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옛이름은 능성현이었다.
조선초에는 나주목의 관할로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천이 흐르고 있다.
넓은 곡창지대와 잘 발달된 교통, 특히 영산강을 통한 바다의 물길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길로 인해 고려시대부터 전국
12목 중 하나였을만큼 번창하였다.
'전라도'라는 지명도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씩 따와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 친숙한 곳이다.
신안(新安) 주씨(朱氏)의 시조인 주희의 증손인 주잠(朱潛)이 송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인 1224년 고려로 귀화하면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곳 능성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潛)할아버지"라고 이야기 했었다.
300년 후 주희의 성리학을 이 나라 조선에서
철저하게 실행하고자 하였던 조광조가 탄핵을 받아 유배와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곳
또한 이곳이다.
성리학의 종조(宗祖) 주희의 후손 세거지(世居地)가 조광조의 생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된 것은 우연일까?
몇 년 전 화순 고인돌 유적지를 찿아 간적이 있었다.
그때 가까이에 있는 달아실 마을
양동호가옥에 들리려 했는데
길을 잘못들어버린 적이 있다.
되돌아가기 싫어 그냥 지나쳤는데
못내 아쉬워 한참이나 후회스러웠다.
이번에는 열린 대문에 줄이 쳐져 있고 안내문이 달려 있다.
"읍내 볼일이 있어 외출합니다."
사람 사는 집에 주인도 없는데 들어가기도 그렇고
더구나 줄까지 쳐 놓았는데.
인연이 없는 곳이구나 하고
결국 발길을 되돌렸다.
조광조 유배지는 능주면 소재지 한쪽 끝 조용한 주택가에 있다.
비각, 영정각, 애우당 그리고 근래 재현해 놓은 3칸 초가집이 전부다.
4년 남짓한 관직 생활 동안의 그의 족적이 숨이 가쁠 만큼 빠르게 이루어졌듯이
유배생활 역시 한달만에 끝나고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그의 자취를 느끼기에 무언가 부족한 듯하다.
유허지 앞에는 아담하면서 깨끗한 화장실과
주차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다.
관리사무실에서 문화해설사가 쪼르르 오더니 방명록에 기재해 달라고 하더니 금방 들어가 버린다.
담양의 가사문학관에서는 입장하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계속 따라 다니는 바람에 눈치보여서 사진 한장 못찍었었는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 1482~1519)에 대하여 알아보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할 것이
유학(儒學)과 성리학(性理學)이다.
인류의 축의 시대에
중국에서 발생되어
중국의 문화와 사상의 바탕이 되어왔던,
공자, 맹자, 순자 등에게서
전해 내려 오던 유학은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
불교의 심성철학(心性哲學)이 융합되어
시대에 따라 그 중심이 되는 사상적 학문은
변천되어 왔다.
한대(漢代 : BC202년~AD220년)에서 경전의 자구(字句)를 해석하는데 열심이었던
훈고학(訓詰學)에서 시작하여,
당대(唐代 : 618년~907년)의 문장을
위주로 하는 사장학(訶章學),
송대(宋代 : 960년~1279년)의 철학사상을 위주로 하는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
명대(明代 :1368년~1644년)에는 심학(心學)으로 발전된 양명학(陽明學),
청대(淸代 :1616년~1912년)에 들어서는 고증학(考證學)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으로 변화되어 갔다.
우리나라에 유학이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이었다.
한대(漢代)에 한문자(漢文字)가 전래되면서 유학도 더불어 함께 발전되었으니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유학이 우리 민족 가치관의
바탕이 되어
우리나라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 고려와 함께 시작되었던 송의 시대를 이어 이민족의 원(元)의 시대가 끝나고
우리나라 조선의 개국과 때를 같이하여 명(明)나라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다르게 명나라에 대하여 철저한 사대사상으로 무장한 조선의 지배층은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아 조선을
유교 국가화하였다.
사회가 혼란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세속을 떠나
무위자연 사상에 빠져들게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초월적인 지향으로 말미암아 보편적인 윤리와 생활규범에서
벗어나
신비주의적 미신적인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게 된다.
원나라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횡포 그리고
무신정권의 정치는 고려 말기에 이러한 사회현상이 만연되도록 하였고,
새로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이에서 벗어나고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시작하였다.
문화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
시간을 두고 시나브로 변해간다.
유학은 북송시대에 이르러 주돈이, 정호, 정이 등에 의하여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여 남송시대의 주희(朱喜)가 완성하였는데
이를 이전의 유학과 구분하여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한다.
유학이 발생한 이후,
한(漢), 당(唐)시대를 통하여 성행한
도교와 불교로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
유학은 상대적으로 쇠퇴해 왔다.
주희는 지난 유학의 방향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용(無用)이라 하고,
도교와 불교는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실(無實)이라 하며,
지나온 사상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공맹의 근본 유학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유학의
정통성, 이른바 도통연원(道統淵源)을 강조했다.
그 연원이란 중국 전설의 시대 요, 순 시대를 비롯하여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으로 이어지는 성군이
도를 행하여 실제로 백성들이 태평을 누리게 하는 행도(行道)의 시절로 보고,
이러한 도를 이루기 위하여 학문과 교육으로 후세에 가르침을 베푸는 수교(垂敎)의 시대가 공맹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유학은 본시 현실적 학문으로서 정치, 도덕, 윤리, 교육 등 실제적인 생활에 적용되어 왔다.
성리학자의 현실에 대한 목적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과
도덕 문화 의식의 고양(高揚) 그리고
공공성의 기반 위에 자신과 공동체를 성립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개개인의 인격이 완성되어야 하고,
인격이 완성된 군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백성이 태평세월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주희는 예기(禮記)에서 대학(大學)을 독립시켜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3가지로 요악하였다.
1.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 (明明德)
2.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新民)
3. 지극히 착한 곳에 머무름에 있다.
(止於至善)
그리고 자신의 덕을 닦는 근본 이치를 8가지를
제시하였다.
1. 사물의 이치가 밝혀져야 (格物)
2. 앎에 이를 수 있고 (致治)
3. 앎에 이른 뒤에야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誠意)
4. 뜻이 정성스러워진 후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正心)
5.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자신의 덕이 닦이며 (修身)
6. 자신의 덕이 닦여야
집이 잘 정돈 되며 (齊家)
7. 집이 잘 정돈된 뒤에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治國)
8. 나라가 잘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편안해진다. (平天下)
성리학은 이러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본령으로하여 성립되어 있다.
명나라에서는 성리학이 학문적 연구에서 멀어져가고 그 자리가 양명학으로 대체되었으나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퇴계 때에 와서는 조선 독자적인 성리학을 완성하였다.
조광조 적려 유허지 전면.
영정각.
정암 조광조(靜菴 祖光祖 1482~1519)는
사헌부 감찰(정6품)을 지낸 조원강(祖元綱)의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아버지가
평안도 어천(魚川:영변)찰방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무렵 그곳에서 가까운 희천(熙川)에는 1498년의 무오사화로 인하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다.
주희의 제자 유청지가 지은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부르고
소학을 행동 근간으로 삼아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이러한 김굉필의 사상은 조광조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성리학에 의한 바른 생각 바른 행동의 조광조"를 탄생하게 하였다.
김굉필이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긴 후
사사(賜死)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과
후배 교육에만 전념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뜻을 바꾸어
29세에 진사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고 34세에는 알성시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는 중종이 반정세력에게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신진세력인 도학적(道學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추구하는 성리학자의 등용을 필요로 한 시기였다.
조광조는 4년 남짓한 관직생활을
유래없는 빠른 승진과 함께
대부분 청요직(淸要職)인 3사(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봉직하였다.
사헌부는 모든 신하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 그리고 정치 현안에 대한 제안을 하며,
사간원은 국왕에게 정치 일반에 대한 간쟁(諫爭)을 주로 하는 언관(言官)이며,
홍문관은 원래 궁중의 경서, 사적을 관리하고 각종 문한을 처리하였으나 차츰 왕의 학문과
정치에 자문을 하면서 언관의 역할도 하게되었다.
3사의 직책은 품계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문과에 급제한 인물 중에 청렴하면서도
학문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을 뽑았다.
따라서 모두들 명예롭게 생각하고 가문에서도 영광으로 여겼다.
언론을 주도하는 관직이어서 대간(臺諫), 또는 언관(言官) 이라 하였다.
이들은 왕권을 견제하고 대신들의 권력독점이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유교 문치주의 정치를 표방한는 조선시대 정치의 특징이다.
조광조는 삼사의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100여회에 이르는 계(啓)를 올려 언관의 본분에 충실하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치(道治)를 이루고자
왕(중종)을 무던히도 압박했다.
요즘 나라 안은 온통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문제로 시끄럽다.
일차적으로 당사자의 책임이 크지만 시류에 편승해 이권이나 챙기는 주변의 인물들 역시 비난을 받고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 측근들이 맡은 일을
명예롭게 여겨 의(義)를 행하는 군자의 길을 가지 못하고
권력으로 여겨 이(利)를 탐하는 소인의 길 가는 사람이 많으니
이 또한 대통령의 큰 허물이 아니고 무었이겠나.
올바르지 못한 일과 대의명분에 목숨을 걸고
국왕에게 충언을 하는,
좌천되더라도 명예롭게 생각하는 옛 선비들의 기개가 새삼 생각나도록 하는 사건이다.
빨리 악몽에서 벗어나 모두가
자기가 맡은 바
지극히 해야 할 일에 힘 썼으면 좋겠다.
조광조의 정치이념은 지치주의(至治主義)이다.
지치는 잘 다스려진 인간세상을 뜻한다.
유가(儒家)의 이상향인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조광조는 덕(德)과 예(禮)에 의한 왕도정치를
통해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왕이 현명해야 하고 왕의 자질을 함양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유학의 경사(經史)를 가르치는 경연(經筵)에서
도학(성리학)을 숭상하고 (崇道學),
마음을 바르게 하고 (正人心),
성현의 법을 본받아 (法聖賢),
지치(至治)를 일으켜야 한다. (興至治) 라고 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숭상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하고 그것을 정치에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이제껏 사장(訶章)에 치우친 과거의 부족한 점을 메꾸고자 '현량과'라는 관리선발 제도를 도입했다.
현량과의 선발기준은 성품이나 재능, 지조. 학식,생활태도, 행실과 행적 등에 의해 뽑았기때문에,
신진 사림세력이 주를 이루었고 자연히 이들이 삼사로 진출하여 여론을 주도하였다.
도학정치를 위한 인재를 확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도학을 실천하기 위하여 지방에는 '향약'을 실시하였다.
이제껏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지방관이 주도했던 유향소(留鄕所)를 철폐하고,
유학에 의한 지방자치를 확산시키고자
지방 유림이 주체가 되어 유교적 예속(禮俗)에 의한 향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조광조는 관직생활 내내 삼사의 언관으로 근무하면서 '언로(言路)'가 열려 있어야
지치(至治)가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정5품인 사간원 정언에 부임하자 마자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 문제 사건이 일어났다.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이 진성대군 시절에 결혼한 정부인이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왕비가 되었으나 오빠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으로 반정 때 처형되면서 왕비자리에 오른지 7일만에 폐비가 되고 말았다.
뒤를 이은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이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상소를 올렸다.
대간에서는 이들에게 죄를 주기를 청하여 유배형에 처했다.
이에 조광조는 상소하는 자를 벌하여 언로를 막은 종2품인 대사헌을 비롯한 대간들을 탄핵하여 박상과 김정은 복직시키고 기어코 대간들을 파직시키고야 말았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은 담양 면앙정 송순을 비롯한 호남 유림을 일으키고 뒷날 기묘사화로 핍박을 받은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왕(중종)과의 자존심 싸움을 벌여가면서까지 추진한 정책이 소격서(昭格署)의 폐지였다.
조광조가 힘들게 목적을 달성했지만 왕과의 갈등을 그만큼 많이 만든 일이었다.
소격서는 중국의 도교가 도입된
고려 현종 때 설치되어 유지되어 왔던 곳인데,
도교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형상화한
상청(上淸), 태청(太淸), 옥청(玉淸)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재앙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곳이다.
서울 삼청동 지명의 유래가 된 이곳은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국가에서 주관한 제사를 지냈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예조에 소속된 '소격서'란 관청을 설치했었는데
이전부터 존폐가 여론에 올랐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었다.
유학자인 조광조에게는 미신을 타파하는 일 조차 못해서는 도학정치가 요원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광조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들 중에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다고 하여 새로 심사하여 공신호와 토지, 노비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반정 초기에도 언급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공신들은 이미 원로가 되어 되돌리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강력히 주장하여
2, 3등공신 중 일부와 4등 공신 모두 해서 76명의 위훈을 삭제하고 말았다.
4등 공신은 대부분 무관들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비해 논공행상에서 불리한 녹훈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에게 조광조는 죽일 놈이 되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도학개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조광조는
왕과의 갈등과
훈구대신과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역이란 누명을 쓰고 탄핵을 당하여
유배길에 올랐다가 사사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진정한 성리학자로
정치를 실행하였으나 학문이 성숙하지 못하여
뜻을 채 펼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평. 여기서 학문이라 함은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조광조는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 및 정치가로
평가되지만 그가 펼쳤던 정책은
사대부에게 제한되어 있고
일반 백성들의 삶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발자취로 조선 사림들의 저변이 확대되었으나,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그가 오래 살았어도 또 그의 개혁정치가 완성되었더라도
선조 이후 사림의 세상이 붕당되어
우물 속의 개구리 싸움으로 조선이 쇠락하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광조 적려 유허비각.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비.
적려는 귀양살이 했던 집
유허비는 유물이나 유적이 없더라도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던 곳을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
뒷면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라고 하는데
조광조가 귀양오게 된 내럭이 적혀있다고 한다.
거북 형상의 비석 받침돌이 예쁘다.
정교하게 조각하지 않았어도 그에 못지 않은 멋이 있다.
이미지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면서 무언가 자유로움의 아름다움이랄까.
비각의 나무살 간격이 좁아 잘 보이질 않는다.
죽수서원(竹樹書院)의 홍살문.
홍살문은 이곳에서부터 몸과 마음을 경건히하라는
표시이다.
주로 왕릉이나 사당과 서원에서 볼 수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후 1971년 달아실 마을에 제주 양씨의 후손이 건립했으나 1983년에 한양 조씨 후손이 원래의 자리인 이곳에 재건하였다.
서원은 크게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으로 구분되는데,
강학공간은 또 강학과 모임의 장소로 이용되는 강당(講堂)과 유생들의 기거처인 재사(齋舍)로 이루어진다.
갑오경장 이후에 재건된 서원의 특징은 강학공간은
형식적인 곳이 되어 많이 생략되어 지어졌다.
서원의 역할도 제향 뿐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유생의 숙소이자 생활공간인 재사(齊舍).
전통적으로 강당 앞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사당의 내삼문.
이곳에서부터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천일사(天日祠).
죽수서원의 사당이다.
조광조와 양팽손이 배향되어 있다.
학포당은 기묘사화로 공직에서 물러난 양팽손(1488~1545)이 고향인 쌍봉리에 지은 곳으로 그 터에 후손들이 1920년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는 서화(書畵)에 뛰어나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으로 이어지는 예향(藝鄕) 남도의 인물 중 첫번째로 꼽힌다.
1510년에 진시시를 조광조와 함께 합격한 이후 1516년 문과에,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하여 조광조와 같은 길을 걸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시신을 거두어 주었다고 한다.
다락방 창문이 특이하다.
내부에 들어가 보지 못하였으나 높이로 보아서 다락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학포당
양팽손이 처음 학포당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 하니 수령이 500년이나 되었으며 참 잘 컸다.
공자는 항상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였기에 행단(杏壇)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공자를 모시는 향교에는 은행나무를 공자와 동일시하여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고 길렀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 역시 자신의 거처에 은행나무를 심는 전통이 생겨났다.
조광조 선생 영정.
애(愛)우(憂)당.
절명시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금부도사가 가지고 온 사약을 앞에 두고 지은 시.
絕命詩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섬기듯 하고
憂国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집 걱정하듯 하니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내 충성된 마음을 밝게 비추리라.
절명시는 죽음을 앞두고 지은 글이니 마지막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조광조는 "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알고 있다" 하였다.
마지막까지 그의 강골(强骨)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마음에 닿는 절명시 하나 소개한다.
지난 날을 생각하면 회한이 가득하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담담하게 죽겠다는 성삼문의 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撃鼓催人命
북소리 둥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
고개를 돌려 보니 해는 지려하네
黄天無一店
황천에는 주막이 없다 하는데
今夜宿誰家
오늘밤은 어느집에서 묵으려나.
계유정난 후 단종을 복위하고자 했으나
힘이 모자라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어쩌거나.
죽어서도 기약이 없구나.
綾城謫中
능성에서 귀양 중에
誰憐身似傷弓鳥
화살 맞은 새 같은 이 몸
누가 불쌍하게 여기랴.
自笑心同失馬翁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마음과 같아
웃음이 절로 나는구나.
猿䳽定嗔否不返
원숭이와 학은 내 돌아오지 못함을
비웃겠으나
豈知難出覆盆中
엎어진 동이 속에 갇힌 몸이라
빠져 나오기 없음을 어찌 알랴.
옛글을 보면 가끔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는 원숭이 이야기가 가끔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의 고문을 인용해서이다.
여기서는 북산이문(北山移文)의
夜䳽怨 / 曉猿驚 에서 인용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화순 고인돌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