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 소화제消化劑
박정용
해외든 국내든 여행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먹거리임을 부
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낯선 곳을 찾아 떠나면 그 곳엔 낯선
사람들이 낯선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 호기심은 언제나
여행의 즐거운 과정이자 목적이 된다. 여행 중엔 숙박 교통, 음식 이 세 가지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고 성공을 좌우하는 열쇠가 되지만 그 중에서도 먹거리는 여행에 활력
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의 독특한 음식 문화를 살
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은 해외여행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여행을 자주 하는 나로서는 현지 음식으로 인한 고통이 그다지 크지 않는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먹거리 때문에 여행 내내 고생을 하면서 지
내거나 심지어는 다 집어치우고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여행객들도 있
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김이며 고추장이며 심지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김치까지혀
로 맛을 느끼면서 동시에 코로 냄새를 맡으면 감칠 맛 나는 느낌을 받지만 김치 냄
새 그 자체는 그리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정성들여 포장하여 바리바리 싸들고 다
니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 보다는 차라리 측은한 마음이 든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루에 한 끼라도 한식을 먹어야만 소화도 잘되고 식욕이 생길 뿐 아니라 정신
적으로도 안정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여행을 잡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가 이
들이 초보시절에는 의욕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고유
한 음식을 들게끔 식단을 짜지만 얼마 안 가 곧 하루에 한 끼는 한식으로 메꾸게끔 조
정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란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었다는 편이 정
확한 표현이다. 평소에 양식당을 자주 이용해왔고 호기심을 발휘하여 이왕이면 낯선
이국異國 식당을 찾던 나이기에 그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이태리
음식이면 이태리 음식, 프랑스 음식이면 프랑스 음식 모두 다 - 음, 모두 다 라는 것
은 어폐가 있지만 - 알려고 노력하고 친해지려고 애써왔기에 양식을 아무리 먹어도 질
리지 않으리라 생각해왔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비행기에서 제공되는 기내
식도 한식韓食보다는 양식洋食만을 골라 먹었었다.
작년 여름 이탈리아의 안코나 - 안코나는 이태리 중동부의 항구도시로 한반도의 원
산 정도 위치로 보면 된다 - 근처 시골 작은 동네에 약 2주간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당시 파스타의 나라, 피자의 나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리조트를 또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었다. 스트로우처럼 속이 빈 국수 마카로니, 만두피
처럼 넓적한 국수 라자네, 마카로니를 잘라 만든 펜네, 우리가 파스타의 전부인 것처
럼 알고 좋아하는 길고 가느다란 국수발의 스파게티 등 가지가지의 파스타를 본토에서
맛 볼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피자는 또 어떤가 음 스파게티와 함께 세계적으
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음식 한국에서도 피자리아에 가면 피자 몇 조각과 샐러드만으로
도 저녁 식사를 대신 했잖은가 피자를 잘 굽는 식당일 수록 피자위에 얹는 토핑보다
는 바닥 빵 맛에 더 비중을 둔다는데 한번 본격적으로 본고장의 피자맛을 비교해 보리
라고 다짐했었다..게다가 리조트까지 죽처럼 걸쭉한 쌀 요리 리조토 야채와 홍합 등
어패류가 쌀과 잘 어울려 절묘한 본고장의 맛을 보여 주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대
되는 것은 와인이었다. 남북이 길고 동서가 가늘은 이 나라가 뜨거운 태양과 척박한
토양 - 포도나무는 양질의 땅 보다는 산기슭 자갈밭 같은 경사지고 토박한 곳을 좋아
한다 - 그리고 건조한 기후 드잉 어울려 조합에 내는 와인의 원조라 하지 않던가!
내가 묵던 곳은 규모는 작지만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로 식당과 겸해 있어
숙박과 하루 세 끼니를 한집에서 해결할 수 있어 편리했다 주인 부부가 점심 식사부
터 저녁 늦게까지 식당일에 매달려 손님들을 접대하는 아주 가족적인 곳이었다. 아침
식사만큼은 그들 부부의 부모가 나와서 챙겨주었다. 도착한 다음날 점심부터 식사가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식사다 전채인 안티파스토 첫 번째 접시인 프리모 피아토,
두 번째 접시 세콘도 피아토 딸린 접시 콘토르노 그리고 과일과 디저트 커피까지 먹
으려면 단순히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큰 행사다. 전채는 야채나 햄 등을 사
용하여 만든 냉채가 대부분으로 먹기에 부담감도 없고 드레싱도 담백하여 좋았다. 첫
째 접시는 대부분 파스타였다 소스는 다양하진 않았어도 토마토와 올리브 오일이 절
묘하게 어울려 밀가루 음식을 받쳐주고 있었다. 두 번째 접시는 육류로 소고기나 돼지
고기를 삶은 후 얇게 저며 내오거나 치킨 소테가 주종이었다. 어쨌거나 숙박료와 식사
비는 이미 지불된 상태. 우리는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
아그들 부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민들이 영어를 몰랐다. -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실물을 가져와서 보여주고 오케이 하면 가져다주는 식으로 며칠을 재미있게 맛있게 먹
으면서 보냈다. 그러나 닷새도 채 되기 전에 슬슬 몸에 부담이 오기 시작했다. 음식이
식도를 지나가면서 쓰라린 자극을 주기 시작하더니 위에 들어가서는 서로 섞이지 않으
려는 듯 요동을 치며 뱅뱅 돌기만 할 뿐 더 이상 내려가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스파게티는 마치 고무줄처럼 질겼고 라자냐는 칼국수 판처럼 두껍게 만들어져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이 먹기 전부터 서로 성난 것처럼 부대끼고 있었다. 리조트는 예상
했던 상태보다 심각해서 생쌀을 씹어도 이보다 낫겠다 싶었다 그 맛있는 피자도 소용
없었다 형형색색의 토핑도 바스락 소리가 나게 구워진 밑빵도 몸속에 들어갈라치면
식도부터 통증을 느끼고 위에 들어가면 요동을 쳤다. 소화제의 구실을 해주어야 할 와
인은 왜 그리 밋밋하고 바디가 약한지 소화를 돕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음식물의 주위
를 빙빙 돌았다.
그러나 나는 참아야 했다. 나는 평소에 이탈리아 음식의 찬양자가 아니었던가. 어느
식당에 가서나 이태리 음식을 시키고 나면 잘난 체 그 음식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떠
들어 대지 않았던가. 이제 본고장에 와서 그 맛을 익히는데 이처럼 더 좋은 기회가 어
디 있다고 음식 타박을 하겠는가. 더구나 나는 반 이탈리아 사람 아니던가 (그 이유
는 이렇다. 내 영문 이름은 ‘시모네’이고 이는 시몬 혹은 사이먼이라는 뜻의 이탈리
아식 이름이다 별명이 아니라 외국인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실제로 내 여권의 영
문 표기 이름은 PARK, SIMONE JY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고작 닷새 밖에 지나지 않았
는데 내 마음의 고향 이태리에서 내 위장이 벌써 고향 음식에 대하여 거부감을 행사하
고 있다니!
겨우겨우 그곳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열차로 로마로 다
시 왔다. 로마에선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이틀의 여유가 있었지만 소용돌이티는 뱃속
을 생각하면 남은 일정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페르미니역전驛前의 호텔에 짐
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지만 그 어느 곳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이스
크림으로 저녁을 때우기로 작정하고 -이태리 아이스크림은 단연 세계 최고이다 가게
마다 어찌 그렇게 독특한 맛을 낼 수 있는지 경탄할 만하다. 하릴없이 거리를 헤매는
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서라벌이라는 간판을 단 한식집이 눈에 띄었다. 저녁을 먹
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식당 안에는 손님이 꽤 여럿 있었다. 무얼 시켜야 또 오
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까. 고민을 하다가 옆 사람을 보니 김치찌개를 맛있게 들고 있었
다. 한국에서 먹던 시뻘건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도 칼칼한 게 먹을 만했다. 그래도 먹
고 나니 금방 속이 다스려지는 듯싶었다. 그날 밤부터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위장의 트러블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었다.
진짜 거짓말처럼 소화도 잘 되었고 따라서 식욕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
정이 되었다. 다음날 또 그 식당을 찾았다. 반가이 맞아주는 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
또 시킨 김치찌개를 가리키며 느닷없이 “이것은 찌개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그녀는
어제 식사 후에 내게 무슨 문제가 있었나 하고 놀란 듯 쳐다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찌개가 아니고 소화제입디다.” 그리고 지금껏 고생했던 이야기와 찌개를 먹고 속이
확 풀려 버린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기내식으로 양식洋食 대신 비빔밥을 고추장에 비벼 맛있게
먹었다.
2005. 20집
첫댓글 반가이 맞아주는 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
또 시킨 김치찌개를 가리키며 느닷없이 “이것은 찌개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그녀는
어제 식사 후에 내게 무슨 문제가 있었나 하고 놀란 듯 쳐다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찌개가 아니고 소화제입디다.” 그리고 지금껏 고생했던 이야기와 찌개를 먹고 속이
확 풀려 버린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기내식으로 양식洋食 대신 비빔밥을 고추장에 비벼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