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59. [역경의 열매] 오하라 (1-16)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가수 오하라입니다
장애를 가진 모든 분들께 내 노래로 희망과 용기, 주님의 사랑 전하고 싶어
중도실명한 가수 오하라에게 삶은 용기이고 도전이다. 오씨가 최근 경기도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서 포즈를 취하며 밝게 웃고 있다.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입니다.”
오늘도 나는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첫인사를 한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와 함성. 그러나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이기에 환호하는 관객을 마음으로만 상상해본다.
2018년 11월 두 번째 앨범을 내고 ‘별빛 인생’이라는 국민응원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명색이 가수지만 그리 유명하진 않다. 하지만 다수의 방송 출연 덕분인지 “TV에서 봤어요”라며 반갑게 아는 척을 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힘내라”며 일부러 무대 뒤까지 찾아오셔서 응원해 주시는 분들, “나도 장애가 있다”며 내 손을 꼭 잡고 울먹이시는 분들. 나는 이 모든 분께 희망과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
주님의 뜻인가. 나는 많은 분으로부터 용기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관객과 소통하고 공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정말 힘들고 어렵다. 일단 관객과 눈 맞춤이 안 된다. 노래하며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세가 비뚤어지기 일쑤다. 보다 못한 남편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자세를 정면으로 향하게 바로 잡아주곤 한다. 머쓱해진 나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여자라 그래요”라며 너스레를 떨고 관객들은 한바탕 웃음을 쏟아낸다.
나는 첫 음반을 내기 전까지 음악에 대해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게 전부였다. 그러다 뜻밖의 행운으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KBS 전국노래자랑 오산시 편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노래를 더 잘 부르고 싶어 레슨도 받았다. 최근엔 찬양사역자인 소프라노 임청화 교수께 지도받고 있다.
임 교수님과는 우연히 같은 무대에서 찬양하게 됐다. 녹록지 않은 살림을 아시고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재능을 전수해주고 있다. 그런 교수님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자 주님 앞에 기도하며 노력한다. 처음 레슨을 받을 때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 ‘그냥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성악을 전공하셨기에 깊은 호흡으로 깨끗하면서도 풍부한 소리를 내라고 가르치신다. 성악이 생소한 나는 숨만 차고 소리는 ‘꽥꽥’거리고 정말이지 시쳇말로 똥 쌀 지경이었다.
당시 나는 ‘세미 트로트’곡으로 앨범을 냈기 때문에 ‘트로트와 성악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노래의 가장 중요한 것이 호흡이며 발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요즘엔 ‘오하라TV’라는 유튜브 방송도 하고 있다. 1주일에 한 번 경기도 평택 집에서 녹음한다. 아직 구독자 수는 적다. 하지만 어차피 단 한 사람이라도 함께 행복을 나누고자 시작한 일이기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가는 길인가 하는 점이 어렵고 중요할 뿐이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오하라 (1)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가수 오하라입니다
* [역경의 열매] 오하라 (2) 키워준 엄마와 운명적 만남 이어준 '나의 미소'
* [역경의 열매] 오하라 (3) 어른만 살던 적막한 집, 내 재롱에 '까무룩'
* [역경의 열매] 오하라 (4) 결코 잊을 수 없는 첫 아이 울음소리
* [역경의 열매] 오하라 (5) "왜 내게 이런 천벌이"… 36세에 망막색소변성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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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70년 출생. 2015년 앨범 ‘오하라의 행복한 이야기’로 데뷔. 대한민국감사국민위원회·선플운동본부·전국자원봉사연맹 홍보대사, 한국청소년문화원 문화홍보실장, 경기도시낭송협회 회원. KBS 전국노래자랑 오산시 편 최우수상. ‘시민과 함께하는 장애인가요’ 최우수상, ‘서울재즈오케스트라 전국트로트 가요제’ 금상, 대한민국 사회공헌 사회봉사 대상.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KBS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 등 출연. 오산장로교회 출석.
***[역경의 열매] 오하라 (2) 키워준 엄마와 운명적 만남 이어준 ‘나의 미소’
길에서 헤매다 파출소 보호 받는 중 한 아주머니의 부름에 살포시 웃었던 기억이 엄마와 첫 만남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씨가 지난해 말 경기도 평택 서부문예회관 대공연장에서 평택교향악단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다.
1973년 여름 뜨거웠던 해가 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젊은 아주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동네 파출소로 향했다. 젊은 아주머니는 영 마음이 편치 못한지 머뭇거렸다. 할머니가 아주머니의 등을 떠밀었고 파출소 구석에 앉아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데리고 갔다.
여자아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긴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는 데다 왼쪽 볼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할퀴었는지 아직 아물지 않은 흉터가 있어 보기 안쓰러웠다. 손에는 파출소에서 저녁으로 준 빵과 우유가 들려 있었다.
젊은 아주머니가 “아가”라고 부르자 아이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보더니 조그만 이를 드러내며 살포시 웃었다. 순간 아주머니의 마음은 ‘이 아이는 내 자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나를 키워준 엄마와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기억을 더듬으며 정리해 본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낳아주신 부모님이 누구인지 모른다. 당시 다들 내 나이가 네 살이라고 믿었는데 집도 부모 성함도 모르는 내가 “나이는 네 살”이라고 정확히 말한 까닭이다.
나는 길에서 헤매다 어찌어찌해 파출소의 보호를 받게 됐다.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음 날 보육원으로 보내질 처지였다. 당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엄마를 이웃집 할머니가 “이참에 아이 하나 데려다 키우라”며 파출소로 끌고 갔던 것이다.
사실 엄마는 아이를 데려다 키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를 보고 웃는 모습에 마음이 ‘확’ 바뀌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고 하신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오하라씨는 늘 웃는 얼굴이라 예뻐요”라며 칭찬해 준다. 나의 미소, 그 미소가 나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내가 한 일이겠는가.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고 살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섭리였음을….
엄마는 지난 5월 20일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치매도 있고 정신이 흐릿해 요양원에 계셨었다. 하지만 찾아뵐 때마다 다른 사람은 몰라봐도 언제나 나는 알아보셨다. 본인의 나이도 내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내 이름과 얼굴은 기억하셨기에 감사하고 행복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는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정말 고마운 우리 엄마. 엄마를 만난 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었다. 1970년 대만 해도 집마다 아이들이 너덧 명씩이었고 많은 집은 7남매, 8남매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기에 형제 많은 집을 부러워하며 외로움을 많이 타셨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해 아이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 얼마나 절망하셨을지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엄마는 “내 속으로 낳았으면 이렇게 예쁜 딸 못 낳았을 거야.” “그러니 예쁜 딸 키우라는 신의 뜻이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엄마를 못 만났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생각만 해도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길러주신 부모님, 낳아주신 부모님.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3) 어른만 살던 적막한 집, 내 재롱에 ‘까무룩’
이불에 구멍내고 화장실에 빠지고 사고 치고 속 태워도 엄마는 항상 온화한 말씀으로 타일러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씨(오른쪽 네 번째)가 지난 5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과 함께했다.
주근깨에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소녀. 엉뚱한 일도 벌이지만 한편으론 사랑이 가득하고 문학적인 소녀. 이쯤이면 누구나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어릴 때 좋아했던 소설 속 주인공 빨강머리 앤. 나 역시 빼빼 마른 것도 엉뚱한 것도 그 앤 셜리 못지않았다. 살던 곳은 경기도 화성의 시골 마을이었다. 동네 첫 번째 집이라 지나는 사람은 우리 집에 들어와 길을 묻거나 물을 얻어 마시곤 했다. 그럴 때면 인심 좋으신 부모님께서는 찐 감자나 옥수수 같은 걸 대접하시곤 했다. 그 집에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다섯 식구가 살았다.
당시 나는 사내아이들처럼 산으로 들로 망아지처럼 달리고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가족의 속을 태웠다. 하루는 장롱에서 꽃이불을 꺼내 이불 가운데를 가위로 오려내 곰돌이 인형의 이불로 만들었다. 논과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부모님께서는 구멍 난 이불을 보시곤 할 말을 잃으셨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할머니는 노발대발 야단을 치셨다. 그때 엄마는 할머니를 말리시고 나를 데리고 이불을 덮고 있는 곰 인형 앞으로 가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나! 곰돌이는 오늘부터 꽃이불을 덮고 자니 행복하겠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밤부터 구멍 난 이불을 덮어야겠구나.”
기억한다. 할머니의 야단치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내가 엄마의 온화한 말씀에 순간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것을….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구멍 난 이불을 덮고 잤다.
화장실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그 모양새가 나무 널빤지 두 개를 걸쳐놓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식이었다. 나는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가 여름인지라 널빤지 위에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걸 보고는 발 위로 올라올까 무서워 발을 움직이다 그만 한쪽 다리가 널빤지 밑으로, 허벅지까지 빠지고 만 것이다.
나는 널빤지를 부여잡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할머니께서는 똥 범벅을 하고 나온 내 모습에 기겁하시며 달려와 우물가로 데리고 가서 한 손은 코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박박’ 씻기셨다.
말썽은 이뿐 아니었다. 아빠가 가게에서 사주신 흑사탕을 봉지째 들고 나가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할머니께서는 과일을 커다란 항아리에 넣어두곤 했다. 그런데 나는 머리를 써서 내 키보다 큰 그 항아리 속의 사과를 꺼내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항아리 속은 텅 빌 때가 많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식구들은 도대체 누가 사과를 가져갔나 의아해 했고, 결국 모든 게 밝혀지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외할머니는 “도무지 말릴 수 없는 별난 아이”라고 혀를 차셨다. 엄마아빠는 “저 녀석이 아주 영리하고 재치가 있으니 다른 집 아이들 여럿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며 나에 대한 기대를 풍선같이 부풀리셨다. 사건·사고를 달고 다녔다. 하지만 외조부모님과 부모님 목을 꼭 끌어안고 “사랑해”를 연발할 때면 그 재롱에 모두 ‘까무룩’ 넘어갔다. 하기야 여러 해 동안 어른만 살던 적막한 집안이었는데 어린 여자아이의 소동과 재롱이 끊이지 않으니 얼마나 혼이 빠지면서도 즐겁고 행복했겠는가.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4) 결코 잊을 수 없는 첫 아이 울음소리
어린 나이에 살림 할 수 있을까 걱정에 애들 낳자마자 양가 부모님이 키우셔 손수 돌보지 못한 아쉬움 커
가수 오하라씨가 1995년 9월 15일 생일을 맞은 딸을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1990년 9월 15일 새벽 5시 50분쯤 내 귀에 들리는 작고 가냘픈 울음소리. 나는 갓 태어난 첫 아이의 울음소리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딸아이가 지금은 두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에 문득문득 놀라움을 느끼곤 한다. 2년 뒤엔 씩씩한 아들이 태어났고 그 녀석도 지금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어엿한 가장으로 살고 있다.
나는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그래서 시부모님이나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이도 어린 내가 제대로 살림하며 살 수 있을까 늘 걱정하셨다. 그런 까닭에 첫애는 낳자마자 얼마 안 돼 시부모님께서 키워주시겠다며 자주 데리고 가셨다. 둘째 역시 딸 하나만 낳으신 외할머니께서 이게 얼마 만에 얻은 아들이냐며 안고 가시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손수 키우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시부모님이나 우리 부모님께서도 온갖 정성으로 아이들을 키우셨겠지만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게 지금 나의 생각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언젠가 육아도서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라는 책을 읽고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부모가 되고자 하는 분들께서는 꼭 필독하시길 권한다. 당시 남편은 자영업을 했고 나는 전형적인 가정주부로 늘 집안에서 살림만 하며 지냈다. 두 아이도 어린 시절의 나 못지않게 극성맞은 말썽꾸러기들이었다. 때론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 키울 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큰 아이는 목소리나 말투며 성격이 선머슴 같으면서도 첫째라 그런지 생각이 깊고 아량이 넓다. 둘째 녀석은 딱 벌어진 어깨며 덩치가 커서 의젓한 듯 보이면서도 호기심 넘치고 애교가 많은 장난꾸러기였다.
그리고 어릴 적엔 못 말리는 마마보이였다. 어쩌다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다녀올라치면 둘째 녀석의 전화 폭탄에 구경이고 뭐고 통화만 하느라 친구들이 가자미눈을 뜨고 나를 째려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아들의 그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난 지 오래라 때론 그때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리고 보면 우리는 정작 행복한 그 순간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음에 빠지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하루를 기쁘고 복되게 살며 그 축복을 순간순간 만끽하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앞을 볼 수 없게 된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난 터라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손자 손녀들과 함께 밖에 나가게 되면 아이들이 나에게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에 사람들이 진짜 할머니냐고 되묻곤 하는 걸 보면 아직 그리 심하게 늙은 것은 아닌 듯해서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외모의 덜 늙음에 대한 위안보다 주님을 향한 마음의 청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외조부모님을 비롯해 다섯 식구였던 우리 집안은 지금은 살아계신 엄마를 포함해서 11명으로 대가족이 됐다. 가족 모임이나 명절에 모이면 제법 북적북적해서 외동으로 자란 엄마나 나는 정말 즐겁고 행복해졌다. 돌아가신 엄마가 그립다. 엄마가 내게 주신 사랑의 불씨가 이제는 여러 개의 촛불에 타오르는 불꽃이 돼 주님 앞에 감사로 사랑으로 빛나고 있다. 우리 모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길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린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5) “왜 내게 이런 천벌이”… 36세에 망막색소변성증
짐 되기 싫어 극단적 선택… 장애 이유로 삶 포기한 자신에게 미안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가 시력을 잃기 전인 1994년 4월 가족 소풍에서 포즈를 취했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배드민턴 채를 들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내게 딸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 아니야 그냥 좀 이상해서…. 다시 치자.” 그러나 날아오는 셔틀콕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다시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인생이 그 셔틀콕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것을….
내 나이 36세. 이름도 생소하고 어려운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에 걸렸다. 처음에는 피곤해 일시적으로 시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급기야 나중엔 시야마저 좁아졌다. 주변 사물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다. 허겁지겁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많이 진행돼 거의 실명 상태였다.
현대의학으로는 어떤 치료방법이 없었다. 개인차가 심하고 정확히 연구되지 않은 희귀병이었다. 의사에게 “희귀병이며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절망감에 휩싸였다.
‘왜 내게 이런 천벌이 내려졌지?’ 원통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과 세상, 나중엔 신마저 원망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며 힘과 용기를 주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한창 사춘기 아이들에게 엄마인 내가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절망하게 했기 때문이다.
더듬거리며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물론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살게 됐다.
‘어떻게 하면 빨리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정말 신이 있다면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신은 없는 거야. 모두 다 꺼져버려!”
하지만 주님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더 큰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어둠을 사랑의 빛으로 밝히셨다. 그날도 고통스럽게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다시 한번 극단적 선택을 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물음 하나가 뇌리에 스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되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좋은 집에 못 살아 보고 좋은 곳에 못 가보고 좋은 옷 못 입어 보고 좋은 차 못 타본 것들? 그게 아니었다. 떠오른 생각은 ‘왜 좀 더 사랑하며 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왜 부모님께 효도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말 대신 내 딸로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했을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때까지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은커녕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증오하며 죽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뭐라 할 수 없는 안타까움, 서러움이 밀려왔다. 부끄러웠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볼 수 없어도 가진 게 없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실로 그것은 기적이었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6) 경기수련원 입학… 시각장애인으로 첫발 내딛다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실명하게 된 각양각색 중도 시각장애인들 모여 동병상련 아픔 나누며 서로 용기 줘
중도 실명한 가수 오하라씨가 전북 임실의 한 노인회관에서 안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안 보이면 어때. 못났으면 어때. 그래도 난 나를 사랑할 거야.’
이렇게 거듭 다짐했다. 이후 처음 한 일은 재활교육을 받은 일이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출발이자 도전이었다. 경기도 수원 경기수련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보행, 점자 등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여러 과목을 배웠다. 현실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시각장애인은 정부에서 독점으로 허가한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 생계를 꾸려간다.
하지만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재활학교에서 2년간 교육받으며 4번의 필기시험과 4번의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도 실명자는 더 힘들고 어려웠다. 갑자기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점자책을 읽거나 음성녹음이 된 책을 들으며 공부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점자는 한글을 1부터 6까지의 숫자를 조합해 글자를 만든 것인데 그 숫자를 하나하나 외우는 것이 어려웠다. 좁은 틀 속에 점을 찍어 넣는 것도 뭐 하나 쉬운 것이라곤 없었다.
게다가 써놓은 점자를 뒤집어 손으로 더듬어 읽어내는 것은 당시 내 생각으론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점자라는 게 점 하나만 살짝 잘못 찍어도 ‘선생님’이라는 글자가 순식간에 ‘선생 놈’이라고 바뀔 수 있었다. 식사시간에 반찬을 집으려고 한다는 게 앞사람의 밥을 퍼오거나 국을 휘젓기 일쑤였다.
한 번은 남자 화장실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제법 화장실 구조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한 시각장애인 학생이 다른 시각장애인 학생의 옷에 그만 실례를 한 것이다. 여기쯤이면 소변기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볼일을 본 것이 실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강생들은 다들 얼마나 황당해 했는지 모른다. 시각장애인들은 부딪히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차바퀴에 발이 깔리고 잘못 거리를 다니다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그 정도는 그저 좀 짜증 나는 일에 불과했다.
특히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실명하게 된 중도 시각장애인들은 성별도 나이도 개인적인 시각장애의 차이도 다양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리 더듬고 저리 부딪히며 생활하니 매일매일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그래도 우리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며 각자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화장실에 혼자 못 가는 학생들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약시인 분들이 도왔다. 사물함에 열쇠 구멍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학생에게 더듬어 찾는 요령을 알려주며 서로서로 의지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학업이 부진한 학생을 위해 방과 후 따로 남아 시험 준비를 도와주며 어떻게든 함께 시험에 통과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았다.
그만큼 시각장애인들은 절박했다. 그들에게 안마사 자격증은 가히 생명줄이었다. 단순한 수강생들이 아닌,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심정이었다. 서로 용기를 주고 희망을 나눴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기수는 학기 초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나는 영광스럽게도 안마를 가장 잘하는 학생에게 주어지는 ‘안마수기상’을 받았다. 졸업식 날 우리는 모두 당당했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오하라 (7) 내 인생의 또 다른 문 두드린 ‘낯선 목소리’
처음 혼자 귀가하던 중 난관에 봉착, 친절한 남자의 도움 받아 위기 넘겨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가 최근 전남 광주에서 공연 후 남편과 포즈를 취했다.
시각장애인 재활학교에서 혼자 집에 못 가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겁이 많았다. 게다가 이제는 앞도 못 보게 됐으니 혼자 밖에 나가는 일이 마치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언제까지 친구나 지인의 도움만 받으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등하굣길에 집이 같은 방향인 친구들과 함께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여러 상황으로 나 혼자 집에 가야만 했다. 일단 스쿨버스가 전철역까지는 데려다주었고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스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용감무쌍할 정도로 힘차게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white cane)를 폈다. 재활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써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내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지팡이는 여기저기 쿡쿡 걸렸고,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됐다.
‘아 힘드네. 시각장애인 생활이 그리 쉽지 않구나….’
그동안 숱하게 다닌 길임에도, 혼자서는 전철역 입구를 찾는 것도 더디고 어려웠다. 어렵사리 역 안으로는 어찌어찌해서 들어왔다. 하지만 또 난관에 봉착했다. 이제는 전철역 내 넓은 홀에서 개찰구를 찾는 일이었다. 개미걸음으로 조심조심 더듬기 시작했다. 심장은 계속 쿵쾅댔다. 흰 지팡이를 쥔 손은 땀으로 젖어 들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순간 내가 투명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결국 어정쩡하게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저기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가뜩이나 긴장감으로 팽팽해진 나의 온 신경이 그 낯선 목소리에 너무 놀라 무슨 전기에 감전된 듯 곤두섰다. 아마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내가 지팡이를 짚고 무슨 묘기라도 하려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레 다시 물어봤다.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그러자 그 남자도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 아까부터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요. 많이 불편하신 듯해서요. 도움이 필요하실 것 같아 도와 드리려고요.”
그 말을 듣고 내 머릿속은 순간 빠르게 회전했다.
‘이 사람은 남자다. 하지만 이곳엔 사람들이 많기에 내게 이상한 짓을 할 순 없겠지. 여차하면 큰 소리로 외치면 될 거야. 그래 일단 좀 도와달라고 하자.’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전철 타는 곳까지 안내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낯선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됐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시각장애인 재활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이름과 나이를 말해주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동갑이며 그도 나처럼 이 전철역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뒤 전철이 도착했다. 나는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고 그와 만남을 뒤로 했다.
그러나 그때 그 만남이 전철의 슬라이딩 도어처럼 내 인생의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은 한 남자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당시엔 교회를 다니지 않고 믿음 생활을 하기 이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이뤄진 것임을 믿고 있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8) 행동으로 보여준 진심에 감동… 그는 나의 수호천사
우리의 만남이 그에게 상처될까봐 절교 선언하고 모든 연락 끊었으나 진심 알고 내 사랑 더 감출 수 없어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씨(오른쪽)와 이태웅씨가 2014년 5월 결혼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전철역에서 종종 그 남자와 마주쳤다. 우리는 전철을 기다리며 수다를 떨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일부러 내 하교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점점 친해졌다. 같이 밥도 먹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사이가 됐다.
그러는 사이에 졸업했고 안마사 자격증을 받고 일자리도 얻었다. 그리고 풍요로운 가을날 그는 내게 “생일 축하한다”며 선물을 불쑥 내밀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선물을 뜯었다. 허리띠가 들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꽤 마른 편이라 허리띠 줄이 길어 불편했는데 그가 준 허리띠는 꼭 맞아 그런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다. 스케이트보드 강사를 할 정도로 운동도 잘했다. 남다른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그는 생일선물을 받고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내게 말했다.
“너는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뻐. 처음 만났을 때 고맙다며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어. 이제 두렵기까지 해. 네가 들고 다니는 그 흰 지팡이가 커다란 흰 날개가 돼 날아가 버리는 악몽을 꾸기도 해. 그래서 너를 꼭 묶어두려고 허리띠를 선물한 거야.”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유치찬란한 프러포즈가 어디 있으며, 프러포즈 선물로 허리띠를 받은 여자는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깔깔’대며 웃곤 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큰 혼란에 빠졌다. 왜냐하면 멀쩡하게 생긴 총각이 앞도 못 보는 시각장애인에다 애가 둘이나 있는 이혼녀와 함께 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겨우겨우 빠져나온 깊은 어둠의 늪 속으로, 이제는 그가 자처해 스스로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로맨틱한 일이 절대 아니에요. 때론 타인들의 따가운 시선도, 동정 어린 말과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몸짓까지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딪히고 상처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바보 같은 생각 집어치우고 정신 차리세요.”
진심으로 거듭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그에게 내 말은 마이동풍, 우이독경일 뿐이었다. 급기야 나는 그와 절교를 선언했다.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못 만나게 되자 매일 저녁 내 집 근처 공원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때론 눈물이 난다며 내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글씨를 읽을 수도 없는 내게 말이다.
그는 몇 달 동안 자신의 진심을 어떻게 하면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장애인 활동 보조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전신마비 환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에 다니고 지적장애 학생을 돌보고 시각장애인을 정성스레 돌봤다.
그 사실을 알고 감동이 밀려 왔다.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숨기고 참아왔던 그에 대한 내 사랑을 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서로 말없이 한참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그 남자는 중도 실명한 내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였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9) 시각 장애 예비며느리 꼭 안아주셔…
시댁에 첫 인사… 태웅씨 어머니의 “사랑한다” 말씀에 간신히 눈물 참고 “저도 사랑합니다”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가 2015년 2월 일본 돗토리현 공연 후 성곽 인근에서 남편 태웅씨와 함께했다.
“내 모습 어때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아∼, 걱정된다. 자꾸 떨리네.”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불안하기는 태웅씨도 마찬가지인 듯 자꾸 심호흡하고 있었다. 태웅씨 부모님을 뵈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태웅씨가 교제 사실을 털어놨고 한동안 충격에 빠진 부모님께서 가족회의를 거쳐 집으로 같이 오라는 연락을 주셨다. 나는 태웅씨에게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시각장애인 며느리라 충격을 받으셨을 것을 생각하면 몹시 죄송하고 송구할 따름이었다.
최대한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태웅씨 부모님은 3층에 사셨는데 우린 손을 꼭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태웅씨 가족들이 모두 와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식사했다. 그야말로 바늘방석이었다. 태웅씨와 밥을 먹을 때는 반찬 위치만 알려주면 편하고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차 시댁 식구가 될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밥을 먹자니 안 보이는 눈앞이 더욱 캄캄해진 것 같았다.
반찬을 집는 내 손을 모두 주시해 보고 있을 것만 같아 자꾸 헛손질했다. 태웅씨도 눈치를 살피는 듯 평소처럼 다정하게 반찬을 얹어주거나 챙겨주지 못하고 있었다. 체할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조심조심 밥만 먹기 시작했다. 그때 어머님께서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내 그릇에 반찬을 챙겨주셨다.
“무얼 좋아하느냐”고 물으시며 이것저것 수저에 일일이 얹어주시는 바람에 열심히 받아먹느라 과식했다. 집으로 돌아갈 땐 어머니께서 꼭 안아주시며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애써 미소지었다.
가족 모두가 온화하고 다정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모두 한결같이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며 지내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우리가 돌아간 뒤 태웅씨 어머님께서는 우셨다고 한다. 나도 자식을 둔 어미이기에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랬다. 다른 사람이 장애인을 도우며 함께 살 때는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막상 내 자식이 그런 처지에 놓이고 장애인과 한 식구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한평생 주님을 믿어오신 어머님께서는 아들 태웅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태웅아. 모든 것은 네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다. 주님께서 주신 그 십자가를 감사히 여기고 사랑해라.”
시댁은 가톨릭을 믿으신다. 우리 친정 역시 가톨릭을 믿는 집안이다. 그리고 태웅씨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10년이나 그렸고 특히 눈동자를 많이 그렸다. 그리고 이제는 한 여인의 눈이 돼주고 있다. 현재 우리 부부는 집 근처 교회에 나가고 있다. 시댁 분들은 가톨릭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다며 개의치 않으신다.
나는 이런 시댁 식구들이 좋다. 조카들은 예쁘고 착하다. 형님은 집안일에 솔선수범하신다. 아랫동서는 내 몫까지 일하느라 고마움을 느낀다. 어머님께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인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효도라 믿고 있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10) 전국노래자랑 최우수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안마로 생계 이으며 제2의 삶 살다 주위 권유로 노래자랑 참가… 결혼 예물로 받은 한복 입고 무대 올라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씨(왼쪽)가 2014년 KBS ‘전국노래자랑’ 경기도 오산시 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뒤 송해씨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2011년부터 일한 안마원은 ‘안마 바우처’ 사업을 하는 곳이었다. ‘안마 바우처’는 취약계층 노인과 장애인의 건강증진을 돕고 시각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가 일부 지원하는 사업이다. 중도 실명한 나는 안마로 생계를 이으며 제2의 삶을 살게 됐다.
외동딸로 자라 그런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힘들게 안마하면서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안마받는 어르신들은 자식 자랑이나 젊었을 때 추억담, 사소한 일상까지 대화가 끝이 없었다. 시를 좋아하는 분에겐 시를 낭송해 드리기도 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흘러간 노래도 배워 불러드렸다.
2014년 초 경기도 오산시에서 송해 선생님이 진행하는 KBS ‘전국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안마받으러 오는 분마다 내게 전국노래자랑에 나가라고 권유했다.
나는 살포시 웃으며 “그런 데를 아무나 나가나요”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도 꼭 출전하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희망과 행복을 준 것처럼 더 많은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전해야지”라며 주저하는 내게 용기를 심어주셨다.
결국 참가신청서를 냈다. 예심 장소인 오산 시민회관은 참가자는 물론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렇게 떨고 있겠구나. 그래 내가 이분들께 용기를 주자. 앞 못 보는 여자가 당당하게 나가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길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1차 예심이 끝나고 통과자 50명을 호명했다. 나는 얼른 집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잘하는 분들이 많아 떨어질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한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내 이름이 불리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남자 친구 태웅씨도 놀랐는지 나를 끌고 허겁지겁 앞으로 나갔다. 1차 예심을 통과한 50명은 2차 예심을 치렀다. 15명만 본선에 나갈 수 있었다. 날은 어두워졌고 50명의 노래도 끝이 날 무렵 합격자 15명의 이름이 한 명씩 호명됐다.
잠시 뒤 내 이름이 호명됐다. 귀를 의심했다. 잠시 후 축하한다는 인사말이 들리자 겨우 현실감을 되찾았다. 태웅씨와 말없이 손을 꼭 잡았다.
2014년 4월 봄날. 나는 결혼예물로 받은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노래가 모두 끝나자 시상이 시작됐다. 인기상부터 장려상과 우수상이 호명돼 상을 받았고 최우수상을 남겨두고 있었다.
송해 선생님께서 뜸을 들이시며 “아, 이 분이시군요. 고운 한복을 입고 나오셨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참가자 중 한복을 입고 나온 사람이 몇 있었기에 나는 그냥 누굴까 하며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최우수상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메달과 상금 100만원을 받았다. 상금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당시 어렵게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달 나의 반쪽, ‘수호천사’ 태웅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11) 첫 앨범 내고 안마사에서 가수의 길로
내가 살아온 이야기로 7곡 받아… 비록 타고난 소리꾼은 아니지만 노래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첫 앨범 ‘오하라의 행복한 이야기’ 표지. 2015년 11월 이 앨범 발매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인기 없는 무명가수의 길은 너무 힘들었다.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뒤 과분한 관심을 받게 됐다. 이곳저곳에서 노래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중도 실명한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강연이나 간증을 요청하는 곳도 있었다. 때마침 다니는 안마원도 그만둬야 할 상황이라 초청받는 곳마다 열심히 노래나 강연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노래 강사들 단체의 권영대 회장님을 통해 작곡가 겸 노래 강사인 송광호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송 선생님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곡을 써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송 선생님은 약속대로 내게 7곡을 작사·작곡해 주셨다.
나는 안마사로 열심히 일하며 모은 돈에 대출받은 돈을 보태 앨범을 내기로 했다. 그렇게 가수의 길은 시작됐다. 가수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세상일이란 게 그렇듯 앨범 작업 과정도 어렵고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노래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데다 악보도 볼 수 없었기에 오로지 소리만 듣고 또 들으며 맹연습했다.
녹음실 비용도 난관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추가 비용을 지급해야 했기에 부담이 됐다. 잘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남편과 나는 평택에서 서울까지 열심히 오르내리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2015년 11월 첫 앨범 ‘오하라의 행복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지금도 늘 우리 부부를 응원해주고 격려해 주시는 권영대 회장님과 송광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수호천사인 남편에게 감사한다. 남편과 만남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많은 행복과 행운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런 천사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도를 드린다.
앨범을 내고 자신의 곡이 있으면 가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이 쉬워 가수지 진정한 프로 가수가 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솔직히 나는 타고난 소리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노래 좋아하고 노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내 노래를 통해, 내 강연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그것이 곧 나의 성공이다. 나 오하라가 생각하는 행복과 성공은 그런 것이다.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을 극복한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알게 된 참된 행복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삶의 이유다.
직업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면 이것저것 아쉽고 후회가 남는다. 그러나 소프라노 임청화 교수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무대가 스승이기에 때론 실수를 통해 배운다. 가끔은 내가 가는 이 길이 진정 나의 길인가 하는 의문과 회의도 생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로 응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모든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나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심을 믿고 있다. 오로지 순종하고 헌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인도하심을 믿기에 다시금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고 나아간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12) 무명가수로 하늘의 별따기라는 TV에 출연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 본 방송 PD, 날 꼭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며 섭외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촬영 때 남편 이태웅씨가 흰 티셔츠에 그려준 오하라씨 모습. 남편의 사랑이 느껴진다.
현재 활동하는 가수는 많다. 그러나 이들 중 대중에게 알려지고 인기 있는 가수는 많지 않다. 그리고 무명 가수가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행운이 찾아왔다. 앨범 낸 지 한 달여 만이다.
내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한 방송국 PD가 보고 가방을 챙겨 나가는 우리 부부의 뒤를 급히 따라왔다. 그리고는 자신을 소개하며 명함을 주고 내 연락처도 받아갔다.
집에 TV가 없는 까닭에 그분이 담당하는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남편이 인터넷 검색을 하고서야 MBC의 ‘사람이 좋다’는 휴먼다큐 방송이고 꽤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한다는 것을 알았다. 방송 시간도 50분이나 됐다.
그런데 우리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전날 만났던 PD님과 카메라맨을 비롯해 몇 명이 ‘우르르’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PD님은 우리 부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는 우리 부부를 섭외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다음날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모두 정말 열심히 찍었다. 처음에 PD님은 내가 자기보다 어린 줄 알았다가 알고 보니 내 나이가 더 많은 걸 알고 누나라고 불러주며 편하게 대해 주었다.
예전에 TV를 볼 때는 그냥 단순히 재미로 편하게 봤다. 하지만 막상 내가 촬영 대상이 되고 함께 작업하면서 방송이란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즐겁고 재미도 있었다. 가끔 촬영을 멈추고 쉴 때면 내 삶과 신앙 이야기를 늘어놨고 매번 나의 이야기에 빠져들던 PD님은 급기야 나를 오 교주님이라고 농담처럼 부르곤 했다.
촬영이 거의 끝나갈 즈음 남편은 아침 일찍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오늘은 촬영 안 하는 거야?”
남편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뭔가를 숨기는 듯했다. 점심 때쯤 강원도의 한 바닷가에 도착했고 촬영팀도 와 있었다. 그곳에 모인 이유를 알고 나는 ‘울컥’ 감동했다. PD님이 우리 부부가 결혼식만 올리고 신혼여행을 못 다녀온 것을 알고는 신혼여행 촬영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바닷가에 제일 예쁜 방에서 우리는 신혼여행 겸 촬영을 했다. 남편은 내 얼굴을 그린 흰 티셔츠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볼 수 없기에 티셔츠에 그려진 내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남편을 향해 말했다.
“여보. 이 그림 속 나는 세상을 볼 수 있겠지?”
순간 눈물이 쏟아지고 남편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촬영 일정을 모두 끝내고 PD님은 일주일 집에도 못 들어가고 편집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한 덕분에 시청률도 좋았고 방송이 나간 뒤 나는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뻤던 일은 우리 방송이 연말에 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지금도 담당 PD님의 말이 기억난다.
“누나. 나는 무대 위에 있는 누나를 보는 순간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었어. 그래서 누나를 세상에 꼭 보여주리라 마음먹었지.”
지금 내 마음은 감사로 가득하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과 이 세상, 또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바친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13) 설 무대 많지 않아 빚만 늘어… 가수 포기할까?
직장 그만두고 매니저 자처한 남편… 흔들릴 때마다 ‘좀 더 힘내자’ 격려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씨가 2015년 12월 대구 동성로에서 공연한 모습.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1집 앨범을 내고 불러주는 곳만 있으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달려가 노래했다. 노래 홍보에 관심이 많았다.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용기를 드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많은 축제와 무대가 있었지만 무명 가수인 내가 설 무대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작은 단체를 통해 선 무대에서는 예산이 적다며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받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여자 가수들은 남편이 직장을 다니고 있기에 돈벌이가 적더라도 부담은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남편 없이 전혀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오로지 내 가수활동을 도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살림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앨범을 내면서 진 빚과 매달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다. 빚이 점점 늘었다.
노래연습을 하다가도 이게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인가 하고 자꾸 의문이 들었다. 내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노래 포기하고 다시 안마사로 일할까. 남편도 다시 일을 시작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텐데….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남편은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 좀 더 힘내자.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당신 손을 잡고 고맙다며 나도 힘내겠다는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직도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아. 우린 처음부터 유명세나 돈을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잖아. 세상과 더불어 많은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자고 결심하고 한 일이잖아.”
나를 안고 토닥여주는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이내 불안감을 떨쳐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마음속을 희망과 용기로 채워넣었다. 누군가를 위해 다시 세상에 내놓을 그 희망과 용기를 말이다.
신앙인으로서 모든 것에 감사하려 노력했다. 누군가가 건네는 물 한 잔에도 감사했다. 그저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힘들 때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이렇게 살아서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힘을 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더욱 감사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당신의 기적을 다시 한번 보여주셨다.
첫 증거가 2집 앨범을 낸 일이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낸 가수분이 내게 어울리는 곡을 작곡했는데 아무 조건 없이 내게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요즘 ‘등대 오빠’로 활동 중인 가수 김선주씨였다.
내가 어려운 형편임을 알고는 앨범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지인에게 부탁해 도와주셨다. 그 덕분에 가수 데뷔 3년 만에 생각지도 못한 2집 앨범 ‘별빛 인생’이 태어났다.
별빛 인생은 국민응원가 같은 노래다. 유명인을 지칭하는 스타별이 아닌, 평범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노래 가사가 너무 좋고 사랑스럽다.
이 노래를 통해 많은 분께 사랑과 행복을 전하고 싶다. 주님께서도 그것을 바라고 내게 축복과 은혜를 주셨으리라 확신한다. 어두운 밤일수록 별은 더 빛난다. 우리 인생도 힘들고 막막할 때가 주님과 더 가까워질 때라고 생각하고 기도드린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14) 장애인 합창단과 협연하며 ‘더불어 삶’ 깨달아
아름다운 화음으로 어우러지는 합창처럼 모두가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행복 나눠야
지난해 9월 경기도 평택 남부문예회관에서 장애인합창단인 ‘푸른날개합창단’과 협연 모습. 청각 지체 장애 등 다양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합창을 통해서 하나가 됐다.
나는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짓고 싶진 않다. 하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 때문일까. 장애인들을 만나면 좀 더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2018년 그런 내 마음을 더욱 아련하게 만드는 여러 장애인을 만났다. 바로 경기도 평택 최초의 장애인합창단인 ‘푸른날개합창단’이다. 2017년 12월 창단한 푸른날개합창단은 청각 시각 지적 발달 지체 장애인과 비장애인 4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합창단 창단공연에 함께 연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장애인 합창단임을 알고 흔쾌히 함께하기로 했다.
공연 전 찾아간 연습실, 그곳에서 정말 아름다운 분들을 만났다. 말을 할 수 없기에 노래할 수 없는 청각 장애인분들과 말을 정확히 할 수 없는 지적 장애인분들이 함께했다.
청각장애인들은 수화로 합창을 했다. 발음이 어눌한 분들도 열심히 노래했다. 우리는 하나가 됐고 최선을 다했다. 합창단은 ‘보리밭’ ‘고향의 봄’으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 ‘경복궁타령’, ‘아리랑’ 등 민요로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했다.
이후 합창단장의 권유로 부지휘자 겸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간혹 지휘자가 바쁜 일정으로 연습시간에 나오지 못할 때면 부지휘자인 내가 합창연습을 지도한다. 단원들을 전혀 볼 수 없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도 부족한 나의 지도에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오히려 내게 힘내라는 응원까지 보내는 그분들의 따뜻한 사랑에 내 마음은 벅찬 감동으로 가슴 저린 행복이 밀려오곤 한다.
내가 이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드리고 싶은 마음에 함께하려 했었는데 오히려 내가 격려와 응원 속에서 더 많은 사랑과 용기를 얻고 있다. 날로 실력이 늘어가는 단원들을 보며 나 또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이분들이 곧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음을 깨닫곤 한다.
또한 많은 단원이 교회에 다니기에 우리 합창은 곧 찬양과 다름없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 모두를 협력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믿는다.
처음엔 도무지 맞지 않는 화음이었다. 박자를 맞추지 못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연습시간이 늘어나고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화음은 어우러지고 아름다운 색깔로 빚어졌다. 날이 갈수록 서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합창하면서 깨달은 점이 많다. 모두가 함께하는 연주이기에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 한 사람 실수가 합창단 전체에 끼치는 피해가 크기에 늘 조화롭게 해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 사는 이 세상도 이런 합창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려하고 이해하며 서로 돕고 더불어 행복을 나누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흔히 사람들은 이 세상을 ‘약육강식’이나 ‘아귀다툼’ 세상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 푸른날개합창단처럼 밝은 희망이 있음을 믿는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맑고 환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각자의 자리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마음껏 행복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오하라 (15) 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 하와이 여행
노래 스승 임청화 교수님 제안 받고 볼 수 없는 경치라 감흥은 없지만 해외 여행 못한 남편 위해 가기로
지난해 12월 미국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남편과 다정하게 한 컷. 비행기 타길 늘 두려워했던 내가 남편을 위해 선택한 특별한 여행이었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점점 커졌다. 진동이 몸에 느껴지자 두 눈을 꼭 감았다. 유난히 겁이 많은 나는 스스로 “괜찮아 괜찮아”를 주문처럼 외웠다. 의자를 ‘꽉’ 붙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너무도 가뿐히 날아올랐다. 모든 것은 내 주문처럼 괜찮아졌다. 남편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날아가고 있었다. 노래를 지도하는 스승 임청화 교수님과 아들 남석이도 함께했다.
외국행 비행기를 타는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필리핀이었는데 그리 장시간 비행이 아닌 데도 무척 겁을 먹었다. 배편으로 일본을 갈 때 파도가 심해 일행 모두 뱃멀미로 고생할 때도 혼자 멀쩡했던 내가 유독 비행기라는 낯선 것에는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하와이까지 가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임 교수님의 제안 때문이었다. 교수님과 우연히 같은 무대에서 찬양했고 교수님께서는 형편이 어려운 나의 사정을 아시고는 아무런 조건 없이 레슨해주고 계신다.
그날도 레슨을 받기 위해 학교로 교수님을 찾았다.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교수님께서 가족과 하와이 여행을 준비했는데 일정이 여의치 않아 가족 중 일부가 못 가게 됐고 마침 우리 부부와 함께 가자고 제안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말로만 듣던 하와이를 가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편을 위해 하와이를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을 볼 수 없는 나는 어디를 가든 크게 감흥이 없다. 경치라는 것이 눈으로 봐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눈 감고 있으면 내 집 안방이나 그랜드캐넌이나 내겐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시각장애인분들도 계실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해외에 별로 나가보지 못한 남편을 위해 함께 하와이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임 교수님 아들 남석이가 낯을 가려 따로 관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하와이로 출발하기도 전부터 걱정이 됐다. 남편이나 나나 영어를 잘 못 하는데 어디서 길이라도 잃고 헤매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남석이는 남편을 정말 좋아했다. 오히려 교수님과 내가 사라진 두 남자 때문에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여하튼 남편은 하와이에서 원주민처럼 돌아다녔다. 남석이는 그런 남편을 보고는 교수님께 여행 다닐 때는 무조건 우리 부부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와이는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다.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신선한 공기와 파도 소리,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들이 좋았다.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12월인데도 따뜻했다는 점이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로선 집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였다. 하와이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내가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니자 사람들은 물론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까지 모두 지나갈 수 있도록 정지해 주는 것이었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있어 좋았다. 하와이에 도착한 첫날부터 집이 그리웠는데,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나고 막상 떠나는 날엔 아쉬웠다. 남편을 위해 처음 떠난 먼 여행길. 우리 인생도 이런 여행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오하라 (16·끝) 소풍길 인생… 열심히 노래하고 복음 전할래요
사료 얻어 먹은 고양이의 보은에 모든 일상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회개 기도 드리고 매일 삶에 감사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와 남편 이태웅씨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집 대문과 현관 사이에 작은 화단이 딸린 공간이 있다. 그런데 길고양이들이 담을 타고 넘어와 쓰레기봉투를 헤집어 놓기 일쑤였다. 배고픈 고양이들을 위해 사료를 주기 시작했다. 한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그날도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현관문 앞에 쥐가 죽어있다며 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죽은 쥐를 집 근처 땅에 묻었다. 그런데 얼마 뒤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남편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 ‘화들짝’ 놀랐다.
인터넷에 원인은 내가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은 특히 암고양이들은 사료를 얻어먹거나 어떤 도움을 받게 되면 그 감사함의 표시로 쥐를 잡아 선물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신기했다.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짐승도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데 나는 내 생명을 주관하시고 모든 생활에 은혜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얼마나 어떻게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회개 기도를 드렸다. 다시 한번 하나님, 모든 일상에 감사하게 됐다.
듣고 말하고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다닐 수 있다는 것, 몸에 걸친 옷,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하나부터 열까지 감사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이렇게 내게 각성을 선물해준 고마운 그 고양이 ‘샤샤’는 현재 우리 집에 살고 있다.
며칠 뒤 한 마리는 외롭다며 ‘렉돌’이라는 품종의 예쁜 새끼고양이를 동서가 분양해주었다.
남편은 암고양이 두 마리와 나까지 포함해 우리 집은 3대 1로 남자가 약세라며 농담했다. 하지만 얼마 뒤 우리 집 남녀 비율은 열세도 우세도 아닌 동등한 상황이 됐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
사연은 이렇다. 2층 사는 딸과 사위가 자동차 보닛 안에 고양이가 있다며 내게 고양이 간식을 좀 달라고 찾아왔다. 간식으로 유인해 고양이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까만 털에 목둘레와 다리만 하얀 털이 있는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동차 안에 한 마리가 더 있는 게 아닌가. 그 녀석도 간신히 꺼내보니 줄무늬가 있고 씩씩해 보이는 얼굴이란다.
태어난 지 갓 두 달이나 됐을까. 어미를 잃고 헤매다 따뜻한 자동차 보닛 안으로 기어들어 간 듯했다. 두 녀석 다 마르고 기운이 없어서인지 울음소리도 가냘펐다.
내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녀석들이 안쓰럽고 불쌍했다. 결국 두 마리 다 키우기로 했다.
딸은 자기 자동차 이름이 티볼리니까 까만 녀석은 ‘티볼리’, 줄무늬 녀석은 ‘본네트(보닛)’로 이름을 짓자고 했다. 사위를 포함한 우리는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두 마리 다 수컷이었다. 이렇게 해서 현재 우리 집은 3대 3으로 남녀 비율을 맞췄고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한다.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하나님. 오늘도 저는 인생이라는 소풍 길에서 사랑의 보물찾기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독자 여러분. 제 부족한 간증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래 부르고 주의 복음 전할 테니 관심 부탁드려요.(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