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이남 최대의 산괴인 지리산은 옛날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산악인들에게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1960~1970년대 지리산 등산을 다녀왔다면 대단한 산행으로 여겼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종주했다면 노련한 등산가로 인정할 정도였다. 당시 교통이 불편해 접근이 쉽지 않았음은 물론 제대로 된 등산로가 없었던 탓이리라.
등산깨나 하는 사람도 평생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찾기 어려운 이때 지리산을 200회나 오른 이가 있었다. 1980년 여름 천왕봉에서 '지리산 등산 200회 기념식'이 열렸는데, 부산 산꾼 200여 명이 참가하는 진기록도 함께 세워 국내 산악인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이 대기록을 세운 이가 부산의 성산(1939~2010) 선생이다.
선생이 등산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으로 서울에서 피난 온 배재중학생 배학겸의 가족이 선생의 초장동 집에 세 들어 산 것이 계기가 됐다. 일찍이 산에 매료된 배학겸은 '삼천리탐승회'를 만들어 구덕산 엄광산 승학산 봉래산 등 부산 시내 산을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물을 캐거나 땔감을 마련하려고 산에 가는 것 외에는 등산을 잘 몰랐던 부산 사람들에게 탐승회 회원들이 밧줄을 걸고 바위를 오르내리는 모습은 놀라운 신세계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선생은 이들의 길 안내를 도맡으며 등산의 세계로 깊이 빠져든다.
전쟁이 끝나고 탐승회 회원들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선생은 몇몇 친구들과 부산 근교 산을 올랐다. 그러다가 1958년 가을 지리산 등산 때 이명선 박선종 등과 산악회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아 선생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 산악회가 한국산악회 경남지부, 부산청년등산구락부에 이어 부산에서 세 번째로 탄생한 '초장산악회'이다. 당시 선생을 비롯한 창립회원은 그들만의 등산철학이 있었다. '등산인은 산길이든 암벽이든 만나는 모든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필요하면 줄도 타고 암벽도 오를 줄 알아야 하며 악천후에서 야영하는 기술도 익혀야 한다'였다. 1959년에는 창립정신을 바탕으로 '대륙적으로 대범하고 크게 넓게 나아가자'는 뜻에서 회 이름을 '대륙산악회'로 바꿨다.
선생은 산악회를 창립하면서 내건 개척정신 구현에 앞장섰다. 1960년 초여름, 지도는커녕 산길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고헌산에서 길을 잃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물을 뒤집어쓰며 폭포와 절벽을 돌파하는 계곡산행의 고생 끝에 정상에 서게 됐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륙산악회만이 하는 '물탕 등산'이다. 이어서 미지의 땅 제주도에 대한 답사를 겸해 한라산에 도전한다. 서귀포에서 출발해 남성대~남벽~백록담~용진각~개미등~탐라계곡을 거쳐 제주시로 돌아왔다. 선생은 무려 32명이 참가한 이 원정대 산행대장을 맡아 당시로써는 기상천외의 코스를 무난히 주파한 것이다.
선생의 불타는 의욕은 태백산 함백산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상 산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었고 교통편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갈치시장에서 산 군용장비와 일본 산악잡지를 보고 모방해 만든 장비만으로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을 뚫고 적설기 초등을 일궈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후 가야산 지리산 설악산 동계등반에 나섰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암벽등반에도 심취했었다. 1960년을 전후해 회원과 함께 초장동 뒷산인 천마산 능선의 암벽에서 기초훈련을 쌓으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대륙산악회를 태동시킨 인연인지는 몰라도 선생은 지리산을 누구 못지않게 온몸으로 사랑했다. 선생의 지리산 사랑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으로 시민안내 등산을 꼽을 수 있다. 1960년대 초 보통 5~7일 걸리던 천왕봉 산행을 1966년 2박 3일 만에 진행해 부산과 지리산의 거리를 좁혀줬고, 1979년에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천왕봉 당일 등정을 성공했다.
선생은 1964년 겨울 부산 산악인들로 구성된 '지리산 동북 루트 개척 학술조사대'의 등로반 리더를 맡아 미답으로 남아 있던 동북계곡(현 칠선계곡)의 등산로 개척에 막중한 역할을 했다. 당시 목격한 엄청난 도벌과 충격적인 운반수단(목마로, 도벌댐)을 고발하는 한편 도벌꾼들과 정면으로 맞서다 도끼를 내세운 그들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칠선계곡에 이어 중봉골, 도깨비골, 국골 등도 답사, 그 비경을 세상에 공개했다.
천왕봉 아래 법계사 초막의 손 보살(본명 손경순)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선생을 친아들처럼 맞아 줬다. 천하의 애주가인 선생에게 절 주변의 8가지 약초를 달여 낸 물에 찹쌀을 담가 팔선주를 빚어준 일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온다. 법계사 아래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얘기는 한때 부산 산꾼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부산 산악인들 사이에 "지리산이라면 성산, 성산이라면 지리산을 떠올리게 된다"고 할 정도로 지리산에서 갖가지 전설적인 기행과 기록을 남겼다.
'부산(釜山)에 가면 성산(成山)이라는 거대한 산이 있다. 이 말은 한국 산악계에 수십 년 동안 회자돼 온 말이다. 그런데 부산에 성산이라는 산은 없다. 단지 산을 너무 좋아해서 산에 미쳤고, 급기야 이름마저 본명 대신 뫼 산(山)자를 붙인 산꾼으로 알려진 성산이라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고 국제신문은 '고(故) 성산의 발자취'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랬다. 선생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산이었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나라 산천이 없을 정도로 평생을 등산에 바친 현대 부산 등산사의 산증인이었다. 전국 어디서나 부산 산악인을 들먹일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던 선생은 그 명성만큼 부산 등산계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선생은 20대 젊은 나이에 부산 산악단체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부산 등산계의 발전을 꾀하고자 했다. 그래서 1961년 구성된 '재부산악단체통합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부산 최초의 등산연합체인 부산산악연맹 결성(1965)에도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부산학생산악연맹 창설(1968)의 일등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대한산악연맹 부산·경남연맹 준비위원회 발기인 회장을 맡아 창립(1969)을 주도했고, 초대 전무이사직을 맡아 연맹 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데에도 한몫했다.
이후 선생의 일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면서 인생 궤적도 크게 바뀌게 된다. 1971년 후쿠오카산악연맹의 초청으로 일본 북알프스 원정대의 대장을 맡아 22일간 원정을 다녀왔다. 당시 직장에 휴가원을 냈지만 매끄럽게 처리되지 않아 부산공고 기계과를 졸업한 후 15년간 근무했던,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병창 검사과장 자리를 미련 없이 버렸다. 그 후 합기도 유단자였던 선생은 토성동에서 도장을 열었으나 운영은 뒷전이고 등산 다니느라 얼마 가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다.
1976년부터 팔성관광 부설 '명산순례회' 산행대장을 맡아 부산서는 처음으로 매주 관광버스 편으로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산을, 여름은 빼어난 계곡이나 폭포가 있는 곳을, 가을이면 단풍명소를 찾는 '계절형 맞춤 등산'을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한편으로 산행 개척에도 앞장서 부산에서의 등산 대상지를 넓히는 데 큰 몫을 했다.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월악산 등 전국의 명산을 부산 최초로 1박 2일 또는 2박 3일 일정으로 단축했고, 부산서는 불가능하다는 홍도 깃대봉을 3박 4일 만에 성공하면서 도서지방 등산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 수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미답지로 남아 있던 산 대부분이 선생에 의해 그 모습이 하나씩 공개된 셈이다. 그러나 명산순례회는 팔성관광과 관계를 끊고 선생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다가 재정난으로 장수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선생은 산이나 명소에 대한 설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울진 망양정에 들러 일행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조선 왕 숙종이 망양정에 올랐는데 하도 멋진 풍경에 감탄해 '이 바다를 술로 바꿔 어찌 300잔만 기울이고 말겠느냐 술이 바닥나게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경치'라고 했다"며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거창 수승대나 농월정에서는 그곳에 깃든 역사와 전설을 설명하고는 술에 반쯤 취한 채 정철의 '장진주사'를 큰 소리로 읊어 산천에 메아리쳤다고 한다.
선생은 작명의 대가였다. 일본 북알프스에 올라 한국에도 수려한 산이 많은데 왜 알프스라는 이름이 없는지 아쉬워했다. 그래서 후배 곽수웅 씨와 가지산~능동산~간월산~신불산~영축산의 아름다운 봉우리와 힘찬 능선을 '영남 알프스'라 명명했다. 지리산에도 많은 이름을 남겼다. 천왕봉 아래 거대한 바위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문을 '개선문'으로, 칠선계곡의 소와 폭포를 선녀탕 청춘홀 대륙폭포 마폭으로 이름 붙였다. 또 금정산의 고별대 대륙봉 파리봉 부채바위도 선후배들과 이름 지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선생은 등산, 등산이론, 등산실무, 등산지식을 고루 갖춘 문무를 겸비한 등산가였다. 전국의 등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100번 넘게 참가했고, 부산에서 등산 강좌나 세미나가 열릴 때면 언제나 단골로 나서서 등산의 저변 확대를 위해 열변을 토했다. 선생은 얘기를 잘하는 만큼 글도 잘 썼다. 산악인으로는 드물게 문장력이 빼어나 일간지와 산악잡지 등에 많은 글을 남겼다. 또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전국 명산 등산코스를 5만분의 1 지도와 함께 소개한 '등산코스 안내도'를 1972년에 펴내기도 했다.
본명인 성용철을 성산으로 바꾸면서까지 평생을 등산에 몰두한 선생. 낙천적이고 낭만적 성품을 지녀 풍류를 아는 산꾼으로 통했다. 언제나 등산로 개척과 자연사랑에 앞장섰고 산악인 저변 확대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영원한 산사나이였다. 부산 등산계를 대표하는 산악인이었고 한국 산악계의 큰 산이었던 선생은 2010년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부산의 진산' 금정산의 일부가 됨으로써 영원한 '부산의 산'으로 거듭났다. 선생을 '등산인 성산'으로 존경하지만 '인간 성산'으로 그리워하는 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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