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게 성경이란? - 왜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까?
필자 주 : 이쯤에서 목사에게 성경이란 무엇인가를 말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목사와 성경연구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변정리를 해 봅니다.)
성경을 읽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핵심을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제파악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읽는다면 문제이지요.
프랑스어도 모르면서 <르몽드>지를 읽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언어란 히브리어와 헬라어입니다.
참 다행한 일은 히브리어를 몰라도, 헬라어를 몰라도 성경은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번역 성경의 유익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관건은 성경의 전체적 줄거리입니다.
주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읽는 것이 제대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까?
우선 성경읽기에 대한 두 구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5:39와 고린도후서 3:14-16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읽는 목적을 영생에 두었습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생의 길이 보인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부지런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저 읽는 정도가 아니라 통으로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진지한 바리새인들이라면 성경을 거의 통으로 외울 정도입니다.
오늘의 성도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한국교회는 거의 10% 미만의 성도만이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는 주일에 교회에서 꺼내보는 성경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성경 읽는 운동은 격려해야 할 일입니다.
대형교회의 물량주의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바자회를 빌미로 교회문턱을 낮췄다고 자랑합니다.
거룩한 처소가 어느새 장사꾼의 땅으로 바뀐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새 신자에게 상품으로 현혹을 합니다.
1주 출석 무엇, 2주 출석 무엇 하는 식으로 출석 횟수에 따라 상품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로 사람을 끌어와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갖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일에도 돈을 쏟아 붓는다면 성경읽기 운동에도 투자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도의 기본은 성경을 아는데 있습니다.
물론 몇 번을 통독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도라면 늘 성경을 가까이 해야 되겠지요.
읽고 묵상하는 일은 자연스러워야 되겠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저는 목사의 사역치고는 조금 독특한 사역을 했습니다.
기독음대라는 특수한 교육기관에서 오랜 기간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잠간이지만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했습니다.
기독음대는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 강의 장소를 갖고 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강의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전국의 성도들과 대면한 셈입니다.
한국 교회 전체 성도들의 성경 수준을 가늠해 볼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기독음대는 명색이 믿음 좋은 사람들이 헌신하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뜨겁게 충성하기 위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모인 곳입니다.
정말 뜨거운 분들입니다.
지금도 그 분들 중 몇몇 분들과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사역을 하던 초기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은 있는데 정작 성경엔 무지한 이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쉬는 시간도 없이 강의를 했습니다.
툭하면 시간을 넘겨서까지 강의를 했습니다.
늘 고마워하는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이 그립기도 합니다.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는데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성도들이 태반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입니다.
성경 읽는 성도와 함께 목양을 한다면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성경과 씨름하는 성도와 더불어 공동체를 꾸려간다면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와 함께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큰 교회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이 없는 속에서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성경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간간히 성경에 배고픈 이들이 나옵니다.
의외로 이단들의 덫은 곳곳에 펼쳐 있습니다.
이단이란 무엇입니까?
주변에서 이단에 넘어간 사람들을 보십시오.
성경을 가지고 뭔가 아는 체 하지 않습니까?
전혀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눈이 동그래지지 않습니까?
교회의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의 연장선쯤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재능 따라 봉사한다고 자랑합니다.
점점 더 영혼은 황폐하여 가는데도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주로 사역을 통해 만난 이들은 음악을 하는 분들입니다.
성가대를 비롯한 찬양과 관련된 사역을 하는 분들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릅니다.
음악성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모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제가 만난 대부분의 교회 음악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아니 교회 음악인들만 아니고 음악사역을 한다는 목회자도 그랬습니다.
제가 조금 건방진 말을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실상 목회자의 성경부재에 기인합니다.
무식한 목사들이 강단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무식 유무는 세상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궁극적으로 성경으로 결판을 내야 합니다.
목사에게 성경을 아느냐는 것은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의 그 오묘한 진리를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상식선에서 성도보다는 그래도 진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도보다도 못하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목사에게 요구되는 상식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목사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기준을 제시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도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성도들의 영적 수준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성경 수준도 다르겠지요.
그래서 천편일률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래도 나름 목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지노선은 있겠지요.
제 기준에서 말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제가 볼 때에 이 만큼은 해야 목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시간짜리와 세 시간짜리, 그리고 열 시간짜리와 오십 시간짜리가 필요합니다.
성경을 한 시간에 설명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 시간 동안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각각의 시간에 맞춘 줄거리를 분명 갖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 전체에서 자신만의 전문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성경의 한 분야에 대해서는 훤하게 꿰고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목사는 신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는 그 누구라도 신학자의 수준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목사 할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의 강단이 정리가 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이십년에 지났는데 아직도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숱한 세미나에 줄을 지어 다닙니다.
저도 한 세미나에 세 학기를 다녔습니다.
느끼는 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직도 배우고 있나”란 생각입니다.
배우기만 할 뿐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배움은 분명 문제가 있는 배움입니다.
목사는 분명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배운 이상으로 가르쳐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배운 만큼이 아니라 배운 이상으로 가르쳐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수가 던져준 성경진리의 파편들로 사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단편들을 갖고 목회하다 보니 이삼년이 고비가 됩니다.
성경을 깊게 팔 생각은 안하고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주워 올린 정보를 성도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성경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주변적인 것에 기웃거립니다.
목회의 본질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데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joyful.ch/hvpu/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