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을 산책하다
좌로부터 홍관식 안 걸 정운종 신계식 최돈문 임종도 안순영
11월 11일 토요일, 성법57산악회(회장 최돈문)는 창경궁 산책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4호선 혜화역 성균관대역 4번출구로나가 15분정도 걸으면 창경궁 정문이 나온다. 입장료는 1000원, 경로는 무료, 주민등록증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왕실의 어른으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게 된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이다.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이 있었다. 1483년 성종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로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 왕실 동산인 낙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서울대병원이 자리하고 있어서 낙산이 보이지 않지만 임진왜란(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타서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이다.
1983년부터 동물원 식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은 비록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그 옛날 왕실 생활의 체취가 물씬 풍겨난다.
* 자경전 터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아 전망이 좋은 이 터는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이 있던 곳이다. 자경전은 1777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동쪽으로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으며, 뒤편에는 아름다운 계단식 후원이 있었고 한중록의 산실이기도 한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적 왕실 도서관인 장서각이 들어섰다가 철거되었다. 이곳엔 풍기대와 앙부일구가 놓여있어서 바람의 방향이나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돼있다. 늦가을이지만 초겨울 날씨 이날따라 유난히 바람이 차다.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는 창경궁 단풍을 관상하며 내전터로 들어섰다. 숲 일대는 어린 왕자와 공주들을 비롯한 궁궐 여성들의 생활의 처소로 이용되었던 건물이었는데 나무가 가득히 들어서있다.
잠시 걸으니 춘당지가 보인다
* 춘당지
춘당지는 백성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벼농사를 지었던 내농포가 있던 곳이었는데 일제가 파헤쳐서 연못으로 바꾸었다. 춘당지에는 역사를 자랑하는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1470년 성종 때 만든 탑으로 보물로 지정된 이 탑의 기단부는 4각형 받침돌과 8면에 안상을 새긴 2단 고임돌과 8면에 안상과 꽃을 새긴 연화 대좌로 구성돼있다. 여기저기서 인증 샷 소리가 요란하다. 연못가를 지나면 바로 온실이 나온다. 창경궁 대온실이다.
* 온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였던 철과 유리로 지은 대 온실, 대부분이 고풍스러운 목조 전각인 궁궐 안이라 좀 이색적인 냄새가 난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온 것과 때를 맞추어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1909년 일반에 개방하였는데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목적이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데 있었으니 일제의 간악함이 하늘에 닿고 있음이 아닌가.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창경궁 안 몇 곳을 더 소개한다.
* 영춘헌과 집복헌
집복헌은 후궁의 생활공간이었다. 현재 집복헌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834년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이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기다 돌아갔다.
* 통명전·양화당
통명전은 1834년에 다시 세운 일상생활공간인 내전의 중심 건물답게 월대를 쌓고 지붕 가운데 용마루가 없다.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1834년에 다시 지은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가 돌아와 거처하기도 했다.
* 경춘전ㆍ환경전
경춘전은 대비의 일상생활공간인 침전이고, 환경전은 왕의 침전이다. 두 건물 모두 1834년에 다시 세웠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경춘전은 산실청(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환경전은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간곳이다.
* 숭문당ㆍ한 인정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년에 다시 세웠다. 앞폭에 설치한 누각형 뒷마루로 출입하였고 영조 임금의 친필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함인정은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는 건물 이름의 뜻을 상징하듯, 사방이 터진 개방형 건물이다.
* 명정전
명정전은 왕이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궐내각사 터
창경궁 궐내각사의 중심에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 일대를 헐어 동물원을 만들었으나 1980년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 이곳엔 회화나무등 커다란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회화나무는 상서로운 나무라 하여 궁궐 입구 주변에 많이 심었다.
* 해자·회랑·옥천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를 건너 마당을 만들었는데 이 마당을 둘러싼 외행각은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다.
* 홍화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1616년에 세워진 이 문 앞에서 국왕이 일반 백성들을 친히 만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홍화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비록 짧은 시간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본 창경궁, 그 옛날 가족과 함께 밤 벛꽃을 감상하며 즐겼던 때가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맴돈다.
시골서 손님이 오면 의례 창경원으로 모셨던 기억도 새롭다. 대학 3학년 때인가 근로장학회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 불쑥 찾아오신 처 백부(그땐 예비 처 백부)를 정성껏 모신 것이 신랑감으로 합격통지서(?)가 날아들 줄이야.
도리켜 볼수록 만감이 교차한다.
오찬은 혜화 역 1번 출구 지근거리 순대 국 정식으로 배를 불렸다. 최돈문 회장은 언제 이런 맛 집을 알아두었는지 음식이 맛깔스럽고 별미였다.
한솔도 참석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니 이날도 사는 맛이 절로 나는 하루였다.
(참석한 동문) 신계식 안 걸 안순영 임종도 정운종 최돈문 홍관식 한솔
(글 정운종, 사진 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