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 1896년 4월 28일, 평안남도 룡강군 삼화면 덕동리
▶ 사망 : 1971년 2월 1일 (74세)
▶ 직업 : 작가, 시인, 승려, 언론인, 초등학교 교사, 언론인, 수필가
▶ 학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 배우자 : 이노익(1921년 이혼), 하윤실(1929-1931년)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배려로 삼숭보통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신여자>지를 직접 창간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1년과 1931년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있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문단, 매일신보 등에 칼럼과 논설을 기고하였고, 1925년부터 3년간 아현 보통학교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연애 활동을 하였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종교에 대한 회의를 해오다, 1927년 불교잡지 불교의 문예란에 기고하면서 불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1930년대 초 서울의 선학원 등에서 참선을 하였으며, 1933년 만공선사 하에서 출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1971년 입적한다. 출가 시 만공선사가 선 수행을 위해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하라는 말을 따라, 20여 년 집필 활동을 중단하다 1950년대 후반에 다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60년에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발표하고,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를 발표하며, 1964년에 마지막 저서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를 발표한다. 불명(佛名)은 하엽(荷葉), 도호(道號)는 백련도엽(白蓮道葉), 하엽당(荷葉堂),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다른 이름은 원주(源珠)이다.
김일엽(金一葉, 1896년 4월 28일 ~ 1971년 2월 1일)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가 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을 따서 일엽이라는 필명을 썼다.
옛날 천축으로 떠났던 신라에 스님들 중, 살아 돌아 온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그 곳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굳이 떠나는 스님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깨우치지 못한 나를 찾아 득도하기 위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자아란 찾아지는 대상이 아니고 불교적 논리로 볼 때 찾고 있는 그 자체가 자아인 것이다 그러한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
하늘은 들음이 고요하여 소리가 없다 푸르고 푸른데 어느 곳에서 찾을까 하늘은 또한 높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다만 모두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한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스님들)은 자기들의 꿈과 바라는 이상이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고 슬퍼하거나 괴로 워 하지도 않으며 남이 보든 말든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나에 길을 향하여 고난에 여정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밝음이 어두움은 이끌어도 어두움은 밝음을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어두워지는 법이다. 라고 말한 제(帝)나라 환공(桓公)의 말대로 어두움을 밝히려고 어둠을 이끌려고 고진감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덕사 이야기를 할 때 그저 수덕사는 여승들이 많아 여승들이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 더 자세한 인물이나 역사 그리고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은 알 필요성도 느끼지 않으며 알지도 모른다. 수덕사는 예로부터 그 터가 서기 383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수한 자리에 절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절터로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들이 커다란 족 적을 남긴 대 사찰임에는 틀림없다.
수덕사가 그러한 대 사찰이기에 여기를 거친 스님들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필설로 다할 수가 없으며 또한 수많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고행과 시련을 감내하며 무수한 수행자들이 지나갔는데 특히 그 중에서 근세에 이르러 빼놓을 수 없는 세 명의 스님이 있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구한말에 있었던 경허 성우(鏡虛 惺牛1849~1912) 스님이고 다음이 그의 제자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이 있고 마지막에 만공의 제자인 일엽 스님 즉 수덕사 여승의 최초의 여승 일엽이다.
☞ 수덕사에서 생을 마친 일엽 스님,
수덕여관을 떠나 여기저기 전전하다 1948년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
멀리 떠난 고암 이응로 화백을 뒷바라지하며 기다리다 떠난 박귀희,
수덕여관에 깃든 세 여인의 인생행로는 이제 역사가 됐습니다.
수덕사에는 근현대에 이르러 기억해야 할, 스님 세 분이 머물렀다.
(경허,만공,일엽)
개화기에 신세대인 여성이었던 그가 1933년, 38세의 나이에 수덕사에 왔다가 만공 스님의 불법에 감동되어 불교에 귀의하여 수덕사에 최초의 여승이 된다. 그 후 만공에게 귀의하여 열반직전까지 만공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유일한 여승이다 여기서 잠깐 만공과 일엽 스님과의 일화를 보면 어느 날 일엽이 만공에게 찾아와 묻는다.
스님! 불법(佛法)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고 묻자 네 눈앞에 있다. 저는 보이지 않는데요. 너에게는 또 하나의 너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스님께서는 보입니까? 너만 있어도 보이지 않는데 나까지 있으니 어떻게 보이느냐 스님! 그렇다면 스님도 없고 나도 없다면 볼 수 있나요?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놈은 누구냐 하며 호통을 치자 일엽은 철퇴를 맞은 듯 물러났다.
만공은 어느 날 법당에 불상을 보고 허! 부처님 젖통이 저렇게 큰 스님들 양식걱정이 없겠구먼. 여승인 일엽 앞에서 갑자기 젖통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일엽은 얼굴을 붉히며 묻는다.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수용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허! 허! 저년이 부처님만 건드려놓고 젖은 얻어먹지 못하는군!
참으로 이와 같은 거침없는 말투를 보고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만공과 일엽 사이의 밀어(密語)로 이해하며 둘과의 사이에 어떤 남녀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 생각하고 수군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깨 닳지 못하는 미련함을 꾸짖는 말을 색(色)으로 표현해 가지고 말을 하니까 그 뜻을 모르는 우매한 범인(凡人)들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수군거리고 있을 뿐이다.
♡ 신여성들의 이야기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켄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살아갔으며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유연애론”과 “신 정조론”을 주장하게 된다.
♡ 신 정조론
그녀가 80 몇 년 전에 주장했던 신정조론을 살펴보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 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한마디로, 남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 는 이야기다.
당시 꽤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지금도 그러하지만)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다.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신뢰에 기반 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 더욱 자유분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김일엽은 한국최초 여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 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수제국대 학생이었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 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 앞에 있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 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보는 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 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발췌했음을 밝혀 둔다.
태풍을 만난 잎 새 한 장이었던 그녀의 삶을 되짚어보자. 자유분방하다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일엽은 여성의 육체적 순결이 무의미하며 새로운 남자를 만날 때마다 진실하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는 파격적인 ‘신정조론’을 주장함으로써 성 담론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특히 <나의 정조관>에서 성의 해방을 주장했다.
나는 더러운 것을 막 주무르던 손이나 티끌 하나 만져보지 않은 손이나 손은 손 일 뿐이지 정・부정이 손에 묻지 않는 것같이 여자의 육체가 남성을 접하고 안접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고 오직 그 여자의 정신 문제뿐이라, 정신적으로 정적 청산이 되어서 사랑을 상대에게 온전히 바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처녀로 자처할 수 있어 그 양해를 하는 남자와 그렇게 될 수 있는 여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정조관을 가진 까닭이외다.
지금도 용납되기 쉽지 않은 파격적인 주장. 하지만 그저 주장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몸소 그런 삶을 살아냈다. 비록 이혼녀라는 낙인이 찍혀 산산이 부셔졌을지라도 말이다. 일엽은 출가하기 전 몇 번의 사랑과 실연,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다.
일엽이 신정조론을 주장할 정도로 선진적인 의식을 가진 당찬 여성이었고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던 덕분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상에 의지하고 위로할 단 한 사람의 살붙이도 없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이었던 까닭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일엽을 늘 사랑의 미망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사랑이 자기가 찾던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을 때는 단호하게 빠져나오는 결단력을 가졌다. 대개의 사람이 이런저런 핑계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과는 다른, 정직한 삶의 자세였다.
하지만 내적인 소신에 기반을 둔 거침없는 삶은 일엽을 자유분방한 여자로 보이게 했고 사랑과 연애를 둘러싼 그의 행적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962년 출간한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일엽은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편지의 형식을 빌려 불법을 전하기도 한다. 안으로는 불법을 담으면서도 겉으로는 연애 이야기로 구성된 독특한 이 책은 불교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책을 읽고 불교의 진리에 감화되어 출가한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하니 대중에게 포교를 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써도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런데 이미 속세를 떠나 절필한 지 30여 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내면서 굳이 자신의 연애사를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신문명기에 선각자로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난의 화살을 맞기도 했던 연애사를 굳이 스스로 꺼내놓는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사옵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만 하게 되옵니까?
내 것 네 것 가려질 길 없사옵고
조건이나 대가가 따져질 새 어딨겠어요.
혼마저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저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사옵기에?
나의 영육을 어루만져주던 당신의 손길이 다시 그리워져서, 20년 전의 내 방, 당신의 손때 묻은 북향 미닫이를 밀고 닫던 당신의 그 손길이 지금 승당 안 내 방 미닫이를 열고 내 누운 곁에 슬그머니 앉아주시는, 이루어질 가망도 없는 허망한 그 기쁜 광경을 눈물지으며 그려보게 됩니다. 성불의 길이 조금은 더디어도 좋아요! 당신이 웃으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져주시는 즐거움을 한번이라도 맛보여주실까 바라는 애달픈 마음은 성불 다음가는 희망일 뿐입니다.
간절한 마음을 편지에 담고 나서 일엽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청춘을 불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수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간의 연연하는 편지를 찢어버릴 수 있었다. 잠시 마음속을 혼미하게 했던 그리움도 잠잠해지고 냉정한 편지를 보내준 그에게 도리어 감사의 마음이 일어났다. 옛 연인과의 자리에서 결연주가 될지도 모를 위험한 이별주를 청하던 일엽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성불의 길에 동행하는 벗이자 동지로 남기로 결심하고 백련의 자리에서 마음을 정리한 글을 보낸다.
세속의 번뇌에 시달릴 때도,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화두인 사랑. 오히려 그것을 피하거나 감추지 않았기에 사랑도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