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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스크랩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님 이사야 강해48.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인 그리스도
최믿음 추천 0 조회 62 15.01.19 0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7년 1월 10일 이현래 목사님 말씀 - 이사야48.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22


48.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22.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인 그리스도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이사야55:1-5).



이사야 55장 3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라고 하셨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번역되었는데 원문은 ‘다윗의 긍휼’이다.

다윗은 목동에서 왕이 된 사람이다. 누구도 그가 왕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기름을 부으러 갔을 때 일곱 아들을 다 보았지만 그들에게는 기름을 붓지 않고 양을 치고 있던 말째 다윗을 불러 기름을 부었다. 다윗을 데려오자 여호와께서는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다윗은 그날 이후로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고 그는 승승장구해서 사울의 왕조는 무너지고 다윗의 왕조가 건설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었고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민요가 생겨났다. 그로 인해서 사울은 여러 번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대항하지 않고 끝까지 그에게 아버지로서의 대우를 했던 것이다. 목동에서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흠모하고 있고 그와 같은 왕, 그와 같은 메시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유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장에 내 보내어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눈물로 침상을 적시는 깊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던 사람이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나 저런 면에서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던 사람인 것이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이스라엘 왕가는 대단히 비참했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왕들이 극도로 사악한 왕들로 멸망하기에 합당한 왕들이었다. 조선의 역사를 보아도 좋은 왕은 몇 사람 되지 않고 대부분이 악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보다 훨씬 심하게 대부분이 악한 왕이었다.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서에는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라는 말로 다윗에게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1. 긍휼은 사랑과 은혜보다 깊음

왜 긍휼이 필요한가? 긍휼은 사랑보다 훨씬 깊은 데서 나온다. 사랑은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경우에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긍휼은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너무 비참하고 가련한 자이기 때문에 사랑마저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긍휼이다. 더욱 비참할수록 더욱 긍휼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은 망했으니까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는 그런 긍휼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 확실한 긍휼이 입증된 셈이다. 다윗에게 베푸신 긍휼의 결실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긍휼은 사랑이나 은혜보다 훨씬 깊은 데서 나온다. 이스라엘과 다윗의 왕가가 그만큼 가련했기 때문에 사랑보다는 긍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련한 상황을 보면 왕들은 대부분 돌이킬 수 없을만큼 악한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들이 아무리 경고를 하고 교훈을 해도 듣지 않는 왕들이었다. 결국은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심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그는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앞으로 끌려갔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하게 끝났는데 어떻게 긍휼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수준과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은 다르다. 사랑과 은혜는 선물이다. 그러나 긍휼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선물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은혜의 근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의 대상이다. 그런데 긍휼 안에는 사랑과 은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긍휼로부터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긍휼이 아니었다면 그 패역한 백성에게 그분의 사랑과 은혜는 도달될 수 없다. 긍휼의 그릇,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특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달되었다.

피조물인 인생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다. 숨이 코에 붙어 있는 인생이 어떻게 지으신 자의 사랑의 대상이 되겠는가? 우리는 그분의 긍휼의 대상일뿐이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실 때 어떻게 사랑의 대상일 수 있겠는가? 상호간에 적당한 자격이 있어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천적으로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 존재는 어떤 의미로도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반역이기 때문에 마땅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분의 긍휼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사랑이지만 그 근원은 긍휼이다.


2.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오셨음

우리는 그분의 긍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셨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의 원천은 긍휼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긍휼로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신 그 사랑의 원천은 긍휼이다.


가. 백성들이 배척함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모든 백성이 그를 배척하였다.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에는 제자들까지도 그분을 버리고 갔다. 목숨이라도 버릴 것처럼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하였고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한 사람도 그를 버리고 갔다. 그런 가운데 그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사랑만으로는 안된다. 긍휼이 없이는 안된다.

마태복음 23장 37-38절에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받아들일만한 자세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던 백성이다. 그 결과로 A.D 70년에 타이터스의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천 년 동안 흩어져 버렸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것은 70년이었지만 예수를 죽이고 그들이 흩어졌던 것은 이천 년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에 갔을 때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 당신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예수를 죽인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라는 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예수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선지자들도 핍박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온 사람을 핍박하고 죽였던 것이다. 그들은 말을 타고 오는 메시야를 원했지 어린양 메시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어린양 메시야로 온 사람을 그들을 멸시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린양이신 선지자,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그들은 아직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다. 수천 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그러한 백성들에게 구원자로 오시려면 사랑으로는 불가능하다. 긍휼이 필요하다.


나. 그리스도께서 오심

그리스도는 배척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긍휼로 오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의 대상 이상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직도 반성하거나 신약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중동에서 성경에 따른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중동의 깡패다. 국제연합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말을 타고 오는 메시야지 어린양 메시야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그리스도가 오시면 배척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인 것이다.


다. 바울의 증언

바울은 이것을 사도행전 13장에서 다윗에게 약속된 확실한 긍휼이 결코 사망의 썩음을 보지 않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라고 말하면서 이사야 55장 3절을 인용하여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이사야 55장 3절이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바울은 해석한 것이다.

히브리어의 ‘긍휼’은 희랍어로 ‘chesed’다. 이 단어를 사도행전 13장 34절에는 ‘거룩한 것들(복수)’로 번역하였고 35절에는 ‘거룩한 자(단수)’라는 인격적인 말로 번역하였다. 거룩한 것들, 미쁜 것들이라고 할 때는 복수고 거룩한 자는 단수다.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베푸셨던 여러 가지 긍휼들을 의미한다. 어떤 사건들이다. 그런가 하면 35절에는 갑자기 ‘거룩한 자’로 표현하였다. 긍휼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가 없고 의롭다 하실 수 없으면 거룩하게 하실 수 없다. 이로 보아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은 한편으로는 복수적으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주는 기초로서 부활하신 분이다. 만일 그가 부활하시지 않았으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망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의 기초는 그분의 부활이다. 그분이 그렇게 사시고 죽으신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았다면 부활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 우리를 의롭다 할 근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의 운명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다. 첫 번째 사람인 아담으로 말미암아는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두 번째 사람인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왔다. 그러한 사람, 모범이고 샘플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을 의롭다 하심으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농산물이나 수산물을 검사할 때 보면 일일이 다 검사할 수 없으니까 표본을 채취해서 검사한다. 옛날에 내가 살던 지방에서 김을 수출할 때 어민들이 가져온 김 중에서 한두 개만 보고 검사를 해서 합격하면 도장을 찍어주었다.

표본을 보고 다른 것도 다 같이 취급한다. 예수님을 의롭다 하시면 그 의로움을 근거로 해서 그를 믿고 그의 운명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인생으로서 올바른 위치를 지킨 것에 대한, 사람으로서 참된 위치를 지킨 것에 대한 승인이다. ‘너는 참 사람이다. 네가 참 인생의 위치를 지켰다. 내가 원하던 사람이 바로 너 같은 사람이다.’라고 정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만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을 의롭다고 하신 목표는 모든 사람을 그 안에서 의롭다고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따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운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함께 의롭다 하시려고 예수를 먼저 의롭다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은 구별한다는 뜻이다. 자기의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치상으로 구별되고 성분상으로 구별되도록 하는 모든 근거가 우리를 의롭다 하심에 있다.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로마서 8장 30절에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였다. 여기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빠졌지만 의롭다고 하시고 그 결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셔서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의롭다 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그 영역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다. 그러니까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거룩하게 하심도 없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멋대로 하고 살았지만 도저히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내 아버지 집에는 품군이 많으니까 나를 품군의 하나로 받아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버지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아들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인 것은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혀서 잔치상에 나오게 한다. 이것은 의롭게 한 결과로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한 것이다. 만일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긍휼로 받아주지 않았으면 목욕을 시킬 리가 없을 텐데 의롭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목욕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혀서 아버지 잔치상에 참여하게 한 것은 영화롭게 한 것이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거룩하게 함도 영화롭게 함도 없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은 우리 구원의 기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그분의 부활하심이고, 그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을 인정하신 것이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위한 확실한 긍휼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다. 그분의 긍휼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

가. 만민에게 증거로 세워짐

이사야 55장 4절에는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열국에게, 만민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로서 세우셨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 5절과 3장 14절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 하였다. 이것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누구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실 수 없는 처지에 있는데 그런 인간 중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 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모든 사람이 불합격 되고 나니까 원래 주인이 모든 사람을 불합격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를 인정하신 것을 보니까 ‘이분은 불합격만 시키는 분이 아니라 합격도 시키는 분이구나.’라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가지신 분이라고 증거한 사람이다. 나쁜 물건을 보고 계속 불합격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검사원이 너무 심하게 가져오는 것마다 불합격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를 인정하신 것을 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가지신 분이라고 입증하시게 된 것이다.


나.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음

이사야 55장 4절에는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라고 하셨다. 어떻게 만민과 만왕의 인도자와 명령자가 되셨는가? 이것은 부시나 후진타오가 예수님의 명령을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우주적인 전쟁 안에서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적장인 사탄과 사탄의 화신을 의미한다. 영적으로는 사탄이고 육신적으로는 사탄의 화신, 사탄의 성육신이다.

예를 들어 느브갓네살이나 바로는 제국의 왕이지만 영적으로는 사탄의 화신으로 적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는 사령관으로서 인도자와 명령자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는 군대다. 군대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공격을 하듯이 우리가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적장을 물리치는 사람들일 때 그분은 우주적인 명령자가 되신다. 이 땅에서의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그분은 우주적인 사령관이다. 그래서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다고 하셨다.


다. 시온의 구속자

이사야 59장 20절에는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도성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도성을 가리켜 시온이라고 한다. 시온의 구속자, 시온을 구속할 자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신 그리스도다. 시온이 의로워서 스스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시온은 구속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라. 이스라엘의 빛

이사야 60장 1-3절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 말은 교회들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계22:5)”라는 말이 나온다. 새 예루살렘의 빛은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빛은 인격의 영광이다.

인격의 영광을 만나면 빛을 보게 된다. 구원을 얻을 때 우리는 캄캄한 가운데서 빛을 보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둠 가운데서 무슨 빛이 비쳐왔기 때문이다. 그 빛은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인격적인 빛이다. 예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오신 것을 보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하였다(마4:16). 이방의 갈릴리로 불릴만큼 변방에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는 것이다. ‘큰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놀라운 인격, 영광스러운 인격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은 이 영광스러운 인격의 빛으로 말미암았다. 만약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빛나게 보이지 않는다면, 예수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영광스럽게 보일 때 사람들은 그 영광만큼 예수를 믿게 된다. 이것이 빛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으니 열방은 네 빛으로 나아오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쳐서 그 영광이 또 다른 사람에게 비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에 의한 것인가? 이것도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는 빛이 아니고 빛을 발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스라엘을 볼 때 그들은 열방에 빛을 발할만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열방에 빛이 될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긍휼로 말미암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이 영광의 빛이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 비로소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역사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인가 그들이 굉장한 나라가 되면 온 세상이 그들 앞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열방이 오게 되는 것이지 결코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이스라엘에게 세계 열방이 복종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생각은 구약적인 해석이다. 신약은 이미 그런 세계를 벗어났다. 그런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세계가 아니다.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세계 안에서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이며 인격적인 세계 안으로 옮겨 온 것이 신약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지금 이스라엘이 새로운 나라가 되어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응할 것이라는 생각은 구약적인 해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인격의 나라는 열방의 빛이다. 경험해 보면 우리가 빛을 발할 때 세상의 영광의 빛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격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사람들은 이 빛을 보고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문자대로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빛이신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가 알고 믿는 그리스도지 결코 말을 타고 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 다윗에게 한 번 약속하신 이 긍휼은 결코 쇠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비유로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이 쇠하여진다면 이스라엘에게 행한 언약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신약에서 입증되었다. 물질적인 언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다. 다윗에게 허락하신 확실한 긍휼이신 그리스도가 왔지만 물질적으로 기다리고 역사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는 제쳐 놓고 지금도 이사야의 예언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통곡의 벽에 서서 그 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캄캄한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갈 때 “그리스도여 오셨습니까?”라고 할만큼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를 제쳐 놓고 기다리기 때문에 전혀 엉뚱한 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야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또 다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예수를 제쳐 놓고 유대인들처럼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알고 나서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져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구원이 빨리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신 그리스도!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도달했고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을 입어서 이 말씀을 확증하고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고 당신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이 다르며 당신의 목표와 우리의 목표가 달라서 우리는 당신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당신이 어디로 가시며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이루시려는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다윗에게 약속했던 확실한 긍휼,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결코 제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그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도달해서 당신의 긍휼이 확증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제쳐 놓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예수 당신만이 우리의 메시야며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이미 오셨고 이미 오신 당신을 우리가 알고 믿고 따르고 당신과 하나 되어 당신의 나라의 건축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일생이 오로지 주님의 신성하고도 영원한 목표와 계획 안에 쓰임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에게 동참하고 당신의 소유물이 되어서 당신의 영광의 표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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