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章 떨어지는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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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
다.
강은 고통이 없어 보여서 좋다.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흐르고 있지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강은 취미가 없다. 있다면 오로지 꾸준히 흐르는 일상뿐이
다.
한광은 짬이 날 때마다 강가를 찾는다.
술은 가져오지 않는다. 술은 정신이 나약한 인간들이나 찾
는 것이지 않은가. 인간이 만들어낸 음식 중에 가장 쓸모 없
는 것이 바로 술이다.
취해서 횡설수설하고, 토하고, 다음 날이 되면 후회하
고……
기루도 찾지 않는다.
기루에 가면 너무 힘든 인생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을 힘든 세상에서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 참을
길이 없다. 너무, 너무 불쌍해 눈물이 솟구치기까지 한다.
세상에 악(惡)은 너무 깊게 넓게 퍼져있다.
악을 몰아내기에는 너무 힘이 든다.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
다. 세상에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들.
그런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힘없고, 착한 인간들은 고통을
받는다.
한광은 강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 전체는 구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해남도에서만은 악
의 무리들을 응징할 것이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편안하
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리라.
그 때까지가 문제다.
삶에 찌들이고,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본단 말
인가.
그들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편한 세상에서 아늑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강물이 속삭이는 듯 했다.
'힘을 내. 힘들지만 보람이 있잖아. 하늘이 남보다 강한 무
공을 내려준 것은 다 쓸데가 있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불쌍한 사람들은 편히 살 수 있는 극락으로 보내 줘.
그게 할 일이야. 나쁜 놈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한가롭게 쉬
고 있을 틈이 어디 있어? 빨리 빨리 움직여.'
한광은 강한 의무감을 느꼈다.
자신이 극락으로 인도한 사람들처럼 강물도 숭고한 마음을
알아주니 얼마나 좋은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두 번째로 다가 온 장마다.
투툭! 투투툭……!
빗방울이 제법 굵직하다.
한광은 낚싯대를 버리고 일어섰다.
살림망, 미끼통, 뜰채…… 모두 버렸다.
한광은 옷이 비에 젖는 게 싫었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손상
시키는 기분이 들어서.
한광은 해남파 총관(總管)의 전용마차에 앉아 떨어지는 빗
방울을 감상했다.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끌며, 좁게 앉으면 여섯 명 정도는 능
히 탈 수 있는 마차.
현임 총관인 천애해붕(天涯海鵬) 막과(膜 )는 한광이 자신
의 전용마차를 이용하는 데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천애해붕 막과 역시 남해삽십육검 중 일인이다.
신비에 가려진 비파주와 추운단주, 그리고 가물함 수좌인
하파와 함께 십이가문의 사람이 아니면서 남해삼십육검으로
거명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들 사 인은 활동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이들 사인의 공통점은 해남오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파와
추운단은 뇌공검 한민이 장문인직을 이어받으면서 신설했으니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비파주는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고, 추운단주 역
시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큰 방갓을 쓰고 다닌다.
그들은 신위를 드러낸 적이 없다.
누구와 겨룬 적도 없고, 하다못해 무예가 완숙하지 못한 수
련총 무인들과 비무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들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직위만으로 남해삼십육검 중
한 명으로 지칭되었다. 비파주나 추운단주는 적어도 해남오지
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니지 않고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자
리니까.
하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파는 장문인이 소주자사 황병의 딸인 황난영(黃蘭英)을
아내로 맞아들일 때, 그녀를 따라온 시종무인에 불과했다.
곳간지기에서 가물함 수좌에 오르기까지는 불과 삼 년.
그 삼 년이란 기간동안 하파는 해남도(海南島) 제일지자(第
一智者)라는 말을 얻어냈다.
무공 역시 탁월할 것이라는 후문은 그 다음에 들리기 시작
했다.
해남파 모든 재력(財力)을 관리하는 하파.
그에 대한 암살 기도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
그는 근 마흔 번에 달하는 암살 기도를 무난히 견뎌냈다.
자칫 한 순간이라도 방심했었다면 목숨이 서너 개 된다해도
모자랐을 사람.
뛰어난 무공을 익혔으리라는 짐작은 그래서 생겼고, 하파는
삼십육검 중 일인이 되었다.
막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비파주나 추우단주처럼 과거가 불투명한 사람도 아니
고, 하파처럼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도 아니다. 막과는 해남도
사람이다. 한인인 것도 틀림없다.
십이가문에 속하지 못한 한인.
강제로 해남도에 이주된 한인들 중에는 십이가처럼 굳건한
터를 마련한 사람들도 있지만, 적응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 중 절반은 다시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
은 십이가에 기생하며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막과는 수련총 무인들의 희망이다.
십이가 사람이 아니면서 무공을 부지런히 닦으면 총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니까.
그러나 안으로 파고들어 실상을 살펴보면 껍데기에 불과하
다는 것을 알게 될 게다.
막과가 총관에 오른 것은 뛰어난 무공도 한 몫을 했지만 운
도 상당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십일대 해남오지인 강성오가의 가주들.
그들 중 수굴일지는 뇌공검 한민이었다. 당연히 뇌공검 한
민이 총관의 위(位)를 이어받았다.
뇌공검이 총관으로 있은 지, 겨우 석 달만에 전임 장문인이
장문인직을 내놓았다.
쉬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기는 정정하다고는 하지만 이미 구십이 넘은 노인이 해남
파를 이끌기에는 무리였으리라.
뇌공검 한민은 장문인직을 이어받았고…… 총관은 공석이
되고 말았다.
전례에 따르면 십일 대 해남오지 중 다른 네 명중에서 한
명이 총관직을 이어받아야 한다. 허나 그 때는 이미 다른 네
사람도 각기 자신의 가문을 이어받은 후였다.
차기 방법으로 십이대 해남오지 중에서 총관을 선출하자는
안도 나왔지만 거기에는 각 가문의 이해타산이 곁들여있어 실
현되기 어려웠다.
한민은 수련총 무인 중에서 무공이 강하면서도 십이가에 속
하지 않은 무인을 골랐다.
그가 바로 천애해붕 막과다.
막과가 총관으로 임명된 배경이 그러했던 만큼, 그가 총관
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았다. 극
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신껏 결정 내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 들어 막과는 유소청과 함께 수련총 무인들을 지도하면
서 세월을 보내는 모양이다.
그에게는 오히려 그게 속 편할 것이다.
건곤검 한혁이 수굴일지로 확정되고, 차기 총관으로 내정된
이상 그는 거의 이십 년 동안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더 이상 짊어지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결단을 내리셨습니까?"
맞은 편에 앉아있던 하파가 조용한 음색으로 물어왔다.
한광은 시선을 마차 창문 너머에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
였다.
"해남오지 중 두 명의 임용이 불확실해졌습니다. 청혼검 전
혈은 행방을 모르고, 취옥검 유소청은 적엽명과 연관되어
서……"
"하파."
"예, 말씀하시지요."
"그대는 적엽명이 명부객일 것 같다고 말했지?"
"네."
"연서까지 받아내면서 적엽명을 명부객으로 몰아붙였는데?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적엽명이 해남도를 벗어난 직후 적수노
인 밑으로 들어갔다고 말한 것 같은데?"
"……"
"말해 봐. 왜 그런 거짓말을 했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
"한 가지는 황담색마의 종부비법을 알아낸 것입니다."
한광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하파…… 이 자는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착한 인간도 아닌
것 같다. 어쩐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나쁜 인간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자고로 머리가 뛰어난 자치고 정신이 제
대로 박힌 인간은 별로 없다더니만. 그러면 죽여야 하나? 강
물이 말한 대로 지옥으로 보낼 인간인가?
한광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파는 계속 말을 이었다.
"또 하나는 진짜 명부객이 활동할 수 있게끔 틀을 마련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물어보려고 했다. 진짜 명부객이 누구인가?"
"이미 죽었습니다."
"뭣!"
"우화의 아들인 탕. 그가 바로 명부객입니다."
"우화의 아들이라고 했나?"
"네."
"그렇다면 우화가 누군지도 알고 있단 이야기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비파의 눈은 해남도 전역을
두루 살피고 있으니까요."
한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에게는 간도 쓸개도 모두 내준 것 같았던 하파, 하지만
그는 숨기고 있는 게 너무 많다. 역시…… 믿을 수 없는 작자
다.
"그런가? 후후! 그렇다면 석두는 개죽음을 당했군."
"아닙니다."
"……"
"제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해서 알아봤습니다
만 적엽명에 관해서는 조금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해남도를 떠
난 다음, 마치 땅속으로 푹 꺼진 듯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전
혀 냄새를 맡을 수 없었죠. 그래서……"
"그래서 석두에게 비무를 지시했다?"
"지시가 아니라 협조였습니다."
"위협이었겠지."
"하파, 네가 동원하는 사람들…… 역시 비파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가물함 수좌이며 비파주이기도 합니다."
"후후후! 남해삼십육검이 아니라 삼십오검이었군. 아니면
이검을 혼자 당적할 수 있거나. 그런가? 이검을 혼자 당해 낼
수 있나?"
"사람들은 왕왕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십오검이 아니라 삼십사검입니다. 저는 무공을 모
르니까요."
"무공을 모른다?"
"시험해 보셔도 좋습니다."
시험할 것도 없다. 하파도 무공을 익히고 있지만 그것은 어
린아이 장난과도 같은 것이다. 한광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그는 탈혼검을 익힌 다음부터 상대의 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
이 생겼다. 적엽명이나 아버지, 또는 건곤검 한혁에게서는 무
시하지 못할 기운이 풍긴다. 하지만 하파, 이 자는 아니다.
"지금 나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이유가 뭔가?"
"이제 소공께서 움직일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하파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소공께서는……"
하파는 정교하게 그려진 지도 한 장을 꺼내놓고 앞으로 한
광이 할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광은…… 하파에 대한 생각을 차후로 미뤘다. 세상에 살
아남아도 괜찮을 사람인지, 아니면 착한 사람을 위해 세상에
서 도태되어야 될 인간인지에 대한 판단을.
한광은 느긋한 마음으로 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여름 산을 즐겨 찾는 편이 아니었다. 새끼손가락 마디
만하게 자란 모기와 여름 벌레들이 귀찮게 달려들어 짜증스럽
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은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지만, 그래서 하얀 무복을 흠씬
적시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는 하파가 말해준 일
을 처리하는 것이 시급했다.
삼목(杉木)으로 이루어진 숲이 나타났다.
하파가 일러준 대로라면 목적지는 멀지 않다.
한광이 삼목림으로 발길을 떼어놓았을 때,
슈욱!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검공이 하늘
에서 떨어져 내렸다.
날카롭다? 풋내기들이 어설프게 휘두르는 검에도 그런 말을
붙여 주어야 하나?
휘익! 퍼억! 우둑!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인형은 곧게 차올린 진천각에 뼈마디
부서지는 소리를 남기고 멀찌감치 나뒹굴었다. 왼쪽 갈비뼈가
모두 부서졌으리라. 그리고 부서진 갈비뼈는 비수로 변해 심
장을 찔렀으리라. 진천각에 옆구리를 강타 당한 인간들은 한
결같이 그런 증세로 죽는다.
'이제 겨우 둘인가?'
한광은 수를 세면서 즐거운 표정을 떠올렸다.
개는 맹수가 아니다. 개의 조상이 늑대라고는 하지만 인간
에게 길들여진 이상 꼬리를 흔들면서 재롱을 피우거나 주인이
시키는 대로 집이나 잘 지키면 그만이다. 돼지도 맹수가 아니
다. 멧돼지는 선 자리에서 일 장을 도약한다고 하지만 비곗살
이 디룩디룩 찐 집돼지는 한 자도 뛰지 못한다.
그게 정상이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은 맹수처럼 길길이
날뛰어서는 안 된다.
여족인들.
그놈들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이나 다를 바 없다. 사람
탈을 쓰고 태어났다고 모두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한인은 부
리기 위해서 태어났고, 여족인들은 부림을 당하기 위해서 태
어났다. 그게 본분이다. 본분을 거슬리는 놈들은……
슈우욱……!
우스운 놈들. 어디서 기습하는 법은 배워 가지고 제법 흉내
는 낸다만은.
퍼억! 우둑!
"셋."
한광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번에 기습한 자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가축을 잡을 때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바로 비명소리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돼지 멱따는 소리는 정말 듣기 싫다. 돼지
란 놈은 몽둥이로 두들겨서 혼절을 시켜놓아도 칼만 들이대면
금방 제정신을 찾아버린다. 그리고 듣기 싫은 비명을 질러댄
다.
한광은 즐겼다.
언제까지 비명소리를 듣지 않고 죽일 수 있는지.
산 정상은 의외로 밋밋했다.
오지산에서 바라본 여모봉은 웅휘로운 느낌을 주었는데 막
상 올라와보니 바위가 삭으면서 만들어놓은 굵은 모래로 가득
했다.
한광은 오지봉을 넘어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걸어갔다.
하파는 어떻게 이토록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지도에서 본 여모봉과 실제 와 본 여모봉은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절벽 밑을 쳐다보자 두 장 아래쯤에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그곳이 동굴입구다. 언뜻 내려다보기에는 겨우 사람 한 명
정도 올라설 만한 바위지만 실제로 내려가 보면 의외로 넓어
서 장정 서너 명은 둘러앉을 수 있다고 했다.
한광은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쉬익!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날카로운 검이 날아온다.
이번에는 날카롭다는 말을 적용시켜도 좋을 만한 검이다.
피윳! 피윳……!
한광은 다리를 가슴까지 바짝 오므려 몸을 둥글게 말았다.
검날은 다리 아래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상대도 이 정도
는 생각했다는 듯 연속적인 검공을 퍼부어 온다.
한광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상대가 사용하는 검은 해남파 정통검이다.
초식이 대범하고 장중하다. 검에 깃든 힘은 세상을 반으로
갈라버릴 듯 강하다.
스릉!
드디어 여모봉에 발을 디딘 후 처음으로 유살검의 시퍼런
검광이 빛을 뿜어냈다.
상대는 기습이 실패하고 연속적인 공격에도 득을 보지 못하
자 두 걸음을 물러서서 진기를 다시 조절했다.
이제는 검대검이다.
"점심은 먹었나?"
상대는 뜻밖의 질문을 받고 눈썹을 곤두세웠다.
"무슨 뜻이냐?"
"안 먹었으면 내가 차려주려고."
상대의 눈에 노기(怒氣)가 떠올랐다. 그럴수록 한광은 진하
게 웃었다. 입은 그대로이되 눈으로만 웃는 비웃음이었다.
"한광, 너의 무명은 익히 들었다. 하지만 오늘로써……"
"개미를 좋아하나, 아니면 쌀벌레를 좋아하나? 좋아하는 것
을 말하지 그래."
밥을 차려주는 것은 어릴 적에 한 번씩은 해본 놀이다. 한
인이든 여족인이든 한 번씩은 해봤다. 한족 아이들은 여족 아
이들을 잡아 놓고 개미나 쌀벌레를 먹이곤 했다. 그런 장난을
해도 야단치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장난을 당한 아이의 부
모는 눈을 부라릴 뿐 큰소리 한 마디 치지 못하고 우는 아이
를 데리고 사라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광의 말을 들은 상대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는 냉정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한광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동공이 위로 치켜올려지고 하얀 눈자위만 요악스럽게 빛났다.
검끝도 미미하게 떨렸다. 처음에는 단지 흔들리는 정도였는
데 이상한 소리가 이어질수록 확연하게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억!"
상대는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분명히 당황한 것 같았다. 모욕을 듣고도 냉철하게 유
지하던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으리라.
"바마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
검이 날았다.
여족인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가 휘두른
검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을 치고 말았다.
"끄륵!"
답답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이미 널찍한 바위에 드러누운 그는 간질병에 걸린 사람처럼
사지를 떨었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위를 촉촉이 적셨다.
동굴은 개미굴처럼 복잡하다.
모두 사람 손으로 만든 동굴이다. 그리고 보니 벌레도 기는
재주는 있는 모양이다. 이만한 동굴을 만들 수 있다니.
한광은 솔직히 감탄했다.
만약 하파에게서 상세한 말을 듣지 못했다면 미로(迷路)나
다름없는 동굴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고 있으리라.
'하파……'
감탄이 더해갈수록 하파에 대한 의심도 굳어졌다.
그는 이미 동굴에 와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눈으로 보고 그린 듯한 지도를 어떻게 만들 수 있으
랴.
한광이 막 큼지막한 바위를 돌아설 때였다.
슈욱!
바위 뒤에서 검이 날아왔다.
이번에 공격한 자도 정통검을 익혔다. 제대로 배운 무공이
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 초식을 이어가는 면은
부드럽지만 세기(細技)를 정확히 표출하지 못하고 있다.
검보(劍譜)다. 검보로 익힌 무공이다. 사부가 있어 직접 사
사(師事) 받았다면 초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표현해 냈
으리라. 그렇다면 위력 또한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달라졌겠
지.
한광은 저녁 노을 속을 나는 해오라기처럼 날아올랐다.
해오라기는 두 자 정도 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새다. 등
은 흑색, 날개는 회색, 배는 백색. 뚱뚱하고 다리가 짧으며
부리 또한 무뎌서 아름답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는 이 볼품 없는 새의 이름을 따서 검법을 만들
었다.
적노검법 팔 초식.
한가에서 최초로 만들어낸 검법명이다.
야행성인 해오라기처럼 조용하며, 볼품은 없지만 실용적인
면이 무척 강해서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해오라기와 비슷하다
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한광은 적노검법에 집요하리 만치 집착했다.
적엽명에게 패한 검법이기 때문이다.
적엽명을 처음 만났을 때 적노검법을 펼치려고 했다. 적엽
명에게 패한 적노검법으로 그를 눌러주려고 했다. 적엽명이
전검을 익힌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탈혼검을 가다듬을 생각조
차 하지 않았을 게다.
한광은 적노검법 하나만으로 해남오지가 되었다. 적노검법
만으로 남해삼십육검 중 일인이 되었다. 적노검법으로 유살검
이라는 무명을 얻었다. 이까짓 설익은 검법은 비린내만 날 뿐
이다.
파앗!
섬광이 번뜩인 순간, 검을 쳐오던 자의 머리는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곧이어 피가 솟구쳤지만 이미 몸을 피해버린 한광
은 무심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적을 바라볼 뿐이다. 검은 고사
하고 사방으로 흩뿌려진 피보라조차 그의 몸을 건드리지 못했
다.
'대력검이다!'
한광은 세 번째 공격을 받은 다음에야 여족인들이 사용하는
검법을 알아보았다.
강성오가의 검공 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중오가나 약이가의 검공은 멸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현임 가주들은 그런 대로 흉내를 내는 편이지만 그의 자
손이란 작자들은 가전검공조차 제대로 익힌 놈이 없다.
정화방이라는 기루를 차리고 있는 박가주 박홍.
그 놈도 죽일 놈이다.
연약한 계집들 골육을 파먹고 살고 있으니, 옥로진인이란
엉터리 도인에게 대력검보를 빼앗기지. 병신 같은 놈. 자신의
가전검공이 벌레들 손에 들어와 있는 줄도 모르고.
우화대원이 사용하는 무공을 알아본 한광은 거침없이 쳐나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화는 한 사람이 아니다. 연꽃을 없앨 수 있겠는가. 바람
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대의 우화야. 그것만 대답해."
"우화는 한 사람이 아니다. 여족인의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
이라면 모두 우화지."
"그럼 모두 죽이면 되겠군."
"뭐라고!"
"놀랬나?"
"……"
아래턱까지 구레나룻을 기른 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광이 들고 있는 검에서는 진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뿐
만 아니다. 동굴 전체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대력검을 익힌 대원은 모두 스무 명이다.
그 이상의 기재를 구한다는 것은 우화에게도 무리였다. 무
엇보다 무공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없어 무골(武骨)을 지닌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지 못했다.
몸이 빠르다. 달리기를 잘 한다. 싸움을 잘 한다. 몸이 유
연한 것 같다.
스무 명의 기재를 고른 기준이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대력검을 익혔고, 무공을 익힌 다음 사람을 보는 눈
또한 달라졌다.
대력검을 익힌 스무 명의 대원들은 진짜 무골을 찾아냈다.
상승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뛰어난 근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골도 근골이지만 고된 수련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력과 초식의 미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도 빼
놓을 수 없는 요소다.
오성(悟性)이 뛰어나면 더욱 좋다.
대력검을 익힌 대원들이 찾아낸 기재는 모두 서른 한 명.
그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피나는 수련을 거듭하고 있
으리라. 그들의 공동 사부격인 열 명의 대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이 되어 혹독하게 다그치고 있으리라.
다른 열 명은 우화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들
은 지금 동굴 여기저기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것도 이제 갓 해남오지가 된 풋
내기에게.
아아! 이런 줄도 모르고 대력검을 얻었다고 좋아했다니. 해
남파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니.
우화가 인상을 찡그린 것은 스스로 자신을 질책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한광에게는 자신의 말이 당돌해서 기분 나빠하
는 것처럼 비쳐졌다.
"구레나룻, 네모진 턱, 호목…… 맞아, 네가 우화야."
한광은 유살검을 크게 흔들었다.
검에 묻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퉁겨졌다.
유살검은 요약했다. 피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른다는 듯 맑
고 시린 광채를 뿜어냈다.
"검을 뽑아. 안 뽑을 거야?"
"허허허! 죽이려고 찾아왔으니 죽이면 될 것이 아닌가? 내
가 검을 뽑지 않는다면 죽이지 않을 텐가?"
"하하하! 장난이 심하군."
"무지한 자 같으니…… 자존을 외치는데 무공을 익히고 익
히지 않고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한광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말 뜻밖이다. 우화는 무공을 모른다. 밋밋한 가슴, 가냘
픈 팔,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지만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되
어 있지 않다.
"싱겁게 됐군."
한광은 진기를 풀어버렸다.
마주 선 자가 신룡처럼 구름 속에 감춰진 신비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무공을 몰라서는 흥미가 떨어진다. 그래도 우화라고
하기에 몇 수 잔재간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억울하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해서 여모봉을 올랐단 말인가. 어디서
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데…… 이런 자가 해남파
의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단 말인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나?"
"……"
"이봐, 웃기는 소리 좀 작작해. 사람은 모두 자기 먹을 복
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소리도 못 들었나?"
"여족인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그런 소리를 할 텐가?"
"하하하! 그래서 한인으로 태어난 거야."
"그럼 내세에는 여족인으로 태어나보게."
한광은 말을 나눌수록 죽여야 한다는 강렬한 살념(殺念)이
떠올랐다. 이래야 죽일 맛이 난다. 우화는 자기가 살기를 부
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여기는 우리들의 땅이었네. 누구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었지.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더러운 것을 가지고 들어왔
어. 내 것, 네 것 나누는 것."
"됐어."
"……?"
"이제는 죽일 생각이 들어. 결론은 벌레 주제에 인간과 같
은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 말인데. 어떻게 죽여줄까? 파리 죽
이듯이 때려죽일까, 아니면 개미 죽이듯이 밟아 죽일까?"
"허허허! 해남파에 살성(殺星)이 나타났군."
"살성? 하하하! 정말 맘에 드는 소리야."
한광은 성큼성큼 다가섰다.
우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
다고 대항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
로 태연하게 서있을 뿐이다.
휘익! 퍼억!
주먹이 복부를 가격했다.
우화는 배를 움켜잡고 풀썩 꼬꾸라졌다.
한광은 발뒤꿈치로 우화의 등을 찍어 찼다.
퍼억!
우화는 격한 신음을 토하며 무너졌다.
한광은 목을 발로 밟고 지긋이 눌렀다.
"컥! 컥……!"
우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붉은 얼굴은 곧 거무
죽죽한 색으로 바뀌었다. 눈이 위로 떠지고 입 밖으로 내민
혓바닥을 연신 꿈틀거린다.
한동안 발버둥치던 우화의 몸이 오뉴월 버들가지처럼 축 늘
어졌다.
"벌레는 이렇게 죽는 거야."
한광의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