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살아도 그날이 오면 왕관을 쓰고 왕노릇하리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만(마 20:23) 의외로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묵시문학적인 의식에서 나온 말입니다.
(묵시문학에 대해서는 전에 쓴 글들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중에 하나; 다니엘서와 묵시문학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은 당시 통용되던 묵시문학적인 종말 이야기와는 다릅니다(R. Bultmann).
종말이란 세계 안에 닥치는 물리적인 파국을 넘어섭니다.
그러니까 코로나와 같은 질병, 홍수, 지진, 전쟁 등은 종말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는 종말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파격적인 변화’입니다.
종말의 본뜻은 물리적 세계의 파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동안 속했던 자리를 바꿔버리는 것, 다른 말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도래하였고 세상의 지배는 이미 끝을 맞이했다’는 선포이며, 성도는 ‘나는 이 나라를 영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연한이 다한 세상의 영화에 취하며,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에 여전히 목표를 두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를 성서는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눅 12:56).
우리 말로 하자면 철없다, 철모른다 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통용되는 묵시문학을 훌쩍 뛰어 넘습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 연구에 따라서는 ‘실현된 종말론’이라고도 합니다.
한 군데만 소개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5).”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이 낮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날이 오면, 그 세계가 도래하면 왕좌에 등극하리라'는 말은 사실 성서의 종말론에 대한 더 깊은 배움이 필요한 말입니다.
틀렸다, 맞았다 하기 전에 주어진 텍스트의 본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문득 흥미로운 묵시문학적 우화가 떠오릅니다.
(제 마음에서 생각난 우화일 뿐 성서는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는 항상 말석에 앉습니다.
그는 나중에 상석에 앉으리라는 의도로 말석에 앉는 자가 아닙니다.
자, 과연 그날이 왔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제 내 왕좌를 차지하리라 그곳이 어디뇨?’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이 와도 겸허히 낮은 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 나라에서 그는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