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태동 역사 - 13 - 재임스와 화잇 부부의 활동 당시 교회 분위기와 교회 태동의 역사
13. 재임스와 화잇 부부의 활동 당시 교회 분위기와 교회 태동의 역사
실망 이후에 재림운동이 지속될 때의 교회의 분위기가 어떠하였으며 저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으며 생활을 영위하였는가가 매우 궁금하다. 처음에 저들은 교회당 건물이 없었다. 교회당의 건물을 마련한 때는 1855년에 미시간 베틀크릭과 뉴욕 벅스 브리지였다. 처음에 저들은 그저 자신의 집에서 모여서 여러 가족이 함께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안식일 아침에는 설교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당시 목사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윌리암 인그람, 죠지 홀트, 죠셉 베이츠, 재임스 화잇 정도였다. 몇 명 되지 않는 목사의 수로 흩어진 양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저들은 급료도 받지 못하엿다. 안식일 찬미는 펌프 오르간으로 불렀고, 설교는 좀처럼 듣지 못하였고, 잡지와 성경을 읽는 것으로 대치하였고, 주로 논의하며 기도하며 사교적 모임을 가지며 서로 죄를 고하고 각자의 믿음을 증거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들은 예배를 드림에서 연금을 드려보지 못하였다. 저들의 식탁에는 돼지고기가 놓여 있었다. 흡연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는 건강개혁이라는 주제는 매우 동 떨어져 있었다. 안식일 시간도 해지는 시간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저녁 6시로 잡고 있었다. 이런 일이 1855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저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기별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다른 교인으로 일요일을 지키는 자들에게만 적용시켰다. 이후에 계속 발전된 것들이 1860년 건강 생활, 1870년대에 해외 선교와 교육, 1880년대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1890년대의 그리스도 인성에 대한 부요한 이해 등으로 번져났고 지금도 계속 사업은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1850년대로 돌아가서 이때에 재림운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역의 중심은 조사심판에 대한 교리였다. 이것에 대하여 처음으로 발언한 분이 하이람 에디슨이다. 성소에서의 사역의 참 근원은 그리스도로, 그가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도말을 관장하여 정결케 함이었다. 구약 당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여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하였다(렘 16:30, 33). 저들이 이러한 경험을 갖던 날에 행하였던 일은 자신들의 마음을 토로하며 살폈다. 그러한 경험을 갖지 않은 자들은 회중에게서 분리되었다. 밀러주의자들의 실패는 이러한 구속의 도말케 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심판에 대해서만 조급한 판단으로 주의 오심을 강조하고 있었다. 심판과 예수의 재림을 동일 선상에 놓았던 고로 실망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러프보로우와 우라이야 스미스 양인은 저들의 관심을 대속죄일의 심판에 가져가 첫째 기별 이후 둘째 천사의 기별과 셋째 천사의 기별이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세상을 향한 기별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상대한 정결에 대한 의미로 부각된 것이다.
도말, 정결이란 그리스도인 실재의 경험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그물에서의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던 결혼예복을 걸치지 않는 자에 자에 대한 박새,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자의 무성의한 자에 대한 판결 번복 등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되어야 할 신분의 고상함을 묘사한 것이다. 말 3ㅣ17,18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저들은 특별한 소유로 되어 귀한 보석이 될 자들이다. 주님이 오시기 전 우리들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경험을 지님에 대한 만전을 기하여야 함이 우리 모두의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 가연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없는 상태가 저들 스스로 될 수가 있는가? 결단코 될 수는 없으며 저들은 결단코 자신이 죄 없다고 할 수가 없다. 저들이 야곱의 화난을 경험할 때에 갖는 일들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통절하게 느끼고 저들의 모든 죄를 버리는 데에 충실한다. 하늘의 기록책으로부터 죄가 도말이 되는 놀라운 축복의 음성을 듣는다. 이 모두는 믿음으로 되는 일이다.
이렇게 죄의 도말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되어 사단의 제어와 마지막 환란의 날에 설 수 있어야 한다. 1888년 엘렌 화잇은 회중을 상대로 설교할 때에 지금 주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회중의 시선을 성소 안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성전에서 사역을 시작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육체의 더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하고 있다. 우리는 육체와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부터 우리들을 정결케 하여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온전히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말씀은 고후 7:1의 말씀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경험을 갖게 되는 일이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씻어짐이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할 일이 우선 복종이다. 마 7:12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를 지니고 정결케 되는 과정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죄의 도말은 대화에만 타나나는 것이 아니라 저들 태도에 기인되어 저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어야 한다. 안식일 사상은 환희가 아니라 거룩하게 됨의 그 자체이다. 안식일의 계명의 의미가 그것을 요구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겔 20:10에서 말하는 바대로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을 아는 것으로 주와 나 사이에 거룩한 표징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의 기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주님의 사역이 우리 개개인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시간에 살고 있음을 깨우치는 강력한 기별이 되고 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는 생활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죽어서 하늘에 간다, 지옥에 간다 하는 신조들을 차단할 것이다. 살아서 그리스도처럼 되어지는 축복의 과정을 받도록 할 것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인이 된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함에 대한 답은 성소에 계시는 그리스도라고 화잇은 설파하였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확인케 하여 준 기별이 이 교회를 지탱하게 하고 잇다. 1850년에 시작된 일이 지금까지 근 170년 이상 가까이 지속되어 고오 있다.
이러한 일이 지속되어 오던 초기 단계에서는 교회도 없고 정상적인 목사의 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교회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복음의 질서를 위한 조직 개편이다. 흩어진 재림신자들이 모여 안식일을 지켜 나가고 하늘 성소에 대한 빛을 전달하는 입장에서 교회의 간판 없이 사업을 운영하여 나감에 있어서 애로사항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게 되었다. 저들 모두는 한때 자신들이 속하려 있던 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무리들인지라 처음에는 교회 조직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았었다. 이제는 하나의 단체가 되어 믿는 무리의 수가 4,000명이나 되었던 형편에서 단체의 이름을 정하여야만 하였다. 이에 대한 필요가 16년이 지난 1860년대에서야 대두가 되었다. 부패한 교회에서 나온 저들인데 다시 인간 중심으로 조직하게 되면 또 다시 바벨론이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가졌던 저들이었다. 교회 간판을 내거는 일을 일컬어 로스웰 코텔 씨는 창 11장에서의 바벨탑을 쌓는 과정을 언급한 말 중에는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성과 망대를 쌓는 것에 교회의 이름을 적용하였다. 교회가 잘못하면 창녀가 된다. 교회는 거짓된 신조나 특적적인 잘못딘 요소를 지닐 수가 없으나 그런 것들을 완전히 배제된 것이어야만 한다.
1860년이 오기 전에도 복음의 질서를 따르는 교회 조직에 대한 논의가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보수자의 주장에 따라 더 이상의 이름이나 조직, 신조를 채택하지 않는 않은 채로 작은 무리, 흩어진 양, 남은 자, 성도, 친구로 언급하면서 유지하였다. 저들은 단지 확신을 지닌 자들로 공통된 경험을 지닌 채로 연합하면서 믿는 바의 것들을 현대 진리라는 명명하에 잡지로 출판하여 서로 믿음을 공유하는 일들을 하여 나갔다. 이로 인하여 믿는 자도 불어났고 재정도 확보되었다. 처음의 인원이 200명이던 것이 20년 만에 3,000명이 되었다. 매 해마다 200%의 신자가 늘어나기도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뒤로 물러선 이들도 생겨났다. 믿는 회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생겨나게 된 일이 저들 집단을 지도하여야 되고 하나님의 백성을 탄생시키는 작업이었다. 안수 받았던 자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많은 수의 평신도들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저들 중에 몇 명에 안수를 주어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도록 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목사의 안수를 받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최고의 지도자들로는 재임스 화잇, 죤 바잉톤, 앤드류스가 유능한 자로 인정된 자들을 필요에 따라 구별하는 식으로 안수하여 하나님의 직무를 이행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교회 조직이 없었다. 그저 몇 사람만이 지방들을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지도하여 나가며 잘못된 것들을 시정하여 나갔다.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조직적으로 선도하고 지도하여야 할 필요를 갖게 된 배경 중 한 가지 사건은 마이네 파리스에서 안식일을 받아들인 오스왈드 스토벨 씨가 늑막염에 걸려 아파서 의사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고 기도하던 중 자신이 나음을 얻었다고 외치는 일이 생겨나며 자신이 내일 손을 쓰는 일을 하겠다고 한 일이 발생되었다. 이때에 화잇이 무뤂을 꿇었을 때에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화잇이 계시를 받는 모습이 알려지게 된다. 계시를 받을 때에 어느 한 곳을 주시하였고 눈은 열려 있었다. 그는 호흡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가 계시 중에 보았던 몇 마디 단어와 문장을 발하며 그녀의 얼굴은 자연스러웠고 그녀의 손과 팔의 동작은 은혜로웠다.
그녀가 계시를 받은 후에 자신이 만난 러프보로우를 찾아서 자신이 본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일곱째 간음을 랭한 이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얼마 전에 회개한 자였는데 그의 충실한 행동으로 보아 그가 그러한 죄를 범하였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6주가 지난 후에 화잇은 그를 알아보고 계시 중에 본 장본인임을 숨김없이 지적하였다. 그때에 그는 사실을 부인 앞에 고백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안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한 개인적인 사건이었으나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사역 중에 생겨나는 모든 일들을 이런 한 사람에 의존하여 죄를 발견하고 고백케 하여 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는 무엇인가 교회가 간판을 내걸어야 할 시점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조직하여야 할 일련의 사건이 발생되었다. 미시간 잭슨 마을에 신자인 여인 한 분이 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세탁한 옷을 갖고 가고 있었을 때에 평소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 대하여 가졌던 반감으로 창문에서 물을 끼얹어 깨끗한 옷 위에 진흙이 튄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에 그녀는 그 여자에게 쌍말로 욕을 하였다. 이 말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들에 대하여 좋은 이름이 번져나야 할 시점에 난데 아닌 욕을 내어 뱉은 일로 인하여 대장장이 팔머 씨의 집에서 그곳 지방의 목사였던 캐이스와 러셀이 그녀의 행위를 책망하고 정죄하였다. 이때에 화잇도 참석하였다. 서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을 때에 화잇 부인은 계시를 받게 되어 그녀가 잘못한 일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나서 화잇은 잠시 잊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캐이스와 러셀은 화잇 자매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에 대한 신뢰를 가졌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자리에서 계시 속에서 그녀의 행위를 보면서 두 목사가 그 여인에게 정죄한 내용이 너무 심하였음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언잖아 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여인은 눈물로 죄를 고백하였으나 두 목사는 화잇의 비평에 도리어 공격하고 갈라지고 마는 일이 1853년 6월에 생겨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진리의 전달자’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에 ‘기별자의 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때에 재임스가 마랄리아에 걸려 죽게 될 고비를 맞고 있었다. 저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 이런 일이 발생됨으로 인하여 화잇을 보호할 일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화잇 부인은 계시를 받으며 형제들에게 비난을 가하면 신문의 영향도 쇠하여지고 재림운동도 시들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로지 현대 지리를 전파함에 최선을 다하게 되면 믿는 자의 수가 더욱 증대하리라고 권면하였다.
화잇 부인이 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되지는 않았다. 또 다시 두 번째 그룹이 이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스테브슨과 함이 주역으로 다가오는 ‘시대의 당’이란 이름으로 경고의 내용 중에 구원 얻을 사람들의 기회는 다가온 시대 동안에만 지속된다고 주장하였다. 저들이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무로 50마일이나 먼 곳에서 왔으면서도 먼저 번에 이탈한 케이스와 러셀을 비난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한 통속이 되었다. 메신저당과 다가오는 시대의 그룹도 처음에는 다소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들어지고 말았다. 또 한 그룹으로 생겨난 분파가 1858년 이름도 이상한 the smoke and chew party 라고 명명하면서 담배를 피우던 자들이다. 저들은 한결같이 화잇을 대항하던 자들이었다. 이 세 부류의 집단이 분파로 되어져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들 중에 남은 자인 스눅 씨와 브린커호프 씨가 지도자로 선출되어 독립된 형태의 교회 조직을 원하면서 화잇을 반대하여 ‘마리온 당’을 창설하였다. 브린거호푸는 유니버설주의자로 전향하여 만인구제설을 믿는 자로 전향하여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제칠일교회로 명맥을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내 분파의 집단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저들 나름대로 출판물을 찍어내면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 중에서도 화잇을 중심으로 한 진영측에서는 사업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매우 힘겨운 씨름을 하여야만 하였다. 합세한 이들로서는 사라 자매와 러프보로우, 웨거너 등이다. 교회당 건물이 없던 당시에 회집을 운영하기 위한 것 중의 하나가 대형 덴트를 구입하는 것과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사람을 모으는 일도 인쇄를 통한 출판물에 의존하였다. 여기에서 생겨나는 쉽이 모든 일을 운용할 수 있는 재원이 되었다. 이 당시에 이곳저곳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모이는 백성들의 운집이 있었고 이들을 대하는 목사들이 있었다. 또한 목사로 하나님의 기별을 증거하는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재정적 도움의 방식이 채택되지 않았던 때였다. 일부 친척들이 재정을 도와주어 살기도 하였으며, 자신들의 농토와 가축 등을 팔아 생계를 돕고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살았다. 목사들은 그러한 삶의 모습에 대하여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목회자들은 설교하면서 자신의 생업을 이어나가야만 하였다. 이러한 삶이란 저들이 죽기를 각오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일에 투신하였던 엔드류스는 20대이면서도 힘든 노동에 지쳐 있었고 눈은 거의 실명할 정도에 이르렀고 그의 음성은 쇠하였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땅을 개간하고 있었다.
죤 러프보로우의 경우, 그는 문 열쇠를 만드는 일을 하였었다. 그가 지닌 돈이 35불이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설교하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였을 때에 그가 지녔던 돈 모두가 털려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그의 수중에는 실과 성냥을 살 돈 조차 없게 되었다. 자신이 지닌 돈이 단돈 3세트가 되자 부인은 이것으로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대에 그는 부인에게 봉사하면서 주님을 신뢰하자고 하였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아갔을 때에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80불의 열쇠를 주문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이행하여 나갔다.
정말로 지독하게 고생을 하던 러프보로우를 지원하기 위한 화잇 부부의 열성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자신의 곤경에 처하여 있는 모습을 계시 속에서 보고 먼 곳을 찾아온 저들의 열성에 감복하고 뜨겁게 포옹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러프보로우는 1924년 그가 죽기까지 하나님의 일을 봉사하는 데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분이다. 1859년 앤드류스가 러프보로우 집에 있을 때에 목회직에 봉사하면서 빛을 위하여 성경을 상고할 때에 발견한 것이 십일조에 대한 것과 고전 16:2의 연결이다. 저들이 모든 연금이 무엇인가? 자선이란 명목 하에서 모든 신자들이 남녀 어린 아이 장년 구분 없이 형편에 따라 돈을 내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목사들을 돕기로 하였던바 이것이 십일조 기원의 시작이다.
신자들이 목사들을 돕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면서도 이러한 일이 제도적으로 보완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가들은 신자들을 섬기고 잃은 양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이다. 또 한편으로 문제가 된 것이 저들을 돕기만 하다가 행여나 도망을 가거나 소유를 갖고 있던 교회당과 덴트와 인쇄기에 대하여 걱정하면서 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논의하게 되어 어느 한 개인에게 소유되지 않고 법인의 소유가 되기 위한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곱 명의 위원회를 선정하면서 투표하여 교회의 이름을 정하는 일이 논의되었다. 처음에 나온 교회의 이름이 하나님의 교회였다. 어감이 이상하고 자신들만을 독보적인 존재로 나타내는 강한 인상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형편 중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1861년에 블리어진 그 이름이 1863년 5월에 정식으로 통과되었다. 교회의 이름이 정해지고 그러면 누가 대총회장이 되느냐 함에 대하여 재임스는 극구 사양하였다. 바잉톤이 초대 회장 자리에 임하고 2년 후인 1865-1857, 1869-1871, 1874-1880년 3회에 걸쳐서 재임스 화잇이 교회 사업을 이끌어가는 수장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하여 신자들은 누가 정식 목사인지를 알 수가 있어 믿게 되었으며 이곳저곳을 불리어 다니며 개인적인 수고로 힘을 소모하는 폐단을 줄이면서 개개인들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여 있는 교인인지에 대한 확신감을 간직하면서 신앙인의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