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28]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세종문화회관 건축가 엄덕문
매일경제 2020.03.20
▲ 세종문화회관 전경 /사진=서울시
[효효 아키텍트-28]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서울 광화문의 풍경이자 '랜드마크'인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화재로 소실된 시민회관을 대신하여 1978년 개관했다. 서슬퍼런 박정희 유신 시대의 산물이지만 권력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건축가는 엄덕문(1919~2012)이다.
세종문화회관은 경복궁과 정부청사, 교보와 KT 사옥 등 관공서, 상업 빌딩 등이 뒤섞인 도로 축선에 바짝 붙어 있다. 도로 축선에서 뒤로 더 들어갔어야 한다는 비판은 건축가의 잘못이 아니다. 용도에 비해 절대 부족한 대지 면적을 활용하고자 한 건축가의 고민을 되짚어봐야 한다.
주변 조경은 앞 광장에 느티나무와 연못을 두어 관객이 연못을 건너 극장으로 들어가게 하려 했다. 차는 지하도로로 지나게 하고 그 위에는 잔디광장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논의대고 있는 지금의 광화문광장 개편안이다.
"광장이란 게 건물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조성해주는 공간입니다. 결국 터가 좁으니 건물도 길에 바짝 붙여 지을 수밖에요. 그걸 안마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광장을 만들어 해소했습니다. 거기서 뒤쪽으로 연결되는 공간은 반드시 뚫려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은 뒤 터가 생겼지만 그때는 거기가 도로였습니다. 건물이 다 된 뒤에 지금 공원 자리가 생겨서 음악분수도 있고 나아졌어요. 처음부터 그 대지가 확보됐더라면 좋았을 것을…."(프레시안 2009년 3월 6일 인터뷰)
감리도 나서서 했다. 서울시가 건축적 세부를 알 수 없으니 시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독하지 못하고 설계자가 역학 공학적 부문까지 컨트롤하는 것이다. 엄덕문은 자하문 밖 자신의 소유 솔밭을 팔아 인건비로 충당했다.
구조는 한옥의 안채와 별채를 세우고 두 건물을 이어주는 회랑과 한가운데 안마당에서 뒤뜰로 연결되는 개념을 현대건축으로 풀어냈다. 대지 면적 대비 과도한 공간 규모 요구를 수용해 지붕 속에 지원 시설을 넣었다. 이들은 채광을 천장에서 받는다. 바깥에서 보면 그냥 지붕 같아 보인다. 대강당과 소강당 사이의 마당이 들어 올려진 것도 저층부에 연회장을 마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옥인동 골짜기와 누상동을 거쳐 세종회관 터를 거쳐 청계천 상류로 흘러나가는 지반이었다. 상당히 큰 하천을 복개해 쓰고 있던 터였는데 홍수가 나면 이 하천의 물이 넘쳤다. 지하 2m에서 물이 흘렀다. 엄덕문은 고민 끝에 세종회관을 배라고 설정하고 무대를 두껍게 해서 닻처럼 물속에 고정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땅속 지반의 모암(母岩)에 건물 지하를 연결시켜 어떤 수압에도 배가 다치지 않게 고정시킨 닻의 기법을 쓴 것이다. 평면도상으로도 무대를 크게 한 건 현대적 무대 장치에 대한 선응 조치이기도 하다.
애초 박정희 정권은 1972년 불탄 시민회관 터에 북한 평양 인민대학습당, 만수대 극장에 필적하는 기념비적 건물을 짓고 싶어했다. 엄덕문에게 청와대는 5000명 들어갈 대회의실 등을 갖춘 기와 건물을 요구했지만 그는 "그건 평양의 특징일 뿐"이라고 거절했다. 장대한 기단과 강당의 배흘림기둥, 정면 양쪽 벽의 비천상 부조, 열린 계단 마당으로 꾸려진 얼개의 단아함, 만(卍)자 창살로 처리된 벽면 등이 세종문화회관의 특징이다.
정면 벽 두 개의 날아오르는 비천상 부조는 한국 고미술에서 취해온 주제를 그가 디자인하고 김영중이 조각했다. 육중한 건물이 날아오르듯 가벼워진 느낌이 나고 예술의 경지가 스며 있는 듯 암시를 준다. 서양화가 권옥연과 변종하가 무대막 그림을 디자인했다. 건축사가 안창모는 배흘림기둥을 우리 전통 건축의 현대화로 해석하기보다는 그리스 파르테논신전에서 보이는 서양식 기둥이 모델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세종문화회관에 대한 비판도 있다. '권위적인 조형과 건축' 평은 동시대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다. 한편으로는 엄덕문은 건축물이 천년은 가야 된다는 소신 때문에 웅장미를 설계의 첫 번째 변수로 꼽은 듯하다.
▲ 세종문화회관 전경 /사진=연합뉴스
엄덕문은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통영 나전칠기의 장인이다. 일본 와세다대 부속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 가시마 건설회사의 건축사로 평안도 강선에서 제철회사를 지을 때 광복을 맞았다. 서울에 와서 서울공업고등학교와 한양대학 건축과에서 가르치고 홍익대에 조각가 윤효중(1917~1967)과 함께 건축과(건축대학의 전신)를 창설해 국전 미술 부문에 '건축'을 포함시키고 엄덕문건축연구소를 이끌면서 과천정부2청사, 마포아파트, 소공동 롯데호텔 등을 설계했다.
1978년 엄덕문은 이희태를 영입해 광화문 교보 사옥(1980)의 실시 설계를 맡기면서 건축연구소는 엄이건축연구소가 된다. 교보 창업주 신용호는 일본의 주미대사관을 설계한 시저 펠리(Cesar Pelli·1926~2019)에게 콘셉트 설계를 의뢰했다.
일본 유학 시절 와세다대 부속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다니던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설자 문선명(1920~2012)과 친구가 되었다.(강희달 전 서울건축사회장) 이런 인연으로 그는 1974년 선화예술고(서울), 1981년 리틀엔젤스예술회관(현재 유니버셜아트센터), 1989년 선문대(천안), 1991년 통일교 도원빌딩(서울)을 설계했다. 도원빌딩에는 부분 부조와 떡살무늬 솥뚜껑과 만자 창살을 적용하여 한국적 현대 건축을 시도하였다.
1988년에 제정한 엄덕문 건축상은 후배 건축가들에게 많은 격려가 되고 있다.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