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1장
1. 흩어진 열 두 지파(1)
야고보서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행함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구절을, 가장 많이 기억할 것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 삼아, 성도들이 열심과 행함이 부족하다고 보여지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면서, 행함을 강조하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야고보서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말하는 로마서와, 행함을 말하는 야고보서를, 수레의 두 바퀴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수레바퀴가 하나만 빠져도 안되는 것처럼, 신앙은 믿음과 행함 어느 하나가 빠져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이 함께 나아가야,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나, 성도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말처럼 들리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본다면 잘못된 말입니다.
가령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편 강도의 예를 들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강도에게 있었던 행함은 무엇입니까? 분명 강도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습니다. 분명 온전한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에게 있었던 행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이런 예를 앞세워서, 행함이 없어도 된다거나, 행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의 문제를, 기존의 시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야고보는 행함을 얘기합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로 행함을 말하는가를, 배워가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야고보서를 살펴가면서, 여러분께 이런 유익이 남겨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 구절에서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열두 지파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성도에게 문안한다고 해도 될 말을, 왜 열두 지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에서 열두 지파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열두 지파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발생한, 언약 공동체로 불립니다. 그 존재 자체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언약 공동체인 열두 지파, 곧 이스라엘을 세우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나라가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이스라엘을 세워서 고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과, 물과, 공기로 생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임을 부인합니다.
이처럼 은혜를 부인하는 세상은, 오직 자신의 힘을 구축하고, 그 힘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열두 지파를 세우시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힘이 아니라, 은혜에 두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출발부터가 은혜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무서운 장자 재앙에서도 죽지 않고, 이스라엘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은혜의 출발입니다.
이들은 강한 힘으로 쫓아오는, 애굽 군대의 위험으로부터도 살아났습니다. 물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은혜를 거쳤던 것입니다. 수많은 원망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약속의 땅은,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땅이었습니다. 힘은 거부하고, 은혜만 용납하는 것이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 공동체인 열두 지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바라보며 살아감으로써, 힘을 의지하는 세상의 불의함을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열두 지파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라면, 야고보가 말하는 흩어진 열두 지파의 의미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말하는 것은, 힘의 사고방식을 부인하는 의미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히 모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연합이 곧 힘으로 통용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후로, 교회가 박해를을 받았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서, 성도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사방으로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어떻게든, 사람들을 모으기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모으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많은 수가 곧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사람이 한 일은, 힘을 모아서 인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인 인간들을 흩어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힘을 모아, 그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람들을 모으는데 힘을 쓰고, 많은 사람을 힘으로 여기면서, 그 힘으로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자행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면서도, 은혜로 산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시는 것을 은혜로 오해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길을 달려가는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도를 흩으신 것은,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온 사방에 존재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야고보가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말을 하는 것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약자일 수밖에 없으며, 교회 또한 강자가 아니라 약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부터가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라고 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태어나서부터 함께 자라온 예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육신적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모든 것을 외모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요 7:5절을 보면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단지 혈육 관계에서의 형이었을 뿐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생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교회의 다른 태도와,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흩으시는 분인데, 우린 자꾸 모으려고 합니다. 없는 것은 불안하고, 많이 소유한 것이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모아놓은 것을 흩어 버리시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모았다고 해서 내것이 아니며, 내게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따로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모았다고 착각하지도 말고, 내것이라고 착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게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내 힘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해도, 수를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언약 공동체인 열두 지파, 곧 하나님의 교회에 살아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교회가 이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리고 어떻게든 큰 교회를 이루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의 정신을 팽개친, 종교 집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도는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2.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2-4)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흩어진 열두 지파는, 하나님이 세상에 세우신 참된 이스라엘은, 힘있는 강한 존재가 아니라, 약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자보다는 강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힘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인데, 정작 하나님의 뜻은 강자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약자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는 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러한 뜻 앞에서, 성도는 힘있는 자가 되고 싶어 하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는 큰 갈등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에게, 시험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말 역시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 시험이라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사고방식이, 성도에게는 시험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험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은 힘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돈이 힘이고 권세가 힘입니다. 그리고 힘없는 자는 자존심 상하면서도 굴복해야 하고,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를 약자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약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시험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결국 세상이 추구하는 힘이, 성도에게는 시험거리가 되는 것이고, 자신도 힘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고, 힘을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들이, 바로 시험에 빠진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결말을 내다보면서, 힘이 진리가 아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힘이 아니고, 권력이 힘이 아님을 알고, 생명의 나라에 진정한 힘으로 발휘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로 살고자 할 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을 이용해서, 세상의 힘을 얻고자하는 방식으로 산다면, 시험이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내게 시험이 된다는 것은, 곧 내 마음의 소망이 세상에 있기보다는, 하늘에 있다는 흔적이며, 그것은 성령의 간섭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성도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인내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힘을 추구할 때, 그 힘으로 인해서, 약자가 무시 받고 괴로움을 받는다고 해도, 힘의 결말을 알기에,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만약 힘으로 사는 세상의 방식이 부러워지고, 그 힘을 소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인내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일 2: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말씀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 역시, 누구하나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환경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믿음만을 고집하고 살아가는데 시험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만약 시험이 없다면, 그 이유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아예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정욕과 자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입니다. 또 하나는 아예 정욕과 자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의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고, 후자의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정욕과 자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천국을 얘기하면서도, 세상이 사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힘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시험이며, 이런 시험에서 하나님은 성도를 간섭하심으로써, 세상의 힘이 결코 힘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간섭을, 세상에서 받는 시험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성도에게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성도가 시험을 만나고, 믿음의 시련을 겪을수록, 그 마음에 더욱 분명하고 선명하게 새겨지게 됩니다. 시험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불의한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고, 불의함을 확인할수록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심중에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 시험이야 말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만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 곧 십자가만을 소망하는 것이야 말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정욕과 자랑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의 심령을 지키심으로써, 주님만을 소망하게 만드십니다. 이처럼 주님만 소망하는 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인내하기 위해서, 온전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시험을 이기라. 인내하라’는 말을 하지만,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시험을 이기고 인내할 수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면, 힘을 주신 후에는 성령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인간의 능력을 믿습니다. 인간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은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까지 가능하게 해버립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의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한 약자의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성도는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이 인내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는 것으로 인해서 어떤 영향도 받지 말고, 주님이 오셨을 때를 기억하며, 십자가만을 소망하기 바랍니다. 돈으로 사는 세상을 오히려 우습게 보면서, 마지막 때 무엇이 참된 힘인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8)
성도에게 세상은, 마치 발에 전혀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는 것처럼, 불편해서 빨리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는 곳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을 살게 되면, 필히 시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사탄이, 끊임없이 천국보다는 세상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가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도는 세상을 살면서 부딪치는 여러 문제들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히려 헛된 것이라고 하고, 썩어질 것이라고 치부한 세상의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비록 성도라고 하지만, 그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보고 겪는 것은, 돈과 권세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성도에게는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곧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환경으로 개선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말고, 오로지 말씀만을 고집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떡으로 살아가고, 떡이 힘이 되는 세상에서, 떡이 되지 않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은, 오직 말씀으로 살고자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씀으로 살면, 떡이 주어질 것으로 착각을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마음이 사탄에 의해 장악된 것일 뿐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세상의 떡에 가치관을 두고, 믿음을 이용하고 떡을 얻고 싶은 욕망일 뿐입니다. 이러한 거짓된 믿음으로는, 시험을 만나지 않습니다. 다만 남들처럼 살지 못한 것 때문에, 한탄하고 낙심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흩어진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가 처한 세상의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시험을 만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하늘의 것만 소망하고 붙들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런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힘없는 자는 무시 받으면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늘의 것만을 소망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해도, 막상 세상 현실과 부딪히게 되면, 믿음보다는 힘이 되는 것을 더 갖고 싶은 욕망에 이끌리는, 내 자신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시험을 칠 때 도움이 되거나,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믿음으로 살고자 함으로써 시험을 만날 때, 지혜의 부족을 가장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말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흔들림이 없이 천국만 소망하는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성도는 하나님께 지혜의 부족함과 믿음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혜의 부족함을, 절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꾸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자연히 지혜가 부족함을 절감하면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믿음으로 살고자 하기보다는,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고자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세상의 것을 구할 뿐, 지혜를 구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혜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이기에 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오해를 갖게 합니다.
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더군다나 여기서 말하는 구절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마치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기도할 때 의심을 하지 않으면, 응답받는다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지혜의 부족을 구하게 되면, 하나님은 지혜를 주심으로써,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지혜를 구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면, 그것은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야고보가 말하는 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혜를 구했는데, ‘하나님이 과연 지혜를 주실까?’라는 마음을 의심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합니다. 곧 바람에 의해서 그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을 치는 것을, 의심하는 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그 예로 들어볼 수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었다가, 풍랑이 일었을 때 무서워함으로, 물에 빠진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베드로가 물에 빠진 이유는,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풍랑이 일었을 때, ‘내가 물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였기 때문에 빠졌다는 것입니까? 물론 베드로가 풍랑을 보고, 그런 마음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의심이라고 한다면, 결국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은, 풍랑을 보면서도 ‘나는 빠지지 않는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의심 없는 믿음은, 자기 결단과 의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라’고 하심으로써,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라는 말씀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다도 복종하는 상태였고, 따라서 바다는 베드로를 빠뜨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권능은 풍랑이라고 해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풍랑이 인다고 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걸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말씀 안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풍랑을 바라봄으로서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있는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은 상태의 마음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되고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을 두고 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으로,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할 수 없음을 믿고,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어떤 시험을 만난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이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일로 인해 무서워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무엇을 구하든, 얻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늘의 좋은 것을 우리에게 베푸셨는데, 풍랑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는, 아무리 기도한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것들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8절에서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보면서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결국 두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그러한 자신을 부탁하며,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두 마음을 품은 마음을 낮춰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고, 지혜의 부족을 구하면서, 하늘의 것만 소망하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가 아닙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음을 보면서,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지혜의 부족함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혜로 넘치게 하실 것이고, 어떤 시험을 만나도 인내하면서, 천국만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4. 무엇을 자랑할까?(9-11)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도는 지혜의 부족함에 대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로서 진심으로 지혜가 필요함을 소망하는가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전혀 지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가식적인 행동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지혜를 구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없이는 성도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 현실을 알았기 때문이고, 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의 현실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만났을 때인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믿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만나는 것이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현실은 믿음의 방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없이는, 시험을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9-10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여기서 말하는 낮은 형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을 뜻합니다. 소위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권고합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 자랑할 높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높음을 자랑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권세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높음은, 세상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들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세상과 똑같이 돈과 권세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자신을 보게 되면, 낮은 자는 한없이 초라하고, 자랑할 것은 전혀 없는 자신만 보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세상은 힘있는 자를 높이고, 힘을 자랑하는 곳임을 알고, 그러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자랑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과 권세가, 힘으로 높임 받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임 받는 것은, 오직 ‘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가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에게, 그리스도 의는 자랑거리의 모든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말 역시 같습니다. 부한 자는 말 그대로, 부자들을 가리킵니다. 돈과 권세를 가지고, 힘있는 자로 군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런 부한 자들이 낮아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실패해서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실패는 부끄러운 일로 여길 뿐,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부한 자가 자랑할 낮아짐은,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들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한 자의 낮아짐입니다. 그래서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낮은 자와 부한 자로 구분하고 평가하는, 돈이라는 것도 영원하지 못하고, 풀의 꽃처럼 잠시 내 수중에 있다가, 결국 사라지는 것들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11절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가치를 두고 귀하게 여긴다고 해도, 풀의 꽃처럼 귀함도 아름다움도, 모두 사라질 때가 있고, 결국 쇠잔하고 마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흐름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법칙일 뿐입니다. 곧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세상의 이러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헛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참 지혜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헛되기 때문에,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결국 지혜는 세상의 현실을 보게 함으로써,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는 힘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하지 않고 믿으면서도, 세상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세상 것이 헛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세상 것이 없이는 못산다는, 강한 욕구가 마음 한구석에서, 우리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끊임없는 유혹이고 시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세상이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 때, 여러분이 마음먹은 대로,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까?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말자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되던가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의지로 술 담배는 끊을 수 있습니다. 곧 자기 의지로 행동은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마음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고, 술 먹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통제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주셔서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세상의 현실을 알고, 하나님 나라만 소망하는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사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늙어가는데, 그냥 몸이 늙어가는 것으로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늙어갈수록 세상의 현실을 깨닫고, 지혜를 구하는 성도로 늙어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늙어가는 것이야 말로, 백발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을 가치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돈버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나중에 믿어도 되지만, 돈은 오늘 벌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라는 생각들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벌지 못한 돈을 아까워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이러한 시험과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갈등과 고민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에서 성도를 붙드는 것은 지혜, 곧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는데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을 사는 일에 돈이 전부라면,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는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세상과 돈을 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 아닙니까? 천국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지만, 결국 내 몸을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세상을 향한 마음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우리 자신을 두고, 어떻게 믿음이 있다고 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믿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래도 마음에 예수님을 두게 되고, 나의 죄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은혜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은혜이며 기적의 사건일 뿐입니다. 성도는 이 은혜 안에서 주를 바라봐야 합니다.
골 3:1-2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처럼 성도는, 땅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도다움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세상에 심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보화의 가치가 달려져야 합니다.
성도가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삶은,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 풀의 꽃처럼 헛됨을 알고, 하늘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하늘의 의를 입었음을 자랑하며,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자랑하는 그가 성도입니다.
5. 시험을 참는 자는(12-18)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이 말씀에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인간이 시험을 참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믿음의 사람은, 시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믿음과 세상의 부딪힘입니다.
아시는 대로 믿음과 세상은, 한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각기 다른 길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믿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가는 길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갈등과 고민이 없겠습니까? 이처럼 믿음으로 인한 갈등과 고민이 발생하는 현상이, 곧 믿음이 내 속에서 일하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험을, 우리의 힘과 자제력으로, 참고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자제력이 있다고 해도, 세상에 대해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세상의 영광과 권세와 힘을 내어 놓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의 것을 선택하는 의지와 자제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력과 자제력으로, 시험을 견디고 이기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시험을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자리에 있음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야고보는 성도가 시험을 참고 견딤으로써,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을 차근차근 풀어 보면,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의 면류관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을 참는 자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사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곧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만,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된 피조물이고, 이 새로움은 오직 십자가의 영으로써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야고보의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능히 성도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게 함으로써, 기어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복에 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시험을 참고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면, 옳다고 인정함을 받을 수가 없지만, 연약한 우리를 붙드시고, 약속하신 복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본다면,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로 하여금, 어떻게 시험을 참고 견디게 합니까?
13-15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먼저 13절에서 말한 시험과, 12절에서 말한 시험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절과 12절에서 말한 시험에는, 시련의 의미가 담겨 있는 반면에, 13절에서 말하는 시험에는 유혹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시련의 의미가 담겨 있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유혹의 의미가 담겨 있는 시험은, 사람이 자기 욕심으로 인해서, 스스로 시험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을 받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고의로 인간을 유혹에 빠뜨리는 분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 욕심이 항상 유혹에 끌려 죄로 나아가게 하고,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있는 인간은, 누구도 유혹을 이길 수 없고, 결국 사망을 피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의 유혹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탄의 유혹을 사람들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성도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성도도 여전히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자신들의 생활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과 고민이라는, 시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편안한 삶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로 하여금, 어떻게 시험을 참는 자로 만듭니까?
16-17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이 말씀처럼 성도가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이, 세상에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 은사로 보여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성도에게 평안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세상이 아니라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보고,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 이것이 시험을 참고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것만을 좋은 것으로 바라봅니다. 위의 것은 믿지 못하고 확신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믿게 하고 소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땅의 것이 아닌, 위늬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복에 거하고 있는 성도에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8절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 절대로 인간의 가능성과 열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의 할 일은, 하나님의 구속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시험을 참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6. 버릴 것과 받을 것(19-21)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표적을 구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잘 실천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선하게 산다고 자부했었지만, 문제는 현실적인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 표적을 베푸는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는 풍족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진리의 도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을 고상한 지식으로 채움으로써, 자기 가치를 향상하고자 하는 바램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공통점은, 자신들을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향상시켜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리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들의 요구를 완전히 묵살해 버립니다. 사도가 말한 것처럼, 복음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뿐이지,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이요 걷지 못하는 이와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러한 평가에 대해, 쉽게 수긍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예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고개 숙이는 척 할 수는 있지만, 그 속마음에는 항상 자신의 공로와 의를 인정해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면, 두 가지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반발하면서 성을 내는 것,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찔려서, 진심으로 죄인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이 생명의 말씀이고, 영혼의 구원이 되는 진리의 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하고 반발하는 것은, 나를 죄인으로 규정해 버리고, 모든 행위를 악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인정받고 높임을 받으면서 들어가는 천국을 꿈꾸는 것입니다.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말을 보면, 무슨 대화의 기술을 말하는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절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해줘야 하고, 자기 말은 아껴야 실수가 적고, 상대방의 말에 성이 난다고 해도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 풀이하여 말하지 않습니까?
만약 복음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러한 복음에 누가 반발을 하겠습니까? 성을 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게 좋은 말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말인데, 이런 말을 싫어하고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소위 설교라는 것들은, 사람들의 요구를 맞춰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을 내용으로, 복음을 가공해 버린 것입니다. 이 세대에 가득한 죄는 지적하지 않으려고 하고, 적당히 위로가 되고 힘이 나는 말이나, 도덕적인 가르침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세대에서 성도는, 참된 진리의 도를 듣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내 귀에 즐거운 말이 아니라, 내 심령을 파헤치고, 그 속의 악한 것을 다 끄집어냄으로써, 나의 자존심을 다 뭉개 버리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내 영혼에 구원이 된다면, 그것을 진리로 여기고, 진리의 말을 듣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듣기는 속히 하고’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대하는 성도는, 자기 욕심에 이끌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욕심에 이끌린 채 복음을 대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말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복음을 밀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나의 욕심을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오직 복음을 향해서만 열려있을 것이고, 따라서 참된 복음에 대해서는 듣기를 속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고, 말로 뱉어 내는데 익숙하고 재빠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욕심이 있을 뿐인데, 그런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간다면, 내 욕심에 안 차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불평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의 실상을 깨닫지를 못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라고 해서, 반발하고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의 성품이 아닙니다.
성도의 성품은, 영혼에 구원이 되는 복음만을 원하게 되어 있고, 그런 성품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내 마음에 들고 안들고가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능력이 되는 복음이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여기고 살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도, 단순히 성이 나도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성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공로와 의, 착한 행실을 전혀 인정해 주지 않을 때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모두 부인해 버릴 때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악으로 규정해 버릴 때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에게 성을 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은, 복음 앞에서는 자신의 의로움과 공로가, 모두 무너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대화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복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20절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따라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도, 성도가 성을 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복음에 대해 성을 내는 것은, 자신의 공로와 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사람의 성냄은 자신의 공로와 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의 의가 가려지고 비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추구하는 의와 공로가 부인되고 무너지는 그 자리에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의가 부인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낸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영광스런 존재가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높임 받기를 원하는 욕심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복음은 듣기 싫고 성만 나는, 쓸데없는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있는 욕심입니다. 성도가 욕심에 끌려 미혹된다면,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게 됩니다. 욕심이 원하는 것이, 복음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러므로 성도는 이 말씀처럼,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마음에 심어 놓으신 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우리의 욕심에 의한 모든 것입니다. 이 욕심이 하나님의 진리의 도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성도로 하여금,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것을 훼방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쉴 새 없이 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좋은 것들에게, 마음을 두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욕심으로 복음을 대한다면, 복음에서 뭘 듣고자 하고,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분명 자기 욕심에 흡족한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악을 버리고, 하나님이 마음에 심으신 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우리의 욕심을 흡족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만을 소망하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로 도를 받는 것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 것이, 곧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입니다. 이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도를 받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진리의 말씀을 향해, 성을 내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는 도구가 아님을 깨닫는다면, 진리에서 분명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보게 될 것입니다.
7.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22-25)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그렇다면 여러분이 아무 설명을 듣지 않고, 이 구절을 본다면, 어떤 의미로 이해하겠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은 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지, 듣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여러분에게 있는 상식을 기반으로 하여 생각하게 되면, 결국 말씀을 행하는 문제를, 인간의 행함으로 연결하여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곧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등의 실천을, 말씀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가 강조하는 말씀을 행하는 문제가, 거의가 이런 것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러한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주일 성수나 구제, 봉사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기도에 대해 앞에서 말한 바는 있지만, 그것도 기도를 실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곧 야고보는 한국교회가 생각하는, 행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 때 박해와 고난을 받음으로써, 흩어지게 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성도들이, 고난과 함께 시험을 받을 수 있기에, 시험에 대해 얘기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데도, 정작 예수님은 도와주지 않고, 고난의 현실은 계속 될 때, 믿음에 흔들림이 있을 수 있고, 시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야고보는 그들에게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는 말을 함으로써,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을 소망하고 바라봄으로써, 시험을 견딜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것을, 귀하고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은사가 세상에서, 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욕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욕심이, 하늘의 은사를 귀한 것으로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이 내용처럼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는, 결국 죄를 낳는 자들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항상 죄를 낳고 그 죄가 자라가며, 우리를 사망에서 꼼짝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낸 것이,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성도라면, 땅의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사와 선물이 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이란 성도로 하여금 하늘의 것을 소망하게 하고, 하늘의 것으로 위로를 받게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이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은 세상에 몸담고 있지만, 땅의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한 천국이 있으며, 세상의 무엇보다도 천국이 귀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참으라고 하고, 시험을 참는 자가, 약속의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시험을 참았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면류관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참는 것 자체가, 위의 것을 소망한다는 증거인 것이고, 위의 것을 소망하는 것이, 곧 이미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약속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자녀이기에, 약속에 의해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말씀을 행하는 것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한 것처럼, 날마다 죄밖에 낳는 것이 없고, 그 죄가 내 안에서 장성하면서 사망을 낳는, 비참한 멸망의 자리에 있던 내가, 하늘의 은사로 생명을 얻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 내용이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지고, 공감하게 된다고 해서,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말씀을 들으면서 공감하고, 받아들인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믿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고, 알았고, 믿는다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가 죄인 됨을 알았다면,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나는 죄인이다’고 하면서, 자신을 자책만 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허물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23-24절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사람이 말씀을 들을 때는, 자신이 죄인이고, 사망에 처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양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모양이 어떠했는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알았다면, 죄인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고, 사망에 처한 내가,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더러운 것이 묻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기에, 형제의 티를 보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비판을 하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면, 자신의 더러움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형제에게 티가 보인다고 해도, 먼저 자신의 들보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자연히 비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똑같이 더러움이 있는 자로서,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 아래 있다는 것은, 거울을 보고 알게 된, 자기의 더러움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만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면 25절의 내용은, 복음을 실천하는 그 믿음만이, 온전한 믿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듣고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것은, 새로운 실천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실천하는 자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역시 말씀을 실천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과 사도들의 삶이 다르지가 않습니다. 땅의 것을 소망하지 않고, 하늘의 것만을 소망하면서, 어떤 고난과 환난도 참았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곧 성령이 사도들에게 함께 함으로써, 그들을 예수님의 실천하심으로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실천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소망하게 할 것이고, 나의 더러움을 잊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자로 살게 할 것이고, 환난과 고통에서도 참고 이기게 할 것입니다. 말씀은 성도를 이러한 행함으로 인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입니다.
8. 경건이란(26-27)
본문을 보면 경건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데, 경건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외형적인 모습과 실천일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말할 때, 여러분이 쉽게 떠올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외형적인 모습과 종교적인 삶의 실천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러한 것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습이라면, 기독교 신앙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든, 경건으로 여기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된 경건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신앙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경건하다고 여겼습니다.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들이고, 그 생활 역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누가 봐도 신앙인다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혀를, 재갈 물리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갈이라는 것은, 말을 못하게 입을 막는 용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제하기 위해서, 입에 물리는 재갈을 말합니다. 곧 혀를 재갈 물린다는 것은, 그 혀가 주인의 통제를 받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혀를 재갈 물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본성에 따라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눅 18:9절부터 보면,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자신의 실천을 자랑하고 높이면서, 자신들이 세리나 창녀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혀를 재갈 물리지 않았을 때 나오는 인간의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을 분명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거의가, 종교적 삶과 말씀의 실천일 것입니다. 곧 열심 있는 교회 생활과 착한 일을 앞세워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의 의를 판단하게 합니다.
의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은, 저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고, 판단하는 말을 내뱉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에 의해 통제되는 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 교회는, 바리새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종교적인 실천과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오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치는 세리는 사라지고, 바리새인만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을 경건하다고 여겨도, 그 혀가 재갈 물리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라면, 모두 헛된 경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은 외형적 실천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특별한 행동과 실천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경건은 외형적인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경건은 무엇일까요?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 말대로 하면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도와주면, 그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까? 그런다면 결국 구제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까?
당시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땅이 있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아와 과부는 땅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닙니다. 땅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과부라고 해도 돈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고아라고 해도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아서,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27절의 내용은, 단순히 고아 과부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경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 16장:9절부터 보면, 절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성중에 거하는 노비, 레위인, 객, 고아와 과부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맥추절이나 추수절을 지킬 때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매는 땅이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열매를 얻었다는 것은, 그들의 땅이 있다는 것이고, 그 땅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얻은 것임을 잊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이 없이 애굽의 종으로 살았던 것이,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종이며 고아이고 과부였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경건입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힘없는 약자들을 불쌍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불쌍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외형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비교하고 차별하는 말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경건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즐기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본성과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래방 안가는 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처럼 돈을 힘으로 여기지 않고, 돈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처럼 살려고 하지 말고,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곧 세속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경쟁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존재임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야 말로 세속이고, 이 세속에 물들어 사는 것이, 헛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경건은 자신의 불쌍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은혜와 자비하심이, 이웃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경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