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1분에 1만원, 100분에 100만원
토요일 오후 1시 중앙대 모의법정실. 어느 건설사 창립 8주년행사가 열리는데, 기념 특강연사로 초청되어 강단에 서다. 제목 ‘생활속의 실천예절’. 지난 4월초 성균관대 첨단강의실에서 실천예절지도사 고급과정을 수료한 100여명 앞에 선 이후 두번째이다. 120여명의 눈망울이 나에게 모아졌다. 자, 이제 나에게 주어진 100분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까? 심호흡을 한다.
가장 먼저 이렇게 강의를 하고 듣는 것도 ‘예를 갖추자’며 모두 일어나게 해 ‘읍’(揖)을 하자고 한다. 원래는 절을 해야 하나 장소상 할 수 없을 경우, 공수(拱手:손끝을 마주 끼는 기본적인 자세)한 상태로 허리를 굽히면 손은 무릎까지 내려가고 그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며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다.
먼저 문상을 가서 위문이랍시고 영전에 절하는 모습들이 천태만상이고 잘못투성이라고 질타했다. 평상시 공수하는 방법은 남자는 왼손이 오른손을 깍지를 껴 감싸는 것이고 여자는 반대이다. 그러나 흉사 때에는 그 반대로 해야 한다. 100일 탈상이후는 흉사가 아니고 길사(吉事)로 치므로 평상시와 같이 하면 된다. 예절에 있어서 방위(方位)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라고 역설했다. 양 손을 합치지 않고 바닥에 짝 펴서 넓죽 절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임금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고두배(叩頭拜)라고 하는 것이므로, 알고 보면 얼마나 꼴불견인지를 말했다. 절하는 방법과 순서를 실습해야 하나 마땅치 않다.
다음으로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의 위치를 말하다. 주례 선생님 좌측(관하객 입장에서)에 신랑이 서야 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가 마치 서양식인 것처럼 알고 그대로 행하는 실례가 비일비재하다. 그 위치는 사자(死者)의 위치이다. 남자는 양(陽)이며 동쪽(東)쪽에 서야 하고 여자는 음(陰)으로 그 반대방향이다. 이는 남존여비의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고 아니고 수천년 내려온 ‘음양오행설’이라는 동양철학의 핵심이다. 신부아버지가 딸을 인도하여 들어올 때의 서는 위치도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또한 드라마에서 쓸데없이 자주 나오는 부부의 침실장면을 보자. 남편이 아내의 오른편에서 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죽은 자의 위치에서 잔다. 방위를 알아야 하는 까닭이 이런 데 있다. 남동여서(男東女西)는 고래(古來)의 진리이다. 부모님께 자식들이 절할 때에도 아버지는 왼쪽에 앉아 절을 받아야 한다.
직장인으로서 ‘고지서 없는 세금’에 시달리는 게 애경사(哀慶事)이다. 경조서식(慶弔書式)에 대해 말하다. 겉봉투 쓰는 요령, 속종이(물목지)쓰는 요령, 하객이나 조문객의 최소한의 마음자세를 표시하는 대표적인 것이 서식일진대, 제대로 올바르게 쓰자고 하다. 먼저 결혼(結婚). 결혼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국혼(國婚)의 경우에 쓰였다. 일반인들의 경우 ‘장가할 혼’ ‘시집갈 인’하여 혼인(婚姻)이라고 했으며 정부의 모든 공식문서에서도 결혼을 혼인으로 쓰고 있다. 따라서 겉봉투 앞면에 앞으론 결혼이라고 쓰지 말자. 문구가 인쇄된 봉투도 지양하고 아무리 바빠도 몇 글자 정도는 손수 쓰도록 하자. 이것은 순전히 성의 문제이다. ‘경하 혼인’ 으로 쓰고 아랫부분에 이름을 쓰자. 이렇게 ‘000 하례(賀禮)’. 속종이를 보자. 다섯 부분으로 접어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빈칸으로 남기자. ‘근축 혼인’이라거나 문구는 굳이 한자로 쓰지 않아도 좋고 한글로 ‘두 분의 앞날에 행복과 발전이 있기 바랍니다’는 등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문구를 쓰자. 축의금을 쓸 때는 아라비아숫자로 하지 않고 대자(大字)로 쓰자(壹, 貳, 參, 伍). 식장에서 기도에서 빈 봉투를 달라며 속종이도 없이 현금만 넣는 실례를 범하지 말자.
조의(弔儀) 서식은 또 어떤가. 겉봉투 앞면에 ‘爲000댁 大夫(大夫人)喪次’라 쓰고 그 밑에 이름을 쓴 후 ‘곡배’(哭拜) 등으로 쓰자. 대부는 남의 아버지이고 대부인은 남의 어머니를 이른다. 속종이에도 ‘삼가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는 등 자기 마음에 우러나오는 표현을 쓰면 된다. 삐죽 얼굴만 비치고 나오는 조문은 실례이다. 초상을 치른 후 고마움을 표시하는 편지에 쓰는 자기에 대한 단어를 보자. ‘고자(孤子) 000’는 아버지가 돌아가셔 안계신 것을 이르고, ‘애자(哀子) 000’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쓴다. ‘고애자(孤哀子)’는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을 때 쓰는 지칭이다. 기쁨에 동참하기는 쉬워도 그 슬픔을 같이 하기는 어렵다. 경사는 부득히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애사는 꼭 참석하도록 하자는 등의 요지의 말을 쏟아내다.
예절이란 “저런 버릇없는 놈”할 때의 ‘버릇’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할 때의 ‘법’을 예절이라 할 수 있다고 하다. 시쳇말로는 “저런 싸가지 없는 친구”할 때의 ‘싸가지’가 예절이 아닐까 한다고 말하다. 우리는 서양의 매너(manner)나 에티켓(etiquette)을 모르면 금세 손가락질을 하면서 정작 우리 전통예절은 도외시하는 ‘이상한’ 풍토가 있다고 질타하다. 자기비하적인 사고방식은 아마도 구한말 때부터 패배주의, 일제시대 식민사관 등에 기인한 것같다고 하다. 예절이란 한마디로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리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생활규범”이라고 말하며, 궁극적으로 스스로 사람다워지려는 자기관리을 뜻하는 수기(修己)와 남과 어울려 함께 사는 대인관계인 치인(治人) 또는 안인(安人)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하다. 누구나 다 아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시작되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유학과 공자에 대하여 말하다. 선비 유(儒)자를 풀이하는데, “사람의 도리(道)리를 익혀(習) 자기 몸에 젖게(濡) 한 뒤에 부드러운(柔) 모습으로 남을 가르쳐서(敎), 마치 하얀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가르침이 젖어들게 하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꼭 있어야 할 사람(需人)”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하다. 공자는 중국에서 성인(聖人)으로서 ‘왕’(王) 대접을 이제껏 받고 있다. 한때 문화혁명시절 박해를 받았으나, 지금은 공자 떠받들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나라도 문묘 대성전에서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석전(釋奠)을 지내고 있다. 맹자, 자사, 안자, 증자등 4현과 공문10철을 비롯하여 주자를 비롯한 송, 명시대 유학자 등과 함께 동국 18현(겨레의 스승)도 배향하고 있다. 유학은 결코 타파할 대상이 아니고 인간의 수양이념으로 더욱 갈고 닦아 현대와 접목이 되어 우리 일상사에 배어들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다. 유학은 고리타분하고 꽉꽉 막혀 공자왈 맹자왈이나 하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맹신하는 종교가 아니다.
25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아주 근사한 문화선진국의 명성을 유지하였다. 오죽하면 공자가 직접 “동이(東夷)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을까. 그 이유가 ‘동이열전’이라는 책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거만하지 않고 풍속이 순후하다. 길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길을 양보했으며(행자양로行者讓路), 밥을 먹을 때 다른 사람에게 밥을 양보했다(식자추반食者推飯).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처지가 달라 같은 자리에 앉았다(남녀이처 이부동석男女異處 而不同席).” 물론 ‘남녀칠세 부동석‘은 시대와 맞지 않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길에서 사람들과 마주치면 먼저 가시라며 길을 양보하고, 밥을 먹을 때 다른 사람에게 먼저 먹으라고 밥을 밀치는 것은 오늘날에도 미풍양속(美風良俗)이 아닌가. 공자의 말씀은 더 이어진다. “소련대련 형제가 부모상을 당해 3년 동안 잘 치렀다”고 했다. 낳고 기르고 가르친 부모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군자의 나라’로 ‘동이’를 꼽으며, 말년에 뗏목을 타고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군자들이 사는 나라가 어찌 비루하고(陋) 누추하겠냐’며 제자들의 걱정을 일축했던 대목도 ‘영원한 고전’ <논어>에 나온다. 또한 대대로 ‘이(夷)’자를 ‘오랑캐’로 해석해 왔는데, 역사적으로 묵과할 수 없는 ‘오역(誤譯) 중의 오역’이라고 핏대를 세우다. ‘설문해자’라는 자전(字典)을 보면 ‘평평할 이, 어진 사람 이’ 등으로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오랑캐 이’로 부득불 훈독(訓讀)을 하며 내려왔을까. 너무너무 한심한 이야기라며 통탄을 하다. 외국인들이 “한국에는 한국이 없다” “동방예의지국의 명성은 어디에 갔는가”라는 의문을 표한다면서 오늘날 비례(非禮) 결례(缺禮) 실례(失禮)가 횡행하는 ‘동방무례지국’의 비난만은 어떻게든지 면해야 되지 않겠냐고 역설하여 만당의 박수를 받다.
생활속의 실천예절과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문화선진국의 자긍심을 말한 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며 중국의 관용구 ‘노도학’(老到學라오 따오 쉬에)을 선보이다. 중국의 작가 왕몽(王蒙왕멍)의 예를 들다. 18년 동안 돼지막을 치우는 등 괴로운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쉬지 않고 공부하여 위구르어를 통달하고 40년 동안 소설, 에세이등 1천만자를 썼다는 노작가이다. 70이 훨씬 넘었는데도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나의 직업은 학생”이라며 공부하라고 독려하고 “인생은 즐거운 항해”라며 참답게 사는 지혜를 설파하고 다닌다.
이윽고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100분이 흘렀다. 무슨 말들을 늘어놓았을까. 청중들의 느낌은 어때했을까. 정리를 한다. 예절은 우리 일상생활의 기본이다. 배우고 알아서 실천을 해야 한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자녀교육을 하려도 ‘알아야 면장을 할’ 것 아닌가. ‘실천예절개론’이라는 대학교양과목 교재를 선전하다. 대진대, 건양대에는 ‘예절학과’가 신설돼 있다. ‘한국 현대예절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원(和園) 김득중(金得中)선생을 소개하다. ’조선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이야기를 하다. 겨레의 스승 18분 가운데 ‘부자(父子)’가 배향된 경우는 이분들이 유일하다. 화원선생은 사계선생의 13대손이 된다. 예절입국(예절 바로세우기) 운동에 투신한지 30년, 이제 그는 현대예절의 아버지가 되었다. 집을 팔고 전세에서 월세로 가산을 탕진하며 예절이론을 정립하고 전파에 혼신의 힘을 쏟은 그는 극노인(77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교수로, 일류강사로, 학자 양성에 영일(寧日)이 없다.
실천예절지도사라는 국가공인자격증이 올해 2월 정식으로 생겼다. 예절지도사를 양성하고 예절입법운동 전위대(前衛隊)로 ‘예의생활실천운동본부’(약칭 예실본)가 행정자치부 소속 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이제 예절운동은 국가차원에서 나서야 한다. 초중등 교과에 예절과목을 넣어라. 우리는 이대로 몇 년만 더 흘러보내면 ‘불쌍놈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끝으로 ‘차렷’이 아닌 ‘공수’ ‘경례’가 아닌 ‘읍’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Lexus' 고급승용차가 12시에 집근처에서 나를 기다리더니, 강의가 끝나자마자 차가 대기하고 있다. 회사 관리팀장이 ’폐백‘이라며 봉투를 건넨다. 대체 얼마나 넣었을까, 궁금하기가 굴뚝같은데, 운전기사가 있는 마당에 확인하지 못하고 내리자마자 화장실에서 슬그머니 열어보았다. 빳빳한 신권, 띠로 두른 한 다발이 묵직한 게 아무래도 ’100만원‘이다. 잘하면 50만원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과분하다. 100분 강의에 100만원이라니? 계산해 보자. 1분에 1만원꼴이구나. 뿌듯하다. 내가 100명이 넘은 사람들 앞에서 1시간 30분 동안 ’이빨 좀 깠기로서니‘ 사례비가 100만원이라니? 병원 입원실에 있는 두 아들에게 현금다발을 보여주며 가장 먼저 자랑을 쳤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라며 ’얼마 받았겠냐‘고 물어보라고 시켰다. 30만원이라는 답에 아들은 몇 배 업(UP)를 시켜보라고 했다고 한다. 아내도 놀란 눈치다.
나홀로 늦은 점심을 하러 인근상가 설렁탕집을 찾았다. 어지간하면 혼자 먹는데 익숙하지 않아 참거나, 먹어도 라면이나 김밥을 먹을텐데, 오늘은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 듯해, 약간 망설이다가 도가니탕(1만원)과 참이슬 한 병을 시켰다. 아, 내가 호사(好事)를 하는구나. 아내나 아이들에겐 두 배나 비싼 식사를 사주어도 나는 항상 그보다 싼 것을 시키는 체질인데, 오늘은 아주 무리하는 것이다. 일종의 오바)이지만 가끔씩은 이런 것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집로 돌아와 아내에게 돈뭉치를 그대로 건네며, 오늘 저녁 고등학교 친구들과 기분좋아 한 잔 할테니 10만원만 달라고 하다. 일체의 군소리가 없다. 약간은 감격한 표정이다.
최근 열흘 동안 ‘복합골절’ 아들 때문에 몸고생, 마음고생한 아내에게 주는 선물로는 최적이다. 내일 퇴원하면 치료비가 200만원 가까이 될텐데,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버지와 형에게도 전화로 자랑을 했다. “아버지, 세상에 1시간 강의해 갖고 백만원 벌었당개요. 그것도 예절에 대해서 말이에요” “형, 오늘 돈 왕창 벌었네. 한 달 월급의 3분의 1을 벌었당개”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니 난리가 났다. 명강사 나왔다고, 한 방 쏘라고, 축하한다고, 그래그래 그래서 내가 오늘 콜했잖냐잉, 많이 마셔라. 초여름 저녁은 그렇게 삼순이집에서 익어갔다. 어디 또 이런 흥미로운 일 안생기냐? 진짜 자신있는데.
우천 합장
<2006년 7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