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텍스트와 지평발견
성경텍스트(본문)의 지평(대지의 면) 발견하기는 ,성경에 나타나는 지평(모든 이해의 과정과 관계된 넓은 의미)을 탐색하고 발견하는 단계이다
우리가 말씀을 선포하는 시대와 성경 시대는 많은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은 지금 이 시대의 잣대로 해석하면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너무 많다, 그 이유는 시간적으로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어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캐내어야만 한다.
첫째 성경에는 많은 숫자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숫자들안에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성경에 나타나 잇는 숫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숫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잇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예배의식과 관련해서 특정수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숫자들이 본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중요시되는 사물의 상징으로써 사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3. 7 등 일부 신성한 숫자들은 성스러운 제의와 관련이 있고 그 숫자 자체로서는 일정 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또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문화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이 이해되지 않기에 문화적 배경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유대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문화 코드를 잘 알지 못하면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다음 바울이 되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 이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 교회 강단은 물론이고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것을 마치 성경에 기록된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데
사행 13;9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오류다
사울(하나님께 간구하다)은 단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작은 자)은 로마식 이름일 뿐 이다
셋째 단어의 어근이다 히브리어에는 단어의 뜻도 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창8;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에서 여기서 아라랏은 거룩한 땅을 의미하는데
어근으로 들어가면 아라랏은 저주하다 저주받다 라는 뜻이다
이렇게 아라랏 산의 방주는 앞으로 오실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다. 저주받을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결국 노아와 그의 가족은 새롭게 시작하고 새 생명을 얻은 것인데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신 그 장소가 예수님의 피로 거룩해 진 것처럼 노아의 방주가 있었던 그 아라랏산이 거룩한 땅이 된 것이다.
설교자는 성경의 정보나 지식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영적 생명력’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말씀의 세계를 잘 이해할 뿐만아니라 그 말씀이 설교자의 영적 성장에 차지하는 역할을 알기
위해서 말씀의 능력, 영적분별의 도구로써 말씀과 같은 주제들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물맷돌에 관심을 가지고 물맷돌 다섯 개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
다섯 개의 물맷돌의 5숫자를 가지고 한 시간을 설교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물맷돌 다섯 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돌덩이 다섯 개를 주워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간 것이다 다섯 개라는 돌에 대해 상징적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하나 던져서 안 맞으면 다시 던지기 위해서
다섯 개를 취한 것이다,
다윗이 살던 그 시대에 물맷돌을 사용한 것은 싸울 때 일반화된 방법 중 하나였기에 사람들은 물맷돌을 던지는
연습을 해서 무기로 사용하는 훈련을 했다
사사기20;16절에 보면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라고 하였다. 베냐민 지파의 영웅적인 자질은 활쏘기와 물매 던지는 것을 매우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대상12;2)특히 왼손잡이는 그들의 특유한 면으로 부각되어 있다,
모압 왕 에굴론을 쳐서 죽였던 사사 에훗도 왼손잡이로 베냐민 지파였다 (삿3;15
)베냐민이라는 이름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것을 볼 때에 왼손잡이의 주력부대가 그들에게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점이기도 하다.
물매는 질긴 가죽이나 헝겊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속에 돌을 끼워서 던지는 무기이다.
고대 근동의 전쟁터에서 위협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물맷돌을 던지는 용사들은
모두 왼손을 쓴 군인이었고 던지는 기술이 탁월한 병사들이었다는 점이다. .
고대 중동지방에서 이 물맷돌을 던지는 것은 훌륭한 무술 중에 하나였다. 여기서 설교자가 전해야 할 것은
물맷돌을 던졌던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의 믿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
설교에 관한 성경구절 가운데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십자가의 도) 2장 5절(전도의 원리)까지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설교할 수 있는 성경이라고는 우리가 지금 구약이라고 부르는것이 전부였는데
그런데 구약 본문(사29;14)십자가의 도(인간구원을 이륙하여 완성한 십자가의 종교, 즉 복음)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설교하면서도 바울은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했다고 말한다.
구약 어디에도 예수님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울에게는 항상 하나의 주제만 있었으니 바로 예수였다.
심지어 주제의 구성요소도 ‘하나님, 성경, 설교자, 회중’의 유기체적인 관계 안에서 이 네 가지의 차원이 하나로
통합되는 신비 안에서 행했던 것이다
❒설교의 권위와 카리스마❒
설교가 예배라면 설교자는 예배로서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전하려 하지를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자기변호나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설정하여 성경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설교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곧 예배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진정 예배가 될 때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중보자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인간의 본 모습이 어떤지를
가감 없이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인 것을 스스로 인식했을 때 메시지에 카리스마가 묻어나게 되고,
이 카리스마는 인간적인 꾸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대언할 때 진정한 권위를 드러나고 하여 사람의 심령을 움직이는 영적 카리스마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설교의 능력으로 치유함을 경험해야 하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말씀을 소화하고 유익함을 얻고 치유적인 내용을 찾은 다음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
설교의 능력과 효과를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런 설교는 설교자나 예배자 모두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
하나님과 교통하는 마음으로 임하기에 환희와 기쁨을 동시에 가져오게 된다.
가장 좋은 설교란 쉬운 설교이다, 즉 쉬운 설교는 누구나 잘 이해할 수가 있어서이다. 단순한 메시지로 청중들이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쉬운 말을 쓰면서 앞뒤가 정된 되고 문법에 맞고 합리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사실 한편의 설교는 작은 논문과 같다할 수 있다. 작은 논문인만큼 분명한 ‘주제’와 ‘목적’과 ‘결론’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설교자가 본문의 전개와 무관하게 또는 전혀 맞지 않게 예화를 사용하거나 앞뒤의 말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설교를 했을때는 청중들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오히려 반감을 갖거나 지루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좋은 설교와 위대한 설교의 차이는 설교자와 청중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
빌립보서의 메시지는 바울에게서 왔지만 듣는 이들을 향한 설교의 효력은 ‘성령’으로부터 왔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영혼을 회심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성령의 인도로 복음의 원리와 그 결과를 가져오는 (사행8;26~40)
성령의 인도로 (사행9:20~22)회개한 사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의 영혼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는데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영혼을 향하는 설교자는 온전한 성령 충만함으로 영에 이끌리는 설교자가 되어야 좋은 복음사역자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16장에 바울이 빌립보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기사에서 그때 바울은 여러 여성들에게 복음을 제시 할 때에 그중 한 사람이었던 루디아가 나오는데 (11~15) 내용에서는 복음의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루디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행16;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아멘
이 말씀의 문맥의 흐름을 볼 때에 역사성 (고대의 루디아지역) 도시. 공업도시로 염색공업과 금속 세공업 발달,
루디아라는 이름은 로마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 그러나 본문의 루디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는데
14절 15절은 자주 장사 루디아의 회심사건으로 인하여 복음의 결과는 15절에서 온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고
이 루디아의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어 빌립보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바울을 섬기는 봉사를 아끼지 않을만큼 복음을 듣고 난 후의
결과는 온가족이 구원을 받는 축복이 임했다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온가족이 세례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 축복은
고넬료의 가족(사행10;1~8), 빌립보 간수의 가족(사행16;31~34), 그리스보의 가족(사행18;8), 스데바나의 가족(고전16;15~16),
등이 있는데 설교자의 사명적인 복음의 전달로 영혼구원의 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