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cnn.co.kr%2Fmain%2Fbanner%2Fright_banner%2Florenskong%2Fcell_group%2Fcell_group_title3.gif)
|
|
지난 세기 교회성장이 하락 곡선을 이루며 심각한 교회적 위기의식을 느낀 모든 교계는 다시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부흥의 열정을 회복하려는 뜨거운 열기로 새 천년의 문을 열었다. 많은 교회 부흥 전략들이 소개된 지난 세기에는 주로 방법론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회성장의 원리는 단련된 테크닉보다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것이 역시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지금 사도행전적 소그룹모임의 확산은 교회성장의 마지막 보루인 양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것이 셀목회다. 세계교회는 지금 소그룹 모임의 셀 목회로 전환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취미생활이나 원하는 동호인 모임을 선호하고 있으며 자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다양한 셀모임에 참석하기를 원하고 있다. 일반적인 현대인들은 이러한 모임을 통해서 보다 헌신적이고 의미있는 일을 찾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열을 투자하여 자신이 원하는 문화활동에 시간과 돈을 소비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관계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삶의 방식으로 산다.
세계는 이러한 자기취향의 소집단(subcult)들이 팽창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요즘 취미에 따른 「소집단 폭발」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작은 그룹이 사랑 받는가? 소그룹의 장점은 융통성이 있어 모임의 순서 절차가 쉽게 변경되고, 참석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용이하며, 장소에 매이지 않는 이동성이 있다. 또한 수용성과 인격성, 모험성이 있다. 셀그룹의 확산도 폭발력 있는 소그룹 분열의 집단이다.
셀(ce1l)은 감옥이란 뜻도 있지만 생명의 구성 단위인 ‘세포’라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는 말하는 셀교회의 셀의 의미는 당연 후자에 속한다. 생명체는 살아 있는 세포로 구성되어 기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하면 세포가 모여 조직이 되고, 조직이 모여 기관이 되며, 기관이 모여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인 몸을 이루듯, 셀 교회도 같은 이치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셀 교회의 장점은 셀 교회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게 됨으로써 성도들간에 구체적인 교제와 도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셀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다. 셀 교인들은 셀교회를 통해서 사귐, 나눔, 치료, 영적인 활성화, 전도 등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또한 셀 교인들은 사랑, 배움, 섬김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셀교회는 간증의 현장이 되고, 변화의 현장이 되고, 성장의 현장이 된다. 이러한 셀 목회가 폭발적인 부흥으로 열매를 거둔 나라가 바로 싱가포르이다.
셀목회의 현장 싱가포르! 적도 부근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이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1956년 영국에서, 1965년 말레이지아에서 독립한 작은 국가로 제주도보다 작은 크기에 인구는 총 350만명, 그 중 80% 이상이 중국인이고 불교, 유교, 모슬렘과 소수의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싱가포르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특징은 극장을 인수하여 더욱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유교권 문화 속에서 붉은 장미처럼 꽃피운 싱가포르 침례교회(FCBC)는 1986년 8월, 350명 교인으로 출발하여 1988년 셀 교회로 전환하면서 800명으로 증가했고, 1995년 말 예배 참석자가 6000명으로 성장한 기적을 남긴 교회다. 도시의 번화한 시장 한 가운데 위치한 극장을 개조해서 만든 교회 본당 건물에서는 주일 4부 예배를 드린 후 교회 밖 노점에서 친교와 점심식사를 나눈다. 여기에 있는 노점들은 이 교회 성도들을 상대로 장사해서 먹고 산다. 10,000명 이상이 모이는 연 2회 정도의 대집회 때는 싱가포르 최대의 실내체육관을 사용한다. 그리고 교회 산하에는 셀 목자훈련센타, 국제훈련센타, 사회봉사센타가 있고, 1995년 당시에 벌써 69명의 목사와 105명의 전임직원이 교회 모든 운영을 도맡아 하고, 1000여명의 지체사역 자원 봉사자들이 사역자를 도와 이웃 사랑을 실행하였다. 1998년에는 목사만 11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매주 모이는 활동적인 셀이 700개이며, 일년에 한번 정도 모든 셀 교인들이 총동원되어 싱가포르 전역에 흩어져 구제와 봉사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구성은 셀(10∼15명) 다섯이 모여 구역(Zone)이 되고, 구역이 모여 지역(District)이 된다. 셀 본부 상황실의 큰 상황판에는 교회 모든 셀의 움직임이 한눈에 보이도록 해서 24시간 셀의 활동을 점검하고 있다. 담임목사가 꿈과 비전을 제시하고, 부목사와 평신도 지도자가 전략을 수립하면, 교회 어린이로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하나가 되어 비전과 전략을 함께 공유하며 일사분란하게 실천한다.
랄프 네이버 박사의 소그룹 비전 그러나 싱가폴에도 셀이 없던 지루한 계절이 있었다. 셀이 없던 교회 초창기에는 일반적인 한국교회에서도 그래 왔듯이 앞문으로 들어오는 교인수보다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수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는 사람보다 사역을, 사랑보다 사명을, 말씀보다는 말만 하는 ‘지루한 계절’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교회 상태를 ‘영적성장이 둔해지고 성도들이 삶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는 때’라고 로렌스 콩 목사는 회고한다.
이 시기에 셀교회 개념을 처음 확대 발전시킨 사람이 랄프 네이버 박사(Dr. Ralph W. Neighbour)이다. 그는 싱가포르 침례교회 협동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셀을 도입하게 되는데, 네이버 박사는 22세에 빌리 그래함 전도팀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그 후 뉴욕지역에서 5년동안 23개의 침례교회를 개척하는 억척을 보인 인물이다. 1969년 40세에 고향 휴스턴에서 목회를 시작, 불신자에 대한 전도와 신자들의 삶의 변화를 유도하는 셀 개념을 처음으로 개진하여 실험 기간을 거쳐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남침례회교단 해외선교부에서는 이와 같은 전략을 싱가포르에 심기 위하여 그를 해외에 파송했다. 1997년 다시 휴스턴에 돌아와 4년 동안 셀교회 개념을 재정립하고 확대 적용한 결과 18개월 만에 교인수가 700명에서 1400명으로 배가되었다. 셀교회의 교과서적인 책 "Where do we go from here?" 저자인 네이버 박사는 싱가포르 침례교회에 와서 셀 교회를 본격적으로 실시하며 ‘일과 프로그램 중심’의 전통교회에서 ‘사람과 사건’ 중심의 셀 교회로 완전 전환(paradigm shift)시켰다. 그들은 셀이라는 새로운 배를 타고, 돛을 높이 올리고, 방향을 잡고, 성령 바람의 인도를 받아 신나게 푯대를 향해 나아갔다.
겨자씨가 거목으로 변하여 네이버 박사가 셀을 재정비하고 떠난 후 콩목사는 셀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다. 교인들을 말씀으로 무장시키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며, 제자훈련 및 사람을 키우고, 지체사역을 셀교회에 맞도록 재조정하는 대단원의 작업을 과감히 추진하고 콩 목사가 직접 진두 지휘하며 주님의 세밀한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귀기울였다. 그 결과 1995년 말 교인수는 350명에서 6000명으로 부흥하였고 현재는 8천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1만명의 교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드려지는 주일 대예배는 그야말로 축제다.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찬양, 말씀, 성찬식, 침례식, 간증, 연극이 있고, 치유를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1995년 한해 동안에 침례받은 사람의 수는 556명에 이르렀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수는 자그만치 1,931명이나 된다. 한 알의 겨자씨가 거목을 이루어 시원한 그늘을 안겨준 셈이다.
셀 목회의 현장 싱가포르! 그곳에 간다. 이러한 셀목회의 생생한 부흥의 소식을 접한 사람은 교회 내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흥분하게 된다. 단 몇 년만에 대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는 소리에도 물론 구미가 당기지만 우선적으로 그 방법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으며 미래지향적이고, 방법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부흥을 꿈꾸는 목회자들이 모여 생생한 셀 목회의 현장 싱가포르에 간다.
한국강해설교학교 전문목회연구원에서는 제3차 2월 8일(화)∼14(월)일 제4차 2월 23일(수)~3월 1일까지 두 차례 싱가포르 현지방문 세미나에 참가한다. 벌써 제3차는 모든 예약이 마무리된 상태이며 참석하게 될 45명의 목회자들이 기대와 흥분으로 새 달을 기다리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의 집중되는 관심과 주목 속에서, 셀 그룹 목회 국제컨퍼런스가 싱가포르 FCBC(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의 주최로 열리고 또한 CHC(city harvest church) 젊은이 사역 전문가 콩히 목사가 6월 21-25일에 IPS 2000대회(International pastors’school)를 개최한다. 이미 한국에서도 셀목회를 정착시키고 있는 교회들이 여럿 있다. 여의도 순복음(조용기)교회, 왕성(길자연) 교회, 지구촌(이동원)교회, 안산 침례교회 등이 그러한데 이 교회들도 셀목회로 전환해 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와 목회자는 지금까지 설명한 싱가포르 FCBC의 로렌스 콩 목사(Lawrence Khong)와 CHC의 콩히목사(H. Kong)이다. FCBC는 지금 1만∼1만3천 여명이 모이고 있고 CHC는 젊은 청년대학생만 6천여명이 모인다. 콩목사의 꿈은 서기 2000년까지 싱가포르 모든 마을에 적어도 한 개의 ‘기도 셀’ 즉 5000개의 셀을 세우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0억이 넘는 중국인의 복음화를 자기교회에서 책임지겠다는 오만한(?) 야망도 가지고 있다. 이미 대만에는 국제 셀 훈련센타의 전초기지가 마련 중이다. 2002년까지는 전세계 50개국에 셀교회를 심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이 작업도 구소련 국가들을 차례차례 방문하면서 이미 개시됐다.
이런 영혼 추수에 대한 셀목회 구조의 성공을 최초로 제시한 랄프 W. 네이버(Ralph W. Neighbour. jr Touch Outregch Ministries) 설립자는 “21세기 세계 교회들은 초대교회의 형태인 신사도행전적 교회인 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외에도 이 셀목회가 세계교회 성장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오랄로버트 박사(오랄오버트 대학총장), 피터 와그너(풀러신학교 교회 성장 전문가 및 세계기도센타 책임자), 존 맥스웰 목사(INJOY설립자 및 윌로우크릭교회 컨설턴트), 엘머타운스(리버티 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및 교회성장 전문가)는 말하며, 프로그램 중심 PBD(Program Base Design)에서 셀목회로 전환되는 교회들을 CGC(Cell Group Churches)라고 부른다.
이러한 혁신적인 셀그룹 교회들은 미국에서만 수 천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신 경향」(Emerging Trends) 셀목회의 발생 원인은 ‘교회들이 이제 더 이상 낡은 방식들 가지고는 교회구조 안팎을 막론하고 기존 성도들의 집단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속감이 불분명한 불신자나 이동 교인들은 군중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람으로 방황하는 신자들이기 때문에 생동감이 넘치고 생명력이 있는 성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활기찬 셀그룹으로 발전해야 한다. 세포가 분열하는 것처럼 소그룹이 끝없이 확산되는 모습이 초대교회의 성령 폭발적 셀 목회의 모형이다. 이번 2월 24일부터 시작되는 싱가포르 세미나의 강사 및 주제는 로렌스 콩 목사의 ‘셀 교회의 비전, 셀 교회의 원리, 셀 교회의 전도, 성장을 위한 셀 키우기, 영광스럽고 효과적인 사역, 담임목사의 역할, 셀 교회의 선교’이며, 에드 실보소 목사(추수전도 설립자 및 회장)의 ‘영적 기후를 바꾸기 I·II’, 구나 라마 목사의 ‘셀 그룹 어젠다, 지역사회를 이해하기’, 쿨라우디오 프레이드존 목사(말젠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만왕의 왕 하나님의 성회 교회 개척 담임목사)의 특별 성령 집회가 있을 예정이다. 또한 셀 교회 전환에 필요한 준비방법과 전도훈련법, 셀교회의 사역 정보 시스템들도 공개된다. 한편 한국교회에 늘 최신목회를 제공하는 한국강해설교학교 전문목회연구원은 대표 관계를 갖고 싱가포르 두 교회를 공식 방문하여 예배와 셀 모임방문 세미나를 참석하게 된다. 평신도가 목회하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개인이 존중되는 교회,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교회인 셀목회는 앞으로 매우 비전있는 목회 방법으로 국내에서도 급속한 확산과 정착이 기대된다.
사람 낚는 어부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A.D. 1813-1873) / 이만용 목사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가난하지만 신앙심이 돈독했던 부모님으로부터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란티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너무나 가난해서 10살 때 면직물 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 번 돈은 거의 모두 책을 샀는데 라틴어 문법책, 베르질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등을 사서 공부하고 읽었으며, 자연과학 서적 등을 탐독했다. 특별히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 철학"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특권임을 깨달았다. 1830년에 그는 글래스고우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것은 후에 아프리카 탐험과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구츨라프의 권유로 원래 중국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했지만 신학공부를 다 마쳤을 때 중국에는 아편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떠나지 못하고 당시 영국에 머무르고 있던 로버트 모펫(Robert Moffat)의 권유로 남아프리카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1840년 11월 20일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12월 8일 알고아만(灣)을 향해 떠났다. 알고아만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베추아나국의 쿠루만에 1841년 7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베추아나 사람들의 말을 배웠으며, 수개월 후 100km가 넘는 여행을 통하여 가는 곳마다 의료활동을 하여 원주민들의 신임을 얻어 복음 전파의 계기를 삼았다. 리빙스턴은 1843년 모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크웨나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선교 및 탐험 본부를 추장 세트셀레가 옮긴 곳인 콜로벵강 유역에 마련하였다. 추장 세트셀레는 리빙스턴에게서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일부다처제를 포기하면서 아내들을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세트셀레는 또한 자신이 직접 선교사가 되어 자신의 부족들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영향력을 미쳤다. 리빙스턴은 어디에 가든지 원주민들에게 설교하고 종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부활 및 심판에 관해 증거했다.
1853년 리빙스턴은 초베강 유역의 리냔티에 살고 있는 부족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교사역은 당시 마콜롤로 부족의 지배 하에 있던 바로체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854년 그는 로안다로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얼마 지난 후 다시 마콜롤로로 돌아왔다. 1853년 11월부터 1854년 6월 사이 동안 여행으로 서른 한 번 열병에 걸렸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를 위한 그의 열정은 열병이나 어떤 난관에도 꺾이지 않았다. 1856년 그는 마콜롤로의 동료들을 남겨두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에 돌아온 리빙스턴은 1857년의 많은 시간을 그 동안의 여행 이야기들과 결과들을 글로써 표현했다. 또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연설했다. 이로 인하여 선교사 리빙스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험가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은 선교사로 나아갈 것을 천명했으며, 아프리카의 문명화와 개방을 통해 그 나라가 한층 더 잘살게 되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영혼구원임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리빙스턴은 새로운 교역 정책과 더불어 폭넓은 선교사역을 생각해 나갔다. 그는 영국 영사의 자격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잠베지강 유역의 탐험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리빙스턴의 제2기 아프리카 활동에 해당되는 1856년부터 1864년은 많은 실망 및 실패와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의 선교사역에 큰 방해가 된 것은 포르투칼 사람들의 노예 행위 묵인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빙스턴은 계속적인 탐험으로 쉬르와 호수를 발견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마콜롤로 부족이 종족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당한 사건이었다. 1862년 1월초 리빙스턴은 4년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다가 다시금 함께 있게 되었는데, 3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아내는 질병 끝에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그의 선교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적인 탐험과 선교사역을 진행해 나가는 가운데 1864년 정부의 소환을 받아, 리빙스턴은 영국에서 1년 동안 머물게 되었다.
1865년 가을, 리빙스턴은 영국을 다시 떠났으며 1868년 잔지바르를 경유하여 로부마강 하구에 이르렀다. 이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 그는 백인을 동반하지 않고 인도에서 선교학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이들은 니아사 호수에 도착하여 야만적인 마피투족의 공격을 받자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래서 몇몇 짐꾼들만 마피투족의 공격을 피하여 리빙스턴과 함께 추적을 벗어났다. 이때 리빙스턴으로부터 도망쳐간 사람들은 리빙스턴이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던 가운데 리빙스턴은 병마와 부족한 식량, 적들의 공격 등 수많은 역경을 이기면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그는 니아사 호수, 탕가니카 호수, 모레오 호수, 뱅겔로 호수 등을 횡단하면서 보냈다. 1871년 11월 10일 그가 니앙웨에서 루알라바강에 도착했을 때 다시 병이 났는데, 여기에서 그는 스탠리(Henry M. Stanley)를 만나, 병을 회복했다.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그는 마치 하늘에서 온 천군 천사와도 같았다. 스탠리는 겨울동안 리빙스턴과 함께 머물다가 1872년 3월 돌아갈 때 같이 영국으로 가자고 했으나 리빙스턴은 거절했다.
스탠리와의 작별 후 리빙스턴은 계속해서 탐험과 선교사역을 수행해 나갔다. 그는 방웨올로 호수를 발견하였는데, 이때 리빙스턴은 병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리빙스턴의 충성된 종자들이 일랄라에 도착해서 트쉬탕보 마을에서 오두막에 리빙스턴을 옮겨 그를 간호했는데, 리빙스턴은 어느날 침상 옆에서 무릎을 꿇고 죽어 있었다. 이때가 1873년 5월 1일 이었다.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는 데 리빙스턴은 기도하듯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리빙스턴의 탐험과 선교여행 가운데 충성을 다해 수행했던 아프리카 원주민 쿰마(Chuma)와 수지(Susi)는 특별한 헌신을 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죽은 주인 리빙스턴의 시신을 방부제 처리하여 잔지바르로 옮겼다. 곧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리빙스턴의 시신을 영국까지 옮기기로 한 것이었다. 1874년 2월에는 바가모이오에 도착했으며, 영국으로 계속 항해하여 4월 15일에는 사구댐프턴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1874년 4월 18일 위대한 탐험가요 선교사인 리빙스턴의 시신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안치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리빙스턴의 시신이 아프리카에서 영국까지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리빙스턴의 부서진 팔을 조사해 보고 난 후에 틀림없는 그의 시신임을 믿었다. 리빙스턴의 사랑과 선교와 헌신의 깊이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선교사, 탐험가로서의 리빙스턴은 참으로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 문명화의 선구자였으며, 아프리카에서 약 29,000마일을 여행한 탐험가였다. 또한 그는 삼십삼년간의 아프리카 선교사역 기간 중 자선사업과 의료봉사를 통해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선교사로서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처럼 그 역할을 잘 감당해 낸 사람이었다. 곧 리빙스턴의 죽음 이후 아프리카는 기독교가 들어오도록 여러 지역을 개방하게 되었으며, 아프리카를 위한 거대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아프리카를 위한 여러 선교협회와 교단 선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뛰어난 점은 그의 인격적인 면이다. 그는 남을 위한 친절과 사랑과 관심과 관대함에서 탁월했다. 또한 그는 놀라운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나아갔다. 또한 그는 여행 기간 동안 언제나 규칙적인 기도뿐만 아니다. 수행원들과 더불어 매주일 예배를 철저하게 드렸다. 리빙스턴은 그의 선교사역과 탐험을 통하여 아프리카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본 적이 없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관뚜껑에 다음의 성경구절이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