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현금수송 트럭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일견하기에도 고급으로 보이는 빌라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동네였다. 골목엔 50미터 간격으로 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간도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어서 사방은 괴괴한 적막에 휘감겨 있었다.
조수석 쪽 뒤 창문 하나만 열어둔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어서 길로 접어든 차의 속도가 떨어졌다. 어둠 속인데다가 썬팅이 짙어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차였다. 차가 골목을 막 돌아오르막에 접어들 무렵 도로변 인도에 심어진 나무가 마치 둘로 분리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나누어진 한쪽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신형은 차량의 열려 있는 뒷 창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광경이었고 지켜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차의 창문이 올라가며 늦춰졌던 차의 속도가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바람처럼 창문으로 들어와 자신의 옆 좌석에 않은 한의 호흡 한점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김석준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한은 언제 보아도 인간 같지 않은 친구였다. 비록 시속40킬로미터 정도로 속도를 늦추었다고는 하지만 달리는 차량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것이나 뛰어든 후에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침착함이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사내와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백미러로 한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김석준의 후배들이다. 한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런 한을 보며 김석준은 말문을 열었다.
“정말 어렵게 탄다.”
“부러우면 가르쳐줄까?”
“생각 없다.”
한의 말에 김석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한의 시선과 마주친 김석준이 입을 열었다.
“어디냐?”
“여기”
한은 호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은 A4용지 한 장을 꺼내 김석준에게 건넸다.
인터넷의 지도 제공 사이트에서 뽑은 지도였다. 김석준은 실내등을 켜고 잠시 지도를 바라보다 앞좌석의 조수석에 앉아있는 사내에게 지도를 넘겨주었다.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역시 실내등을 켜고는 지도를 보며 운전석의 사내에게 방향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한이 준 지도상에 표현된 장소에 포착하려면 30분 정도를 더 가야 했다. 목적지는 성남시의 분당구와 중원구의 경계 지점으로 동쪽으로 성남시와 광주시가 만나는 곳이었다. 도착하면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을 터였다. 차 안은 조용했다.
“내가 할 일이 너무 단순한 거 아니냐?”
시트에 등을 기대고 앞좌석에서 운전하는 후배를 바라보던 김석준이 궁금한 표정으로 툭하고 말을 뱉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던 한의 눈에서 밝고 부드러운 빛이 일렁였다.
“탈취는 내가 맞는다. 너는 최대한 빨리 물건을 옮기고 흔적을 지우면 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변수를 차단하는 것은 내 역할이다. 너는 드러나면 안 되니까.”
한의 말에 김석준은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만나기 전에 역할분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했다. 김석준은 한이 주장한 자신의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한이 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한이라는, 능력의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걸출한 사내도 버거워 하는 조직이 그들의 적이었다. 회에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생사에 연연하는 사내는 아니었지만 튈 때와 안 튈 때를 구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는 더욱 아니었다. 불필요한 노출은 계획을 망가뜨릴 것이라는 점에 그도 동의하고 있었다. 오늘 그가 맡은 역할은 탈취한 물건을 한으로부터 인도받고 그 물건을 안전하게 운송한 후, 추적이 가능한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한이 벌어주기로 했다.
“어째 어려운 일은 전부 네가 도맡는 느낌이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쓸데없는 소리. 지금은 시작이어서 그렇다. 앞으로 네 일이 자리를 잡아가면 지금 내가 겪는 애로 사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어려움이 네게 닥칠 거다. 오해도 많이 받을 것이고, 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네가 하는 일은 기존의 판을 뒤흔드는 것이니까. 지금까지 이루어진 판 안에서 단물을 빨아먹던 자들은 모두 너를 적으로 간주할 거다.”
“기득권이라 이거지. 흐흐흐. 어려움이 있겠지. 쉬움 일은 아니지만 나도 그리 쉽게 뻗지는 않을 거다.”
“안다.”
“판은 네가 마련해준 것이다만 나도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김석준의 음성은 느긋했다. 그에게서 여유로움을 느낀 한은 싱긋 웃었다.
김석준에게선 한 점의 망설임도 그리고 팍팍한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건, 그리고 마음을 비운 사내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여유였다.
그들이 탄 차가 두어 개의 터널을 지났다. 한밤중이어서 도로에는 차량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한과 김석준이 입을 다물자 차 안엔 작고 부드러운 엔진음만이 들렸다. 그렇게 10여분이 이어지던 침묵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내의 음성으로 깨졌다
“형님, 거의 다 온 듯합니다.”
“세워라.”
한의 지시를 들은 사내가 도로변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의 어두운 공간에 차를 정지시켰다. 한은 차의 문고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연락하면 움직여라. 그들이 이동을 끝낼 때까지는 추적만 한다.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내야 해. 그들에게서 물건을 인도받는 것은 그 뒤다.”
“알았다.”
김석준의 대답을 들은 한은 그를 한번 힐끗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차에서 내린 한의 모습이 인도 너머의 건물들 사이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이 들어선 거리는 사무실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아니어서인지 불이 꺼져 어둠에 잠긴 건물들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와 같은 검은 티에 검은 바지 차림의 한은 그 어들에 파묻힌 채 전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300여 미터를 전진한 한의 신형이 앞을 가로막은 7층 건물의 외벽에 바짝 붙어 섰다. 그 외벽을 천천히 돌아 나가던 그는 건물의 모서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7층 건물과 나란히 선 건물 사이에는 차량 두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 중 중간지점에 주차되어 있던 지프차의 창문이 조용히 10센티미터 정도 내려갔다. 그 차량에 다가선 한은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듯 말없이 그 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셨습니까!”
나직하게 인사하며 상체를 모로 틀고 인사하는 사내는 약삭빠른 인상의 20대 청년이었다. 눈이 작고 하관이 뾰족하게 빠져서 인상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청년이었는데 지금 한을 보는 눈에는 순수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오래전부터 한의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해온 조영구였다.
“상황은?”
“곧입니다.”
조영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무심해 보이지만 그는 한의 눈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를 만족시켰다. 그는 한에게서 어떤 보상을 바라며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한을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을 만난 것은 인생의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내였다. 한을 만나면서 양아치에 불과했던 그의 인생이 변했던 것이다. 그런 한에게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은 믿음이었다. 그는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선욱이는?”
“저 안에 있습니다.”
조영구는 눈앞에 보이는 도로 건너편의 10충 높이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의 앞에는 두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지만 모두 승용차라서 시야를 가로막지는 않았다. 조영구가 손짓으로 가리킨 건물은 외벽을 모두 검은색의 매직유리로 덮은 현대식 건물이었다. 현관 정문 위에 ‘(주)정수건설'이라는 금빛을 입힌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위험할 텐데 혼자 안에 두었단 말이냐?”
한의 음성에 염려하는 기색이 어려 있는 것을 안 조영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만류하긴 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누군가는 안에서 상황을 살펴야 하는 데다 선욱이가 어린 시절 좀도둑질로 날을 새던 놈 아닙니까! 자신 있다면서 안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석준 형님과 함께 교육받은 것도 있고. 일을 혼자 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몸을 빼려고 하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저도 동의한 일입니다, 형님.”
“누구도 다치면 안 된다. 저자들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자이 아니야."
“예, 형님 . 명심하고 있습니다.”
조영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한의 진정이 가슴에 전해져 기분이 좋아진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조영구가 긴장한 안색으로 왼쪽 귀에 걸려 있던 이어폰을 손으로 덮었다. 한의 귀에도 조영구의 귀에 걸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영구 형! 출발합니다.”
“형님, 출발한답니다.”
조영구가 눈을 번뜩이며 선욱의 말을 반복했다. 개미 소리 같은 선욱의 목소리를 한이 이미 들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응시하자 정수건설 건물의 왼편에 있는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건설 현장에서나 입을 법한 작업복을 걸친 남자였다. 모자 밑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사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도로와 사방의 건물 사이를 면밀하게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곧 주차장으로 다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진 후 둔중한 엔진음이 울리며 1톤 트럭 한 대가 머리를 내밀었다.
뒤에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실린 탑차였다. 침묵이 무겁게 사방을 누르고 있는 한밤중이어서 트럭의 엔진 소리는 더욱 크게 도로를 울렸다.
트럭은 한 대가 아니었다. 앞 차가 도로로 나서자 뒤질세라 같은 형태의 트럭이 한 대 더 올라왔다. 두 차량 모두 트럭답지 않게 사방의 유리창에 썬팅을 하고
있었는데 안이 안 보일 정도로 진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타고 있다는 윤곽 이상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다. 조영구와 한이 타고 있는 지프차는 전면에도 검게 썬팅이 되어 있어서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예전 한의 차를 타본 적이 있는 조영구가 흉내를 낸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한 두 대의 트럭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조영구가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잡은 손을 한이 잡아 제지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 조영구에게 한은 고개를 살짝 저어보였다.
“기다려.”
“형님, 놓칩니다.”
안절부절 못하는 조영구가 재촉했지만 한이 그의 손을 놓은 것은 20여 초가 더 지나고 나서였다. 조영구는 차의 시동을 걸며 차량을 급하게 발진시켰다. 조영구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 가라.”
“하지만...”
“놓치지 않는다. 염려하지 않아도 돼. 선욱이에게 석준이와 합류하라고 연락이나 해라.”
조영구는 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의 힘을 뺐다. 한이 흰 것을 검다고 말해도 믿을 그었다. 어떻게 트럭을 추적할 수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한의 말을 믿은 것이다.
선욱에게 연락을 하는 조영구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한은 앞서 간 트럭들의 엔진음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트럭과 그가 탄 차의 거리는 대략 7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그가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트럭 두 대의 엔진음은 곧 그의 청각에 잡혔다. 산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차의 독특한 엔진음만으로 400여 미터가 떨어져 있는 차량의 추적에 성공했던 그였다. 지금 그의 능력은 당시와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되어 있었다.
그가 탄 차와 앞서 가고 있는 트럭 사이의 700여 미터 거리는 그의 추적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거리는 그의 가시청(可視認) 거리 내에 있었다. 조영구는 물론이고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에겐 트럭을 놓칠 이유가 없는 거리인 것이다. 도로에는 차들이 너무 없었다. 앞서 가는 트럭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런 도로에서 트럭의 사이드밀러에 들어올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하면 저들은 분명히 의심할 것이고 문제가 생길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이런 일을 맡는 자들이 훈련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했다. 저들은 이런 일에 필요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한은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서 움직일 때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트럭을 탈취하는 일은 그에게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 트럭을 탈취하는 것만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트럭에 실린 물건들을 건네받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후자가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 지금 출발한 트럭이 도중에 어떤 변화도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도 있지만 회의 용의주도함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지금 트럭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들이 이번 행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한은 트럭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들을 잡는다고 해도 중요한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트럭을 덮치지 않고 있는 이유였다. 이번 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트럭의 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미행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트럭은 성남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과 연락이 된 김석준의 차도 곧 한이 탄 지프차의 뒤에 따라붙었다. 트럭의 꽁무니도 보지 못하며 운전을 하던 조영구가 한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이 방향은 성남인터체인지 쪽인데요?”
“도로를 타려는 모양이다.”
대답하는 한의 음성은 무심했다. 조영구는 한이 한 번도 그의 믿음을 배신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는 트럭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은 조영구의 의구심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설명해줄 방법도 없었고, 잠시 후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믿지 못할 것이었다. 의구심은 김석준이 탄 차를 운전하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프차의 30여 미터 뒤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불안한 듯 백미러로 김석준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는 김석준에게 트럭에 대한 미행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백미러로 보이는 김석준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서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석준의 어디에서도 불안해 보이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석준은 앞자리에 타고 있는 사내들의 기색을 눈치 챘다.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경 꺼라. 저 친구가 하는 일에 실수는 없어, 믿고 가면 된다.”
그의 말을 들은 사내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은 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김석준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았다. 그들은 김석준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성남인터체인지에서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진행하던 조영구는 한의 손짓에 차의 방향을 틀었다. 한의 손끝은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이정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탄 차는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서울 방향이었다. 서울톨게이트를 벗어난 뒤에도 15분 정도를 더 달린 지프차는 서초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다.
“유턴해라.”
“예?”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한의 말에 멍한 표정이 되었던 조영구는 말뜻을 깨닫자마자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했다. 차량 흐름은 개의치 않는 운전이어서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들이 깜짝 놀라 쌍라이트를 깜박이며 클랙슨을 마구 눌러했다. 하지만 조영구는 다른 차들이 보이는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득이나 트럭이 눈에 보이지 않아 신경이 곤두선 데다가 그들이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하면 놓칠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그의 운전을 과격하게 만들었다.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해 달리던 지프차가 한의 손길을 따라 우측 차선으로 붙으며 속도를 줄였다. 달리는 지프차의 앞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대형 간판을 본 조영구의 얼굴에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형님, 여기는?”
“의외로군.”
그들이 탄 차는 만남의 광장 주차장으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새벽시간이어서 주차장은 빈자리가 많았지만 한가하지는 않았다. 만남의 광장은 주차장에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는 차들과 24시간 영업을 하는 휴게소 매점들 덕에 활력이 넘쳤다.
“형님!”
조영구가 긴장한 목소리로 한을 불렀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이 어딘지 짐작한 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남에서부터 뒤쫓아온 트럭 두 대가 휴게소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주차장 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한은 조영구에게 주차장 한쪽을 손짓하며 차를 대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프차가 주차장에 자리를 잡자 뒤따라온 김석준 일행이 탄 승용차가 지프차와 세 대의 차량을 사이에 두고 주차했다. 5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트럭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피던 조영구의 손이 귓가로 움직였다. 그는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과 옷깃에 붙여놓은 마이크를 떼어내 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형님, 석준 형님입니다.”
한은 조영구가 건네준 이어폰과 마이크를 받아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왜?”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김석준의 음성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트럭이 도착한 곳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기다려봐라. 운전수를 바꾸는 모양이다. 아마 곧 다시 출발할거다.”
“거기서 그게 보여?”
“내 시력은 좌우 안 모두 5.0이다.”
“괴물 같은 놈!”
한의 농담을 들은 김석준이 웃으며 말하곤 연락을 끊었다. 김석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의 말에서 김석준과의 대화를 유추할 수 있었던 조영구의 눈에는 한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이 가득했다. 그에게 한은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는 사내였다. 조영구는 초능력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한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을 자신이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을 초월한 어떤 능력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한은 평범한 직업을 가진 너무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이 특별한 도구들을 사용해서 일을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자신처럼 눈치 빠른 사람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라는 것에 더욱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트럭이 만남의 광장을 출발한 것은 한의 일행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연히 출발하는 트럭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잡놈들이 여러 가지 하는데요, 형님.”
시동 키를 돌리며 조영구가 투덜거렸다. 한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조영구의 말을 받았다.
“거리 두는 거 있지 마라. 저자들도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테니까.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일이 꼬인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형님이 옆에 계시잖습니까!”
성남에서 올 때보다 확연하게 여유가 느껴지는 조영구의 음성이었다. 트럭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불안이 사라진 것이다.
“정말 복잡하게도 가는 군요, 형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조영구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현금수송 트럭이 가는 행로는 복잡했다. 그들은 서울톨게이트를 통과해서 경부고속포로를 타고 내려오다 분당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가 유턴해서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가더니 구리, 판교 간 고속도로를 타고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행을 우려하고 그런 행로를 선택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뒤를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기색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구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던 트럭은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지나 토평톨게이트를 통과했다. 트럭이 들어선 길은 경춘가도였다.
남양주를 지난 후에도 경춘가도를 달리던 트럭이 샛길로 접어든 것은 청평을 막 지났을 때였다. 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의 방향을 튼 조영구는 차의 헤드라이트를 상향등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다. 지프차가 들어선 도로는 왕복 2차선 도로였는데 포장이 잘 되어 있었지만 가로등이 없었다. 산을 빙돌아 나 있는 도로는 산의 중턱을 향해 뱀이 똬리를 트는 형국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경춘가도를 막 벗어난 도로였지만 산은 높았고 어둠에 잠겨 있는 데다가 직선 도로는 100미터를 넘지 않았다. 조영구는 시야가 막히는 느낌에 상향등을 켜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구불구불한 길 때문에 핸들을 연속해서 비틀며 도로를 달리는 조영구의 얼굴에 조금씩 긴장이 되돌아왔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세워라.”
한의 말에 조영구는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며 한을 돌아보았다.
한은 조영구에게 도로가의 숲 속에 움푹 파여진 지점을 가리키며 차를 대라는 손짓을 했다. 지프차와 뒤를 바짝 따르던 김석준의 차량이 차를 댔다. 차량들의 색깔이 점정색인 데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가 적절하게 차를 가려주는 장소였다 김석준이 한에게 다가왔다.
“다 온 거냐?”
한은 묵묵히 고재를 끄떡이며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숲이 우거진 산등성이의 뒤편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들뿐이어서 김석준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지금 한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물어서 대답을 해줄 친구도 아니었으니 궁금증은 삭힐 수밖에 없었다. 또 곧 한이 보는 것을 그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한은 걸음을 옮기며 김석준에게 입을 열었다.
“선욱이는 영구의 차를 가지고 돌아가라. 얘기했던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준비를 마치고 기다려. 석준이는 영구와 함께 이곳에서 대기해라. 차가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김석준의 옆에 서 있던 선욱이 아쉬운 듯 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욱의 눈길에서 함께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한은 선욱을 항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은 느렸지만 단호해서 선욱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지금 바로 돌아가라.”
“예.”
“석준이도 모니터를 주시하고.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알고 있어.”
웃으며 대답하는 김석준의 말을 들으며 한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숲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에 김석준과 조영구의 긴장된 시선이 따라붙었다.
한의 신형이 보이지 않게 됨과 동시에 차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며 선욱이 탄 차가 왔던 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