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의 초월
중립의 평화와 평온은 낮은 수준들을 초월한,
그리고 그런 수준들의 격력한 내적 고통을 견뎌 낸 이들에게 반가운 휴식이다.
이것은 정말, 우울, 격력한 고통, 죄책감, 두려움의 늪에서,
그리고 이득과 인정, 결국에는 재로 돌아가고 말 지상의 재물에 대한 미친 듯한 추구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영/영혼에게 하나의 회복기로 비칠 수도 있다.
중립은 후회하는 대신 과거를 교육적인 것, 그리고 애처럽게 교훈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이 이 회복 과 내적 치유의 수준에서 이번 생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중립은 그보다 낮은 수준들에 비하면 주관적으로 크게 선호할 만한 상태이긴 하지만,
아직은 신성(Divinity)의 기쁨과 광휘의 표현이거나
생명을 향한 드높임으로서의 사랑이나 연민의 표현은 아니다.
중립적인 것은 생명에 파괴적이지도 저항하지도 않지만, 적극적인 기여자도 아니다.
중립은 무저항의 참여를 통해, 그리고 결림돌이 되는데 대한 거절을 통해 생명에 봉사한다.
이 수준은 본질적으로 잠잠하며, 생명이 파노라마에 무언가를 보태지도 그것을 훼손하지도 않는다.
중립에서, 사람은 놓음과 내맡김의 과정을 통해 내면의 거울의 집에서 빠져나온 것에 감사한다.
중립에는 '반드시'나 '기필코'의 강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승리자'가 되거나 '성공'하는 것, 혹은 인정이나 수용을 얻는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정당'할 필요는 없으며,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결국에는 영적 원리와 정렬로 인해, 의식은 영감 덕분에 다시 진화하고 이것은 의지의 동의를 구한다.
내적 균형은 그다음 중립으로부터 의식 척도의 보다 긍정적인 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믿음과 긍정적 목적의 드높임으로 뒷받침되는 의도의 귀결이다.
무저항으로 인해 사랑임의 영적 에너지는 다시 영혼을 휘젓고,
영혼은 이제 앎과 표현의 한층 더 높은 수준들을 추구한다.
무조건적 사랑과 연민의 발달을 향한 잠배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점증적 이해를 끌어당기고
또한 예배와 기도의 귀결로서의 영적 진보를 끌어당긴다.
그래서 무저항을 통해 의식 진화를 추진하는 신성한 에너지라는 은총(Grace)을 향한 문이 활짝 열리고,
이로써 개인적 의지는 긍정적 대답이 된다.
그리고 끌어당김에 의해, 또한 신성한 사랑(Divine Love)의 광휘(Radiance) 자체의 점증하는
내적 온기에 의해 신성에 이끌린다.
영적 잠재성의 활성화는 무저항의 귀결이며,
그것은 마치 꽃과도 같이,
창조(Creation) 자체를 통해 물들게 된 그 내재적 성질로 말미암아
태양의 온기에 벌어지고 반응한다.
230-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