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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7일
말씀: 이사야6:1-8
제목: 겸손이 주의 뜻을 이루자
성경에는 단어하나, 또한 문장하나가 굉장한 메시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단어나 문장의 하나의 해석을 잘 못하면 이단적인 교리를 가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 단어가 가지는 어떤 액자소설같이 의미가 풍요롭게 들어있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웃시야왕이 죽든 해’에라는 이 문구도 굉장한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이런 표현이 왜 중요하냐? 하면 웃시야왕은 16세의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그리고 장기간 동안 5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왕은 정치도 잘 했지만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았던 왕이었습니다. 역대하26:4‘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인간들은 겉만 보고 속일 수 있지만 속을 보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보실 때에 웃시야왕은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내면이 반듯하고 정직했던 왕이 웃시야왕입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대단했다고 했습니다. 8절‘ 암몬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그랬습니다. 대단한 왕입니다. 내면이나 외적으로 능력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고 하는 일이 잘 풀리고 그러면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 왕이 백성들에게 칭송을 듣고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역대하 26:16‘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한지라’
이 구절을 접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슬픔을 자아냅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잘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꿈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이 꿈을 이루고 대중화되고 높임을 받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이 교만이라는 유혹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낙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큰 교회하시는 목사님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만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를 이루고 있으면 교만할 수밖에 없는 주위 환경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겸손을 유지하고 교만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왜 산으로 가야하느냐 하면 이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성경말씀이 한 치 오차 없이 영적인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을 날마다 확인합니다.
교만이라는 것이 사람의 인격과 교양에 따라 오고 안 오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성공을 하고 이런 불경기에 자기만 잘 되고 인정받고 칭찬 듣고 하면 교만은 별책부록으로 같이 딸려 오는 것입니다. 교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동적으로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교만이고 뭐가 겸손입니까? 겸손은 교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업에 성공을 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까?’그러면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아이쿠! 제가 했나요 하나님이 다 해 주셨지요. 하하하’그런다고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의를 갖춘, 그러니까 가식적인 교양의 모습을 가지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뭐가 겸손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렵고 힘들고 기댈 때 없을 때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런데 이 제 먹고 살만하고, 화장실이 두 개있고, 사업에 자리를 좀 잡게 되고 그러면 초기에 하나님 앞에 절박 하게 매달리는 것이 슬금슬금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제가 새벽기도 때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못살고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그러니까 1970년도에는 새벽기도에 성도들이 참 많이 나왔습니다. 그의 출석의 50%를 넘게 나왔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살기도 힘들었고 여유도 없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런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교회 다니든 안다니든 새벽종소리에 일어나야 먹고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작정기도회를 한 번 하면 학생들도 다 나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능력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해서 치유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새벽에 나와서 눈물 흘리면 기도했던 사람들 지금은 다 축복을 받아서 잘 사는 모습이 이천년 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주의에서 나타나는 산 증인이 많습니다. 그 때는 겸손했습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하는 고백의 자세가 겸손 아닙니까? 그러면 반대로 교만이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새벽기도가 자꾸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제는 먹고 살 만 하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새벽기도 나간다하면 믿음이 굉장히 좋은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사실 우리 연변에서는 그 정도 가지고는 믿음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겸손한 인생은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사업이 이제 그의 자리를 잡았고 자식들은 잘 커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세상과 사업에 있어서 지혜를 구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할 것 같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험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아예 대 놓고 교만한 사람들이야 자기도 교만하다는 것 앎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예의 바른 척하고 어른들에게는 항상 친절하게 대하고 겉으로는 미소를 항상 잃지 않고 늘 칭찬하고 교양있게 생활하는 사람이 정말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정말 겸손한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뭐가 겸손이고 뭐가 교만인지 아십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 기준이 내 힘으로 살 수 있도록 자신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람의 차이에서 겸손과 교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만과 겸손의 기준을 따져야합니다. 아무리 인격적이고 성품이 좋고 친절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할지라고 그가 하나님이 아니면 살수 없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그는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라옵는 것은 여러분들이 항상 겸손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서, 어린아이가 부모의 보살핌이나 돌봄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도와주시 않으시고 돌보지 않으시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그런 겸손을 유지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죽을 것 같고 오늘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시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태도가 유지되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하면 역대하 26;5 ‘ 하나님이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웃시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웃시야에게 형통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복의 공급이 여호와를 부를 때까지입니다. 목사가 부흥은 프로그램이 좋았고 내가 성경공부를 잘 시켰고 설교를 잘 해서 이렇게 부흥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공급함이 끊어지면 망신만 당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특히 목회에서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내 힘으로 내가 잘 선택해서 내 복이라서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느끼며 사는 순간 하나님의 공급함과 도우심이 끊어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집이, 사업이 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의 영혼은 완전히 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헛된 삶으로 인해 인생전체가 망하는 그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 이런 부분은 자신이 있어, 내가 아니면 힘들 걸’ 이런 말이 꿈에라도 헛소리로 나올까봐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만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교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웃시야는 처음에 잘 나갔다가 그의 마지막은 망한 인생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을 잘 파악해야 됩니다. 오늘보다 현재보다 5년 뒤 10년 뒤가 잘 되어야합니다. 과거야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이미 지나갔으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으로 인해 지금 자리를 잡고 잘 된 것이라면 결국 과거는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잘 되시고 현재보다 미래가 더 잘 되시기를 바라니다. 여러분의 가문이 여러분 대 보다 후손이 더 잘 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이 승승장구 잘 뻗어나간 다든지 여러분들이 지금 만족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인해 결코 여러분들이 실패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조금 잘 된다고 우쭐해져서 웃시야처럼 하나님을 구하지 않은 심령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 없이는 죽을 것 같은, 나는 망신당하고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찾으시기 바랍니다. 웃시야는 말년에 문둥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온 나라가 웃시야가 죽든 해니까 얼마나 나라가 혼미하고 어려웠겠습니까? 이사야 6:1-3 ‘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 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 등장하는 스랍은 천사 중에 가장 높은 천사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가립니다. 이것은 가기 부정을 의미합니다. 가장 높은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존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천사라도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이런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아무리 내가 교회의 중직자요 교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하나님 앞에 나를 부정하는 태도가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하는 사항입니다.
교회 안에 중요한 분들은 늘 그래서 기도해야 됩니다. 이 교회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계시면 잠깐 떠나 가 있어도 잘 돌아간다는 것을 금방 아실 것입니다. 성가대에 노래를 잘 하고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하는 사람이‘내가 없으면 성가대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지만 잘 돌아가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할 수있느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활동무대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둔한자를 통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이 그래서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한 분만 중요하고 그 한 분만 일하시면 됩니다. 교회에서 일하시는 모든 사람들이 날개로 두 얼굴을 가리시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두 스랍들이 하나님 존전에서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면서 3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전율을 느낍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죽는 것만큼 큰 복이 어디에 있겠느냐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광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목사인 저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의 언어로 표현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경험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이 소원이 나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만 체험된다면 이 예배는 완전히 뒤집어 지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제가 저번 주에 도전의식 모험의식을 가지고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적용하는 문제로 오후예배도 도전하시고 새백 기도도 도전하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여러분들의 고집을 꺾고 남은 사람들이 그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설교로 끝났지 이것이 무슨 은혜와 감동과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났더니 이사야 내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에서 3가지로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변질된 자신의 실체를 경험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5절을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순간에 ‘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마자 부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망하리로다 라는 것이지요. 한국에는 성령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성령을 경험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교만하면 성령을 재대로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았다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폄하하고 무시하고 상처를 주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성령 받은 것일까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아도 방언을 못할 수가 있고 성령을 받아도 많은 은사가 체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모든 성령받은 사람은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은사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받은 이유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하는 이사야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맨 날 남의 탓 만 하든 사람입니다. 정부 탓 에서부터 조상 탓까지 모든 것이 남의 탓인 사람이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것이 내 탓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에서 이런 운동을 벌렸지 않습니까? 정말 잘 한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모아졌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 캠페인을 벌리는데 차 뒤쪽에 붙이고 다닙니다‘내 탓이요’ 그래서 제가 차 뒤에서 따라가면서 뒤에서 받으면 내 탓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조심해야 겠다 뭐 이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자기 탓이라면 조그마하게 스티커를 운전석에 붙여서 항상 ‘그래 내 탓이야’하는 것을 각인시켜야하는데 자기는 보이지 않은 차 뒤쪽 트렁크에 붙이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결국 자기 탓이 아니라 당신 탓이라는 것을 홍보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네 탓이요’하는 것은 캠페인 벌려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 안 되는 가정은 다 남의 탓입니다. 부모 탓, 자식탓, 형제 탓, 그리고 은혜가 안 되는 교회는 전부 다 남의 탓입니다. 목사님 탓, 장로님 탓, 권사님 탓 이런 중진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입니다. ‘어디 중진들이 신앙의 본을 보여 본 적이 있느냐 앞장서서 헌신해 본 적이 있느냐’맨 날 남의 탓입니다. 은혜가 있는 교회는 남의 탓할 여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망하게 되었는데, 내가 죽게 되었는데 누구를 탓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아사야처럼 가슴을 치며 ‘내가 문제입니다’내 가정에 내 아내가 문제가 아니고 내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의 연약함을 확인하며 여러분들의 실체를 깨닫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치유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6절 ‘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하던 그 때에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치유되어야합니다. 망하게 되었도다만 계속 그것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것도 중요하고 그것이 기초가 되어야하지만 그 다음은 그 연약함으로 망하게 되었던 그 원인이 치유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정죄는 많은데 치유가 없으면 안 됩니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원점입니다. 깨닫는데 계속 연약한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발견하면 치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간구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경상도사람은 다혈질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문디이 자석, 니 놓고 내가 미억국 무웃다 이 문디자식아’뭐 이러면서 자기가 낳은 잘못은 전혀 없고 자기 닮은 것에 대한 반성을 전혀 없고 그냥 아이만 죽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상처가 얼마나 쌓이겠습니까? 이 경상도 사람들이 싸워도 얼마나 욕도 잘하고 잘 싸우는지 모릅니다. 싸움이라는 것은 자기 잘 났고 남이 잘못했다는 것의 상징적인 사건 아닙니까?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난 뒤끝 없는 것 알지’ 상처 줄 것 다 주고 아픔 줄 것 다 줘 놓고 자기는 뒤끝이 없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은 확실히 뒤끝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해서 그 날 밤잠을 못잡니다. 그리고 또 이런 얄미운 이야기를 합니다. 실컷 퍼부어 놓고는 ‘나 속에 못 담아 주는 것 알지?’이럽니다. ‘그러면 너만 못 담아 주냐’아주 웃깁니다. 알면 고쳐야죠 그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그 나이게 되도록 속에 담아두지도 못하고 삭이지도 못하는 미숙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고쳐야지요.
은혜가 공급되는 교회라고 자랑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거짓말입니다. 우리교회는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내면세계가 고침을 받고 치유가 일어나고 성격이 고쳐지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인격이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인격이 변화를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저부터 인격이 변화고 여러분들이 날마다 인격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교회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로 은혜 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심정이 회복되었습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 당시 얼마나 사람들이 강퍅한지 모릅니다. 그런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주의 종이 여기에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헌신의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저런 악한 심령에게도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시기를 원하시는 그 심정을 알았다는 것이지요. 이사야는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회복되면 저 악랄한 자들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상막합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용납하지 않고 질책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점점 빠져나가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교회는 감싸 안을 수 있는 교회입니다. 나약한 자를 보고 집중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여러분 영혼에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일주일동안 힘들게 살다가 이제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말씀을 들으려고 왔는데 빈손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골수를 찌를만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 입술을 통해서 나와야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왔습니다. 가정은 어떤 허물도 용서되는 곳입니다. 어떤 실수도 용납되는 곳입니다. 마음대로 벗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사랑으로 이해하는 곳이 가정 아닙니까? 그런데 가정이 그런 가정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합니다. 부부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그런데 부부만큼 서로 상처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 내가 당신만나서 쌓이는 것은 고생밖에 없다’‘그 때 그 남자가 결혼하지 할 때 했어야 되는데, 눈이 삐었지, 내가 이 인간을 왜 사랑해가지고’ ‘저 여편네 말만 들어도 짜증스럽다. 내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런 여편네 만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하나’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가정에서 먼저 하나님의 심정으로 회복되어야합니다. 가정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어야합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교회도 회복됩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도 받아줄 수있어야하고 누구든지 용납되어야하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의 심정으로 회복되는 성도들이 많아야 될 줄 믿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회복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여 나를 보낸 곳이 여기입니까?’여기서 변화 받고 훈련과 연단을 받아 협력하여 또 다른 이웃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로 부름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합니다. 어떤 자만이 이 일이 가능하냐하면 주님의 심정으로 회복된 자들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겸손히 내 죄를 깨닫고 치유가 일어나고 고침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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