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인용 :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
* 내용 모티브 : 드라마 <쇼핑왕 루이>, 드라마 <환상의 커플>
* 내용상 언어 유희를 위하여 본 제목은 맞춤법 '억만장자'가 아닌 '엉망장자'로 기재함을 밝힙니다!
엉망장자의 첫사랑
3
김영훈
7.
송전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휴일이었다. 아침부터 홀리데이가 들어가는 노래는 싹 틀었다. 이래야 쉬는 날을 제대로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부동산은 토요일이 제일 피크였기 떄문에 전에 회사에서 하던 것처럼 토,일 휴무는 없었다. 다른 부동산은 월, 화로 휴무를 주기도 한다던데 우리는 다행히 아니었다. 실장언니의 "일요일은 인간적으로 쉬자."라는 신념하에 일, 월을 휴무일로 정했다. 그동안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실연의 아픔에 허둥지둥하면서 살았을거다. 하지만 왜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갱생된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여우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 역할 겸하는 인간 강아지 한 명을 거뒀다.
"이거 닦으면 돼? 응?"
"대충 애벌 설거지만 해서 식기세척기에 넣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남자랑 시리얼 한사발을 말아먹고 출근한다. 와중에 알게된건 남자는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해서 두유를 먹어야한다는 점도 알아챘다. 락토프리나 두유를 줘야하는 것도 강아지랑 비슷하다고 혼자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출근 준비를 했다. 남자는 침대나 소파에 앉아서 베개를 꼭 껴안고 있는다. 옷을 껴입고 머리를 말리는 날 빤히 보고 내가 가방을 챙겨나서면 현관문까지 종종 따라온다. 건물 입구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혹시 밖에 사람들이 보면 안되니까. 여기까지만 있어. 이따 퇴근하고 바로올게."
"응!"
진짜 강아지 아냐? 남자는 대답 한 번 시원시원하게 잘한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끔 치코리타처럼 머리의 뿔이 샘솟는데 그때마다 내가 한 번씩 웃으면서 머리정리를 해줬다. 이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정도의 접촉은 아무렇지 않다. 내쪽에서도 남자쪽에서도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단 일주일만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그냥 마음이 허하고 외로워서였고 남자는 나 아니면 갈데도 기댈데도 없어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상황은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충분조건이었다.
<< 나 오늘 나비 데리러갈게. 한 일곱시쯤 집으로 갈게 이동장만 꺼내놔주라!
탁묘를 맡겼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원래는 내일 나비를 찾으러 가야하지만 출근 전날에 운전을 길게 하는 건 부담이 있었다. 가는 김에 남자 옷도 좀 사주고, 서울 구경도 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늘 일찍 일어났다. 별다른 걸 하지않고 내가 가끔하는 것처럼 물티슈를 뽑아 창틀을 닦는다거나 긴 돌돌이를 바닥에 밀면서 청소했다. 같이 살면 닮는다더니 내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게 귀엽고 웃겼다. 그새 정이든 게 확실했다. 남자가 내게 해준 건 특별히 없지만 타지에 누군가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남자를 주웠다는 사실만 빼고 실장 언니에게 돌려돌려 물었다. 밸런스 게임을 가장해서 <1000만원 받고 미남 거둬키우기(어리광 심함) VS 그냥 살기> 골라보라고 했더니 실장 언니는 무조건 1이라고 했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1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를 거둬키울 천만원은 어디에서 조달할 것인가. 이걸 고민했다. 당장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파혼으로 틀어진 올해 예산 계획이랑,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머리가 아팠다. 일단 입이 하나에서 두개로 늘었다는 것부터 모든 것에 곱하기 2가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됐다. 나는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다가,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어버렸다. 재빨리 보이스톡을 끊으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임스가 전화를 수락한 시간이 더 빨랐다.
- Hey, 여, 주!
"아아. 예. 헬로우 제임스. 안녕하세요."
- 안녕
제임스는 빠르게 페이스톡으로 전환시켰다. 액정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는 엄마도 있었다. 대충 배경으로 봤을 때는 집 앞 그네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경직된 표정으로 눈은 안웃지만 입은 웃는 자세를 고수했다. 분명하게 해둘건 제임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서양인 새아빠라서가 아니고, 엄마의 새로운 남편이어서도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이어져온 고질병 영어 울렁증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문법 신경 안쓰고 툭툭 뱉고 싶지만 그게 어려웠다. 항상
"하하. 하와유."
- Gooooood. 여주, 밥?
그래도 다행히 내가 영어 울렁증을 극복하는 시간보다 제임스 아저씨가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단어단어로 끊기게 말하고 아직 억양이 어색하지만 내 영어실력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제임스가 한국어 중간중간에 영어를 섞을 때마다 긴장됐다. 누가봐도 날 위해 초등학생 수준의 단어만 쏙쏙 골라주는데도 경직됐다. 보다못한 엄마가 끼어들었다.
- 웬일이야. 먼저 제임스한테 전화를 걸고.
차마 액정 두드리다가 실수로 걸었다는 말은 못하겠다. 엄마는 아닌척하면서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는게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제임스 아저씨랑 오래 살면서 나-제임스 아저씨 사이가 데면데면한걸 누구보다 더 잘아는게 엄마였다.
"그냥. 잘지내나 해서요. 아 엄마 있잖아."
- 왜 돈 필요해?
엄마는 역시 엄마였다. 내 표정과 뜸들이는 억양만 봐도 바로 알아챘다.
"응...나 사무실 출근한지도 얼마 안됐고, 또 그때 주웠다고 한 애 임시보호 해야해서."
- 그래. 파혼 기념 선물로 화끈하게 보내줄테니까 걱정마. 돈 아끼지말고 잘 보호해서 주인 찾아줘!
"진짜?"
- 응. 그리고 딸이 슬픈데 엄마가 못가서 미안하네. 제임스도 더 얹어서 준다니까 걱정마.
"됐어. 아저씨는 보내지 말라해."
엄마는 빨리 전화를 끊으라고 성화였다. 당장이라도 송금할 태세였는데 정말 전화를 끊자마자 돈이 들어왔다. 주로 엄마는 페이팔로 꽂아줬는데, 페이팔알람이 정확히 두 번 울렸다. 오백만원 한 번. 오백만원 한 번. 오백만원이 두 번 들어왔다. 천만원. 화끈하게 꽂아준다는게 이말이었구나. 원래도 차인 뒤로 (정신 없어서) 후유증이 별로 없었지만 금융치료가 된 기분이었다. 역시 돈이 모든 걸 해주진 않지만 기분은 좋게하는구나. 내가 액정만 보면서 실실 웃으니 남자가 내쪽으로 슬쩍 다가와 앉았다.
"뭐봐?"
"아. 그, 옷 입어. 오늘 어디 멀리 나가서 옷도 좀 사야지."
이걸 임시보호 비용이라고 생각하자. 천만원을 다쓰기 전까지 이 남자 가족을 찾아주는거야. 어차피 좁은 송전 지역사회에서 경찰에 신고하면 바로 소문날거고, 일단 옷이나 다른 걸 좀 갖춰지고 남자를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받은 이후에 실장 언니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자. 이게 내 계획이었다. 남자는 군말없이 씻고 나와서 내가 건네준 옷을 입었다. 예전 애인이 입었을 때는 진짜 별로였는데 남자가 입으니 태가 다르긴 했다. 역시 옷걸이가 중요한가봐.
"경차라 좀 작긴한데. 불편하겠지만 타봐봐."
"응. 나 안불편해!"
누가봐도 불편해보였다. 나는 좀 넓진 않다, 하고 탔던 모닝인데 남자가 타니까 거의 구겨져서 타는 수준이었다. 기다란 다리가 꺽다리처럼 꺾이고 허리는 등받이에 붙여서 쫙 피면 머리를 박을 기세였다. 남자는 거의 눕듯이 앉아있었다. 서울까지 가려면 편도로 두 시간은 걸렸다.
"너무 불편하면 뒤에 가서 타도 돼. 뒤에는 다리 쫙 뻗을 수 있으니까."
"아니! 나 여기 있을래."
남자는 조수석을 고집했다. 가끔 하는 행동을 보면 사랑 많이 받고자란 막내 도련님 같은데, 또 이런 매너를 보면 장남 같기도 하고. 도저히 남자의 캐릭터 해석이 안됐다. 나는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점심이 되기 직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와있었다. 일요일이라 좀 막히겠지만 정해진 시간 내에 하려면 빨리 해야했다. 속도가 잘 나지않는 모닝이지만 열심히 밟아댔다. 목표는 밤 9시 이전에 송전에 도착하는 거였다.
8.
다행히 네비에 찍힌 시간보다는 빨리 도착했다. 일단 할 일이 산더미였다. 남자에게 지금 옷과 신발 어느것도 제대로 갖춰진게 없었다. 불만없이 내가 주는대로 입어준게 다행이었다. 비싼 명품을 휘둘러서 사줄순 없지만 어느정도 깔끔한 스파브랜드 옷은 여러벌 사줄 수 있었다. 한계절동안 입을 옷만 필요하겠지 싶어 일단 에잇세컨즈로 들어갔다.
"환영함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어느 유튜버가 따라한 것처럼 세모 모양의 입으로 복창하는 직원들이 보였다. 그 부담스러운 인사를 지나쳐서 남자를 안으로 이끌었다.
"입고 싶은 거 찾아봐."
"......"
아무것도 모른다는 송아지, 강아지, 고양이 눈빛으로 날 봤다. 나는 괜히 뒷통수를 긁적였다. 혹시 자기 취향을 다 까먹어서 모르는건가? 하는 수 없이 남자의 손을 이끌어서 남성복 코너로 갔다.
"그냥 뭐 슬랙스랑 기본티. 셔츠랑 남방이랑, 집에서 입을 잠옷이랑, 후드랑 가디건 이정도만 사자."
"응!"
대답은 잘해요. 나는 픽 웃고는 대충 남자의 몸에 갖다댔다. 사실 진짜 남성복에 대해서는 모른다. 뭐 전에 사귈 때도 애인한테 옷을 사주는 게 아니었다. 선물로 그냥 상품권을 주거나 돈을 주고 사고싶은 거 사라고 했으니까 정성스레 뭔갈 준 기억이 없다. 엄마나 제임스 아저씨 생일 때도 멀리 떨어져있으니 필요한 영양제 같은 걸 사서 보냈지 직접 골라서 사준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도 생물학적 남성에게 옷을 사주는 건 처음이었다. 티셔츠는 대충 어깨만 맞으면 들어갈 것 같았고 바지는 허리나 허벅지 둘레가 중요하니까 몇개를 주고 입어보라고 했다. 피팅룸에 남자를 넣고 바깥에서 기다렸다.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시크릿가든 김주원이 되거나, 아니면 커피프린스 1호점 쓸자 아저씨가 되어서 옷을 입고 날개 단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어..."
"나 어때?"
남자가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무슨 청바지 모델마냥, 원래 입고 태어난거마냥 소화를 쭉쭉 해댔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아주 요먕한 강아지처럼 물어온다. 대충 보니 허리는 큰데 다리길이 때문에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한치수 더 큰걸 사서 동네 세탁소에서 허리를 줄이는 수밖에 없겠다.
"바지는 됐다. 이리 와요, 저기..."
피팅룸에는 직원이 두명 있었다. 남자쪽을 흘끔흘끔 보는데 저기요라고 할 수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이름을 몰라서 저기요라고 계속 호칭을 지시대명사 처리했다. 강아지야! 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야, 저기, 그쪽. 이런식으로 카드 돌려막기 하듯 호칭 돌려막기를 시전했다. 아무래도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뇌 속에서 작명세포를 이리저리 굴렸다. 생각나는건 개촌스러운 이름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이름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김춘수 시인의 말마따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데 무명보다는 유명이 나았다.
"영식아."
"......."
"(김영식이 니 이름이야)"
남자의 어깨를 살짝 누르고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는 내가 영식?이라는 표정으로 날 봤는데,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구린 이름이긴했다. 영식이란 이름에 김자를 굳이 붙인건 김이박최중에 제일 흔한 성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도 김이기 때문에. 어디가서 사촌동생이나 사촌오빠라고 둘러대면 먹히지 않을까 싶었다. 에잇세컨즈 안에서 급하게 작명한 이름은 잘써먹었다. 복합쇼핑몰 내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을 때도,
"영식아! 글로 가지말고 이리와!"
꽤 유용했다. 처음에는 남자도 이상하고 어색한듯이 굴더니 이내 남며들었다. 영식이란 이름이 구식이긴해도 정감가는 호칭이긴 했다. 왜 강아지들한테도 촌스러운 사람 이름이나 먹을 거 이름 붙여주면 오래 장수한다는 말처럼. 나름 의미가 있었다. 대충 옷과 운동화도 사고 푸드코트에서 간단히 냉메밀과 치킨까스도 먹었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흠."
"왜?"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가판대. 곧 가을이라는 걸 알리는지 여러가지 가을 아이템들이 즐비해있는데 한가지가 눈에 확 꽂혔다. 다른 반짝이는 것 사이에 딱 눈에 띄는 것. 빨간색 베레모였다. 물론 저런 화려한 모자를 내가쓸 건 아니었다. 나는 새까만 영식이의 머리를 한 번, 다시 빨간 베레모를 한 번 쳐다봤다. 어울릴 거 같은데. 사준다고 하면 싫어하려나.
"영식아."
"응?"
"너 저거 사주면 쓸래?"
나는 검지를 길게 뻗어 베레모를 가리켰다. 성인 남성이 저런 원색 모자 싫어하겠지. 그래도 한 번은 물어봤다.
"네가 선물해주면 쓸래!"
"...기달."
영식이는 예외적 인물이었다. 꽤 흔쾌히, 아니 아주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엘리베이터가 이미 우리가 있는 층에 도착했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는 베레모가 있는 쪽으로 돌진해서 바로 카드결제를 갈겼다.
"남자분이 쓰시게요? 한 번 써보세요. 잘어울리실 거 같은데."
직원분도 영식이의 얼굴을 힐끔 보고 머리에 베레모를 얹어주셨다. 어디 내놓기에 부끄러운 얼굴은 아니지 영식이가. 아주 자랑스러운 국위선양을 할만큼의 얼굴이지.
"요즘 아이돌들이 많이 쓰시는 방법인데, 베레모를 쓴다음에 실핀을 뒤집어서 뒤나 옆에 꽂아주면 잘 안흔들려요."
"여주 넌 안사?"
"...어?"
"너도 사. 같이 쓰자."
직원분이 씌워주신 베레모는 완벽했다. 당장 음악중심에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비주얼이었다. 자기도 마음에 드는지 영식이는 이리저리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봤다. 마치 거울처음 보는 말티즈가 거울 보는 것마냥 말이다. 이 앙큼한 영식이는 커플 모자를 제안했다. 어차피 내 카드로 긁는거지만 기분은 좋았다. 어디 쓰고 다닐일은 없지만 결제했다.
"영식아 맘에 들어?"
"응. 완전 마음에 들어!"
영식이의 말끝에는 항상 느낌표가 붙었다. 참 활발한 강아지구나. 옷을 사느라 의류매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녹초가 된 나와 다르게, 영식이는 아직도 힘이 펄펄 넘쳤다.
"내가 들게. 이리줘."
영식이는 두 손에 가득 쇼핑백을 들었으면서도 내것까지 가져갔다. 웬만하면 아냐 내가 같이 들어줄게 하고 싶지만, 이미 개쓰레기 체력은 동난 상태였다. 이따 나비도 픽업하러 가야하고 운전도 두 시간 더 해야해서 힘을 최대한 아껴야했다. 나는 저항없이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원래 계획은 영식이 옷만 사주는거였는데 꽤 괜찮은 옷들이 보여서 내것도 몇개 집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짐이 불어났다. 안그래도 미어터지는 모닝 뒷자석에 쇼핑백을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이제 집가, 우리?"
"어...아니. 나비 데리고 가려고. 친구집에 맡겨놨어."
"나비?"
있어 우리집 고양이. 세살 먹었는데 성격이 좀...그렇지만. 말을 하다가 말았다.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다. 나비는 안그래도 예민한 앤데 영식이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예전에 전 애인 사귀었을 때도 전애인 얼굴에 뺨다구를 냅다 갈긴 경력이 있다. 그리고 우리집에 와서 뭘하려고 할 때마다 나비가 훼방을 놨다. 달콤한 홈데이트는 대부분 물건너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일수도 있다. 오래 사귄 기간에 비해서 내가 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게 별로 없었다. 알고보니 효녀 고양이네 나비.
다행히 옷을 산 곳에서 친구집이 멀지않았다. 친구는 약속이 있어서 집을 비워뒀고, 이동장도 다 꺼내놨으니 나비만 데려가고 연락 달라고 답장이 왔다. 알려준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 와중에도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비야!"
"먀!"
내 앞에서만 착해지는 순둥이. 깜찍이. 나비는 꼬리를 바짝세운채로 내쪽으로 냥냥냥 거리면서 뛰어왔다. 못본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심히 반가워했다. 뒤에 있는 영식이는 멀뚱히 서있었다.
"이동장 좀 잡아줘 나비 안으로 들어가게 하게."
"응..."
아까보다 영식이의 표정이 안좋아졌는데, 아마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비가 이동장에 들어가려고 점점 다가오자 영식이는 더 잿빛 얼굴이 됐다. 진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진짜 강아지인가? 강아지들은 고양이를 낯설어하거나 무서워한다고 동물농장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나비야 아니아니 이리로 들어가야지."
나비는 이동장으로 천천히 이동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먀아하고 한 번 울더니 이동장 옆쪽을 잡고있는 영식이에게 갔다. 영식이는 숨을 훕 들이키면서 굳었다. 누가봐도 경직된 모습과 표정으로 멈춰있었다. 긴장한 표정과 머리에 쓰고 있는 빨간 베레모가 언밸런스했다. 나는 웃음을 꾹 삼켰다. 혹시 나비가 영식이 패면 어떡하지. 나비는 고고한 치즈냥이의 자태를 지키며 우아하게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식이의 무릎에 발을 턱 얹었다. 모두 긴장한채 나비의 모습을 지켜봤다.
"...먀."
나비는 친구도 인정했다. 자기가 탁묘랑 임시보호를 이렇게 많이 했지만 주인을 대하는 태도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다른 사람은 처음봤다고. 친구도 탁묘 맡아주는 일주일동안 정말 발닦개 노예처럼 생활했다고 했다. 나비가 거실에 돌아다니면 친구는 방안이나 욕실에서 안나가고 있었다. 그정도로 예민하고 기민한 친구였다. 그런 나비가 영식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아까 나에게 한 것처럼 꼬리를 바짝 세우더니 영식의 근처를 뱅뱅 돌았다. 마지막 화룡점정.
"허..."
"...나 좋아하는거야?"
생전 처음본 남정네한테 눈키스를 날렸다. 나비야 언니가 널 그렇게 키웠니. 나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식이의 청바지에 노란털을 다 묻혔다. 내가 강제로 잡아서 이동장에 넣기 전까지 온갖 스킨십은 다했다. 뭔가 허무했다. 내가 처음 포인핸드로 데려왔을 때도 한달동안 눈도 안마주쳐주더니. 외간 인간남자한테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열고 말이야. 괘씸한 마음 반, 그래도 영식이랑 마찰이 없어서 다행인 마음 반이었다. 영식이는 아예 뒷좌석으로 가서 나비와 노는데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나 외로워질라 그러네..."
운전 중 앞을 보면서 한 말이지만 분명 뒷좌석을 향했다. 거울로 보이는 한 남성과 한 고양이의 행태를 고소합니다. 주인만 빼놓고 희희낙락하는 저 풍경이 기가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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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진자너무재밌다.... 저 밥먹으면서 보는중이에요...... 저 쇼핑왕루이도 너무 재밌게 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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