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출동한 경찰구조대와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기섭에게는 이후 모진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단 결과 3, 4번 경추 골절이었다. 1, 2번 골절을 피해 목숨을 잃는 일은 피했으나, 재활치료를 마친 뒤에도 하반신마비는 회복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기섭은 두 차례의 경추 수술을 받은 뒤 재활치료에 들어갔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욕창으로 5개월간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하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뼈가 석회화하는 희귀병인 이소성골화증으로 인해 대퇴부 골절상을 당하고 말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피눈물 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경추 골절 환자는 초기 재활운동이 가장 중요한데 초기에 무려 8개월간이나 꼼짝 못하고 누워 지냈으니 말이에요.”
안전벨트도 없이 바위를 타던 시절이었다. 암벽화도 되는대로 신고 바위를 탔다. 그래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78년 서울고에 입학하자 잠시 갈등이 생겼다. 서울고 산악부 OB 모임인 마운틴빌라는 꽤 잘 나가는 산악회였다. 그래도 선배들과 의리를 지켜보겠다는 생각에 용암산악회와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악회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새로운 유혹은 또다시 찾아왔다. 악우회였다. 악우회 멤버들이 국내 최초로 알프스 3대 북벽 완등에 성공한 직후였다. 마침 악우회 회원이었던 친구 형은 산에 한창 빠져 지내던 기섭을 산악회로 끌어들였다.
이후 기섭은 열정이 더욱 뜨거워졌다. 윤대표, 허욱, 유한규, 임덕용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산악인들과 함께 줄을 묶는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사실 기섭은 스스로 생각해도 바위 체질은 아니었다. 단신에 팔다리가 짧다 보니 핸디캡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선천적으로 겁도 많아 중요한 크럭스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런데도 선배들은 기섭을 아껴주고, 기섭은 그런 선배들이 너무도 좋았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기로 이름난 산꾼
기라성 같은 선배 산악인들과 지낼 때는 뒤따르는 것으로도 등반이 가능했지만, 82년 경원대 산악부를 창립하곤 상황이 달라졌다. 악우회가 흐지부지되면서 파생된 요반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하다 그 산악회도 유명무실해지자 동년배끼리 다니자는 생각에 대학산악부를 창립했다.
새내기이자 창립멤버 10여 명 중 클라이밍을 해본 사람은 김기섭이 유일했다.
“산을 동경만 해왔지 실제로는 거의 다닌 적이 없는 친구들이었죠. 그렇다고 매일 워킹산행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요. 할 수 없이 제가 앞장서서 이끌었어요. 국산 자일에 확보물 등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등반하자니 힘이 많이 들기는 했죠. 그래도 즐거운 시절이었어요. 특히 동기 몇 명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뒤로는 미친 듯이 바위를 찾아다녔으니까요.”
김기섭은 등반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루트파인딩에 관한 한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 그가 원하는 등반선은 어렵거나 독특한 선이 아니다. 아름답고 자연스런 선이다. 대학 1학년 시절 설악동을 출발해 화채릉~대청봉~서북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종주산행에 나섰던 그는 권금성을 오르던 중 노적봉에 매료된다. 피라밋 형상의 노적봉은 너무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6년이 지난 88년 여름 그는 목적 달성에 나섰다. 그러나 길을 제대로 몰랐던 그는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곤욕을 치르고 말았다. 그런데도 노적봉을 오르는 사이 너무도 가슴이 설레었다. 아름답고 자연스런 등반선이 눈에 띄었다.
“이듬해 여름 그 선을 따라 올랐어요. 손을 잡는 곳마다, 달을 딛는 곳마다 에델바이스가 피어 있었어요.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는 느낌이 들더군요. 눈앞에 토왕폭이 나타난 거예요.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물줄기가 거대한 폭포를 따라 쏟아지고, 그 물이 굽이지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 거죠. 등반 도중 소낙비를 맞았어요. 그러고 나자 더 환상적인 광경이 이어지지 뭐예요. 달마봉쪽에서 쌍무지개가 떠올랐어요.”
2005년 홍천강에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이란 강변 리지도 개척한 그는 2006년에는 영월 서강에 ‘봄날은 간다’와 ‘내가 눈물처럼 사랑했던 여인’ 2개 루트를 개척하다 말았다.
“아마 완성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 리지로 떠오를 거예요. 암릉을 오르며 유유히 흘러내리는 강물을 보는 감흥은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죠. 사실 어떤 루트든 개척 중에 이름을 짓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서글픈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회한이 들기도 하고 불운한 앞날을 예측했기 때문인 듯싶어요.”
그는 다섯 살 때 뒷산이 무너져내리면서 묻혔다가 아버지가 급히 꺼내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일, 초등학교 2학년 때 행당동 집 부근의 축대에서 놀다가 10여m 아래로 떨어진 일 등등 그동안 위험했던 상황을 하나 하나 열거한 뒤 “그렇지만 이번에 사고를 당했을 때는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며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 지금 폭풍설 몰아치는 광야를 걷고 있을 것이다. 눈 덮인 병원 앞마당에서 휠체어를 미는 연습을 할 때 그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넘쳤다. 그는 자신이 시를 통해 말했듯이 지금 눈보라 몰아치는 설악의 토왕폭을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보라가 부른다. / 눈보라 끝에 그리운 설악산이 보이고 / 마음은 벌써 토왕폭을 오른다. / 우리는 한국대학산악연맹 동지들 / 달빛이 쏟아지는 설동(雪洞)에서 / 전설이 흐르는 술잔 위에 낯익은 노랫소리 부르며 / 내일 빙폭을 이야기한다. / 산악연맹 동지, 동지들이여. / 내일은 서로의 가슴속에 찬란히 빛나는 피켈을 잡고 / 더욱 더 높은 정상을 향해 / 불붙는 기상으로 토왕폭을 오르자. - ‘산이 우리를 부르거든’(김기섭)
그는 한두 해쯤이면 휠체어를 마음대로 밀고 다닐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며 재활치료에 매진하고 있다. 3년 전 그는 태국 프라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해안에 솟아오른 해벽들이 무척 매력적이었고,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다가도 루트를 하나 내는 게 꿈이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 못했는데 이제 소줏잔을 입에 갖다댈 정도로 회복했어요(웃음).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면 영월 동강을 찾을 거예요. 제 힘으로 길을 완성시킬 수야 없겠지요. 그래도 후배들이 루트를 개척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면 제가 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을 듯싶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볼 때 멀쩡히 걸어다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담담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그가 설악산 노적봉에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개척하고, 노적봉에 경원대길을 볼트를 박기 위해 망치를 휘둘러댈 때처럼-.
/ 글 한필석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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