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과 자유, 그 반어와 역설의 미학
-예자비론
백남오
1. 예자비 작가에게 문학이란
본명이 이미숙인 예자비 작가를 처음 만나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군계일학이라고나 할까,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해 보였다. 세상에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예상과는 크게 다르지 않게 그는 다인茶人이었다. 차문화협회 이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도록 차茶를 벗하고 다우들과 함께 꽃에서 힘을 얻고 웃음을 더한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그 외도 심리상담사 등 여러 가지 일에 심취해 보았지만 뭔가는 모르겠지만 꽉 차지 않는다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0.2프로 정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글쎄 0.2프로라, 나는 순간적으로 그 0.2프로가 한 인간의 전부를 지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예창작을 권했고, 그는 흔쾌히 받아들여 함께 수필의 길을 걷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인생에 부족한 0.2프로는 무엇일까. 지금은 부족함이 메꾸어 졌을까가 가장 궁금하고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부분을 중심으로 그의 수필집《춤추는 여자》(2022, 도서출판 경남)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후 그는 정말 열심히 문학공부를 했다. 저녁의 러시아워 시간대이지만 대학의 강의실에 충실하게 출석하며 수필쓰기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습작한 끝에〈아버지와 고무신〉이란 작품이 완성되었고 공모전에 응모했다. 이 작품은 덜컥 2016년 경남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경사였다. 그렇게 그는 화려한 등단을 하며 수필에 본격적으로 입문을 했고, 다음해《한국수필》신인상에〈나미 공주〉외 1편의 작품도 뽑혔다. 그의 등단작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평소 외출할 때가 아니면 고무신을 신었다. 잿빛 하늘이 여명에 물들기 전부터 5촉짜리 전구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새끼줄을 꼬며 기도하셨다. 새끼틀은 가릉가릉 힘든 소리를 내며 나의 새벽잠과 뒤섞여 귓전에 맴돌았다. 고무신은 늘 아버지의 발바닥에 착 달라붙어 따라다녔다. 밭 언덕을 의지해서 소꼴을 벨 때에도, 아침 일찍 이슬 젖은 논둑으로 물꼬를 보러 갈 때도 함께했다. 이른 새벽부터 어스름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하루의 일과를 고스란히 같이 보냈다. 가끔 장화를 신을 때도 있었지만 고무신은 촌부의 고된 삶의 무게를 끈끈하게 견뎌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 식후에는 오수의 달콤한 시간을 즐겼다. 그 사이 나는 반나절을 따라다니며 지쳐 몰골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의 고무신을 씻었다. 마치 나에게 부여된 임무처럼 행했다.
오래 신어 볼품이 없어진 신발은 보통 발꿈치 뒤쪽 연결 부분부터 터졌다. 그리고 앞쪽 발가락 닿는 부분 순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신고 나면 거칠고 힘들었던 삶을 말해주듯이 신발 전체에 작은 금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그렇게 오래 신어 낡아버린 고무신은 씻어도 새것 같은 느낌이 없었다. 새 볏짚 수세미로 밀고 또 밀어도 하얀 물때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금 사이사이마다 이미 고무 성분은 빠지고 때가 배인 탓이었다.
-수필〈아버지와 고무신〉부분
화자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이슬 젖은 논둑으로 물꼬를 보러 다니는 촌부이다. 밤이면 희미한 불빛 아래서 새끼줄을 꼬며 자식과 가정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런 아버지의 신발은 외출할 때만 제외하고는 언제나 고무신이다. 그것도 신발 전체에 작은 금들이 무수히 생겨날 정도로 그렇게 오래 신어 낡아버린 고무신이다. 화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고무신은 아버지의 분신과 같다. 아버지는 좋지만 한편으로는 엄격하였기에 아버지가 오수를 즐기는 시간에 고무신을 씻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지극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인가. 화자는 요즘, 한 시간도 채 걷지 않아도 발바닥이 아파오는데 온종일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아버지의 발은 아픔을 넘어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무디어지지 않았을까 애통해한다.
고무신은 땅의 기운과 함께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화자의 주술적 사유까지 떠오르게 한다. 값비싼 신발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교감이다. 제 이름의 몫을 다한 고무신을 미련 없이 버렸듯이 이승과의 인연이 다한 날, 곰삭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받아만 왔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으려하니 이미 곁에 없다. 이제 흑백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버지다. 꽉 다문 입술과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까지 생전모습 그대로다. 침묵으로 일관하신 당신, 심연에 감추어둔 사랑을 하나둘 더듬어 본다. 살아생전 한 켤레의 신발도 사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애달픈 그리움만 간절하다고 사유한다.
그는 당선소감에서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멍울하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수십 년 간 앓아오던 병 하나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이제 글쓰기를 통해 내안에 웅크린 마음의 소리를 실타래처럼 풀어내고 싶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얼마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나니, 그것도 신춘문예로 세상에 알리고 나니, 마음의 병 하나가 치유되는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마음의 소리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가 부족하다고 말한 0.2프로의 어느 한 면이나마 채웠음이 아닐까 싶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20년에는 한국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창립된 진등재문학회가 제정한 제6회 진등재문학상의 영예로운 수상자가 된다. 수상작은「문살의 멋」이었는데 작품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가을볕이 익어 가면 문살의 멋에 빠져들게 된다. 여닫이문은 일 년에 한 번씩 문설주를 빠져나와 새 단장을 한다. 창호지에 물을 뿌려 불리면 문살과 분리가 쉽게 된다. 틈틈이 쌓인 먼지를 씻어내고 바람에 잘 말린 문은 새 옷을 갈아입는다. 적당히 풀칠한 한지는 마르면 팽팽하게 다림질을 한 것 같다. 풀칠을 많이 하면 창호지가 터져버리기 때문에 적절한 조절이 필요하다. 한지가 충분히 마르면 책갈피에 넣어 두었던 나뭇잎이나 꽃잎을 손잡이 근처에 붙이고, 모양낸 창호지를 그 위에 덧대어 마무리한다. 문을 열고 닫을 때 손잡이 주위가 터질까 하는 염려를 자연에서 얻은 소품으로 멋을 더하는 것이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여유가 묻어나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배운다.
들국화와 마삭잎으로 장식했던 문을 여닫으며 잘 지내왔다. 올해도 미리 준비해 둔 벚나무 잎으로 단장을 한다. 붉게 물든 단풍은 시간이 갈수록 퇴색되겠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낙엽이 그리움을 대신 품어줄 터이다.
문살은 공간적 미학이다. 애써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인기척에 가볍게 열렸던 문은 이웃 간의 정도 두텁게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사찰이나 고택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나 아쉬움만 남는다. 날아오를 듯 네 날개를 펼친 추녀와 함께 어우러진 한옥. 그 속에서 가녀린 문살로 엮어진 채 여백의 멋을 품고 있다.
-수필〈문살의 멋〉부분
현순영 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서 이렇게 평했다. 문살은 그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다른 것들과 어우러져 문이 됨으로써 더 아름다워진다. 원래 문살 자체가 많은 살들의 아름다운 만남, 결합, 조직이다. 그러한 문살에 한지를 붙인다. 풀칠의 묘(妙)가 필요하다. 한지를 붙인 뒤, 손잡이 부분에 말린 풀잎이나 꽃잎들을 붙이고 그 위에 한지를 한 겹 더 붙인다. 문을 여닫을 때 손잡이 주위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말린 풀잎이나 꽃잎들을 붙이는 것은 문살에 지혜를 덧붙이는 것이다. 또 그 풀잎이나 꽃잎들에 얽힌 기억과 감정을 덧붙이는 것이다. 문살에 이렇게 여러 가지를 더해 문을 만든다. 즉 문살은 여러 가지와 어우러져 문이 된다. 그 문은 숨을 쉼으로써 안과 밖의 공기와 소리를 순환시킨다.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도 차단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문의 아름다움을 “전통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작가의 말대로, 작가가 그 문을 대대로 이어져 온 생활과 문화의 한 요소로 인식하며 일상적으로 향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자비 작가의〈문살의 멋〉은 우리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잊힌 또는 낯선 것이 되어 버린 아름다움에 관한 글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작가는 그 아름다움이 잊히거나 낯설어진 현실을 감정적으로 성토하거나 그것을 되찾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왜 아름다운지를 차분히 설명한다. 작가의 설명으로 우리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잠깐이나마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역시 화자 마음의 변화가 어느 정도인지가 가장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썼다. 수필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지금도 어느 한 모퉁이에서 바람처럼 서성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필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이며 또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요. 요즘 들어 대자연 앞에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합니다. 누군가는 책장을 그냥 넘겨버릴 별것 아닌 나의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삶의 매듭을 풀어낼 진솔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려 합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쳐놓고 독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의 터널을 만들 수 있다면 끊임없이 소통하는 글쟁이로 남고 싶습니다.
대단한 변곡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또 하나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문학의 세계에 깊이 빠져버렸다. 수필창작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음이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고만 것이다. 이제 그는 수필을 빼고는 인생을 말할 수 없을 것이라 본다. 그것은 두 개의 큰상이 주는 자부심과 자신감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필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느 한 모퉁이에서 바람처럼 서성이고 있을 것이라 했고, 아픔을 치유할 수가 없었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픔은 무엇일까. 이것은 0.2프로의 보완과는 또 다른 문제라 생각한다.
2.수필집《춤추는 여자》그 반어와 역설
다시 2년 후에 그는 대망의 첫 수필집《춤추는 여자》를 펴내게 되었다. 목차를 살펴보니 모두 41편의 작품을 5부로 나누어 편집을 하였다. 작가의 말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어딘가 빈 것 같은 가슴 한편이 수필과 함께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필이라는 글쓰기가 내 마음의 치유제가 되었듯이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도 위안이 되고 공감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살아오면서 잘한 것 중에서 하나를 손꼽으라면 자신 있게 수필을 만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삶의 궤적들을 반추하고 심상을 다듬어 갈 길이기도 하기에. 때로는 아프고, 가슴 따뜻한 날도 있으리라. 내가 열어갈 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삶의 이야기를 또 꽃피우고 싶다.” 고 마무리 지었다. 그의 자서에는 네 가지의 핵심이 녹아있었다. 하나는 수필과 함께하는 동안 채워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의 치유가 되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화자의 글이 독자들에게도 위안이 되고 공감이 되기를 바란다는 기대감이다. 마지막으로는 인생 최고의 선택을 꼽으라면 수필을 만난 것이라 했다. 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가 없다. 이제는 자신을 뛰어넘어 독자에게까지 치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수필집은 경쟁이 치열했던 2022년 경남문협 우수작품집상으로 뽑혔다. 그는 이미 촉망받는 작가로 주목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예자비의 수필을 천천히 읽어보면 특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다.〈희방사를 휘돌아〉〈타르 사막에서〉〈춤추는 여자〉〈세렝게티의 주인들〉〈칠 마마의 자유여행〉〈연상〉〈사파리파크 호텔〉등등이다. 이 작품들은 여행수필이기도 하면서 작가가 지향하는 동경과 자유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음이다. 표제작이자 인도여행을 소재로 한〈춤추는 여자〉를 한번 살펴보자.
춤추던 여자는 지친 듯 기둥을 의지해서 서 있다. 이 일본 여인은 배낭여행을 왔다가 인도의 생활문화에 푹 빠졌나 보다. 국적을 버린 채 이곳에 머물며 집시와의 사랑에 빠져 있다고 한다. 인도 여인들의 화려한 치장과 달리 팔목에 나무로 만든 팔찌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유랑하는 집시의 생활, 그 외로운 자유를 한 번쯤 꿈꾸어본 이들도 많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둠이 내리면 마당 평상에 누워 별들의 세상 속으로 넘나들던 마음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자유를 향한 본능이 아니었을까. 이 길은 도박과 같아 쉽게 용기 낼 수 없었기에 별빛에 영혼을 담아 우주여행을 즐겼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녀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나온 삶의 상흔들로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맥없이 서 있는 여인의 얼굴에 회백색灰白色의 그림자가 투영된다. 지금 그녀는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일까. 문명의 발달은 편리함을 추구하게 하고 좀 더 윤택함 속에 안주하려는 것이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다. 맨발의 춤꾼에게 행복지수의 도표를 내민다면 어디쯤에서 점을 찍을까. 나보다 더 만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 소견의 기준에서 맴도는 가슴 시린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춤추는 여자〉부분
이 작품에서 화자는 파키스탄과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자이셀메르의 고성으로 가는 길가에서 춤추는 여자를 만난다. 가녀린 허리 주변을 맴돌던 흑발이 부채처럼 펼쳐진다. 맨발의 그녀는 날개가 있다면 하늘 높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격렬한 몸짓에 길을 가던 여행객들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보라색 바탕에 흰 빗살 문양의 투피스 사이로 보이는 허리 살도 부끄럼이 없다. 춤바람은 여자를 무아지경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제 속에 산재한 삶의 생채기들을 하나둘 털어 버리기라도 한 모습이다.
거리의 악사들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노천무대를 마련했다. 춤판에서 흥을 돋우는 세 명의 악사는 펌프로 물을 퍼 올리듯 춤꾼의 열정을 끌어낸다. 플라이맹코라는 현악기의 짧고 긴 울림이 길 가장자리에 늘어선 좌판 너머로 흩뿌려진다. 북을 치며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는 악사의 목 줄기 핏대가 도드라진다. 밸리댄스로 발전된 집시의 춤은 화려한 의상도 무대도 없다. 오히려 몸치장의 굴레마저 벗어난 그녀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뿐이다. 춤을 추던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엷은 추파를 던진다.
작품속의 주인공인 춤추는 여자는 배낭여행을 하는 일본인이며 집시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이 여인의 모든 것에 등치를 시킨다. 유랑과 자유를 동경한다. “어린 시절 어둠이 내리면 마당 평상에 누워 별들의 세상 속으로 넘나들던 마음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자유를 향한 본능”이었음을 상기한다. 다만 그러한 자유를 감히 용기를 낼 수 없었기에 별빛에 영혼을 담아 우주여행을 꿈꾸어 왔던 것이다. 춤추던 여자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엷은 웃음을 보내는 모습에서 강한 동질감을 표시한다. 춤추는 여인의 모습은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곧 화자의 내면을 외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번 작품집의 제목만 해도 그렇다. 화자의 반듯하고 단아한 외적 이미지와 평소의 태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굳이〈춤추는 여자〉라는 다소 반란적인 표제를 붙였을까. 이것은 자신에 대한 반어와 역설의 미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가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화자는 지나온 삶의 상흔들로 아파했던 것들을 지우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세상의 새장 속에 갇혀있는 듯한 외적인 삶일지 모르나, 진정 바라고 희구하는 바는 동경과 영원한 자유로움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훨훨 날아보는 일이다.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내면의 아픔이자 본질인 것이다. 다음 작품을 한번 보자.
①두 손으로 모래 한 줌을 모아 올려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촉감이 실크처럼 부드럽다.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흔적이 만들어 놓은 사구砂丘는 비단길이다. 푹푹 빠져드는 발자국을 남기며 힘겹게 걸어본다. 마음은 모래를 박차고 날아올라 넓은 사막을 자유로이 유영하며 둘러보고 싶다. 몸의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힘껏 뛰어올라 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 있는 가방의 무게까지 나를 잡아당긴다. 가방 위에는 바람에 실려 온 모래가 소복하다.
사막 길을 묵묵히 돌아온 낙타를 바라본다. 커다란 눈망울과 긴 속눈썹이 시선을 끈다. 매혹적인 눈과는 달리 무릎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피부는 군더더기가 생기고 표피는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피리 부는 노인도, 몰이꾼 소년도 낙타의 무릎처럼 사막에서의 삶을 탄탄하게 다져갈 것이다. 황량한 사막의 허허로움 속에서도 희망이 담긴 소년의 눈빛을 읽을 수 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밝은 얼굴에서 찾아본다.
-〈타르 사막에서〉 부분
②소백산은 철쭉이 만개할 때가 가장 아름답단다. 5월 말경이면 온 산이 꽃단장을 하니 다시 한 번 다녀가라고 당부하시던 스님의 말씀이 바람 소리에 실려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콘크리트길이 오솔길의 편안함을 거둔다. 물처럼 바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은 이 마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다시 세속의 오욕五慾이 일어날 것이다. 환경에 따라 순응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참삶이다. 내일이 되면 오늘은 과거의 한 자락에 매달아 두고, 또 하루하루를 그렇게 쟁여가며 살아갈 것이다. 쉽게 변하는 것이 마음이라지만, 마음에 움직임이 없다면 그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좋고 싫음이 분명할 때, 잡고 놓는 것 또한 자유로울 것이다.
-〈희방사를 휘돌아〉 부분
인용 작품①은 인도의 서북부 자이셀메르 지방에 있는 타르사막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여기서 화자는 일행들과 낙타를 타는데 익숙하지 않아 의도하지 않은 몸짓으로 엇박자를 낸다. 그러면서 사막의 길과 낙타를 생각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푹푹 빠져드는 발자국을 남기고 힘겹게 걸어가면서 마음은 모래를 박차고 날아올라 넓은 사막을 자유로이 유영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표출하고 있다. 끝까지 자유에 대한 소망이 무의식 속에까지 녹아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는 장면이다. 작품 ②는 소백산기슭에 있는 희방사를 여행하면서 쓴 글이다. 이 작품역시 작가는 내일이 되면 오늘은 과거의 한 자락에 매달아 두고, 또 하루하루를 그렇게 쟁여가며 살아갈 것이라 말하며, 쉽게 변하는 것이 마음이라지만, 마음에 움직임이 없다면 그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그러면서 좋고 싫음이 분명할 때, 잡고 놓는 것 또한 자유로울 것이라며, 자유를 꿈꾸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동경과 자유는 지금여기 내게 없는 것,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부재와 결핍과 부족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욕망이고, 공간과 시간과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세상 노래와 이야기들 대부분은 그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빚어진 것들이다. 고인 물은 시내를, 온실 속 화초는 거친 산야를, 나무는 구름을, 구름은 나무를, 지상의 짐승은 천상의 세계를 꿈꾼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지금 여기의 이야기는 현실이고, 지금 여기로부터 떨어질수록 낭만이 되고 환상이 되고 공상이 된다. 어쩌면 이렇게도 문학의 성격은 아주 간단하게 결정되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세계의 여러 산적 이야기들을 분석한 결과, 이들 이야기 속 발견된 사회에서는 잃어버린 순수와 모험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했다. 로빈 훗 신화는 이러한 이상들 가운데서 자유와 정의에의 꿈을 강조한 것이다.
3. 동경과 자유의 갈망
예자비 작가의 수필에서 나타나는 핵심 정수리는 동경과 자유라고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다음 작품을 한번보자.
누구나 가슴에 숨겨둔 상처 하나쯤은 간직한 채 살아가지 않을까. 하지만 내내 그 상처를 붙들고 아파하고 괴로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앞에 주어진 길이라면 묵묵히 따르는 것이 인생의 순리가 아닐는지. 지난 일에 발길이 묶여 허우적대기보다 여여히 흐르는 강물처럼 겸허하게 걸어가고 싶다. 어떤 색으로 물을 들인다 해도 본연의 모습을 찾는 물처럼 말이다.
생명의 원천인 물의 근본은 하심下心이다. 세상만물에 생명의 빛을 키워내지만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땅히 제 할 일을 했다는 듯이 몸을 낮추어 아래로만 향할 뿐이다. 길이 막히면 소리 없이 돌아가는 아량이 있고, 어쩌다 움푹 파인 길을 만난다 해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고요히 생각에 잠기듯 때를 기다릴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이기려 들지 않는 물이다. 밀려드는 힘에는 노도처럼 거친 숨을 내쉬기도 하지만 이내 근본을 찾아 나선다.
-〈텅 빈 듯 꽉 찬 바다〉부분
그에게도 상처와 아픔은 피해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 치유해 가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아픔과 직접 맞닿아 싸우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우회하여 먼 길을 돌아서 피해가기도 할 것이다. 화자는 삶의 아픔을 순리라 생각하며 강물처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생명의 원천인 물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는 하심을 배우고자 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낮추어 때를 기다린다. 어떤 경우에라도 당황하지 않고 이기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화자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삶은 득도를 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할지도 모른다.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버거운 화두가 아닐 수가 없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모든 인내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부분이 동경과 방랑에 대한 꿈으로 성장한 것이라면, 그에게는 가슴깊이 묻어둔 그만의 아픔이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 조차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날 아침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훌쩍 떠나 나그네가 되는 것, 일상과 가족들을 뒤로한 채 표표히 떠나보는 것, 그것은 나를 가두고 있는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실제로 훌쩍 떠남을 감행하든 아니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가 다시 삶을 구속하든 아니든, 떠난 뒤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든 아니든, 사람들은 누구나 방랑하는 나그네를 동경하게 된다.
헤르만헤세는 이러한 방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문학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의 삶은 방랑의 연속이고 방랑 그 자체였다. 그는 방랑을 통해 성숙했고, 작가되었으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빚어냈다. 그의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방랑을 통해 내면의 안주를 얻는다. 그의 시에서도 바람과 구름 등이 자주 방랑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방랑을 거쳐 닿는 곳이야말로 고향이며 만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도달한 목표는 더 이상 목표가 아니며, 방랑자의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법이다.
자 이제 이쯤해서 마무리할 차례가 되었다. 이 글의 결론은 앞서 제기했던 작가의 0.2프로 부족함과 연결해서 논의를 해야 되리라 생각한다. 예자비는 외형적으로 볼 때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작가다. 성장과정도 부모형제들과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티 없이 자랐다. 지금은 창원에 있는 천년고찰 불곡사에 안주하며 수많은 신도들의 개인사와 신앙심을 존경과 사랑으로 다독이는 위치에 있다. 그 막중한 일도 자연스럽고 슬기롭게 이루어가고 있다. 이번 작품집에서도〈봄의 기별〉〈품속으로 들다〉등 불교적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있다.“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엉켜버린 매듭 하나를 풀어주려는 듯 마음을 다독였다. 육중하게 깔려드는 종소리는 긴 여음을 풀어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의 파장은 심연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무작정 소리 따라 나선 발길은 시내에 자리한 사찰 입구에서 머물렀다”며 20대 시절 불교에 입문하던 순간의 상황을 수필〈품속으로 들다〉에서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그의 신앙적 수필에 대해서는 고를 달리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덧붙여둔다.
결과적으로 예자비 작가의 지고하고 평탄해 보이는 삶이 역설적으로는 동경과 자유를 향한 내면의 반란으로 분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가로서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역설이야말로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힘이다. 그런 과정에서 다도에 심취하고, 심리 상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의 삶이, 인생이 꽉 채워지지는 않았다. 그 부족함이 뭔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항상 0.2프로 정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학에 입문을 했고, 수필쓰기에 심취했다. 화려한 등단을 하고, 문학상을 받고, 한권의 수필집까지 펴내었다. 좋은 문우들을 만날 수 있었음은 새로운 덤이다.
이미 작가는 그 부족한 0.2프로를 문학으로 채웠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 전부를 채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말해서도 안 된다. 그 어떤 인생이라도 전부를 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0.2프로는 끝까지 문학을 할 수 있는 동력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0.2프로를 매우기 위해 그는 쉬지 않고 수필쓰기에 매진해갈 것임을 믿는다. 수필집《춤추는 여자》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백남오: 2004년《서정시학》수필, 2015년《수필과 비평》평론등단. 수필〈겨울밤 세석에서〉전문《고등학교 국어》교과서 수록. 2014년《고등학교 문학》교과서 공동저자. 수필집《지리산 종석대의 종소리》등 4권, 수필선집《겨울 밤 세석에서》제2회 수필미학문학상 제13회 김우종문학상 제5회 시대의에세이스트상 수상. 경남대학교수필교실 지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