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민중이 사랑한 메르세데스 소사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고난받는 이들의 어머니'라 불러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인디오의
피가 왜 뜨거운지 그녀를 보면 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인생은 한마디로 거룩하다.
혹독한
군부통치와 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었던 그녀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불행한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982년 12월 민주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근
170년간 잦은 군사쿠데타로 시달려 온 나라다. 국민의 10%가 인디오이고 나머지는 유럽계 백인이다. 인디오들은 16세기의 스페인 침략을
겪으면서 이후 백인 농장주인들의 착취와 그 사람들을 지원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정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리고
1974년 페론이 사망한 뒤 1976년 초 쿠테타를 거쳐 정권이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군부로 넘어가면서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정치·사회적으로 탄압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민중의 삶과 꿈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1977년부터 군사독재가
종식되기까지 약 3년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리는 군부의 인권탄압으로 3만여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정치상황은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반독재와 저항의 노래들이 그 아픈 역사를 이어갔다.
이때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물론,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에게 희망을 노래했다. 군부에
맞서 저항의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 방송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중들의 사랑은 군부독재가 휘두른 칼날 위에서도 뜨겁기만 했다. 소사에게는 늘 비밀경찰이
따라붙었고, 자신이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위험속에서도 그녀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민중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고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래, 반전평화 등의 노래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존 바에즈,
밥 딜런 등 세계적인 가수들과 함께 반전평화 콘서트를 열었고, 국제사면위원회 콘서트에 참여하여 자유와 정의를 노래했다. 아르헨티나 민중의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그녀는
믿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 '모든 것은 변하네'(Todo Cambia)
소사의
노래에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노래는 '언어'가 아니라 '목소리'다. 목소리에 뛰어난 표현력이 숨어 있다. 세계인이 감동하는
이유다. 그녀는 목소리를 통해 노랫말이 담고 있는 정서를 완벽하게 전달할 줄 아는 소리꾼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 보라. 신들린 듯 빨려드는 소사의 노래는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주며, 때로는 우렁찬 외침으로
청중들에게 신념을 전달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다가도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처연히 솟아나는 이웃들의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도 한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을 한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인 판초를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그녀의 삶과 노래를 일치시킨 여인에게 바치는 무한한 존경과 애정의 표시였다.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1979년 1월,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됐다. 그녀의 망명 생활은 소사의 아티스트적 면모를 새롭게 여는
지평이 됐음은 물론이다. 안데스의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포크로리카'(Folklorica)에 음악적 뿌리를 두면서 록과 재즈의 요소까지 넓히는
기회가 됐다.
1982년,
마침내 소사는 망명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몰락했다.
귀국 후 한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그의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무대였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전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왜냐구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게 투쟁이거든요.
아니, 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게 그렇지요. 나는 국민들에게 무슨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소사를
가리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으로 부른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따 빠라의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
아따우알빠 유빵끼의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빅토르 에레디아의 'Razon de vivir'(살아가는
이유) 등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곡들을 완벽하게 소화했으며, 이를 빛내는데 그의 음악적 열정을 바쳤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모든 노래들은 영혼을 울릴 것 같은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처연히 살아나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심장을 녹이는 뜨거움이 있다. 감정을
모두 담고 있는 풍부한 표현력, 삶의 연륜과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살가운 목소리, 노래 마디마다 묻어나오는 인디오의 애환, 강렬하고 우직한 힘,
그녀의 음악이다.
소사는
50년 이상을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노래했다. 인디오의 민속음악을 세계에 알린 월드뮤직의 거장,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해석자, 고난받는
이들을 노래로 달래준 어머니의 존재, 그녀에 대한 화려한 수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랑과 뜨거운 신념이 그녀의 음악과 활동을 낳은 것이라고.
그녀의
나이 일흔 둘. 아르헨티나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민중과 부대끼며 영혼의 목소리로 세상의 분노와 슬픔을 달래주던 '크고 강한' 가수. 그녀의
음악인생이 민중의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해와 성찰을 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굴렁쇠
마음씨좋은
뚱뚱보아줌마 이미지가 떠오르는 메르세데스 소사 는 아르헨티나 FOLKORE (민속노래)의 대표적인 가수이다. 그녀의 남편 역시 음악가이다.
메르세데스
는 군정때 사회,정치성이 짙은 노래를 부르다가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러온 모든사람들과 함께 체포된적도 있었고, 그녀의 노래가 보이콧당하기도하는등
고달픈시기를 보내다 결국 유럽으로 망명한다. 실은 아르헨티나군정이 그녀를 내좆은것은 아니다, 그녀는 원하면 고국을 어떤 제지 없이
왔다갔다할수있었으나 단지 노래를 부르는것이 허락되지않았다.
가수에게
노래를 못부르게 하는것은 마라도나에게 발을 짜른것과 같기 때문에 메르세데스는 어쩔수없이 외국에서 정열적인 가수활동을 하는데, 이로인해 오히려
해외에서 더욱 유명세를 타게된다.
그녀는
지칠줄모르는 해외공연투어를 갖게되고, 아르헨티나는 군정이 말비나스전의 패배로 인해 무너지자 영구귀국하게된다.
벌써
유명세를 타고있는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가수들의 어머니격으로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다. 유럽풍을 좋아하는 아르헨티노들이 정신적으로
조금 성장해 아르헨티나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민속노래는 큰영향력을 끼치게된다. 그뿐
아니라 라틴국민들을 음악아래 뭉치게만들기도했다.
또
해외에서는 색다르고 독특한 음악을 발견하고 메르세데스 음악에 흠뻑 빠져있다. 내가 한국의 음반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견한 아르헨티나가수일런지도
모른다.
그녀의
별명은 “La negra" (깜둥이)인데, 아르헨티나에선 이렇게 애정의 표현으로서 신체의 특징을 별명삼아 붙이기도한다. 그런 의미로 chino
(중국인) 역시 애정의 표현으로서 사용하기도한다. (negro, chino 등이 약올리는것인지 애정의 표현인지를 알아차릴 정도쯤 되면
아르헨티노가 다 된것이다.)
첫댓글 맙소사....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