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의 고향..
그리고 그의 안식처 피게레츠!
스페인의 유명 화가로는 고야,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를 꼽습니다..
차세대로는 입체파로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 야수파 화가인 호안 미로를 손꼽습니다.
모두 세기를 빛낸 화가들.
아니죠!
유럽의 스토리 텔링을 빛낸 화가들..
삶의 이야기들이 영화, 소설로 다뤄졌지만 그중 달리와 갈라의 사랑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달리가 나고 죽은 스페인 피게레스에는 ‘달리 극장 미술관’이 있죠!
달리 극장 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 도심을 걷다 보면 피카소, 후안 미로, 그리고 콧수염을 기르고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올 백으로 넘기고 가운데 가르마를 탄, 독특한 모습의 달리를 흔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한번 보면 절대 잊히지 않는 스타일을 가진 달리..
바르셀로나 마지막 여정은 달리로 정합니다!
피게레스(Figuere) 단순히 그와 호흡하기 위해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를 만나기 위해서~~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나 주의 피게레스는 달리의 고향이며 히로나에서 단지 렌페로 2정거장 거리에 있습니다.
오는 길에 히로나도 잠깐!
히로나에는 성 페레 교회(Esglesia de Sant Pere)가 눈길을 끈다고 하는데 그냥 멀리 눈팅만.. 9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진 교회로 펠리페 5세와 왕비 마리아가 결혼식(1701년)을 올린 곳이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이 교회는 불타 거의 파괴되어 역사적 기록들도 많이 사라졌다.
이후 1941년~1948년 네오고딕 스타일로 재건축되었다.
교회는 달리와도 무관치 않다. 그는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장례식도 치렀다.
오래전 이 교회 바로 맞은편에는 피게레스 공립 극장이 있었는데 스페인 내전 때 불타버렸다.
극장 재건 당시 피게레스 시장은 달리에게 전시실을 하나 마련해 줄 테니 작품을 기증해 달라 제안한다.
당시 달리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극장 옆에 있는 탑(토레 갈라테아)에 살고 있었다.
달리는 본인의 작품 전체를 기증하겠다고 말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74년에 ‘달리 극장박물관’이 오픈하게 된 것이다.
박물관이 완공되기까지 달리는 전시실 전부의 내용에 관여했다.
살기까지 했다.
갈라 달리 재단의 소장품을 전시할 공간의 필요성에 의해 점차 박물관이 확장되어 현재는 두 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 형태가 되었다. 달리가 살던 집의 탑도 달리 극장 박물관의 일부가 되었다.
내키지 않아하는(..ㅎ) 일행들과 극장 입성!
박물관 입구부터 달리의 기괴한 창조성이 비친다. 건물의 붉은 빛과 지붕 위의 달걀 모양이 시선을 끈다. 그래서 ‘계란의 집’이라고도 부른다.
건물 벽에는 피게레스의 전통 빵 모양이 붙어 있다.
박물관 건물 속 야외 공간에는 대부의 알카포네의 캐딜락과 고기잡이 배가 놓여 있고 쇠줄에 감싸인 큰 여인상이 있으며 담장이 넝쿨이 올라간 사이사이로 눈코입이 없는 금색의 나녀상이 마치 영화 ‘오스카 상’을 시상하는 모습을보여준다.
캐딜락 몸체에는 거대 여인상이 비치고 깨진 차 유리 안으로는 잘생긴 남자 운전자 디오라마가 있다.
그 어떤 것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창조적이다.
달리 시각의 ‘링컨(1977년)’ 작품은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나녀 갈라의 뒷모습을 놓치게 됩니다!
반드시 핸펀 화면으로~~
‘바람의 궁전’의 작품들 또한 경이롭다. 달리의 유명 작품인 ‘기억의 고집(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년)’은 물론 그가 53년간이나 해로했던 갈라의 모습이 아주 많다.
1930년대에 세계적 섹스 심벌이었던 여배우 메이 웨스트의 입술을 본떠 만든 ‘메이 웨스트 입술 소파’(Mae West lips sofa,)라는 작품은 차라리 경이롭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사각 틀 액자 안에 얌전하게 있지 않다. 정형화를 거부하고 있다.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달리.
작품들은 커다란 명성을 얻었고, 기벽들은 전설이 되었다.
살아 생전부터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 자화자찬했으며 최고의 그림 값을 받으며 뽀시라운 생을 누리고 살았다.
살바도르(Salvador, 구원자) 달리(1904~1989)는 피게레스에서 공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달리는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입체주의를 실험하고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모임에 참가했다.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친구가 되었다.
부뉴엘과는 크게 논란이 되었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한번은 접하기를 권합니다!
시인 로르카와 동성 연인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리틀 애쉬(Little Ashes, 2008)가 있다.
로르카는 달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그것은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달리는 이후 파리로 여행을 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41년에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다.
달리는 뉴욕에서 영화, 연극,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히치콕 감독이 만든 '스펠바운드'(1945)에서는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별 흥미는 없는 영화..ㅎ
달리와 갈라.
달리 인생의 영원한 뮤즈, 갈라!
달리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인이 갈라(Gala)다.
갈라의 본명은 엘레나 디미트리예브나 디아코노바(1894∼1982)로 볼가강 근처에서 태어난 슬라브계 여인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예술인 폴 엘뤼아르(1895∼1952)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슬하에 세실이라는 딸을 두었다.
갈라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아이 돌보는 것을 싫어했고 거기에 남편의 동료인 독일 출신 화가 막스 에른스트(1891∼1976)과는 불륜관계였다.
엘뤼아르를 따라 스페인에 갔다가 젊은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게 되었다.
스물다섯 살 달리는 카다케스(Cadaques) 해변에서 반라(半裸)의 갈라를 보고 홀딱 반했다.
갈라는 달리보다 10살 연상에 유부녀였다.
둘은 파리 전시회에서 야반 도주~~
긴 이야기가 있지만 그 둘은 53년간을 해로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였다. “나는 갈라를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피카소보다도, 심지어 돈보다도 더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달리의 뮤즈였지만 달리와 살면서도 갈라의 바람기는 여전했고 그녀의 기행으로 달리는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갈라가 죽은후에는 의욕을 잃어 거의 창작하지 않은것으로~~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나 2017년 한 여인이 딸이 달리는 자식이라는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 달리의 무덤은 28년만에 열리기도..
DNA 검사결과가 일치하지 않으며 무혐의 판정..
달리의 시신은 피게레스 극장 미술관 제7전시실에 있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달리가 갈라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카다케스 바닷가에서 낙조까지 본다면 더 행복한 여행이 될 것이다.
이런 스토리에 낙조는 아니라도 카다케스 해변과 히로나까지 방문..
별 관심있게 생각하지 않던 달리..
바르셀로나!
그의 삶과 예술이 궁금하여 고향 피게레츠를 여행하면서 찾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