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님과 같은 해, 나는 1월생이니 10월생이며 님인 대학을 72년에 졸업을 하고 나는 70년에 했으니 그 시절, 우리가 만났다면 차 한 잔이 인연이 있었다면 얼마나 소중했을까요.
내 책 꽂이에 여러 책들과 지은 이들이 즐비하건만 나는 혼불 생각에 온통 절어있습니다.
혼불의 향기에 나는 얼이 빠져있답니다.
정말로 바위에다 글을 쓰듯 했다는 님의 말마따나 그 심정이 내게 박혀 내 가슴까지 저리고 아프답니다.
그리다가 잊히려니 했건만. 님이 떠나신 지 1년이 되는 지금 더 사무치니 이게 웬일인가요.
님이 어느 모임에서 말하기를 혼불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이라도 있었다면 글을 쓰겠다는 사무치는 말에 나는 마음에 담아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님이 유명을 달리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님의 소식을 알 길 없어 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알아내려했으나 님이 상여를 타고 갔을 때, 흘리던 눈물이며 애통의 한숨이 작년 12월로 끝이던가요.
사람의 정서가 이런 것이며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도 이런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님의 대학 모교에서도 님을 자랑 삼아 인터넷에 올려놓았지만 기록이 너무 부족하답니다.
님의 청춘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을 국문과 동아리 인터넷은 먹통만 되고 천리안 통신을 통해서 4대 일간지에서 혼불이나 님을 찾아도 잊혀진 듯 언급이 없답니다.
그렇지, 죽은 사람이 무슨 뉴스를 만들겠나요.
혼불을 사랑한다는 ‘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모임 ‘ 에서는 마음속으로만 사랑하는 나처럼 신문의 칼럼이나 다른 활동은 없으니 그것은 마치 살아생전의 님처럼 조용한 사람들만의 모임 때문이 아닌지요.
혼불을 잘 팔고 있을 한길사는 계속 책을 찍어 내면서 책의 권두나 말에 작가의 말을 실어 줄만도 한데 , 작가가 얼마나 혼불을 쓰기위한 생애를 기울여 ‘사무치게 갈아 새긴 작품’ 인가를 님이 94년도에 미국 뉴욕 주립대에서 했던 초청 강연록 ‘ 나의 혼, 나의 문학’ 을 실어서 이해를 돕는 일을 왜 아니하는지. 님이 말리셨나요 ?
님의 글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 글 자체도 사무치는 명문이었답니다.
님이 혼불을 쓰기 위해서 17년의 세월을 보냈듯 나는 이제 혼불을 읽는 데 내 인생을 보내기로 했답니다.
그것은 돈이 생기는 일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니련만 님이 세상을 떠날 때
“ 혼불은 어이하나. “
하는 걱정에 대한 화답입니다.
이미 혼불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나 하나 더 보태어 혼불을 꺼지지 않게 지키고자 함입니다.
17년 동안 님이 써온 글을 열흘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것이고, 독자들이야 그 열흘 동안에 충만한 슬픔과 괴로움과 황홀 속에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리 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를 파악하려면 그리하기는 하지만 , 그것으로 결코 끝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1000일을 계획해서 혼불을 내가 베껴가면서 최형의 바위로 글을 써가는 노고의 만분지 1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이 저 좋아하는 인기인에 대한 홈페이지를 만들 듯 나 또한 언젠가는 혼불/ 작가 최명희에 대한 펜페이지를 만들고자 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1년이 걸려도 다른 누가 만들면 좋고 그렇다손 쳐도 님을 사랑하고 혼불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며 나 또한 모국어의 바다에 작은 일파가 되고자 함입니다.
그 펜페이지에는 님에 대한 작가에 대한 기록과 흔적을 따라 다닐 것이며
혼불에 나오는 중요한 장면에 대한 내 미숙한 그림도 따라 다닐 것입니다.
그 펜페이지는 만들고 나서 휴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UPDATE 될 것입니다.
혼불의 10권이 끝날 때까지…
그러면 나도 쇄잔해서 혼불이 님처럼 나 또한 사라저간 혼불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조선일보사 사진 데이터베이스에서 님의 사진을 구했습니다.
님의 서재일시 틀림없는 방에 혼불의 교정지를 펼쳐놓고, 만년필을 잡고 다른 만년필과 필통과 풀통과 프라스틱 통과 가위와 스탠드와 백과사전을 놓고
님은 곱게 화장을 하고 앞의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나는 다시 5분지 1 로 축소를 해서 내 수첩에 끼어두었습니다.
혼이라도 있다면 더러 마실 오시구요.
살아서 차 한 잔 함께 못하고 내 차 한 잔 받으세요.
(1999.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