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을 더 재미지게 즐기는 방법>
1. 첨부된 유튜브 브금을 재생시킨다
2. 동영상이 재생되는 아무곳이나 꾹 누른다
3. 연속 재생을 체크한다
4.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음미한다
냠냠
철벽 가드
이재현
❤
<새로운 캐비지!> 포스터가 크게 걸린 용인구 에버랜드 안. 캐리비안베이에 진짜 여름이 찾아왔다.
Q. 에버랜드에 가장 뜨거운 달이 언제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손님들은 8월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 인원들의 의견은 다르다. 더위에 쪄죽어가는 에버랜드 캐스트들 曰
A. 아무래도 6, 7월이죠.
Q. 왜죠? 8월에 손님이 제일 많지 않나요?
A. 그때 온갖 부서에서 캐비로 다 전배보내니까요. 모든 일의 시작. 커플들의 집결지. 핫서머예요!
으레 그렇듯 인사이동에는 찍소리 안하고 따라야한다. 이재현과 나, 우리 둘의 소원은 같았다. 제발! 그나마! 같은 업무 발령이나 스케줄표 적당히 맞출 수 있는 곳으로 가게 해주세요!였다. 아무리 어트랙션에서 활약을 해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캐비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다. 팔 쿨토시를 차고 살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곳. 나와 이재현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재계약을 거절했다는 점이고 이재현은 재계약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정아야아...그냥 재계약하지."
"안돼. 이번에도 취업 기회 발로 까면 엄마가 나 안본대."
나는 앞에 놓인 잔을 이리저리 만졌다. 이렇게 퇴근하고 캐스트 동기들이랑 노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심으로만 채운다면 재계약 제의를 받아들였을거다. 요즘 캐스트 뽑는 인원수도 확 줄고 재계약 캐스트는 더더욱 적다. 삼성의 자기업 에버랜드는 10개월을 계약만료로 정해놓은 것도 개치사빤스다.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발악인 걸 안다. 하지만 온갖데서 청춘들이 모이는 꿈의 장소. 에버랜드를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다른 캐스트들도 다들 같은 마음일거다.
"재현이는 재계약 한대?"
"응. 재현이는 내년에 누나가 무슨 자리 하나 소개시켜준다고 했나봐. 고민하더니 서류에 싸인 했다던데."
"의도치 않게 롱디 되겠네."
상관 없었다. 이 연애 정글의 숲에서 혼자 두고 간대도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어차피 이재현을 믿으니까. 허튼 짓 안하는 사람이고 떨어져있다고 해서 마음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건 나와 이재현 사이에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맥주잔 표면은 허옇게 냉기가 차있다. 남은 생맥을 입에 털어넣고 컵 겉면에 검지를 댔다. 하트를 괜히 그려본다. 이재현 지금 자려나. 보고싶다. 이재현 생각을 하자마자 핸드폰 알림이 온다. 잠금화면에 뜬 이름은 이재현. 어차피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다 알림을 꺼두었다. 핸드폰과 내면이 반응하는 건 한 사람 뿐이었다. 예외 적용 이재현.
>> 나 일어났어
>> 애들이랑 맥주마신다며 끝났어? 나 캐하 앞에 나왔는데 데리러 가도 돼?
사랑은 유치뽕짝 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오만방자한 마음을 혼쭐내준 사람.
<< 응
이재현 같이 있는다면 지난 2년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N년도 계속 그릴 수 있었다.
❤ ❤
"정아 씨. 인건비랑 법인 중간결산 신고했어요?"
대리님 말에 핸드폰 화면을 엎었다. 아 네, 아까 점심 전에 마쳤습니다. 얼레벌레 대답하고 다시 모니터를 봤다. 세무사 사무실은 확실히 하반기가 여유로웠다. 상반기에 입사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에버랜드 퇴사한지도 두 달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내 배경화면은 바뀌지 않았다. 이재현이랑 캐비에서 빨간 바지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라이프가드 커플로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좋았다. 많이, 더, 이런 부사들을 잔뜩 붙일만큼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그냥 주임님이 재계약하자고 할 때 재계약할 걸 그랬나. 한 번 퇴사하면 재입사도 어렵다. 용인에서의 기억은 이재현 뿐만 아니라 모든게 아련하고 즐거운 추억이었다. 출근 맞는 애들끼리 빽사에서 노는 것도 식당 가면서 종류 3개 중에 뭐로 먹을지 내내 토론하던 것도 그리웠다. 무엇보다 이재현이랑 전보다 덜 붙어있는게 씁쓸했다.
<< 재밌냐
>> ㅠㅠ
>> 아니 너 없어서 힘들어
에버랜드 다닐 때도 꽤 체감했지만 이재현은 인기 있는 편이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손님들이 번호를 물어보는 횟수가 종종 늘어갈수록, 신입 캐스트들이 들어올 때 관심남이 되는 것도 꽤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게다가 라이프가드 유니폼은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하던 몸을 더 부각시켜주기 딱이었다. 이두 삼두가 완전히 발달된 그 팔뚝은…… 됐다 말을 말자.
괜히 퇴근하고 혼자 맥주 마시면서 유튜브에 검색해봤다. 종종 <캐비 훈남 라이프가드!> 이런식으로 자극적인 썸네일과 함께 이재현의 옆모습이 찍혀 올라왔다. 화면에서 보는 이재현은 정말 업무적으로 철벽치는 걸 안다. 그냥 혼자 마음이 안좋은 것 뿐이다. 분명히 해둘건 불안한 건 아니었다. 이재현이 알아서 잘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보고싶어."
- 지금 갈까?
"운전해서 오면 자정에 도착인데?"
- 지금 갈게.
이재현이 운전을 할 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재현네 누나가 너무 용인에만 있지말라고 준 중고차가 얼마나 다행인지. 이재현은 일을 한 날에도 가끔 차를 끌고 강남까지 왔다. 사랑이 눈에 보인다면 이런 노력과 정성일거다. 나는 이재현의 목을 꼭 껴안았다. 바로 내 허리로 감겨오는 다정한 손길이 익숙하다. 회사 업무가 별로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눈에 띄게 파탄난 인성도 아니다. 근데도 괜히 울적해진다.
"나 그냥 재계약 할 걸 그랬나."
"왜. 나 못봐서 힘들지. 다시 오고싶지?"
개구진 표정으로 웃는다. 이재현의 허허 캬캬 웃음은 자양강장제다. 기운이 좀 남은 날이라면 장난스럽게 받아쳤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정말 이재현 말이 맞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재현 어깨에 기댔다.
"나 그만둘까? 나 오프가 들쑥날쑥해서 우리 만나기 힘들지."
"됐어. 너 다녀야 연간권 나오지."
"그거 때문이지!"
내 옆구리를 간질이는 손을 피하지 못했다. 잽싼 손길을 피하려고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골이 띵 하고 울렸다. 이재현은 바로 손을 멈추고 내 양볼을 맞잡았다. 이건 분명,
"개수작 부릴라고."
"응 뽀뽀하려고."
뽀뽀하기 직전의 얼굴. 이재현은 모르겠지만 그 특유의 얼굴이있다. 입꼬리가 씰룩이고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려깔면서 날 보는 눈빛. 이거때문에 내가 넘어갔지. 처음의 입맞춤은 찰나였다. 점점 텀을 줄여가며 쪽 쪽 쪽 쪽 쪽 쪽. 고릿적 곰돌이 세마리 스킬도 아니고 귀엽게 뽀뽀를 해댄다. 나는 이재현의 볼을 쿡 찔렀다. 어떻게 맨날 봐도 안질리지. 신기한 남자였다.
"아. 나 내일 엄마랑 약속 있어서 못 만나."
"...알았어. 어머니니까 양보할게."
연신 실실 웃던 얼굴이 쪼그라들었다. 이재현의 볼을 쿡쿡 찔러도 이쪽을 잘 안본다. 가끔 신기했다. 이세상 모든 자신감과 자존감 다 빨아들인 것처럼 굴고 세상 쾌남처럼 굴더니. 역시 사랑 앞에 옹졸해지는 걸보면 이재현도 사람다웠다. 사랑은 늘 확인받아도 모자라다.
❤ ❤ ❤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부정적인 감정은 말로 뱉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나는 이런 관용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라면 눈덩이는 물론 눈씨앗도 만들지 않았을거지만 그날은 좀 이상했다. 월경 전 증후군으로 허리도 뻐근했고 기분도 바닥 중의 바닥이었다. 처음에 집을 나올 때부터 불길했다. 주말에 절대 연락안하는 회사 업무방 단체톡방이 울렸다. 예약 메일 걸어두고 온 줄 알았던 게 발송 오류가 났댄다. 엄마랑 백화점 갈 준비를 하다가 부랴부랴 회사에 뛰어갔다. 십분이면 해결할 일이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겨우 다시 메일을 보내고 제대로 도착했는지 사장님들께 확인 전화까지 돌렸다. 마지막 명단까지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에휴. 사람이 왜이렇게 많니."
"...미안. 그래도 맛있다니까 기다렸다가 먹자."
서울 중심지에 새로이 연 대형 백화점. 모든 수식어가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곳이었다. 명품관부터 여태까지 타 복합상점에 입점하지 않았던 이색 맛집들까지 자리를 꿰어찼다. 엄마는 본의아니게 카페에서 두 시간동안 시간을 죽여야했다. 이미 엄마의 체력은 바닥이었다. 나는 눈치를 살살 보면서 엄마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이재현한테 배운 방법이었다.
"그래서 여사님 기분 좀 나아지셨나."
"몰라. 보고."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을 선물을 사러왔다. 부부 머플러나 선글라스를 맞춰주려고 왔는데 사기도 전에 사람한테 깔려죽겠다. 괜히 오자고 했다. 오픈일 더 지나서 올 걸. 아니면 인터넷으로 골라서 시킬걸. 두어개 매장을 돌아다녔는데도 벌써 체력이 바닥이다. 나도 이런데 엄마는 어떻겠는가 하고 보니 이미 지칠대로 지친 표정이다. 결국 인터넷으로 시켜버리기로 합의를 봤다. 백화점을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이래서 백화점이 위험해. 시계가 없는만큼 얼마나 머물렀는지 알 수가 없다.
"계모임 들렀다 갈테니까 먼저 가."
"저녁도 먹고오게?"
"응. 딸은 집가서 먹을거지? 냉장고에 너네 아빠가 뭐 해놨으니까 꺼내 먹어."
생각해보면 이번 달에 엄마 결혼기념일도 있고 계를 타는 달이라고 했던 거 같다. 그래서 저렇게 죽어있던 눈이 다시 반짝이는구나. 점점 멀어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다가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냈다. 오랜만에 모녀가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이라 핸드폰도 안들여다봤다. 보나마나 이재현 연락이 쌓여있겠지……라고 생각했다.
>> 정아야
>> 오늘 남한이 마지막이래서 술먹을 거 같아
>> ㅠㅠ
위에 몇개 쌓인 카톡은 빠르게 읽고 마지막 문장에 집중했다. 어? 요새 근육 키우기에 집중한다고 술은 잘 입에도 안대던 애였다. 분명히 김남한네 무리가 이재현 팔을 잡고 징징 졸랐을게 선하다. 걔네 무리랑 장미관에 있는 몇몇 신입 캐스들 꼬셔서 맥주 마시러 갔겠지 뭐. 대수롭게 생각안하고 답장했다. 응 재밌게 놀다와. 원래도 연락에 그렇게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재현이나 나나 무던해서 전화가 안되면 그냥 그런가보다. 카톡이 좀 느리면 일이 있나보다 했다.
"강남 성삼아파트 3차요."
토요일이라도 피크 시간은 피크이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있다가 북적대는 사람들을 보고 바로 옆에 있는 택시를 잡아탔다. 안그래도 회사 갔다와서 기가 쪽 빨리는 날인데 이정도 시발비용은 쓸 수 있다. 그러려고 돈버는건데 뭐. 택시에 거의 실려오듯 몸을 맡기고 집에까지 좀비처럼 걸어들어왔다. 아무래도 토요일날 약속을 잡는 건 무리였다. 차라리 토요일 하루 쉬고 일요일날 잡든가 해야지. 샤워할 기운도 없지만 꾸역꾸역했다. 아까 메일 보내고 확인 전화 돌리느라 식은땀을 한바가지 흘렸다. 입에 대충 뭔가를 쑤셔넣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몸이 노곤노곤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이재현이랑 통화해야할 것 같았다. 에버랜드 출입증을 걸고 다닐 땐 밤마다 숙소 앞에서 만났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다. 영상통화나 통화로 대부분을 대체했다. 밤마다 이재현이랑 교환 일기장 늘어놓듯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항상 이재현이 먼저 걸었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발신 버튼을 눌렀다.
- 응 정아야
"아 아직도 술마셔? 이따 전화할까?"
- 아 잠깐만. 나 잠깐 나갈게. 아냐 지금 통화하자. 안그래도 아까부터 가려고 했어.
부시럭대는 소리와 함께 고요해졌다. 술집 밖으로 나온듯 싶었다.
"웬일이야. 술 잘 안먹었잖아."
- 이제 세 명이나 그만둔다해서 억지로 끌려왔지이. 밥 먹었어?
"순두부 열라면. 아 근데 재현아 오늘……"
- 그거 맛있어? 다음에 청양고추 넣고 끓여줄게. 혼자 먹지 말고 같이 먹어.
너 혼자 밥 먹는 거 별로 안좋아하잖아. 덧붙이는 말이 괜히 감동스럽다. 오늘 체력적으로 지친 하루여서인지 별 것 아닌 것도 크게 다가온다. 이런 날이 있다. 괜히 마음이 몰랑해지고 약해지는 날. 평소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사이에 이재현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기분 좋게 작용했다. ASMR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이 껌뻑껌뻑 감겼다.
- 정아야.
"...엉."
- 너, 졸리지
음성만으로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사이. 틀어놓은 선풍기가 머리칼을 날렸다. 가끔 캐스트 숙소 안들어가고 근처 숙박업소에서 둘이 시간을 보낼 때면 항상 이재현이 머리를 말려줬다. 따뜻한 손이 머리칼을 섬세하게 말리는 게 좋았다. 나란히 불면인 날에는 EPL이라도 틀어놓고 둘이서 맥주 한 캔씩 땄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재현은 항상 내 패턴에 맞추고 싶다면서 홀짝였다. 서양남들의 환상적인 슛실력과 치고박는 몸싸움에 시선 둘 바를 몰랐다. 유니폼을 들춰서 이마를 벅벅 닦을 때면 드러나는 복근. 내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면 이재현은 내일부터 삼십분 일찍 헬스장에 가겠다고 했다. 뒤로 넘어갈듯 웃다가 입맞추고, 티비 끄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머리를 쓰다듬는 날들이었다. 그런 점이 좋았지. 아무래도 그만두지 말았어야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니가 머리 말려주면 좋은."
- 오빠! 지금 가요?
급격한 태클. 아무리 메시와 호날두, 그리고 손흥민이어도 발목이 확 꺾이고 눈이 돌아갈만한 태클이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어디까지 하나보자.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우리 통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럴 때 내가 뭐라고 해야돼? 순간 잠이 확 깨고 뒤통수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 다른 분들은 다 안에 있는데. 안 들어가요?
- 저 애인 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지금 나 두고 만담하니. 전화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이재현은 차가운 말투로 뱉는데 상대편이 끈덕지게 플러팅을 걸어왔다. 애인 있음 어때요. 어차피 오늘 4:4인데. 4:4라는 말이 귀에 콕 박혔다.
"니 뭔데."
- 정아야 아냐. 하, 진짜 지금 갈게. 얼굴 보고 얘기해.
"할 얘기는 너나 있겠지."
분명 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말투에서 이재현이 화났음을. 상대방을 냉정하게 쳐대는 것도 안다. 이재현이 4:4 같은 짝지어서 술마시는 걸 싫어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김남한 무리를 싫어해서 식당에서도 같이 안앉는 거. 어쩌다 스케줄 겹쳐서 같이 일하게 되면 기함하는 거. 내가 이재현을 모르면 누가 아나.
안다. 다 아는데, 아는데 그런 날이 있지 않나. 마음이 말캉한 날에는 작은 생채기가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아야, 정아야. 계속 걸려오는 이재현의 전화와 문자를 무시했다. 역시 사랑은 유치뽕짝이야. 부질없어. 백 번 진심을 속삭여도 한 번 등돌리면 모든게 끝이다. 밖에서 아빠가 부르는 사랑의 재개발 가사가 들린다. 싹 다 갈아 엎어주세요옹. 구성진 트로트 자락이 귓가에 쿡쿡 박힌다. 잠은 달아난지 오래지만 불을 다 꺼버렸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장스탠드가 깜빡 깜빡 점멸한다. 이내 퓨즈가 나가듯 확 꺼져버렸다. 감정은 원래 이렇다. 사랑이란 x값에 들어갈 때 더 갑작스럽고 급작스러운 변화값을 토해낸다.
오늘은 이재현이 싫다. 밉다. 안믿을 거다. 오늘만 싫어할 진 나도 모르겠다.
❤ ❤ ❤ ❤
이재현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지 5일 째. 이제 엄마와 아빠가 더 성화다.
"재현이가 보낸 선물 예쁘던데... 아직도 화해 안했어?"
"어. 내 앞에서 이, 아니 걔 이름 이자도 꺼내지마."
집으로 찾아올까봐 근처 사는 사촌언니 집에서 머물렀다. 다행히 언니가 잦은 외근과 출장이 많은 직무여서 혼자 사는 것과 똑같은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언니에게 오십만원을 송금하고 한 달만 얹혀살겠다고 했다. 잘 안쓰던 네이버 블로그앱도 깔았다. 온통 비공개로 전환해놓고 나홀로 일기를 썼다. 맨날 이재현이랑 전화로 교환일기장처럼 시시덕대던게 그립긴 했다. 하지만 이 유치한 마음은 멈출 줄 모른다. 이재현이 그날을 빼면 5일 연속 오프없이 달려야하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걸 기억하는 내가 싫다. 출근 러쉬 와중에 우리집에 찾아와서 엄마아빠 결혼기념일 선물을 주고 갔다는것도 개빡친다. 차마 차단하지 못한 부재중전화와 카톡, 문자는 수두룩하다.
[이재현 부재중전화 (30) ]
>> 정아야
>> 만나서 얘기해
>> 나때문에 집 비운거면 들어와
>> 내가 안찾아갈게
>> 정아야 마음 괜찮아지면 답장해줘'
>> 나 아닌거 니가 제일 잘 알잖아
>> 정아야 오늘 비온대 우산이랑 가디건 챙겨가
건조한 눈으로 보다가 마지막 문자에서 괜히 눈물터졌다. 이럴 때 이재현이 아이폰이고 내가 갤럭시여서 다행이다. 아이메시지나 갤럭시끼리 문자하면 카톡마냥 읽었다고 뜨는데, 카톡은 두려워서 읽지도 못했다. 비행기모드로 돌려놓고 읽을까 하다가 괜히 마음만 약해질 거 같아서 접었다. 문자를 무슨 행주빨듯이 여러번 봤다. 일주일만에 집에 들어온 사촌언니가 옆에 털썩 앉았다. 양싸대기를 날리듯 챱챱 스킨을 발랐다.
"액정 뚫리겄다 뚫려."
"...그정돈 아니거든."
"그때 사귀던 걔야? 2년 만난 애?"
나는 내 옆에 있던 드라이기를 언니쪽으로 밀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뜨거운 바람으로 머리를 탈탈 말렸다. 위이이잉 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왜이렇게 청승맞게 들리니.
"...뭐야. 정아야 너 울어?"
"아니."
"우는구만. 아이고. 그냥 만나라니까. 그런 애 아닌 거 안다며."
추잡스럽게 코까지 흥 풀었다. 이재현이 머리 말려주던 거. 그냥 휴지로 풀면 코 밑 헌다고 물티슈 꼭 챙겨주던 거. 땀날 때마다 닦으라고 어디서 애기 손수건 구해와서 에코백에 묶어주던 거. 온갖 추억들이 생각났다. 마지막 라스트팡은 휴대폰 액정이었다. 방금까지 진짜 다신 안만나라고 쓴 줄 알았는데 블로그에다가는 이재현 보고싶다만 열문장을 채웠다. 땅에 이마를 쾅쾅 박고 울고 있을 때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 정아야. 나 너네 집으로 가도 돼?
>> 너 싫어할 거 아는데 한 번만...
>> 자정까지만 기다릴게.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얘기하자.
>> 정아야 너 좋아하는 카페에서 스콘 사왔어
>> 나오기 싫으면 이거만 두고 갈게
에버랜드 다닐 때 거의 아아메와 수혈하듯 먹던 스콘집이겠지. 아까 애써 흐린눈하면서 확인 안하던 문자들이었다. 최근에 온 스콘 문자 때문에 위로 쭉올려서 봤다. 여덟시에 온 문자니까 지금 열한시면 네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라스트팡 팡 팡으로 눈물샘이 터졌다. 엽떡을 앞에 둔 침샘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아예 눈물 콧물에 장기까지 뺴낼정도로 울자 사촌언니가 등을 토닥였다. 내 대갈토 옆에 놓인 액정을 확인했다. 언니는 조용히 널브러진 가디건을 내쪽으로 민다.
"얼른 나가라. 곧있음 자정되겠구만. 빨리 가."
"...만나면 뭐라해. 내가 괜히 유치하게 군건데."
회사도 피곤하고 심신이 지쳐서 이재현한테 화풀이한거다. 나도 인정한다.
"뭔 말을 해. 그냥 디립다 입술 박치기지."
언니는 드라이기 바람을 내 엉덩이 쪽으로 쐬었다. 뜨거운 김 때문에 번쩍 일어났다. 나가야겠다. 잠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다. 가디건을 걸치면서 바깥으로 뛰었다. 언니네 집에서 우리집까지 걸어서 십오분. 뛰면 칠분일지도 모른다. 이 시간이면 도로에 차도 없으니까 미친듯이 무단횡단해서 가로질렀다. 헉헉대면서 아파트 초입으로 들어섰다. 헤드라이트가 다 꺼진 조용한 아파트 지상주차장. 그 끝에는 익숙한 차가 보였다. 그 옆에 기대고 있는 사람은 더 익숙했다.
"이재현."
"...정아야!"
이재현이 한달음에 달려온다. 내 품에 안기듯 날 껴안았다. 나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큰 몸이 내게 기댔다. 손에 든 스콘은 차갑게 식었다. 항상 뜨겁게해서 둘이 나눠먹었는데. 아직 여름이라고 해도 밤이면 쌀쌀했다. 특히 우리 아파트는 음기가 세서 밤마다 더 추웠다. 이재현은 반팔차림으로 내내 서있었다. 나는 품 안에서 벗어나서 얼굴을 봤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미안."
"미안."
만나면서 한 번도 안싸우진 않았다.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사소한 거에 마음 상하고 다쳤다. 그럴 때마다 우린 나름 합리적인 사과와 진심어린 재회로 풀어왔다. 이번에는 그게 안될 거 같았는데 아니었다. 막상 얼굴 보니까 다 풀렸다. 이재현은 점점 미간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울,
"...너 울어?"
"...미안, 미안해. 바로 자리 박차고 나오려고 했는데...이거 변, 명으로 들리지...나 바보 같지."
운다. 에버랜드 하면서 진상 고객한테 뺨 맞아도 허허실실 웃던 이재현이 엉엉 운다. 라이프 가드 하면서 애기 손님이 무섭다고 유니폼 잡아 뜯어서 반강제 상반신 탈의를 할 때도 웃어 넘기던 애가. 내 앞에서 애처럼 펑펑 울었다. 한번 열린 눈물 수도꼭지는 잠길 줄 몰랐다. 나도 사귀면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진짜, 진짜 끝인줄. 알았어..."
이재현은 얼굴이 발그레 해지면서 훌쩍거렸다. 맨날 호남 쾌남 같은 모습만 보다가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나 진짜...별로지."
가끔 나랑 싸울 때 저자세로 나오긴 했는데, 이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이재현은 예감하고 있었던걸까. 한참을 꺽꺽대며 울다가 다시 내 품안에 쏙 안긴다. 이럴 때면 진짜 영락없는 애기다.
"재현아."
"...응."
겨우 눈물이 멎었다. 운 애한테 차를 몰게할 순 없다. 이재현을 조수석에 앉히고 등을 천천히 쓸어줬다. 내가 속상할 때마다 이재현이 해주던 거였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재현은 손에 꼭 쥔 스콘 봉투를 건넸다. 어찌나 꽉 잡고 있었는지 손잡이 부분이 헤져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오늘 용인 가지마."
울어서 빨갛게 부은 얼굴. 애써 괜찮은 척 하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저 노력. 발그레 달아오른 양 뺨. 이재현의 얼굴을 뚷어져라 봤다. 이재현이 안전벨트를 풀고 천천히 내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이미 앞으로 쏠려있던 내 입술과 이재현이 맞닿는다. 조심스럽게 뒤통수를 잡는 손이 느껴졌다. 나는 단단한 허리를 꼭 껴안고 달뜬 숨을 뱉었다.
"...사랑한다고 해주면 안돼?"
평소에는 절대 안하는 말. 둘이서 수많은 밤을 꾸렸어도 부끄럽다며 피했던 그 문장. 왠지 오늘은 하고 싶어졌다.
이재현 사랑해.
모든게 용서되고 새로 시작될 것만 같은 오늘. 우리 둘만의 밤이 아주 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첫댓글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꺄아아 ♡
내 프사잔아 아 !!!! 작가님 잠만 잠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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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대갈 빡빡 치는 중... 하아 넘 좋아요 우는 이재현...? 엄마나살려
잼내요 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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