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1951년에 제노사이드 협약을 비준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의지만 있다면 국제 사회가 캄보디아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제 사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고, 개입을 주장하는 나라들의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유엔에서 캄보디아 문제를 처음 거론한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의 유엔 대표 헤어초크(Chaim Herzog)는 캄보디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 사태가 “동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했다.
체임 헤어초크
1978년 3월에는 유엔 주재 영국 대표가 이 문제를 인권 위원회에 제기했고, 이어서 차별 방지와 소수 집단 보호를 위한 소위원회가 비판적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폴 포트 정권에 전달했다. 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①캄보디아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음식과 물, 의료 서비스가 결여된 가운데 프놈펜을 비롯한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강제 소개 조치가 단행되어 상당한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②크메르 루즈가 권력을 장악한 지 며칠 내에 다수의 전직 군 장교, 고위 공무원, 경찰, 지식인, 지방 공무원, 전투 경찰이 전국적으로 그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③1976년 초부터는 이 범주에 속하면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작업을 벌여 그들을 처형했다. ④1976년부터는 하급 관리, 하사관, 사병, 민병대원 등 구 정부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인 색출 작업을 벌여 그들을 처형했다. ⑤1977년 이후에는 의사, 기술자, 교수, 교사, 대학생 등의 지식층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다. ⑥보통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음식과 휴식, 의료 서비스가 부족한 가운데 중노동에 처해져 죽었다. ⑦충성을 보이지 않거나 사소한 잘못을 한 보통 사람들도 한두 마디의 경고 뒤에 처형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⑧1977년과 1978년 사이에는 폴 포트 정권의 행정부와 군 인사들 가운데 다수가 내부 숙청 과정에서 처형되었고, 그들 밑에서 단순하게 부역했던 사람들까지 함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캄보디아 정부는 외무부 장관 명의의 전보로 간략하게 답변했다.
우리는 소위원회의 결정을 민주 캄푸치아의 내정에 대한 무분별한 간섭으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이 결정을 통해 소위원회는 조국을 배신한 자들의 활동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책동과, 100만 명 이상의 캄푸치아 주민을 학살하고 캄푸치아의 80% 이상을 파괴하는 등 캄푸치아 인민에 대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뒤에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민주 캄푸치아의 명예를 지속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도당을 후원하고 있다. 캄푸치아의 단합된 인민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3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한 뒤에는 식량도 충분하며, 인민은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수립하고 수호하는 가운데, 제국주의자들의 어떤 도움에도 호소하지 않고 자기 힘에 의존하고 있다.
-1978년 9월 16일, 민주 캄푸치아 외무부 장관
캄보디아 측의 대응 조치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권고안 같은 형식의 우회적 압력이 학살의 가해자들에게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영국이 본래 요구했던, 진상 조사를 위한 특별 인원 보고인 지정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시리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크메르 루즈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두 나라 태국과 중국 가운데 태국은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크메르 루즈와의 돈독한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고, 중국은 캄보디아를 사상적 동지로 생각해서 군사적 지원을 계속했다. 미국은 캄보디아에 직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태국과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마저도 포기했다.
캄보디아의 학살을 종식시킨 힘은 유엔 같은 국제 기구나 강대국이 아니라 오히려 인접국 베트남이었다. 크메르 루즈의 베트남 침략이 더 심해지자, 침묵으로 일관하던 베트남은 소련과 함꼐 반(反) 크메르 전선을 구축했으며, 1978년 12월에 10만 명의 지상군을 투입해 캄보디아를 공격했다. 2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반군의 도움을 받은 베트남군은 1979년 1월 7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프놈펜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엄청난 학살 때문에 이미 대중적 지지를 잃어버린 크메르 루즈와 그 지도자들은 캄보디아 북부의 정글을 넘어 태국의 국경 지대로 도주했다. 베트남은 프놈펜에 베트남과 우호 관계에 있는 온건한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정권을 세웠다.
프놈펜에 진입하는 베트남군 전차
새 정권을 맡은 인물은 크메르 루즈의 전직 관리였다가 1977년에 베트남으로 탈출했던 헹 삼린(Heng Samrin)과 훈 센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것으로 일단락되지 않았다. 게릴라가 되어버린 크메르 루즈에게 중국과 태국이 계속해서 무기를 공급하고, 미국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곧 또 한 차례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헹 삼린
캄보디아 내전 당시 반란군과 정부군의 총격전으로 총알 구멍이 난 앙코르 와트 유적
캄보디아 내전의 모습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크메르 루즈는 학살로 얼룩진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한동안은 민간인 학살을 자제하기도 했다. 1979년 12월에는 이미 민심을 잃어버린 폴 포트를 대신해 키우 삼판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크메르 루즈의 점령 지역에서는 학살이 계속되었다. 학살은 1991년에 크메르 루즈의 패배로 내전이 종식되면서 비로소 완전히 끝났다. 이후 유엔의 감시 아래 크메르 루즈를 배제한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고, 캄보디아 정부는 크메르 루즈를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해 재판을 받게 했다.
2009년 캄보디아 전범 재판에 출석한 키우 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