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360-4[도개4길 18]
참 반가웠다.
일전 도리사 방문 때 그토록 찾으려고 했건만 이제사 찾게 되었다.
정말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도화상과 모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다.
난 모례(毛禮)라는 사람이 불교를 전파하러 온 아도화상을 숨겨주고
신라 최초의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모례의 누이 사씨(史氏)도
승려가 되어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하였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고
신라 최초의 절 도리사(桃李寺)도 모례(毛禮)가 천석을 시주해서
지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르게 전해오는 것 같았다.
모례(毛禮)라는 인물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야기가 어찌되었던지 현재 모례의 집터로 전해오는 곳에 있는
모례가정(毛禮家井)이라고 전하는 우물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고 모례가 살았던 마을은
신라불교 초전지로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절’을 절을 많이 한다고 ‘절’이라고 했다는 둥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든데
우리나라에서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례의 ‘털 모(毛)’를
‘털례’라고 불렀다가 ‘례’를 빼고 ‘털’로,
다시 ‘절’로 바뀐 것이라는 설이 있다.
아도화상은 일곱 살 때 이곳 모례장자의 집에 와 머슴을 살면서
양 천 마리와 소 천 마리를 길러 모례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이렇게 5년간 일해주고 열두 살에 아도는 떠났는데 생각이 있어
그동안의 새경은 한푼도 받지 않았다.
모례가 아쉽고 섭섭하여 가는 곳을 물었으나 장소는 알리지 않고
다만 “얼마 뒤 당신 집으로 칡순이 뻗어올 테니 그 칡넝쿨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과연 그뒤 한겨울 어느 날 칡순이 장자의 집 문턱을 넘어오기에
모례가 곧 그 줄기를 따라가니 냉산 자락에 이르고, 그곳에 아도가 있었다.
아도가 모례의 인색한 성품을 잘 알고 있어서
큰 시주를 원하지 않는 듯 두말들이 자그만 망태기를 만들어
모례에게 내놓으며 “절을 지을 것이니 시주 좀 해주시오” 하자
그는 쾌히 응낙했다.
이 망태기는 그러나 아주 이상한 물건이었다.
두 말은 어림도 없고 열 섬·백 섬을 쏟아부어도
처음 한 말을 부었을 때의 분량 그대로였다.
모례는 끝내 약속대로 망태기를 가득 채우지 못한 채 천 섬을 시주하였고,
아도는 이것으로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오얏꽃이 만발한 냉산 기슭에
절을 이룩하니 이것이 신라 최초의 가람 도리사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전설 한 가지.
도리사가 세워진 뒤 해가 갈수록 절은 번창하고
승려는 날이 갈수록 늘어 절에서는 이따금 마을로 내려와 시주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두말들이 망태기’에 혼이 난 모례의 집에서는 시주를 하려 하지 않았다.
하루는 청하는 시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탁발하는 스님을 붙잡고
“더욱더 부자 되는 길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 스님은 말했다.
“집터가 배 모양이니 돛을 세우면 좋겠지요. 부자 될 겁니다.”
이 말을 좇아 곧 비석 셋을 세웠으나, 오히려 이때부터 차츰
가세가 기울더니 오래지 않아 모례의 집은 망해버렸고,
지금 동네 어귀에 있는 입석이 그 세 개의 비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모례의 인간성을 어떻게 판단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