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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같은 제사장과 성경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의 세상을 모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우물 안이 그들의 세계이며 전부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하늘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하늘 밑에 있는 다른 세상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물 밖의 세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대별하여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등이 있고 개신교에는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하나님의 성회 등 교파가 무수히 많고 각 교파에는 또한 교단이라는 것들이 있어서 각기 우물 안의 제도교회로 존재합니다. 이로 인하여 그 우물의 테두리 속에 거하는 자는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부모나 친지가 천주교 신도였다면 대부분 천주교를 믿게 되고 개신교 신자라면 거의 개신교 신자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후 믿는 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러한 현실이 곧 우물 안의 개구리를 양산하게 되고 그들은 모두 밀턴이 말한 ‘맹목적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유일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처음부터 분파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고전 1:12-13) 이는 분쟁으로 분파된 제도교회의 우물에 갇혀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그 우물을 벗어날 때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성경(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 후에 분파된 교회들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한 분이신 성령을 믿는 자들이 왜 우리는 정통이고 너희는 비정통이라고 합니까? 성경 어디에 너희가 분파되어 믿어도 상관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전에 구원 받아 칭의 된 죄인이 의인이 되었으니까 자기 소견대로 자기 당, 자기 파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해도 무방하다고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 12:48-50) 혈육이라는 우물에 갇혀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물 밖의 하나님의 나라를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혈육이나 분파된 제도교회 또는 그 밖의 인위적인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 곧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주 안에서 다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동서고금,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만민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물 밖의 세상을 보려는 관심이나 열심이 없을까요? 왜 자신을 부인하지 못할까요? 이는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질문입니다. 영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관심과 열심이 없이 그저 자기 시인 곧 육의 삶을 위한 하나의 종교나 취미로 또는 형통과 평안을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나아가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령 관심과 열심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열심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우물 안의 독선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곧 우물을 벗어나는 현명한 길입니다. 바울에게든, 아볼로에게든, 게바에게든 하나님만 믿으면 될게 아니냐는 변명은 별 수 없이 자기 우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집에 불과합니다.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유감스럽게도 부르심을 받은, 택함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니 스스로 거부하고 기독교 역사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하는 역사임을 망각하고 그 역사 속에서 파생되고 정의된 신앙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역사가 조작한 제도교회나 성직자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무조건 그것이 온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단을 분별하기 위한 신학이니 교리니 하면서 이성적인 학문으로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수하면서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모여 교파를 만들고, 그래서 서로 반목하고 분쟁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 세계 기독교 역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인간적인 지식으로 요약하고 정의한 무슨 론, 무슨 설, 무슨 주의 등을 놓고 이것이 옳다거나 저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분쟁의 원인이었기에 분파에 의한 우물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롬 16:17-18) 그리스도인이라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날 수 있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부단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바른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하려면 우물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우물 밖의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물을 탈출하는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을 모두 백지화 하고 그리고 제도교회의 설교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성경을 직접 읽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1-12)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이며 복음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가 제도교회의 설교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제도교회의 교인일 뿐입니다. 더욱이 설교를 들음만으로 자신의 평안과 은혜를 갈구하면서 여기저기 소문난 설교자를 찾아 헤매는 교인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덮어놓고 설교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시의 강단설교는 반론이나 토론이 불가능하므로 독선적이고 일방적일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받은 선포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대언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을 성도의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마치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로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백성을, 택하신 족속으로 삼으시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벧전 2:9)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택함을 입은 백성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물며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히 4“12)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 살아서 역사합니다. 어느 특정인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만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렘 17:9) 이라고 했습니다. 설교란 기록된 그대로 전하지 않는 이상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으로 가감하여 인용될 여지가 큽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3서 2절을 근거로 하는 ‘삼박자 구원론’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의 형통한 삶을 위하여, 특정교회의 부흥성장을 위하여 성경의 한 부분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는 것입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목회에 불리하거나 실행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 말씀은 성도들에게 매우 유익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본문으로 채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에게 그 말씀이 전달되지 못하므로 성경을 읽지 않는 교인은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존재하는 것조차 모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고 교회가 타락하여 지탄을 받는 것은 성경의 참 뜻을 왜곡하는 설교자의 잘못된 복음전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퇴한 모 목사님이 변질된 복음을 성도들에게 설교해 왔음을 고백한 사실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변질된 복음이란 복음을 부정하거나 변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부귀공명과 무병장수를 위한 복음으로 그리고 제도교회의 교세 확장을 위한 복음으로 이용해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배만 섬기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변질된 복음의 오류를 깨닫고 돌아설 수 있는 길이 곧 성경을 직접 읽는 것입니다. 설교를 지속적으로 듣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여 요한계시록이나 기타 예언서와 같은 난해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치고 설교자들은 그러한 예언서를 모두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까? 과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교회에서 성경은 교인들에게 읽혀지지 않았고 성직자들만의 전유물로 존재했었기에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던 것입니다.
난해한 말씀을 미끼로 자신들은 마치 그 뜻을 모두 알고 있는 양 설교를 들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다고 교인들을 기만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이단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난해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만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명쾌하게 해석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영감으로 바른 신앙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이는 방언기도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방언기도를 못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요한계시록과 같은 난해한 말씀은 구원을 얻기에 필수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말씀으로는 복음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된 비밀’ 로 보고도 듣고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 6:9-10) 그러나 그것은 설교의 당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욕심으로 죄악에 빠져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불신자들과 거짓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뿐입니다. 사망의 원인인 욕심을 버리고 (약 1:15)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선다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의 문은 열리고 누구나 차별 없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교역자들 보기에 민망스럽습니까? 직분 값을 하려고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회에 참석하십니까? 체면을 지키려고 십일조와 절기헌금을 하십니까? 각종 기도회, 예배에 참석하고 각종 제목헌금을 드린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진다면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벌써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어도 열 번, 백 번, 아니 천 번이라도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거지 나사로도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낙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말씀들이 무엇을 예표하고 상징 하겠습니까? 거동조차 못하고 누워 있던 나사로가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들을 얼마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의 강도 역시 새벽기도를 날마다 열심히 드렸을까요? 그들이 무슨 선한 일을 했을까요? 아니면 주일마다 설교를 들었을까요? 복음의 핵심은 선이나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자, 목회자, 선교사 등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으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거지 나사로와 십자가의 강도와 같이 우물 밖의 순수한 회개와 믿음이 선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천국에서 큰 자는 우물을 벗어난 자 또는 우물에 갇히지 아니한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행함과 나의 의로 십자가의 보혈을 헛되이 한다면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순진한 자들에게 거침이 된다면 그 믿음은 없는 것만도, 그 하나님의 일은 하지 아니함만도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7)
그렇다고 기도나 예배나 헌금이나 봉사, 전도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성을 다 해 열심히 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지시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이 되거나 하나님의 마당만 밟아 더럽히는 헛된 일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 1:10-17) 주여 주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 7:21-23) 아울러 설교자의 변질된 말씀으로 형이상적인 은혜에 취하거나 헌금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대가성 반대급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하고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위상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매스콤에서의 독자의 소리나 인터넷 사이트에서의 교인들의 외침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제도교회의 가시적인 잘못된 현실과 교인들의 사회적인 부정적 삶을 보고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분들은 성경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으며 무슨 내용을 설교 했다는 말입니까? 날마다 새벽기도까지 드리면서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는 그 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깨달았다는 고백이 왜 그다지도 듣기가 어려울까요?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쳤을까요?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평신도나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니 그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곧 우물 안의 삶이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진실과 공평과 정의의 외침이 언론과 전자매체를 타고 시공을 초월하여 하수같이 온 땅에 흘러넘치니 비록 극히 작은 자들의 외침일망정 듣지 않으려 해도 듣지 않을 수 없고 삭제하고 묵살할 수 없음으로 별 수 없이 두 손 들고 베일을 벗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우물 밖에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교계의 기득권자들의 서투른 저항이 보기에 너무나도 민망스럽습니다. 그 한 예로 교회에서 성경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교회의 부흥과 화목을 허무는 행위라고 하면서 우물의 벽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제도교회라는 우물 안의 신앙에 만족하고 안주한 탓입니다. 우물 안에서 보는 성경과 우물 밖에서 보는 성경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물 안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입니까? 재물인가 명예인가 권세인가 능력인가 대형교회인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한 구함이요 찾음이요 두드림이어야 합니다. (렘 33:3)
필자가 잘 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필자는 그에게 신앙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는 교인이 된 지 수 년여 만에 맹목적 신앙에 회의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알거나 모르거나 무조건 읽어 나갔습니다. 한 자도 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했습니다. 주일예배를 제외한 각종 기도회나 예배를 유보하고 그 시간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모든 휴일은 불가피한 약속이 없는 한 성경을 읽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국한문으로 된 관주성경을 주로 보면서 관련 구절을 낱낱이 비교하면서 읽었습니다. 참고로 공동번역성경, 현대인의성경, 킹제임스성경 등을 위시하여 일문, 중문, 영문 등 외국어 성경도 구입했습니다. 원어신약성경도 구입했습니다. 구입한 모든 성경을 난해한 구절들을 비교하면서 정독을 했습니다. 완전히 성경에 미쳐 버린 것입니다. 그 뒤 수년 만에 구입한 모든 성경을 완독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의 주요 교재들도 일독을 했습니다. 아울러 기독교 강요, 어거스틴의 참회록, 천로역정, 팡세 등 기독교 관련 서적 등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지식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안다’ ‘나는 배웠다’ 라는 교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잊고 마음의 부요에 만족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다만 율법과 같은 차원에서 유익이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 3:20, 갈 3:24) 따라서 바울의 고심과 고백들을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전 2:2, 고전 10:27, 갈 1:11-12, 빌 3:8)
그는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한글 개역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구의 설교나 강해나 주석서나 참고서 등에서 제도교회의 왜곡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또는 그 누구의 권고나 간증을 듣고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꾸준히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직접 구하고 찾고 두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2-14) 고 했는데 언감생심 나 같은 위인이 성경 몇 번 읽었다고 무엇을 알겠으며 오직 계속해서 나 자신은 성경을 읽을 것이며 또 이웃에게는 읽으라고 꾸준히 권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학자나 유명 인사를 찾아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전할 것을 부탁하지 않으셨음에 유의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도 유식했기에 주님께서는 일단 그를 거꾸러뜨린 다음 말씀을 주셨음을 깨닫고 자신의 우물 곧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세상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으니 (빌 3:8) 그 고통이 차라리 처음부터 무식했던 것보다 못했으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인위적으로 변개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하나님의 섭리로 사어(死語)인 고대 헬라어(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나 영어는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신조어도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물 안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오역될 수 있는 여지를 모든 번역 성경은 항상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물 안의 목회자들에 의해 그 번역 성경으로 복음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어 성경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원어를 배워서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원어 성경을 강해하시는 목사님이나 교수님들의 글이나 강의를 참고하면서 성경을 읽는다 해도 바른 신앙관을 확립함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한 성경 원어는 그 당시 서민대중이 사용하던 구어인 코이네 헬라어로서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어휘가 아니므로 말씀을 이해함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성경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송이꿀보다 달다는 말씀의 진미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시 19:10)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베드로 사도가 천명한 왕 같은 제장으로서의 거룩한 성도가 되는 길입니다. 우물을 벗어나 스스로 깨닫기를 주님께 간절히 간구하면서 성경을 정독하십시오. 넘치도록 후히 깨닫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약 1:5, 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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