에 안겨 왔다. 운전기사는 정말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했다. 이제 다섯 시간 후면 다윈이 다큐멘터리에 나오겠네. 다윈은 저의 약한 모습 보여서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항상 어머니를 닮아서 유약하다고 한 말을 기억했다. 러너는 항상 목소리만 컸지 매번 어머니에게 졌다고 했다. 맞아요. 반대하셨어도 결국 가족사진 하나 거는 그것까지 어머니의 뜻대로 하셨어요. 니스 역시 어머니 말씀이라며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니스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지키고 계셨다면 좋았겠다고 하자 러너는 ”있지 않나. 네 핏속에, 다윈의 핏속에 우리 영 가문이 멸망하지 않는 한 네 어머니는 영원히 이 세상에 있다. 니스는 아버지가 감상적인 말 하실 줄 몰랐어요. 내 안에 네가 알지 못하는 면이 아직 많이 슴겨 있다고 러너가 말하였다.

P.747 유예의 시간

불꽃 열기에 다윈은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빛나는 영광은 재가될 터인데 프라임스쿨 다큐멘터리가 전국에 울려 퍼진 후 장작더미 불처럼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될 터인데 마음 졸이며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서로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만 드러났다. 우리 모두 포도주잔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건배 “사랑을”하고 외쳤다. 레오의 전화가 울렸다. “다윈, 루미에게 카세트 찾았다고 전해 줘. 2년 전에 번호 다 잊었다고 해.” 일곱 시 정각 10분 전에 다 모였다. 그런데 ‘이 집안에서만이 아니고 집 밖에서도 어떤 힘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작용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다윈은 그 힘을 앞질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할아버지의 숨죽인 목소리였다. “프라임스쿨은 땅보다 하늘에 가깝다는, 누가 한 것인지 모르는 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P.750 자기와의 화해

프라임스쿨 다큐멘터리 평가가 잡안에서 이루어졌다. 니스는 버즈가 확실히 대가의 경지에 오른 아티스트의 거장, 러너는 작품을 수작 나아가 걸작, 마리는 다윈이 저런 대단한 학교에 다니며 주인공이 되다니…. 눈물을 글썽였다. 니스는 다윈의 이마에 키스했다. <내용은 그림이다.>

대표

니스는 친구 버즈에게 또한 아들 다윈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버즈는 자기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이런 귀한 작품울 헌사하다니 몇 차례 반대했던 것을 후회하였다. 다윈은 아들이기에 과소평가하여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후회하였다. 비록 프라임스쿨을 수재 중인 수재 제이가 포기할 때 니스 자신은 엄두에 못 내 스스로 응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문교부 차관까지 오르게 된 것은 얼마나 영광인가 할아버지의 위로였다. 제이에 대한 추억은 가장 훌륭하다는 것과 인생에서 만난 지독한 악마이며 그를 죽인 자신은 더 지독한 악마일까... 좋은 저녁으로 니스를 이끈 일이 더 있다. 하나 식을줄 몰랐던 아버지 향한 분노, 둘 가슴 졸였던 다윈과의 불화, 셋 공허함만 주었던 공무원 생활이 오늘로 모두 극복될 것 같았다. 재혼은 더 이상 안하기로 했다. 다윈이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 포도주 때문에 어지러웠고 토할 것 같았다가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니스는 어린 다윈에게 직접 포도주를 따라준 자신을 자책하였다.

P.763 새로 쌓은 탑

다큐멘터리가 준 효과는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1. 다큐멘터리 후 다윈의 몸을 곧추세우기가 어려웠다. 포도주가 아니라 이성, 논리, 법규, 양심의 축이 휘청대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마리 아주머니 등 셋은 감탄했지만, 이것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뿐 절대 꽃이 될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 다윈의 회복은 프라임 학교와 다윈 영 자신이 정교하게 합일되어갈 때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비추던 하늘은 자신의 이상이 되었고, 도서관은 자신이 디딘 신세계, 운동장은 정복해야 할 남은 땅, 문 닫힌 고사장은 자신의 내면, 등 燈의 빛 소비는 자신의 지혜, 대강당 불 밝힌 것은 자신의 의지이었다.

2. 프라임스쿨은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거울 속의 사람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3. 제이 아저씨의 입학 취소는 자기 아버지가 기숙사 선택을 말렸기 때문이지 어려운 과정을 예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수재 중 수재를 보고 좌절했던 니스 아버지가 잘못이었다. 입학은 쉬운데 입학 후가 진수였다. 낙오 이기는 정신훈련, 선택받지 못했다는 고독감, 이상 닿기 위한 초인적 노력 등을 이겨내야만 진짜 위대하다고 칭송을 받는다.

4. 제이 아저씨 죽인 사건이 정의가 아닌가? 일생 니스에서 부정을 못 봤다. 옳지 않은 말 못 들었다. 사회 정의 역행하는 일은 무경험자이다. 즉 니스는 정의 자체이었다. 조상 중 살인하지 않은 조상을 가진 핏줄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5. 죄의식에 굴복해 쓰러져야 하는가? 당시 ’너는 살인자야.”라고 했을 때는 술에 만취되어 착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6. 아버지 죄 밝히려던 것이 결코 사랑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7. 변호: 인간으로서 가장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 해도 네가 최후까지 변론해 주어야 할 사람은 너를 낳고 너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준 아버지이다.

8. 결론: 겨우내 작성한 아버지 고발장과 영원히 프라임스쿨을 떠날 각오는 적이 저지른 사고 같았다.

P.775 그 날의 재구성

1. 출근하려는 참인데 아버지를 불렀다. 레오 아저씨 추도식에 안 가려고 합니다. 저에게 의미 없는 일이니까요. 아버지께서도 내년부터 안 가시는 게 어때요. 어머니도 10주년에 마쳤으니까요. “한 번 생각해보겠다.”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할 수 있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2. 루미가 찾는 카세트가 내 아픔의 여진 진원지였다. 그렇다면 녹음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이틀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미드나이트가 삼일 방송되었다. 살해당한 날 아침 라디오가 꺼져 있었다. 그러면 녹음되지 않았다. 1지구는 1심판결이 최종 판결이 된다.

3. 레오 마샬이 ‘레이 헌터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라고 하였다. 전화 왔을 때 좀 더 카세트 열어보고, 테이프 있었는지 물었어야 했다.

4. ‘미드나이트 뮤직’은 자정에서 두 시였다. 살해 시간은 1시쯤이었다. 30년 전 7월 9일에서 10일로 바뀌기 바로 직전이었다. 제이 추적꾼, 니스, 녹음 카세트 세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살해사건에 녹음기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구미 할머니는 버즈 아저씨에게 전달했다.

5. 결론: ① 재구성한 결과 객관적 이성적으로 다윈은 자신의 두려움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② 살해 시점상 테이프에 범인의 정체에 관한 단서가 녹음될 수 없었다. 2심은 끝났다.

③ 조이 아저씨의 증언: am 1시경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중에 듣지 못했다고 했다.

④ 살인자: 계획된 범행이다. 후드를 감추려는 것은 신분을 감추는 일이다. 그리고 완전 범죄로 살해했다. 완벽하게 제압했다.

⑤ 죽은 자: 침대 밑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저항도 있었던 거라면 비명도 있었을 것이다. 동생 조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⑥ 그렇다면 단서는 없다. 제로다.

할아버지 봄 되면 노년 힐 정리하고 이 집에서 사시면 어때요? 다윈이 아버지께 설득하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P.795 버즈 아저씨의 방

제라늄 거리에 위치한 할아버지 피터 마샬의 2층 저택은 외관에 흐르는 피폐함이 더 불거졌다. 떨어져 나간 지붕 테두리, 깨져있는 현관 등. 죽은 나무들, 녹슨 동판 위의 피터 마샬 문패, 고장 난 초인종, 집안 온통 먼지 더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병이 선반, 책상 위에 빈 병으로 가득히 쌓여 있고 시각이나 청각이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노인 한 분이 채널 1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나자 “버즈냐?” 물었을 뿐 대화가 되지 않았다. “루미 헌터이에요.” 듣지도 못했다. 2층으로 올라가 보아도 2~3일 전 카세트를 찾으려 했던 발자국만 있을 뿐 카세트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너무 실망했고 교복을 입고 온 그것이 후회되었다. 레오 마샬이 연락 없이 여행을 떠나다니 배신감만 들었다. 버즈 아저씨도 살아서 절대 가지 않을 집이라고 했듯 이곳에 왔었다고 레오나 버즈 아저씨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삼촌의 영혼이 깃든 물건을 찾기보다 레오와의 만남이 더 우선이고 귀중하다는 생각만 하게 해주었다. 노인의 손목에 프라임스쿨 레오 마셜 이름이 새겨진 시계는 노인이 꼬마 레오가 준 성탄절 선물이라고 했다. 루미는 얼어붙은 땅 위를 걸으며 쉼 없이 움직이는 네온 강을 바라보며 이 일을 계기로 레오와의 관계가 회복될 기미를 보았다. 벌써 2~3시간 지나 어두워지고 저무는 해는 언젠지 모르지만, 차라리 레오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거라 말하는 것 같았다.

P.808 12월 31일

휴식기에 접어든 자연처럼 프라임스쿨 학생도 휴식 기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다윈은 외국어 문법책을 펼치며 부족함을 안고 새해를 맞이할 수 없지. 시험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이다. 단어 성질, 문장 구조를 파헤치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왠지 자신감이 돋아났다. 마리 아줌마가 “이제 편안해졌나 봐 성탄절에 포도주라 했지만 지나간 폭풍이었구나. 다행이야.”라고 하셨다. 12월 31일에 아버지와 식사를 1년의 마지막 날 하게 되어 행복하다. 내일은 새해 할아버지 댁에서 파티가 열리니 기다려진다….

아빠는 12월 마지막 일이니 쉬라고 하신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하고 싶어서요. 요즈음 공부하는 게 즐겁거든요.”

갑자기 할아버지 전화에서 “내일 변호사 많이 배출한 가문의 손녀를 소개해 줄게. 프리메라 여학교 같은 나이라더구나.”

루미 헌터를 포기해서 새로 교제하라는 배려의 전화였다.

레오의 전화가 이어졌다. 8지구인데 오늘과 내일은 집에 가겠단다. 만일 없으면 어머니는 실종 신고하실 게 뻔하기 때문이란다. 그동안 촬영 작업 잘 마쳤단다. 그리고 루미에게 카세트 찾은 거 얘기했냐고 해서 성탄절에 너무 바빠서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레오는 카세트 열어봤냐? 테이프가 있더냐, 녹음되었더냐? 어떤 내용이었느냐 내가 물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답변하는 것으로 보아 내가 이 문제로 얼마나 혈안이 되어있고 대화할 때마다 나의 심장이 얼마나 떨리는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일 할아버지 신년 파티에 참여해 줄 수 있냐고 묻자 어머니의 걱정이 있겠지만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레오야! 나 지금 9지구로 갈게.” 그러자 프라임스쿨 교복 같은……. 하다가 전화가 끊겼다. 11시 3분 늦겠다. 후드는 어디 있지 허둥지둥 찾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좋은 잠바면 다 뺏길 텐데…. 그때 벤이 물고 온 것을 받아든 다음 벤을 와락 껴안았다.

P.821 똑바로 선 인간

카세트 때문에 휘몰아치는 의심에 폭 싸여 센트럴역에 선 다윈은 좀 진정시키며 다가오는 기차를 봤다.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와 같았다. 이렇게 후드를 감추어 들고 1년의 마지막 날 9지구로 향하는 이유가 뭘까?

3지구 내릴 때 답을 확신하였다. 이성의 힘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레오를 신년 파티에 데려가는 것이었다. 6지구에서 후드를 갈아입었다. 8지구에서 9지구로 가는 기차는 텅 비어 있었다. 적막한 플랫폼에서 레오를 만났다. 포식자들이 들끓는 벌판에서 문명인으로 존재 확인시켜줄 유일한 동족을 만났다니 놀라웠다. 더 놀란 사람은 레오였다. “이 후드 어떻게 된 거야?”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돌려준 거야.”

레오는 입을 열었다. “루미에 대해 그동안 비꼬기만 했는데 미안하지. 그러나 이 카세트 주면 잘못을 조금 만회할 거야. 다윈 너도 기쁘겠지?” 카세트에 건전지가 다 닳아 다윈이 준비한 거로 바꿔서 레오가 다시 멈추었던 부분부터 재생했다. 그때였다.

대표

대표

“다윈” 어떻게 된 거야. 이날은 살해된 날이잖아.

다윈은 무릎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살려달라고 빌어야지. 아버지와 나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빌며 애원해야지. 다윈은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맞은편 검은 차창 위로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꿇지도, 두 손을 비비지도 않는……. 똑바로 선 인간.

P.833 다윈 영 Darwin Young

루미는 로이 헌터 딸임을 처음으로 느꼈다. 검은 색 겨울 원피스와 코트, 두꺼운 스타킹, 굽 낮은 구두로 나서며 울음을 터뜨렸다. 품에 안긴 딸의 어깨를 감싸 주며 “괜찮아. 당연한 거야.” 그러나 레오의 죽음으로 자신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었다. 비보를 듣고 해외에서까지 모두 돌아온 천명이 넘는 재학생 전원이 위로하는 프라임스쿨 엄숙한 장례식장 공동묘지. 사인 死因은 카메라와 소지품 탈취의 목적이며 9지구에 갔다가 일월 이삼 일경 하위 지구 순환 기차 화장실 안에서 목이 졸려 5일에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그가 묻히는 1지구 외곽 세인트 폴 공동묘지는 단명한 미성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레오가 떠나는 길에 함께하신 조객을 향하여 감사 인사를 할 때 안아주는 니스 아저씨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레오 아버지인 버즈 아저씨는 “레오에게 해 줬어야 할 말입니다. 여러분, 부디 지금 곁에 서 있는 친구를 소중하게 여기기를 바랍니다. 학교를 떠나 어른이 되어 다른 길을 가게 되더라도 언젠가 가장 힘든 시간이 오면 그 친구는 다시 여러분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어 줄 것입니다. 여기 내 친구 니스 영처럼.” 그 순간 루미는 이 묘지들 사이에서 홀로 공허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내 옆에 서있는 친구는 누구인가? 레오가 영원히 떠났고 다윈 영도 떠났고……. 후회로 시작된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a human being, not a ghost’ 15살 사망한 미아 폰즈 여아 묘비가 띄었다. 누군가 자기 보라고 써 놓고 간 것 같았다. 인간 아닌 유령으로 산 적이 있었다니……. 그런데 잎을 다 잃고 마른 가지만 하늘로 무성하게 뻗치고 있는 나무처럼 저 멀리 다윈이 서 있었다. 루미는 무덤들을 지나 자신도 모르게 유령에게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갔다. 다윈이 고개를 그녀에게 돌렸다. 그리고 미동 없이 나무 밑에 서 있었다. 지금 다윈도 이 세상에 홀로 외로이 존재하는……. ‘단독자’ 같아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

다윈의 시선 쪽으로 루미도 고개를 돌렸다. 멀리 조문객들을 응대하는 니스 아저씨가 보였다.

“넌 어떻게 지냈어?"

놀랍게도 아무 말없는 다윈의 얼굴에서 조소가 아닌 미소를 보자 붉힌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레오는 제이 삼촌에게서 벗어나 내 인생을 찾으라고 했어.”

다윈이 말했다. “레오는 지금도 듣고 있어.”

다윈의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미는 돌아선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유령인 것 같아. 제이 삼촌에 집착하다가 아빠, 레오 심지어 다윈 너까지 잃었어.”

뒤에서 다윈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네 인생을 되찾아.”

루미는 뒤돌아 다윈을 보는 순간 눈물이 저절로 멎었다.

“그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탁 하나만 들어 줄래?”

루미는 다윈이 뒤따라오는 것을 의식하며 걷다가 한 무덤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제이 헌터 삼촌의 묘였다.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익한 아들이었노라.”

성경 구절을 보며 삼촌을 불렀다. “오늘 저는 진짜 죽음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레오의 죽음 앞에서 그 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어요. 삼촌도 이제는 제 삶으로 돌아갈 때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저를 이곳으로 부른 거 맞죠?”

루미는 다윈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윈이 웃으며 말했다. “난 널 좋아해. 루미. 넌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여자야. 널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루미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루미는 진화한 다윈이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을 느꼈다. 돌발적으로 다윈에게 입을 맞추었다. 다윈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아들였다.

루미는 다윈과 손을 잡고 입구로 걸어갔다.

니스 아저씨가 말했다. “둘이 같이 있었구나.... 그래 친구를 잃었으니 서로 위로해 줘야지.”

다윈이 말했다. “루미랑 같이 제이 아저씨 묘에 다녀왔어요. 루미가 아저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니스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루미 네가 도리어 이렇게 활기가 느껴지니.”

“맞아요. 놀라운 일이예요. 죽음이 삶을 더 환하게 비쳐주는 등대 역할을 한다는 건. 저도 다윈 덕분에 깨닫게 되었어요.”

바람이 거셌다. 아빠가 “그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죠.”라고 말했다.

루미는 다윈과 맨 뒤에 서서 걸어가는데 “춥지?”하며 다윈이 그녀의 오른손을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루미는 주머니 속에서 다윈의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끝>

March 21st 2022 23:20

Andrew Ahn

[Andrew]

인간은 선악간에 살아간다. 선을 추종하지만 악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856쪽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3.12~21에 요약하며 저 놈 하다가 이 놈 하며 약해진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마치고 나니 지금도 인생의 깊은 세계로 여행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친구. 책을 소개해 주신 권은희 회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Andrew]

죽음도 인생의 한 과정이다. 이 죽음은 악의 기원 에덴 동산에서 왔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시작된다. 최장수는 969년 무두셀라로 정점을 찍는다. 노아 홍수 이후 120년이란 세월을 향유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인생의 마지막 과정인 죽음의 행사 니스의 친구 레이 추도식으로 시작하여 니스의 아들 다윈의 친구 레오의 추도식으로 끝을 맺는다. 악의 뿌리는 생명의 축소이며 단명으로 영원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니스 영이나 다윈 영 부자 父子처럼 칭송과 경외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고 목표이다.

[Andrew]

<뮤지컬>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어른이 된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