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칠 수는 없잖아요.
주산지 간다기에 한 가랑이 두 다리 끼고 따라 붙었습니다.
마음도 급하고, 도시락반찬으로 적당한 재료도 없고, 물에 손 넣기도 싫고...
보온병에, 물 팔팔 끓여서 페퍼민트 이파리 서너 장 띄워 뜨거운 물만 한 병 준비했습니다.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김밥을 한 줄 사든지 아니면 그냥 현지에 가서 적당히 되는 데로 먹든지,
일단은 가고보자는 심산으로 그 어떤 곳에서도 팔지 않는 뜨거운 물만 한 병 챙겼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도로가 꽉 막혔어요.
가다 서다, 서다 가다.
내가 가는데 남은 못가겠습니까.
모두들 단풍놀이 가느라 도로에 차가 쫙 깔렸습니다.
내가 지루하면 남도 지루할 것이고,
내가 좋다고 가는 곳이면 남도 좋다고 가는 곳 아니겠습니까.
막히면 막히는 데로, 복잡하면 복잡한 데로, 마음 느긋하게 먹었습니다.
멍하게 도로에 턱 서 있기만 해도 성내지 아니하고,
화장실이 급하기만 한데도 참고 차례를 지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급해서 온 사람들이라 생각되었기에.
그렇게 참고 기다리고 하여 목적지 주산지까지 왔습니다.
현지에 도착하니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왁작왁작, 시끌시끌, 웅성웅성,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주산지는 대 만원입니다.
주산지의 왕버들이 닳아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역시 때를 놓칠 수는 없지요.
주산지로 올라가는 길목엔 사과농장에서 나라비로 전을 폈습니다.
"언니 사과 맛보고 가세요"
"오빠 사과 한 박스 사가지고 가세요"
"사모님 청송 꿀사과 한 박스 선물 하세요"
"사장님 맛좋은 사과 있습니다."
관광객을 상대로 사과농장 완전히 대목입니다.
청송사과 맛있는 줄은 목청 높여 외치지 않아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농장사장님들이 직접 나와서 맛있다고 외치며 맛배기로 주는 걸 먹어보니
더욱 더 맛있습니다.
반으로 착 가르면 노란 꿀이 줄줄 흘러내려요.
사각사각, 와작와작, 입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몰라요.
주는 데로 다 받아서 맛만 볼게 아니라,
삐꿈삐꿈 목 빼고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발길 놓이는 데로 아무농장에서나 덜렁 담아주는 데로 한 박스 샀습니다.
금방 나무에서 딴 큼직큼직한 사과가 30개 한 박스에 2만원,
한 열흘 동안은 간식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되었어요,
초라한 나의 가슴에도 풍성한 가을이 왔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4442E4CC393F3A6)
(경북 청송 주왕산 '주산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입니다.
사월 초파일만 되면 어김없이 이 영화를 상영하지요.
경치가 아주 멋있는 곳이랍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찍으려고 사진작가들은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1박을 하기도 해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554442E4CC393F3A7)
500년 되었다는 왕버들이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4442E4CC393F4A9)
아주아주 신기하고 멋있어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654442E4CC393F4AA)
이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왕버들이며 주산지의 아름다운 경치에 놀라 입 헤 벌리고 있다는 것을.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4442E4CC393F5AB)
같이 온 일행들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고 홀로 남았습니다.
산에 와서 산에 가지 않으면 서러워서 못 견딘다는 사람이, 왜 산에 가지 않았느냐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때가 있어요, 놓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산행을 포기하고 홀로 남게 되었답니다.
여러분들 다 알고 계시겠지만,
국립공원 중 유일하게 고속도로가 없는 곳이 주왕산이고요,
유일하게 전화가 도통 안 되는 곳이 주왕산이랍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주왕산 주산지에서 대전사방향으로 갑니다.
일행들이 산행을 마치고 그곳으로 내려오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관광버스가 들어왔던지 길이 막혀 도저히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해 안에는 갈수 없으니 그냥 내려서 걸어가랍니다.
별수 있나요, 길이 막혀 못 간다는데.
혼자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도로가 온통 주차장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와글와글 많이 걸어오더군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4442E4CC393F5AC)
한 5분 정도 걸었을까?
도로변에 사과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려 있는 사과밭 발견, 바로 사과밭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흥분한 나머지 사진부터 몇 장 찍고, 안으로 들여다보니 일꾼들의 일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옳거니 잘 됐다. 사람이 있으니 도둑으로 몰릴 염려는 없겠군,
빨갛게 익은 예쁜 사과를 내 마음껏 카메라에 한번 담아봐야지.
"아이구 할머니 수고하십니다."
"사과가 너무 탐스러워 사진만 몇 장 찍고 갈게요"
"야, 찍어가소"
'남 열심히 일하는데 무슨 늙도 젊도 않은 년이 망태를 짊어지고 들어와 들어오긴'
'시커먼 안경을 끼고 사진은 무슨 얼어 죽을 사진이야'
이런 마음으로 나를 대할까봐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사진만 몇 장 찍고 가겠다."고 했는데,
의외로 아주 반갑게 "야, 찍어가소" 이러는 게 아닙니까?
정말 고마웠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54442E4CC393F6AE)
"아이구 할머니, 너무 건강하십니다."
"절대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시소."
사진을 찍고 나오려다가 마음이 변했습니다.
어차피 일행들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건 사실이고,
중요 전화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계속 전화만 올 건 아니고,
그냥 여기서 할머니들 사과 따는 작업이나 도와주고 갈까?
"할머니, 저 사과 따는 것 좀 도와주고 갈게요"
"야, 따주고 가소"
그리하여 사과 따는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54442E4CC393F6AF)
사과가 얼마나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렸던지요.
차마 따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냥 따지 말고 오래오래 보고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골에서 자랐어도 사과농사는 지어보지 않았거든요.
약 3시간동안 열심히 사과를 땄습니다.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봐 조심조심,
단 한 개의 사과도 떨어뜨리지 않고 흠하나 내지 않고 땄어요.
오랫동안 일을 해야 하기에 힘이 들 뿐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354632E4CC39647A5)
할머니들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4632E4CC39647A6)
높은 곳의 사과를 따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4442E4CC393F9B4)
아주 높은 곳 꼭대기 따기 힘든 곳은 이 아저씨께서 마무리 해주시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1354442E4CC393F7B0)
전 이렇게 낮은 곳, 사다리 없이도 손이 닿는 곳만 땄어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754632E4CC39648A8)
이렇게 딴 사과는 툭 튀어나온 꼭지를 잘라내고 박스로 포장하여 시장에 나간답니다.
맛있는 청송 꿀사과 많이많이 사세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254442E4CC393FAB9)
지금은 오후 4시 7분, 사과 따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때도 잊고 있었습니다.
한참 사과를 따다가 "이상하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하면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세상에! 일행들 산행마치고 내려올 시간이 다 됐지 뭡니까.
급하게 주왕산 대전사 입구까지 와서 칼국수 한 그릇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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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를 띄운 쌀 동동주)
열심히 내려오고 있을 일행들 마중을 나가는데, 이렇게 예쁜 동동주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듭니다.
혼자서라도 한잔 할까?
![](https://t1.daumcdn.net/cfile/cafe/1154442E4CC393F9B6)
여기는 더 많이 들었네. 사과도 보이고 대추도 보이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2054442E4CC393FAB7)
여기는 아예 눈에 뵈는 건 다 넣었군.
도대체 몇 가지야?
국화, 사과, 대추, 더덕, 참나물, 총 5가지가 들었네.
저렇게 많이 넣으면 맛있는가?
![](https://t1.daumcdn.net/cfile/cafe/1154442E4CC393FAB8)
어머나! 찌짐도 맛있겠다.
찌짐 한개만 사 먹을까?
그러나 마음뿐 칼국수 외는 아무것도 사먹지 못했습니다.
혹시 내가 먹고 있을 때 일행들이 내려와 섭섭해 할까봐 신경이 쓰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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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은 관광지라 주막도 많고, 기념품판매도 많이 한답니다.
산에 올라가지 않은 덕에 혼자 이것저것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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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렁주렁 달린 탐스런 빨간 사과는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첫댓글 음식보다 더 맛있는 말씨에 ... 가을과 함께 사과 밭에 온 것 같아요..
주렁주렁 열려있는 빨간 사과를 본지가 엊그제 같은데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피아골에는 벌써 겨울이 와 있더라고요, 손도 시리고 어깨도 썰렁하고.
곧 하얀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건강하시고, 자주 좀 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