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어린 소녀들 참혹한 강제 노역 |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현장을 찾아]④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 |||||||||||||||||||||||||||||||||||||||||||||||||||||||||||||
| |||||||||||||||||||||||||||||||||||||||||||||||||||||||||||||
‘공부하며 돈 벌수 있다’...전남-충남 300명 동원 겨우 돌아 온 고국에선 ‘정신대’ 손가락질
일본 나고야시 미쓰비시 중공업 도토쿠(道德) 공장 한 켠에 새겨진 한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다. 옛 명성과 달리 미쓰비시 도토쿠 공장은 의외로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었다. 12~14세 어린 조선인 소녀들의 꿈과 청춘을 앗아간 60여년 전의 역사도 조용히 세월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양금덕(광주.76)씨 등 아직 앳된 조선인 소녀들이 일본 교장의 말에 속아 일본 땅을 밟은 건 1944년 5월경. 일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징병, 징용, 노무자,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돈도 벌고 상급학교에도 진학시켜 준다는 말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일부는 뒤늦게 부모에게 들켜 상황을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헌병이 대신 부모들을 연행해 가겠다고 위협하고 나선 상황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차역은 어린 딸과의 생이별에 허겁지겁 달려온 부모들의 아우성과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공부도 하고 배고픔도 달랠 수 있다는 기대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작업은 주로 비행기의 페인트칠에 투입됐다. 독한 화학약품 때문에 일본인이 기피하고 있던 작업이다.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날의 허기조차 달랠 수 없었다. 물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돈 한 푼 손에 만져보지 못했다. “한창 클 나이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해 항상 배고파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하도 배가 고팠던지 남이 먹다 버린 것을 주워다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일본 관리인이 그걸 목격했습니다. 남들 앞에서 심하게 매를 때리고, 지저분한 애라고 손가락질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무라마츠(77)씨의 증언이다. 당시 그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녀들과 함께 이 공장에서 근무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적 유교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있던 시절, 또 다른 시련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오가던 혼담이 깨지기 일쑤였고, 결혼을 했더라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988년 12월 다카하시 마코도(62)씨 등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 회원들이 당시 희생된 조선인 소녀들의 명복을 빌며 이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 제막식 현장을 찾은 당시 피해자들도 죽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속 어린 한을 목 놓아 부르짖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