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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風 雲
그들의 바로 옆,
어느 사이엔가 그곳에는 한명의 늙은거지가 앉아 있었다.
(언제 나타났을까?)
이검엽과 능운라는 서로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이때,
거지노인은 야릇한 시선으로 이들 두 남녀를 응시하며 내뱉았다.
{클클.... 천생연분이로다.}
이말에 이검엽과 능운라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능운라는 얼굴을 붉히며 다소 불쾌한 듯 물었다.
{노선배님은 도대체 누구신데.....?}
거지노인인은 상대방의 말 중간에 톡 내뱉았다.
{킬킬... 다 늙어 죽어가는 늙은이 이름은 알아 무얼해?}
능운라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거지노인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보다 이검엽에게로 바짝 다가 앉으며 거칠게 물었다.
{흐흐...이놈 허여멀건 녀석아, 너는 노부에게 술 한잔 살 용의가 있느냐?}
이검엽,
그로서는 이미 거지노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미소하여 담담히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노인장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마시게 해 드릴 수 있읍니다.}
{킬킬... 좋다!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네 녀석은 계집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거지노인은 유쾌해지자 마구 지껄여대였다.
{원하는 계집을 누구라도 네 녀석의 침실로 주마.}
이검엽은 다소 얼굴을 붉혔다.
{소생은 이미 처가 있읍니다.}
그러나 거지노인은 막무가내였다.
{낄낄...상관없다. 본시 이 늙은거지의 취미는 중매서는 것이니까.}
그는 신이 난듯 침을 튀겨가며 계속 떠들었다.
{이 늙은거지에게 술만 거나하게 마시도록 해다오. 그럼 계집은 얼마든지 붙여주마.}
이검엽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노인장께서 원하신다면 술은 사드릴 수 있읍니다.
하지만 소생은 한 명의 처로 만족합니다.}
거지노인은 누런이를 드러내며 웃어댔다.
{낄낄...웃기지 마라. 네 녀석의 이마에는 도화문(桃花門)이 훤하다.
네 녀석이 원치 않아도 주체 못할 만큼의 계집을 얻을...어이쿠!}
갑자기,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냅다 비명을 질렀다.
{청아! 이 거지할아버지 수염은 참 웃기다.}
홍의소녀였다.
그녀는 사정없이 거지노인의 수염을 홱 잡아당긴 것이다.
옆에서 청의소녀가 좋아라 손뼉을 쳤다.
{정말! 꼭 염소수염 같애.}
장난이 심한 두 소녀,
그녀들의 관심이 이검엽에게서 거지노인에게로 옮겨간 것을 어찌하랴!
그녀들은 거지노인에게 착 달라 붙어 법석을 떠렀다.
특히.
그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거지노인의 수염이었다.
그 수염은 잡아 당기고 비틀며 일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아이쿠! 이 못된 놈들아. 아구구...거지 죽네!}
거지노인 역시 보통 법석이 아니었다.
{아구...거지 살려!}
그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능운라,
이 점잖은 여종사(女宗師)는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청아! 홍아! 노인께 이게 무슨 짓이냐?}
{헤헤,.. 재미있는걸 뭐...}
청의소녀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이때,
홍의소녀는 재차 수염을 공격했다.
인정사정없이 획 낚아챈 것이었다.
{어이쿠!}
거지노인은 두 손으로 수염을 감싸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홍아!}
능운라가 황망히 외쳤다.
하나,
홍의소녀는 그 말을 못들은 척 더욱 거지노인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헤헤...할아버지! 왜 홍아하고 안놀아주려고 그래요?}
거지노인은 울상이 되어 엄살을 피웠다.
{아...이 녀석아, 제발 살려다오. 이 수염이 어떻게 기른 수염인데...}
그는 짐짓 때가 찌든 자신의 수염을 소중하게 매만졌다.
청의 소녀는 토라진 듯 코방귀를 날렸다.
{그깟 수염가지고 뭘 그래? 괜히 놀아주기 싫으니까!}
홍의소녀가 맞장구 쳤다.
{그러세 말야! 홍아하고 청아가 무서우면 냉큼 다루에서 나가면 될걸.}
거지노인은 그말에 대뜸 노발대발이었다.
{이 녀석들아! 저 희멀건 녀석한테 술도 못얻어 먹었는데 어떻게 가느냐?}
홍의소녀의 얼굴에 장난스런 웃음기가 피어 올랐다.
{홍아하고 놀다가 술마시면 되겠네.}
거지노인은 펄쩍 뛰었다.
{관둬라! 술 한잔 마시고 수염을 몽땅 뽑히느니 그냥 가는게 낫겠다.}
거지노인의 신형이 술취한 듯 비틀하는가 싶은 순간이었다.
휘르르..
그는 연기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검엽은 그것을 보자 내심 감탄했다.
(대단한 경공이다!)
이어 그는 홀깃 능운하를 쳐다보았다.
능운라,
그녀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한데 그것은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다루 안의 사람들 모두다 그녀처럼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문득,
능운라가 무릎을 쳤다.
{그렇군. 그분 노선배님은 바로 천지신개(天地神개)였어.}
비록 혼잣말이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컸다.
그 말에 다루 여기저기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아!}
{천지신개였다니! 그 거지노인이!}
이검엽조차 흠칫했다.
(천지신개! 바로 우내사성(宇內四聖) 중 개성(개聖)이 아닌가?)
천지신개(天地神개),
그는 당금 개방방주(개幇幇主)의 철심혈걸(鐵心俠乞)의 사백조(師白祖)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이미 삼십 년(三十年) 전에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나,
이 이후로도 그는 공히 개방 사상 최강의 인물이었다.
{드디어 사성께서 제출도 하셨나 보군.}
능운라는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곁에서 홍의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사부님, 그 늙은 거지할아버지가 개성(개聖)이야, 그럼.}
능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이제 사성께서 출도하셨으니 이 무림의 혼란도 오래가지는 못할거야.}
이어,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종(一宗) 매노선배님까지 다시 무림사에 관여해 주신다면
이 혈란도 일 년(一年)이 못되어 가라 앉으련만...}
그 말을 이검엽은 똑똑히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절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대들은 다시는 그 분의 태산같은 모습을 뵈올 수 없을 것이오.}
문득 그는 마음 한구석이 저며드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때,
한 명의 금포인이 급히 다루로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 중얼거렸다.
(금벽궁(金碧宮)의 수하인가?)
과연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금포인은 금벽궁의 제 이부주인 금도천왕 앞에 급히 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는 숨이 넘어질 듯 다급히 말했다.
{부궁주님! 드디어 나타났읍니다.}
{뭣이!}
금도천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한결같이 긴장과 흥분에 싸인 시선이었다.
금도천왕은 금포인에게 물었다.
{혈세사패의 동태는?}
{예, 백살파, 지옥림, 요지 등 삼패(三覇)의 고수들이 다수 보였으나
아직은 이렇다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읍니다.}
금포인의 대답을 듣자 즉시 금도천왕은 자리를 떠났다.
{가자!}
{예.}
그들 두 사람이 나가자 장내는 금세 술렁거렸다.
뒤이어,
다루 안의 사람들 역시 모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능운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공자님, 잠시였으나 즐거웠어요. 신첩도 이만 가 보아야겠군요.}
이검엽도 마주 서 포권했다.
{예,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한바탕 혈풍이 불것만 같은데...
옥체를 보증 하십시오.}
{감사해요. 이공자님.}
그녀가 인사를 마치고 나서자 청의소녀와 홍의소녀가 따라 나섰다.
{아저씨 안녕!}
청의소녀는 귀여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데 그때,
홍의소녀가 문득 쪼르르 이검엽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이검엽의 귀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아저씨, 우리 사부님 어때요? 예쁘죠?}
{그래.}
이검엽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홍의소녀는 다시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됐어요. 아저씨를 우리 사부님 신랑으로 결정했어요.}
{어이쿠, 이런!}
이검엽은 가볍게 홍의소녀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저씨가 혼내줄테다.}
{헤헤,.. 아지만 홍아는 결심했는걸?}
홍의소녀는 입을 삐쭉해 보이고는 다람쥐같이 달려나갔다.
{귀여운 녀석...!}
그는 조용히 미소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여러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 속에 떠올랐다.
(이곳 서안(西安)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일순 그의 짙은 검미가 꿈틀했다.
(팔절이 긴자하여 개입할 정도의 일이라면 혈세사패의 수뇌들도 나타나리라...)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섰다.
(굳이 무림에 개입할 필요는 없으나 검황종 매노선배님의 원한을 풀어드릴
다시 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백운이 반겼다.
푸르르..!
백운은 여물을 잔뜩 먹고는 힘차게 두레질을 해댔다.
{자, 백운! 다시 수고를 해주어야겠다.}
그는 유연하게 백운 위로 올랐다.
이어 관도로 나오자,
그는 바짝 긴장했다.
살기(殺氣).
팽팽한 살기가 관도를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그는 일단 묵묵히 전진했다.
약 이 리(二里) 정도 갔을까?
문득,
창! 차창!
요란한 병기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싸우고 있는가?}
그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관도를 벗어난 숲속의 공지.
그곳에 당도해 보니 과연 한바탕 접전이 불을 뿜고 있었다.
세 명의 홍포검수(紅袍劍手).
그에 맞선 한 백의인(白衣人).
이들은 그야말로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홍포인들의 검세(劍勢)는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번__ 쩍!
강렬하기 짝이 없는 검광(劍光)이 연신 일직선으로 곧장 뻗어나갔다.
그것은 백의인을 금시라도 천참만륙을 낼 것만 같았다.
하나,
백의인.
그는 한 자루의 기형장도로 이들과 맞서고 있었다.
얼핏,
백의인은 세 명에 포위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백의인의 도(刀)는 악랄무비하기 짝이 없었다.
파파파팟!
그것은 세 홍포인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쾌도(快刀)였다.
이검엽은 그를 보자 내심 중얼거렸다.
(백살파의 마졸이군.)
언뜻 이검엽은 그 자의 소맷자락을 보았다.
앗!
그곳에는 언젠가 상대했던 백의인과 동일한 핏빛 장도가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백의인은 백살파에서도 꽤 뛰어난 인물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과연 백의인의 도세는 실로 엄청났다.
세 홍포인의 맹격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한순간,
{흐흐... 죽어랏!}
번__ 쩍!
쐐액__!
쾌도(快刀)!
섬전을 방불케하는 쾌도식이 허공을 갈랐다.
{크악!}
확 품어지는 피분수!
보라__
한 홍포인이 가슴이 쩍 갈라진 채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이얏!}
{차앗!}
나머지 홍포인들이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위__ 잉!
두 줄기 위맹한 검기가 백의인을 무섭게 짓쳐갔다.
하나,
번__ 쩍!
파팟!
재차 쾌도가 날았다.
{으악!}
{크윽!}
두 마디 처절한 비명!
그것은 놀랍게도 두 명의 홍포인이었다.
그들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백의인은 득의만면했다.
{흐흐...감히 벽력궁(霹靂宮)따위가...!}
한데 그 순간,
휘__잉!
무엇인가 둥그런 물체가 곧장 백의인에게 날아들었다.
{어느 놈이냐?}
백의인은 대갈일성하며 쾌도로 맞받았다.
쐐__액!
쾌도는 즉각 둥그런 물체를 꿰뚫어갔다.
그 순간,
콰__앙!
콰르르...!
굉렬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으헉!}
백의인은 다급히 신형을 달렸다.
하나,
삽시에 오 장 방원이 잿더미로 화하고 있었다.
{크__윽!}
백의인은 비명을 토해냈다.
비록, 반응이 빨라 즉사는 면했을지언정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이검엽은 내심 혀를 찼다.
(화기(火器)로군. 그것도 아주 강렬한...! 저 마종이 몹시 다쳤군.)
그때,
스스슥...!
돌연 장내에 한 명의 홍포청년이 나타났다.
(오만하고 성질이 급하게 생겼군.)
이검엽은 내심 씁쓸히 웃었다.
홍포청년.
그는 백의인을 향해 대뜸 벽력같이 소리쳤다.
{네놈들 백살파가 감히 벽력궁도를 해하다니...! 태워 죽이리라!}
백의인.
그는 이미 엄청난 화상을 입은 터였다.
{네,.. 네놈은 벽력신장(霹靂神奬)!}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 했다.
홍포청년,
즉 벽력신장은 잔인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요행히 뇌화신탄(雷火神彈)을 맞고도 살았으나
벽력뢰강(霹靂雷강)앞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지 보겠다!}
위__ 잉!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벽력신장의 주위로 시뻘건 열양지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금세 화마(花魔)와도 같은 강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관전하던 이검엽.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팔절 중 일절로 거기에 부족함이 없다!)
벽력궁(霹靂宮).
하남(河南)에 위치한 명가(名家).
벽력뢰제(霹靂雷帝).
즉, 화기(火器)와 극양지공(極陽之功)에 있어 절세의 기인.
바로 그가 세운 명문(名門)이었다.
당금에 와서 벽력뢰세 때의 성세가 다소 격감된바 있다.
하나,
벽력궁은 현재까지는 하남일대를 석권하고 있는 명문대파(名門大派)였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빈다.
백의인은 자기처지를 잊은 듯 조소를 날렸다.
{흐흐.. 벽력뢰강이 무적이라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흥! 네놈이 언제까지 그렇게 초연한 척 하는지 보자!}
벽려신장은 대갈일성했다.
{죽어랏__!}
파릉!
화르르...!
철석이라도 녹일 듯 강렬한 극양의 강기가 폭사되었다.
{차__ 핫!}
백의인도 기를 쓰고 이에 맞섰다.
쐐__ 액!
파파팟__!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크__악!}
백의인은 도(刀)와 함께 그대로 불길에 휩싸여 즉사하고 말았다.
이검엽은 흠칫했다.
(대단하군! 벽력뢰강이 강맹하다고는 들었으나 저 정도일 줄이야.)
그때,
벽력신장이 흘깃 그를 주시했다.
이어, 벽력신장은 턱을 치켜들고 한 마디 내뱉았다.
{귀공! 이곳은 서생들이 다닐만한 곳이 못되니 빨리 통과하는게 좋을 것이오.}
그리고는 미처 이검엽이 뭐라 할 사이도 없이 휭하니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오만무례한 태도.
이검엽은 어이가 없었다.
{건방진 친구로군. 무공과 가문을 어지간히 믿는 모양이나..}
그는 검미를 모으며 말을 이었다.
{그 오만함으로 언젠가는 곤경에 처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어, 그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백운, 그만 가자.}
이검엽.
그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했다.
그저 처음과 다를바없이 관도로 미끄러지듯 나섰다.
한데 문득,
정면의 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멈춰섰다.
관도 중앙에 우뚝 버티고 선 혈포인.
그를 보자 이검엽은 흠칫했다.
(예삿 인물이 아니다. 벽력신장보다 배는 강한 인물이다.)
혈포인.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호협해뵈는 장한이었다.
내혹하기 그지없는 인상.
검같지도 않은 뭉툭한 검(劍)을 차고 있었다.
하나 이검엽은 그 검조차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파팟!
두 개의 시선이 불꽃을 튕기며 맞부딪혔다.
일순,
혈포인의 눈에 한 줄기 감탄의 빛이 스쳤다.
이검엽 역시 감탄해마지 않았다.
(지닌바 무공이 비록 광명정대하지는 못하나 극히 강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다.)
{........}
{.......}
양인은 서로 그렇게 묵묵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서로 길이 달라 그들은 서로를 스쳐지나고 있었다.
한데 그때,
두두두...!
요란한 수레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것은 이검엽이 지나온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이검엽은 흠칫했다.
동시에,그는 즉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氣 道 制 魂
한 대의 화려한 향차(香車).
그것이 바로 네 필의 준마에 이끌려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이검엽은 보았다.
혈포청년이 전신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패도적인 경기!
(저 향차를 노렸군.)
이검엽은 일단 한쪽으로 비켜서서 상황을 주시했다.
한데,
두두두,..
향차는 혈포청년이 막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풍같이 내달았다.
향차의 마부석에 앉은 죽립(竹笠)을 쓴 청포인,
그는 미동도 없이 곧장 혈포청년에게 쇄도해갔다.
쩌__엉!
드디어 혈포청년은 뭉툭한 장검을 빼어들었다.
동시에,
{이__이엽!}
천기를 경동시키는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순간,
쐐__ 액!
마치 선풍이 몰아치듯 위맹한 검기가 향차로 쇄도해갔다.
아!
그것은 실로 태풍노도와 같은 검세였다.
(과연!)
이검엽은 내심 감탄성을 발했다.
하나,
{흥!}
죽립인은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그 순간,
위__ 잉!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 번개같이 날았다.
파파팟!
검(劍)과 채찍이 무자비한 격돌을 일으켰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놀랍게도 채찍은 혈포인의 검세를 앞지르고 있었다.
{아!}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채찍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
채찍에서 무형강기가 폭출되어 혈포청년을 강타한 것이다.
{크__ 흑!}
혈포청년인은 폐부가 터져나가는 듯한 비명을 토했다.
죽립인이 싸늘히 웃었다.
{흐흐...지옥림의 어린 놈! 시간이 없어 네놈을 못보낸다.}
이어 그는 빠른 속도로 향차를 몰아갔다.
두두두...!
(팔절의 수뇌들에 못지 않은 인물이다!)
이검엽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윽고,
향차는 미끄러지듯 이검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향차의 주렴이 살짝 걷히며 한 쌍의 봉목이 이검엽를 보았다.
이를 느낀 순간,
{아!}
이검엽은 마치 뇌전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 쌍의 서늘한 봉목,
그것은 신비할이만치 매력적인 눈이었다.
한데, 그것은 또한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저 봉목...어디서 보았는가?)
두두두...
향차는 어느새 멀찍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검엽은 일순 망연히 향차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때,
{소주(少主)!}
길옆으로부터 육(六)명의 혈포인들이 소리치며 튀어나왔다.
그들은 즉시 혈포청년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소주?}
그러나 혈포청년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기에 앞서 길게 탄식했다.
{크...나 지옥마군자(地獄魔君子)가 이렇게 허무하게 패하다니...!}
이검엽.
그는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천래비룡 막운비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난 것이었다.
지옥마군자(地獄魔君子).
그는 지옥림의 소주(少主)였다.
지독히 냉혹한 손속으로 그는 평판이 좋은 인물은 못되옸다.
하나,
그는 단연 당금 천하의 제일후기지수였다.
(지옥림같은 사파에 저같은 영걸이 있었다니!)
이검엽은 다소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지옥마군자를 응시했다.
지옥마군자,
그 역시 뭔가 의미 깊은 시선으로 이검엽를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수하들에게 부축되어 그 곳에서 멀어져갔다.
이검엽,
그는 혼자 남게 되자 내심 생각을 굴렸다.
(흠, 그 향차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 향차의 마부만 봐도 거의 무적지경의 고수이다.
그런 고인(高人)을 마부로 둘 정도의 인물이라면...)
문득, 그는 두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그렇다! 그 향차... 이곳에 모여있던 무림인들은 모두 그 향차를 주시하는 것이다!)
이어 그는 향차가 지나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자, 백운! 우리도 가보자.}
히힝...
두두두두!
일단 달렸다 하면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백운이었다.
백운은 질풍같이 달려나갔다.
한데, 어느 순간__
{백운! 서라.}
이검엽은 말을 세우며 낭패한 기색을 띄웠다.
그가 선 지점,
그 앞으로는 이제 두 갈래 길이었던 것이었다.
{이쪽은 감숙(甘肅)으로 가는 관도이고 이 아랫길은 섬서(陝西)로 가는 길인데...}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갔을까?}
관도에는 많은 수레바퀴 자국들이 있었다.
그러나 향차의 바퀴자국을 찾아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별 도리없군 단념하는 수밖에.}
이어 그는 마상에서 길을 내려다 보았다.
{섬서(陝西)로 갈 생각이었으니 이길로 가면 되겠군.}
그는 섬서로 가는 관도로 접어들었다.
(흠, 여전히 살기가 느껴지는군. 도대체 얼마 만큼의 무림인들이 이 주위에 운집한 것일까?)
그는 팽팽한 긴장감에서 벗어나려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한데 문득,
{호호호호!}
간드러진 여인의 교소가 들려왔다.
그는 뚝 말을 다시 멈춰 세우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여인이 이같이 요사스럽게 웃는가?)
그러나 교소는 계속 들려왔다.
{호호...}
그것은 정면의 구릉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검엽은 일단 그쪽으로 향했다.
두두두...
그가 구릉을 넘자,
그곳에는 희한한 장면이 벌어져 있었다.
한 명의 반라(半裸) 여인,
그녀는 도저히 눈 뜨고 못봐줄 정도로 민망한 차림새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나의(裸衣),
그나마 거의 벗다시피하고 있었다.
이검엽쪽에서 보면,
그 여인은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일견하기에도 지극히 음탕해 뵈는 요녀(妖女)였다.
나사(裸絲) 사이로는 미끈한 허벅지와 풍만한 둔부가 육감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한데, 더욱 가관인 것은__
바로 그녀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넋이 나간 듯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여인의 하체부분을 집요하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호호....어때요? 세분 교주님, 소녀의 몸매가 쓸만 한가요?}
여인의 간드러진 음성은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흐흐...천하 일품이오. 요지(妖池)의 여인들이 하나같이 천하우물이라 들었으나
이제야 그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오.}
세 중년인 중 음침한 인상의 한 인물이었다.
{호호호!}
여인은 허리를 나긋나긋 움직이며 재차 추파를 던졌다.
{호호.... 세 분은 소녀를 갖고 싶지 않으세요?}
그 말에 세 중녀인은 거의 동시에 입을 모았다.
{물... 물론... 소저를 갖고 싶소.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여인은 더욱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호호...댓가랄 것도 없어요. 이약을 드시고 소녀를 기쁘게만 해주시면 돼요.}
그녀는 세 알의 환약(丸藥)을 그들 앞에 내밀었다.
{.........!}
{.........!}
세 중년인은 흠칫하여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흐흥...!}
여인은 미묘한 비음을 내며 허를 비틀었다.
{에라! 먹고 죽은 한이 있더라도 일단 먹고 보자.}
{도저히... 못 참겠다.}
삼인은 일제히 허겁지겁 환약을 복용했다.
이검엽은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악랄한 심보군. 저 환약 속에는 무언가 암계(暗計)가 있을 것이고
그 암계는 분명 저런 자들을 요지의 탕녀들의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다.)
드디어,
{흐흐흐...!}
{헤헤...!}
세 사내는 한꺼번에 여인을 덮쳤다.
{아이...}
여인은 교태롭게 세 사내를 다루어갔다.
세 사내,
그들은 이성이 마비된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마치 미친개처럼 음욕만을 채우려 여인의 나삼을 훌렁 벗겨냈다.
그때였다.
{흠!}
한 소리 긁직한 헛기침이 들렸다.
하나,
그것은 황란하는 일녀삼남(一女三男)에게는 벽력이 치는 듯한 소리였다.
{어느 놈이냐?}
세 사내는 노하여 뛰어 일어났다.
목전(目前)의 백마와 마상이 한 청녀,
그가 바로 자신들의 흥을 깬 장본인임을 알자 대뜸 노발대발이었다.
{글벌레 놈! 감히 삼령교의 세 교주의 기분을 잡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휙! 휙!
삼인은 즉시 이검엽의 주위로 날아 내렸다.
{흐흐...육시를 내고 밀...!}
{헉!}
갑자기 삼인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말끝조차 맺지 못했다.
그 자들로 말하면,
감숙(甘肅) 일대에서 흉명(兇名)을 드날리는 삼령교(三靈敎)의 세 교주(敎主)였다.
마령(魔靈).
살령(殺靈).
음령(陰靈).
팔절에는 못미치나 나름대로 적수가 드문 고수들이었다.
한데 그들이 이검엽의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고 만 것이다.
아!
그들은 바로 이검엽의 범강치 않은 기도에 압도 당한 것이었다.
검보기에는 극히 유약하나 실로 태산과도 같은 기도였다.
{으...}
{...........!}
삼령교의 세 교주는 난생 처음 이러한 기도에 움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이검엽,
그는 검황종과 생활하던 중 은연중에 그러한 기도를 습득한 것이었다.
무언(無言)중 엄습하려는 두려움,
그것은 세 교주의 심령을 그대로 제압해 버리고 말았다.
이검엽은 나직이 말했다.
{쯧쯧, 그토록 허약한 심기로 어찌 험한 무림을 살아왔는지 궁금하구료.}
그 말에 삼인은 식은 땀만 흘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어,
이검엽은 호되게 한 소리 호통을 쳤다.
{그만들 가보시오!}
{으아...!}
{으...}
삼령교의 세 교주는 즉시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나 버렸다.
그때,
{호호... 정말 멋진 공자님이시군요.}
여인은 벌거벗은 그 여인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여인,
그녀의 본바탕은 아주 아름다웠다.
하나,
전신에 음탕함과 요사함이 찌들대로 찌들어 배인 여인이었다.
{호호호...}
여인은 도발적으로 나신을 흔들어댓다.
출렁이는 유방.
적나라하게 드러난 여인의 비지(秘地),
그것은 너도 유혹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검엽은 달랐다.
도통 그녀에게서 색욕(色慾)이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운...!)
난초를 연상시키는 청초한 여인,
자신에게만 바쳐오던 순결한 자운의 육체,
이검엽은 문득 눈앞의 여인이 불쌍하게 보였다.
그 여인의 도발적인 몸매에서 느끼는 그의 감정,
(가련한 살덩어리..!)
한편,
(무어 이런 사내가 있지?)
여인은 이검엽가 조금도 동요되지 않자 기이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더욱 재간을 피워볼 심산이 되었다.
{호호... 공자님, 제 몸이 어때요? 탐나지 않으세요?}
한껏 간드러진 음성,
더할 수 없이 농염한 몸짓,
하나,
이검엽의 눈은 너무도 차분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소저, 부끄럽지 않소?}
그 순간,
여인의 고운 얼굴이 보기 싫게 이지러졌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사내들이 거쳐간 자신의 몸,
자랑스럽기까지 했던 자신의 육체는 이 순간 너무도 추악해진 것만 같았다.
더구나,
털끝만큼의 수치도 못느꼈던 행위들이 이제 와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전라로 있다는 사실조차 저주스러웠다.
여인은 황급히 나삼으로 몸을 가렸다.
수치와 두려움과 당혹...
그녀는 경련라며 구릉너머로 사라져 갔다.
{불쌍한 여인...!}
이검엽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추함을 발견한 것이 너무 늦었구나..}
이어,
그는 백운을 몰아 다시 걸어나갔다.
따각따각...!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여인이었다. 세상이란 참으로 불공평하구나..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듯 가련한 여인도 있다..}
한데 그때였다.
휙휙!
선풍을 몰아치며 날아가는 인영들이 있었다.
무려 수십 명에 이르는 혈포인!
{지옥림의 인물들이다!}
이검엽이 중얼거리는 순간,
다시 한 무리 군웅들이 떼지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팔절과 군소문파의 인물...!)
그들은 모두 이검엽이 가려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검엽은 그들의 한결같이 딱딱하게 굳은 모습을 보며 뇌까렸다.
(그 신비 향차가 이리로 온 모양이군. 내가 길을 제대로 찾아 들었구나.)
이어,
그 역시 그들이 간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신비향차!
과연 그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무엇 때문에 많은 무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인가?
神 秘 의 莊 園
(이미 무림인들이 가는 방향을 안 이상 굳이 바짝 따라 붙을 필요는 없다!)
이검엽,
그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얼마쯤 갔을까?
그곳은 관도가 끝나는 곳이었다.
한데 문득,
전면을 바라보던 이검엽은 흠칫했다.
{이런 곳에 장원(莊園)이 있다니..!}
황막한 평원,
그 끝으로는 울창한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원시림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한 채의 장원,
일견하기에도,
그 장원은 전체적으로 괴괴(怪怪)한 살기가 엿보였다.
{범상치 않은 장원이군!}
이검엽은 검미를 잔뜩 찌프렸다.
그러다 불현듯,
그는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곧 그는 신비한 미소를 떠올렸다.
{기이한 일들의 연속이라... 흥! 호기심이 동하는군.}
이어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무르익어 있었다.
{마침 저물어가기도 하고 인적도 없으니...장원에 갈 명분이 서겠다.}
그느 싱긋 미소하며 장원으로 다가갔다.
하나,
그때까지 그가 전혀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를 지켜보는 여러 줄기의 시선이 있음이었다.
(저 자는 무림인이 아닐까?)
(정말 무림인이 아닐까?)
그 시선의 장본인들은 제각기 은밀하게 몸을 숨긴 채 이검엽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
그것은 바로 이검엽를 앞서가던 무림인들이 아닌가?
한편,
이러한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듯한 이검엽,
그는 드디어 장원 앞에 이르렀다.
<천우장(天羽莊).>
{천우(天羽)... 좋은 이름이군.}
이검엽은 백운에게 가볍게 뛰어 내렸다.
이어 그는 곧 장원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탕탕!
{계십니까?}
그리고 잠시 후,
끼이__익!
둔중한 음향과 함께 장원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인물,
(그 마부로군!)
이검엽은 내심 중얼거렸다.
전신에서 싸늘한 한기를 풍기는 중년인,
그는 분명 향차를 몰던 죽립인이었다.
죽립인은 감정이라고는 없는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왔소?}
이검엽은 정중히 포권했다.
{지나던 길손이외다. 날은 저물고 달리 쉴 곳도 없어 하룻밤 신세를 지고자 왔오이다.
편의를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중년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이검엽를 주시했다.
하나 반면,
이검엽은 유연한 미소로 마주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내심 흠칫했다.
(대단한 놈이다. 겉보기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 보이나 만일 무공을 익힌 자라면 상
상을 초월한 절정고수일 것이다.)
그는 예측한 안목을 지닌 인물인 것이다.
이윽고,
중년인은 차가우나 점잖게 말했다.
{본장은 객(客)을 맞이할 처지가 못되니 돌아가시오.}
{다만 이슬만 피할 수 있다면...}
이검엽은 짐짓 정색을 해보였다.
{글쎄, 아니된다 하지...}
중년인은 재차 거절하려다 갑자기 표정이 일변했다.
{..........!}
그는 공손한 얼굴로 뭔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누군가 이 인물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군.)
이검엽은 그의 표정을 의미있게 주시했다.
잠시 후,
{주인께서 귀공을 안으로 모시라는 분부가 계셨오.}
중년인은 장원문을 활짝 열었다.
{감사하외다.}
이검엽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백운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은 이리 주시오.}
중년인의 말투는 무뚝뚝했다.
이검엽은 이를 개의치 않고 태연히 말을 건넸다.
{이 녀석은 백운(白雲)이라 하외다. 잘 부탁하오.}
중년인은 대답대신 명령조로 말했다.
{안으로 곧장 들어가시오. 대청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
{하나 주의할 것이 있오. 절대 길이 아닌 곳을 들어가지 마시오.}
{명심하겠오이다.}
이검엽은 짧게 대꾸해 버렸다.
이어 그는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내전(內殿)을 향해 펼쳐진 오색(五色)의 석로(石路),
그를 보자 이검엽의 눈은 이채를 띄었다.
(놀랍군. 이 석로에 죽음의 함정이 있다니...)
화려하게 채색되었을 지언정 평범한 석로,
그러나 이검엽은 알 수 있었다.
석로를 이룬 석판 하나하나에 모두 기관장치가 되어 있음을...
{.........!}
그는 묵묵히 석로를 내딛으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 주위는 매우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하나 그것 역시 평범하게 정원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오묘하고도 불가사의한 갖가지 진형(陣形)과 기관들이 장치된 것이었다.
이검엽,
그는 십만 권이나 되는 책을 읽는동안 기관지학, 토목둔갑등에 매우 식견이 넓은 터였다.
때문에,
그는 한눈에 장원의 감추어진 모습까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한데 더욱 기이한 것은,
넓은 장원임에도 예의 중년인외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검엽은 이해가 갔다.
(만일 금제가 발동한다면 난공불락(難功不落)의 요새가 되리라. 평범한 꽃 한송이나
조약돌 하나가 사람의 능력을 앞지를 수도 있으니...)
그는 내심 삼탄해마지 않았다.
(과연 누가 있어 이같은 안배를 배풀었는가?)
이윽고,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그는 어느새 우앙한 대전 앞에 이르게 되었다.
과연 그 앞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십(二十) 전후로 뵈는 여인,
마치 옥(玉)으로 빚은 듯한 미녀였다.
정교한 세공품인 양 그녀의 얼굴은 섬세하고도 고왔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미(美)에는 생명이 없어 보였다.
마치 한겹 서리가 깔린 듯한 냉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뛰어난 미모이나 냉막한 것이 흠이군.)
이검엽은 내심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갓다.
이어 정중히 포권했다.
{폐를 끼치게 되었오이다.}
{........!}
여인은 말이 없었다.
대신 한번 싸늘한 시선으로 이검엽를 본후 돌아섰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대청으로 걸어들어갔다.
{흥!}
이검엽은 다소 당혹해졌다.
그러나 이미 내친 걸음,
그는 망설임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대청 안,의외로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상좌(上座)에 긴 장막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문득,여인이 그 장막을 대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 객(客)을 모셔왔사옵니다.}
억양이 없는 건조한 음성이다.
정막 안에서 곧 대답이 들렸다.
{알았다. 이제 상아(霜兒)는 나가거라.}
그것은 예의 여인과는 대조적인 온화한 중년미부인의 음성이었다.
여인은 그 말에 냉막하나 공손히 대답했다.
{네. 물러가겠읍니다.}
여인은 이내 이검엽 옆을 스쳐 지났다.
그러나 시선 한번 움직이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어이없을 만큼 차갑군.)
이검엽은 그만 기분이 언잖아지고 말았다.
그때,
{귀공, 자리에 앉으세요.}
장막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감사하오이다.}
이검엽은 기분을 풀며 의자에 앉았다.
장막 안에서 물었다.
{화북(華北) 출신이신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북경(北京)에서 왔읍니다.}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이검엽이라 합니다.}
{이공자이시군요.}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 이검엽 역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하룻밤 거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객지에 나서면 누구나 어렵지요. 하룻밤이나 편히 쉬도록 하세요.}
{고맙습니다.}
몇 마디 주고 받은 후,
장막 속에서 손뼉을 쳤다.
따딱!
그러자,옆문이 열리며 한 명의 미녀가 나왔다.
홍의여인.처음 여인과는 달리 매우 화사한 표정을 지닌 여인이었다.
{사부님. 소녀 선아(仙兒) 대령했아옵니다.}
{오냐. 수고스럽겠지만 이공자님을 처소로 모셔다 드리도록 해라.}
{네.}
그녀는 이검엽에게 생긋 미소를 보였다.
흰 치아를 약간 드러낸 붉은 입술이 매우 정열적이었다.
(천성이 매우 쾌활한 여인이군.)
이검엽도 마주 미소했다.
{호호... 공자님. 소녀가 모셔다 드리겠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앞장섰다.
{폐를 끼치는가 보오이다.}
이검엽 역시 그녀를 따라 막 몸을 돌리며 할 때였다.
{잠깐!}
장막 속에서 그들을 제지했다.
이검엽은 얼른 돌아다 보았다.
{무슨 분부시오이까?}
{한 가지 당부가 있읍니다. 그것은...}
장막 속의 음성은 일순 무겁게 가라 앉았다.
{밤중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밖으로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예요.}
{..........?}
이검엽은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읍니다.}
{감사해요. 편히 쉬세요.}
이검엽과 홍의여인.
그들은 드디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혜아(慧兒)야. 어떻느냐?}
장막 속 중년부인의 음성이 들렸다.
한데 문득,
그 말에 대답하는 다른 음성이 있었다.
{예, 어머니. 소녀의 생각대로예요.}
낮으나 신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중년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가 그럼 분명 천주산(天柱山)에서 너를 구해준 청년이란 말이냐?}
{예.}
신비한 음성이 대답하고.
아!
그들 두 모녀(母女)의 얘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은 이검엽의 이미 정체를 알고 맞이했단 말인가?
더우기 천주산(天柱山)에서라면...!
중년부인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하나 네 말대로라면 그는 평범한 서생이어야 하는데..}
신비음성이 대꾸했다.
{그가 무공을 지녓다고 보시옵니까? 소녀는 전혀 못 느끼겠어요.}
{그럴 것이다. 그의 일신정하는 아마도 모두 내부로 갈무리...}
중년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신비음성이 놀란 듯 되물었다.
{설마.. 그렇다면 그의 내공은 반박귀신에 이르렀단 말씀이신가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그럴 리가 십개월 전...분명 그는 일게 서생이었는데...!}
중년부인이 차분히 덧붙였다.
{그 사이에 무슨 기연을 만난 듯 하구나. 천지곤룡의 정화도 어쩌면 그가 얻었을 것이다.}
{.........!}
{하여튼 그를 주시해야 한다.}
{네!}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한숨 들리게 되니까...}
{........}
장막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자,대청 안으로 적막에 휩싸여갔다.
이검엽.그는 홍의여인을 따라 쭈욱 걸어나갔다.
후원.
연못이 있고 그 뒤로 아담한 정사(精舍)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쉬세요, 공자님.}
홍의여인은 친절하게 안내했다.
{고맙소이다. 소저.}
{호호... 별 말씀을.}
이어 그들은 방으로 들어섰다.
홍의여인은 손뻑을 딱딱 마주 쳤다.
그러자,소리없이 두 명의 시비가 들어섰다.
{이 아이들이 공자님의 시중을 들어드릴 거예요.}
{감사하오. 한데...}
이검엽은 미소 지어 부인 후 두눈을 빛내며 말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오이다.}
{무엇이죠? 궁금하식다는 것이...?}
홍의여인이 되묻자 이검엽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저의...사부님 되시는 분은...어떤 분이시오...?}
{호호...죄송해요.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소생이 괜한 것을 여쭌 모양입니다.}
이검엽은 무안한 듯 씨익 웃었다.
홍의여인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호호..공자님은 소녀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당돌한 질문.
이검엽은 다소 얼굴을 붉혔다.
{말씀해 주신다면 기억하리다.}
홍의여인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소녀는 적요선(滴腰仙)이예요.}
{아! 적소저셨구료.}
{네. 그리고 공자님을 맞으셨던 언니는 냉하상(冷夏霜). 냉언니예요.}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소.}
{그리고 공자님께만 살짝 알려드리는데요...!}
홍의여인, 즉 적요선은 신이 난듯 조잘거렸다.
{저희 말고도 큰 언니 한 분이 계셔요. 단목자혜(丹木紫慧)라고
그 분은 저희 두 사람을 합쳐 놓은 것보다 백 배는 아름답지요.}
이검엽은 은근히 미소했다.
(아무리 아름답다해도 천주(天柱)에 보았던 그 여인보다는 못하리라.)
그는 내심 한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낀 스쳤으나 신비할이만큼 아름다왔던 여인.
이 순간 퍼뜩 그는 그 신비여인이 생각난 것이었다.
문득,그가 말이 없자 적요선이 덧붙였다.
{믿지 못하시는가 본데 여자인 저까지도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우시다고요.}
그제서야 이검엽은 크게 웃어보였다.
{하하...대단한 미인이신가 보구료.}
{그럼요. 능히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으로 불러 손색이 없는...!}
거듭 자랑하다 말고 적요선은 갑자기 소리쳤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공자님을 모셔다 드리고 금방 돌아오라 하셨는데...!}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쪼르르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문께에 서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호호... 편히 쉬세요. 공자님.}
{........}
이검엽은 연못을 돌아 사라져가는 적요선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단목자혜丹木紫慧)...!}
무의식중이었으나 일순 그의 눈빛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삼경(三更).
{으아__ 악!}
돌연, 처절한 비명이 야공에 메아리쳤다.
{헛!}
이검엽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다시 쥐죽은 듯 침묵이 깔렸다.
(분명히 비명소리를 들었는데...)
이검엽은 일단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즉시 공력을 모으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시녀들이 사라졌군!)
그의 옆방.
분명 시녀들은 그곳으로 갔었다.
한데,
있어야할 시녀들은 기척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검미를 모으며 생각을 굴렸다.
(그 시녀들...숨기려 애썼으나 모두 일신에 고절한 공력을 숨긴 고수들이었다.)
이어 그는 의복을 걸치고 묵령신검까지 허리에 찼다.
(이 장원 안의 돌 하나, 시녀 한명 그 모두 평범한 것이라고는 없다.)
그는 의장을 갖추자 곧 문께로 다가섰다.
(예의는 아니다 호기심을 참을 도리가 없군.)
한데,그때였다.
{아__ 악!}
그리 멀지 않은 곳.
재차 찢어지듯 뾰족한 비명이 터졌다.
이번엔 여인인 듯 했다.
스르륵...!
드디어 이검엽은 문을 열고 성큼 나섰다.
칠흑같은 암야(暗夜).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 금시라도 쏟아질 듯 했다.
이검엽은 팽팽한 긴장으로 무장됨을 스스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음산한 밤이군.)
이내 그는 신형을 날렸다.
휘르르...
그는 소리없이 정사(精舍)의 지붕 위로 날아 올랏다.
칠흑같은 어둠.
그러나 그 정도 쯤은 그에게 전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천지곤룡의 정화!그것이 가져다준 신효(神效) 덕분이었다.
멀찍이 본전(本殿)의 웅장한 전각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마치 유령같이 서 있었다.
(누군가 있군.)
이검엽은 내심 긴장을 더했다.
서쪽의 가산 위.
그곳에 과연 한 개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무엇인가를 짚은 채 우뚯 서 있는 괴인영!
(조심하지 않으면 경을 치리라...)
이검엽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스스스..!
그는 그 인물이 서 있는 가산으로 소리없이 다가갔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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