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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족 도시들
거대 도시
카르트-하다쉬트 유닛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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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투창병 - Mitnag'him Lybim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에서 마우레타니아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해안가에 사는 부족들을 죄다 리비아인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아프리카를 리비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용맹한 전사들은 다트와 투창, 창을 주로 씁니다. 본격적인 접전 상황에 투입하기에는 장비가 많이 열악하지만, 그래도 리비아인들 사이에서 흔한 무기인 칼은 거의 가지고 다닙니다. 그들의 개성은 들고 다니는 방패에서 드러나는데,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소가죽, 염소가죽, 코끼리 가죽, 타조 가죽 등 재료도 다양합니다. 방패 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양도 가지각색입니다. 예를 들어 마케아족은 머리칼을 닭벼슬처럼 만들며, 막시아 부족은 머리 왼쪽 부분을 빡빡 밀어버립니다. 이들은 재빠르고 자신감 넘치는 전사들이지만, 중무장한 적이나 기병대의 질량을 당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장군이 잘 지휘해 주기만 한다면 이들은 장군에게 승리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전사들의 출신 부족은 매우 다양합니다. 아뒤르마키다이, 길리감마이, 아스뷔스타이, 카발리아, 아우쉬사이, 암모니온, 나사모니온, 프쉴리, 가라만트, 로토파기, 마케아, 마클뤼아, 아틀란테, 아타란티아, 아우세아, 기잔티아, 막시아, 자베키아, 마쉴리, 그 외에도 많은 부족들이 있습니다. 고대 기록자들은 대부분의 리비아인 부족들이 경무장 척후전술에 능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암모니온의 척후병들을 darters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리비아인 척후병들은 기원전 310년 아가토클레스와 카르타고 사이의 전쟁에서부터 포에니 전쟁 기간까지 내내 활약했으며, 특히 한니발의 군대에서 발레아레스 투석병/척후병들과 함께 전초전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비아 보병 - Lo'hamim Lybim
우리 선조들과 그리스인들의 전술로 훈련받은 이 리비아 신민들은 카르트-하다쉬트와 다른 식민지들의 영토에서 징집되었으며,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들입니다. 이제 기원전 4세기가 저물고 3세기에 접어들었지만 리비아인들의 무장과 훈련은 전통적인 레반트 호플리테스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장비와 훈련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투레오스 방패와 창, 리비아 부족들의 전통적인 투창을 갖춘 헬레니즘 양식의 투레오포로이 부대와 흡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카르타고인들은 점점 증가하는 켈트, 로마, 이베리아 군대의 영향을 받아들여 리비아인 병사들에게 사슬 갑옷을 입혀 전선 유지력을 더욱 높였습니다. 이 병사들은 쓸만한 전열 보병인 동시에 귀중한 가나안 시민들을 전장에 내보내는 것보다 훨씬 값싸고 안전한 방책이지만, 다른 국가의 정예 중보병이나 중기병들을 상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카르타고 시민들은 그 초창기부터 카르타고나 다른 페니키아 식민도시들의 시민 계급이 전쟁에 나서는 것보다는 리비아인들을 대규모로 징집, 훈련시켜서 전쟁에 동원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교훈은 시칠리아에서 티몰레온을 상대로 벌어진 크리메수스 전투에서 확실해졌는데, 신성대 2,500명을 포함해 1만 명에 달하는 시민군이 궤멸당했던 것입니다. 이후 시라쿠사와 로마를 상대하던 페니키아인 군대의 핵심은 이 리비아 보병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니발 휘하에서 최고의 병력으로 활약했으며, 이베리아의 하스드루발 군대의 전열에서도 믿음직한 중앙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리비아인들을 군대의 중추로 활용하는 이러한 정책은 단 한번의 부작용을 낳았는데, 바로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킨 소위 '용병 전쟁'이었습니다. 이 때 반란군은 페니키아인들의 반격을 모조리 격퇴했으며, 카르타고는 최정예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던 하밀카르와 한노를 불러들이고 나서야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리비-페니키아 호플리테스 - Dorkim Kan'anim
이 병사들은 상인, 수공업자, 장인, 석공 등 평균적인 재력을 갖춘 시민으로써 리노토락스 갑옷과 호플론 방패, 창과 칼을 자비로 마련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동원되거나 장비를 지급받은 것이 아니며, 그저 위기가 닥쳤을 때 고향과 생계를 지키기 위해 장비를 갖추고 나가 싸울 가나안 식민 도시의 시민일 따름입니다. 이런 방식은 구식이며, 카르트하다스팀 국가를 위해 대신 싸우는 신민들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식민지 시민들 중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자는 갈수록 적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페니키아인' 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을 페니키아인(Phoenicians/Punics)이라고 불렀지만, 페니키아인들은 스스로를 가리킬 때 자기의 원래 출신 도시를 따서 티레 사람, 시돈 사람, 비블로스 사람 등으로 불렀습니다. 식민시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 고향 식민시 이름을 따거나, 혹은 그 식민시를 세운 모시(母市)의 이름을 따서 불렀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이 다른 족속들과 구분되는 자기네 족속 전체를 아우를 때 썼던 말은 '가나안 사람'이며, 가나안 사람이란 곧 페니키아인들의 선조가 되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지역의 고대 종족을 가리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나안 사람을 가리키게 된 가나안이라는 말은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후기 그리스-로마 기록자들은 카르타고의 지배 하에 있던 아프리카의 식민 도시들을 상당히 무시했고, 그들을 가리켜 리비-페니키아인들이라고 부르며 은연중에 그들이 리비아 원주민들과 혼혈이기 때문에 카르타고보다 열등하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리비아인들과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간에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을 열등하다고 보았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카르타고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페니키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카르타고인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도시들을 사르데냐, 시칠리아, 몰타, 발레아레스, 이베리아 등에 있는 다른 식민도시들과 차별해서 대우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티카 시(市)는 예외이지만, 이 경우는 특이 케이스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식민도시들이 보병대를 조직할 일이 생기면, 그들은 모두 똑같이 그리스식 호플리타이 팔랑크스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카르타고 시민들도 유사시 시민군을 조직할 때는 마찬가지 방식을 따랐습니다. 이 같이 시민군이 본토 방위에 나선 예로는 기원전 4세기 후반 아가토클레스의 침공, 1차 포에니 전쟁 때 레굴루스의 침공, 용병 전쟁과 2차 포에니 전쟁 때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침입 등이 있습니다. 3차 포에니 전쟁 때가 되어서야 양상이 조금 달라졌는데,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가 항복할 때 대부분의 무기와 갑옷을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대부분 시민들이 급하게 대량생산된 칼과 투레오스 방패, 투창으로 무장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군 중에는 아마도 페니키아 호플리테스 부대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로마군의 전술과 군사 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적으로부터 노획한 사슬 갑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리비-페니키아 기병대 - Parasim Kan'anim
이 기병들은 평균보다는 좀 더 잘 사는 사람들, 즉 갑옷, 방패, 창, 칼에 더불어 말까지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정치꾼들, 부유한 지주들, 매우 성공한 상인들이 대개 이런 축에 들며, 출신 도시의 기병 전통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동원되거나 장비를 지급받은 것이 아니며, 그저 위기가 닥쳤을 때 고향과 생계를 지키기 위해 장비를 갖추고 나가 싸울 가나안 식민 도시의 시민일 따름입니다. 이런 방식은 구식이며, 카르트하다스팀 국가를 위해 대신 싸우는 신민들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식민지 시민들 중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자는 갈수록 적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페니키아인' 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을 페니키아인(Phoenicians/Punics)이라고 불렀지만, 페니키아인들은 스스로를 가리킬 때 자기의 원래 출신 도시를 따서 티레 사람, 시돈 사람, 비블로스 사람 등으로 불렀습니다. 식민시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 고향 식민시 이름을 따거나, 혹은 그 식민시를 세운 모시(母市)의 이름을 따서 불렀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이 다른 족속들과 구분되는 자기네 족속 전체를 아우를 때 썼던 말은 '가나안 사람'이며, 가나안 사람이란 곧 페니키아인들의 선조가 되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지역의 고대 종족을 가리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나안 사람을 가리키게 된 가나안이라는 말은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후기 그리스-로마 기록자들은 카르타고의 지배 하에 있던 아프리카의 식민 도시들을 상당히 무시했고, 그들을 가리켜 리비-페니키아인들이라고 부르며 은연중에 그들이 리비아 원주민들과 혼혈이기 때문에 카르타고보다 열등하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리비아인들과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간에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을 열등하다고 보았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카르타고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페니키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카르타고인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도시들을 사르데냐, 시칠리아, 몰타, 발레아레스, 이베리아 등에 있는 다른 식민도시들과 차별해서 대우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티카 시(市)는 예외이지만, 이 경우는 특이 케이스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식민도시들이 기병대를 조직할 일이 생기면, 그들은 모두 똑같이 중급(medium) 근접전 기병 양식으로 무장했습니다. 카르타고 시민들도 유사시 시민 기병대를 조직할 때는 마찬가지 방식을 따랐습니다. 시민 기병대는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레굴루스의 본토 침공에 맞설 때,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용병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2차 포에니 전쟁 때에는 후대 기록자들이 '리비-페니키아인'이라고 부르던 다른 도시들에서 징집된 시민 기병들이 한니발의 명령에 따라 히스파니아에 있던 하스드루발의 군대에 가담했습니다. 한니발이 그들을 아프리카 도시들과 히스파니아 도시들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보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기병들이 아프리카의 식민 도시들 출신인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에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사르데냐를 카르타고의 손에 다시 넘기려고 했던 함프시코라의 반란에 동원된 기병들도 이런 페니키아식 기병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함프시코라와 비슷한 토착 페니키아-누라기 귀족 아니면 카르타고 본국에서 파견된 증원군 중 하나로 추측됩니다.
카르타고 귀족 기병대 - HaParasim HaB'hurim
이들은 카르타고에서 가장 유서깊고 명망있는 가문들 출신으로, 다른 대다수의 시민 병사들보다 좋은 장비를 갖추고 더 잘 훈련받았습니다. 기다란 기병창과 좋은 칼로 무장한 이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탈리아, 이베리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입한 그들의 갑옷은 청동과 철로 아주 잘 만들어져서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하며, 그들의 튼튼한 이베리아 산 군마는 전방 마갑(peytral과 chamfron)으로 보호받으며 기수들을 적군의 파멸로 인도합니다!
역사적으로 카르타고 시민들 가운데 정기적인 훈련을 받으며 전쟁에 대비하는 사람은 매우 적긴 했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부유한 가문 출신이거나 혹은 자수성가해서 부유층에 진입한 이들로, 유사시 소집되는 시민군 기병들에 비해 훨씬 좋은 장비를 갖출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기병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에 배치되는데, 대개는 '신성대'로 알려진 팔랑크스 보병 부대와 마찬가지로 부대의 우익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 정예 기병들은 '신성대의 기병 버전' 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었고, 이런 오해는 시대가 갈수록 고쳐지기는커녕 더 심해져서, 아예 이들이 아스타르테 여신의 신전에 소속된 기사들이라는 전설까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또다른 유명한 전설로는 한니발의 자마 전투에 이 '신성 기병대'가 참전하지 못해 전세가 기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성 기병대라는 게 실제로는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이야기는 극도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반(反) 바르카 세력의 태도가 어땠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한니발에게 최소한의 지원조차 해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신성대 - Dorkim B'hurim
이들은 카르타고에서 가장 유서깊고 명망있는 가문들 출신으로, 다른 대다수의 시민 병사들보다 좋은 장비를 갖추고 더 잘 훈련받았습니다. 우리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팔랑크스 방식으로 싸우는 이 병사들은 모두 부유한 귀족들로써, 가장 비싸고 화려한 장비로 무장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우리 시민군의 오른쪽 날개 부분을 맡아왔지만, 최근 백여 년 사이의 전쟁은 우리 카르타고 시민들은 전쟁에서 희생당하기에는 너무나 귀중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카르타고의 번영을 위해 이들을 전장에 투입하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권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카르타고는 티몰레온과 아가토클레스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뒤로 자국 시민들을 전투에 투입하는 문제에 대해 한층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시민군을 편성하게 되면 팔랑크스의 오른쪽 날개는 항상 부유한 귀족 출신 병사들이 맡았고, 그리스인들은 이를 가리켜 '신성대(Sacred Band)' 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이르면 이 병사들은 페니키아/가나안 사람들의 주신인 바알에 헌신하는 병사들로 받아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시민 귀족 보병대의 시대는 기원전 3세기 초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한때 카르타고인들은 자기가 전쟁에 몇 차례 참가했는지 보여주는 장식용 완장을 차고 다닐 정도로 군 복무에 열성적이었지만, 시칠리아에서 기원전 396년과 341년에 겪은 큰 패전, 311년부터 307년에 걸쳐 벌어진 아가토클레스와의 전쟁에서 겪은 패배와 보밀카르의 쿠데타 시도 등을 거치면서 시민군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을 갈수록 꺼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307년에 신성대가 활동 중이었다는 점을 보면, 카르타고 군사 전통의 부활이 아예 물 건너간 것은 아니라고 봐도 될 듯 합니다.
발레아레스 투석병 - Qala'im Balearim
EB 1이랑 설명이 똑같네요. 패스 - -
카르타고 가계도
클릭해서 보세요ㅋ
페니키아의 게임 내 가계도는 디자인하기가 꽤 까다로웠습니다. 왜냐면 카르타고는 다른 왕조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로마와 비슷하게 개인의 역량과 그에 따른 공직 진출 역시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카르타고의 게임 내 가계도는 실제 혈족 계보와 다른 가문 구성원이지만 교체되어 들어간 이들이 뒤섞인 것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페니키아 귀족들 사이에 중복되는 이름이 너무 많아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폴리비오스의 기록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카르타고인들은 여성들의 이름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따라서 가계도에 있는 여성 이름들은 모두 무작위로 선정된 것이며, 남성 인물의 결혼 여부와 자손 유무에 대한 정보만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아래에 나오는 일대기들은 모두 게임 내부에서 열람 가능하며, 이 캐릭터들이 어째서 등장하며, 역사상 무슨 일을 했고, 서로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죽은 가족 구성원들
아데르발 (Adherbal, 86), 한노 (Hanno, 65), 히밀코 (Himilco, 70) - 이 3명의 장군은 기원전 4세기 말 아가토클레스에 대한 최후 공세를 펼쳐 그를 시칠리아로 몰아낸 이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피로스의 시칠리아 침공 때도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아가토클레스를 상대로 싸울 때는 젊었었지만 그것도 벌써 50년 가까이 된 일이고, 이제 이 장군들은 오직 게임 내에서 가계도를 구성하는 역할만 하게 됩니다.
에쉬문힐레츠 (Eshmunkhilletz, 59) - 카르타고 남쪽의 새로운 문 거리(New Gate Street)에 있는 봉헌 기록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에쉬문힐레츠는 기원전 3세기 어느 시점에 카르타고의 쇼펫이었던 아도니발(Adonibaal)의 부친입니다. 에쉬문힐레츠는 가계도의 빈자리를 메꾸는 데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한니발 (Hannibal, 60) - 한니발은 아그리겐툼과 시라쿠사에 파견되었던 카르타고 외교관인 한노의 부친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는 한노의 부친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스고 (Gisgo, 54) - 기스고는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이던 한니발 기스고의 아버지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는 한니발 기스고의 부친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가족 구성원들
한노 (Hanno the Elder, 32) - 한노는 1차 포에니 전쟁 중 카르타고 측 지휘관입니다. 그는 전쟁 초반에 구원군을 이끌고 아그리겐툼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비록 그 임무에는 실패했지만, 나중에 그는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해전 중 하나인 엑노무스 해전에서 좌익을 지휘하게 됩니다.
대 한노 (Hanno the Great, 10) -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시칠리아 섬에서 로마는 카르타고를 서쪽 끝의 두 도시인 드레파나와 릴리바에움으로 몰아붙인 반면, 카르타고인들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한노는 아프리카에서 벌인 원정에 성공하여 도시에 부를 가져다 주었고, '대 한노' 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 와중에 하밀카르 바르카는 시칠리아에서 게릴라 전술을 통해 어느정도의 성과를 얻어냅니다.
기원전 241년에는 새로 건설된 로마 함대가 마지막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했습니다. 카르타고 용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하밀카르가 주기로 했던 보수를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보수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들을 차지했고, 한노와 바르카는 기원전 238년에 승리할 때까지 용병들과 잔혹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카르타고는 한노와 하밀카르가 죽치고 있기에는 너무 작은 땅이었으나, 다행히 도시의 자산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두 방향의 정책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한노는 아프리카를, 하밀카르는 이베리아를 맡아 두 방향의 동시 확장이 이루어집니다. 기원전 219년,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와의 전쟁을 재개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한노는 아프리카 밖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모험의 성공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았고,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도 반대했지만 결국 바르카 파벌이 논쟁에서 이겨 전쟁을 결정했습니다. 한니발이 완전히 패배한 뒤 대 한노는 평화 협상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말카르 (Hamalcar, 28) - 하말카르는 1차 포에니 전쟁의 카르타고 군 지휘관입니다. 한노(the elder)가 아그리겐툼 구원에 실패하자, 그가 시칠리아 전체의 군 지휘권을 넘겨받게 됩니다. 공성전만 수십 차례에 이르는 기나긴 전쟁 동안 그는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고,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해전 중 하나인 엑노무스 해전에서는 중앙을 지휘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한노와 한니발 역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측 장군으로 활동했습니다.
한노 (Hanno, 10) - 한노는 1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 군대를 지휘했던 하말카르의 아들이며, 전쟁 후반에는 그 지위를 이어받습니다. 그 악명 높은 레굴루스와의 회담을 담당한 것도 그였는데, 회담에서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인들이 용납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어선 요구를 해 왔습니다. 한노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고, 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레굴루스는 전쟁에서 참패한 뒤 붙잡혀 처형당했고,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 때까지 아프리카 땅을 다시 넘보지 않았습니다.
한니발 (Hannibal, 10) - 한니발은 1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 군대를 지휘했던 하말카르의 아들이며, 레굴루스와의 협상을 담당했던 한노의 동생이기도 하지만 형과 아버지에 비해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카르타고 군의 장교로써 3단 노선의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1차 포에니 전쟁 중 카르타고 해군 사령관이던 아데르발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한니발에 대한 정보는 그게 끝입니다.
아도니발 (Adonibaal, 43) - 기원전 3세기의 어느 시점에 카르타고의 새로운 성문으로 이어진 남쪽 도로의 완성을 기록한 비문을 보면 그 해의 쇼펫인 아도니발과 샤팟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도니발은 행정 담당 쇼펫이었으며, 그의 임기는 아테네의 아르콘(Archon)처럼 1년 단위였습니다. 그는 에쉬문힐레츠의 아들이며 보디넬카르트의 증손자입니다.
샤팟 (Shahfat, 40) - 기원전 3세기의 어느 시점에 카르타고의 새로운 성문으로 이어진 남쪽 도로의 완성을 기록한 비문을 보면 그 해의 쇼펫인 아도니발과 샤팟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한노 (Hanno, 24) - 알려진 바에 따르면 1차 포에니 전쟁은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의 위협을 받은 메사나가 로마와 카르타고 양쪽에 구원 요청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먼저 도착한 쪽은 카르타고였는데, 시칠리아 방면 지휘관의 휘하 부대를 메사나에 주둔시켰습니다. 로마 군대가 뒤늦게 메사나 해협에 도착했을 때, 페니키아 지휘관은 로마인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들이 바다에 손을 씻는 것을 보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합니다. 그 뒤 로마군이 어떻게 해협을 건넜는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밤중에 몰래 건넜을 거라는 사람도 있고, 페니키아 함대를 몰아내고 힘으로 건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로마군은 한때 카르타고 쪽에 손을 잡았던 메사나 내부의 친 로마 파벌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페니키아 지휘관이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그가 한때 도움을 요청하던 마메르티니들의 손에 죽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 지휘관의 이름은 대개 한노로 추정됩니다.
보스타르 (Bostar, 18) - 보스타르는 시칠리아의 하말카르 휘하에서 종군했었지만, 그보다는 카르타고의 사르데냐 총독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는 용병 반란, 혹은 "휴전 없는 전쟁" 기간에 사르데냐의 용병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고, 반란군은 그를 살해한 뒤 섬의 지배권을 로마인들에게 넘겼습니다.
히밀코 (Himilco, 16) - 히밀코는 릴리베오(릴리바이움)의 지휘관으로써 1차 포에니 전쟁 후반 내내 이루어진 기나긴 공성전을 버텨낸 장본인입니다. 그는 한니발 로도스의 대담한 봉쇄망 돌파를 감독했고, 아카이아 용병 알렉소의 밀고를 받아 휘하 용병들의 반란 시도를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시를 지켜낸 뛰어나고 존경받는 지도자로써 전쟁 후에도 응당 살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쟁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노 (Hanno, 29) - 한니발의 아들이며, 하스드루발의 부친인 한노는 1차 포에니 전쟁 발발 당시 동맹 협정을 위해 아그리겐툼과 시라쿠사에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맹 관계가 틀어지자 해임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258년 한노라는 사람이 사르데냐의 군사 지휘권을 받아 로마의 침략에 대항했는데, 그 한노가 이 한노가 맞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스드루발 (Hasdrubal, 11) - 한노의 아들이며 한니발의 손자인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55년부터 251년까지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군 지휘를 맡았으며 장군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하스드루발 자신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는데, 전쟁에서 수 차례나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패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카르타고의 관행을 볼 때 아마 처형당했으리라 추측되지만, 그가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한니발 기스고 (Hannibal Gisgo, 17) - 기스고의 아들이자 한니발의 아버지인 한니발 기스고는 보통 줄여서 기스고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기원전 261년 한니발 기스고는 아그리겐툼 주둔군의 지휘관이었습니다. 한노(the elder)가 이끄는 구원군이 로마군의 포위를 돌파하는 데 실패하자, 한니발 기스고와 부하들은 로마군의 칼과 쇠사슬 앞에 아그리겐툼 주민들을 버려두고 밤중에 몰래 탈출해 버렸습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해안가를 약탈하여 로마군의 보급체계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본거지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이런 작전에 동조하는 장군은 아무도 없었고, 전쟁 후반에 하밀카르 바르카가 그와 비슷한 개념을 따랐을 뿐입니다. 메사나 해협에서 그는 부데스(Boodes)의 분견대를 파견하여 로마 집정관 그나에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한니발 기스고의 성공은 밀라에 해전에서 로마 해군에 패배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해전에서 로마 해군의 신무기 코르부스(corvus, 까마귀)가 첫 선을 보였고, 이 신개념 도선 장치에 대한 대비책이 없던 카르타고 해군은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한니발 기스고와 패잔 부대는 사르데냐 해안가의 좁은 만에 포위되었고, 탈출 가망이 없어 보이자 그의 부하들이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한니발 (Hannibal, 1) - 한니발은 한니발 기스고의 아들이며 기스고의 손자입니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카르타고 군대의 장군으로 복무했는데, 그가 복무한 기간은 1차 포에니 전쟁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한니발 (Hannibal, 30) - 한니발은 포에니 전쟁이 발발할 당시 리파리 군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지휘하던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마메르티니들을 설득하여 메사나 시에 페니키아 주둔군을 들이게 하고, 메사나로 진군해 오던 시라쿠사 군대를 회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하말카르 바르카의 아버지, 즉 한니발 바르카의 할아버지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이는 카르타고에선 아들이 태어나면 그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는 이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 이론에 부합하는 사례보다는 부합하지 않는 사례가 더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하말카르 바르카가 전쟁에 처음 참여했을 때 첫 임지가 한니발의 임지였던 리파리 군도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밝혀진 연령대와 세부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여타 수많은 '한니발' 들 중에서는 이 리파리 군도의 한니발이 가장 그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하말카르 바르카 (Hamalcar Barca, 3) - 1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기원전 247년, 하말카르 바르카는 카르탈로(Carthalo)로부터 로마군이 거의 다 차지해 버린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군 지휘권을 넘겨받았습니다. 갈리아인들을 포함한 소규모 용병 부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의 북서쪽 해안(현 팔레르모 근처)에 상륙한 그는 에레크테 산을 점령하고, 그 산을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켜냈습니다. 그는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대담하게도 이탈리아 남부까지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지상전 무패 신화를 쌓아올렸으나, 기원전 241년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한노가 카툴루스에게 격파당하는 것까지 어떻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정전 협정에 따라 시칠리아는 로마에게 넘어갔으나, 하밀카르와 그의 부대는 로마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섬을 떠났습니다. 한노가 주도하는 국내 정치상황에 염증을 느낀 그는 기스코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사직했습니다.
하밀카르와 함께 아프리카로 건너온 용병들은 보수를 받지 못했고, 잔혹한 용병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한노는 이들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하밀카르를 도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밀카르는 처음에는 포로들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반란군들이 자기 편으로 돌아오기를 유도했으나, 반란군 지도자들이 기스코와 포로들을 처형하자 그 보복으로 자신 휘하의 포로들도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하밀카르는 수천 명의 반란군을 학살한 끝에 기원전 237년에야 겨우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로마는 사르데냐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이 반란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아마도 하밀카르는 귀족들 사이에서 정치적 분쟁에 휘말린 듯 하며, 그 후 나중에라도 시민들이 자기 뜻을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짐을 싸서 히스파니아를 정복하러 떠났습니다. 히스파니아 정복 덕택에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상실을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고, 동시에 미래에 로마를 공격할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원정에는 하밀카르의 아들인 한니발 바르카도 동행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229년 베토네스 족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다른 대부분의 위대한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소인배들이 그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았습니다.
보밀카르 (Bomilkar, 17) - 보밀카르는 기원전 260년에 쇼펫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외에 보밀카르는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 바르카 휘하의 기병 지휘관이었던 한노의 아버지로 더 유명합니다. 보밀카르는 한니발의 세 누나들 중 한 명, 즉 하밀카르 바르카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한니발에게는 매형이 되며, 한노는 한니발의 조카가 됩니다.
기스코 (Gisco, 16) - 기스코는 하스드루발의 아버지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의 아들 하스드루발은 2차 포에니 전쟁 기간에 이베리아의 카르타고 군 사령관이었습니다. 그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하면서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요원, 제독, 수행원들
부데스 (Boodes, 27), 외교관 - 부데스는 1차 포에니 전쟁 중 카르타고 원로원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한니발 기스고가 이끄는 함대에서 분견대를 이끌고 로마 해군을 기습하여 집정관 그나에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사로잡는 공적을 세웁니다. 이 굴욕적인 패배로 그는 '아시나', 즉 당나귀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한니발 로도스 (Hannibal Rhodos, 16), 스파이 - 1차 포에니 전쟁 중 벌어진 기나긴 릴리베오(릴리바이움) 공성전 때, 로마군은 도시에 지원군이나 보급품, 새로운 소식들이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해상을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항해술로 로도스라는 별명이 붙은 한니발이라는 카르타고인이 번번이 이 해상 봉쇄를 돌파했고, 릴리베오에 보급품과 새로운 소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의 돌파는 몇 주 동안이나 이어졌는데, 때로는 느린 로마 배들 앞에서 일부러 멈춰섰다가 따라잡힐 것 같으면 재빨리 다시 나아가는 식으로 약올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덕에 릴리베오는 외부와 소통하는 한편 보급품을 공급받고 방어군의 사기도 진작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좋은 일이 그러하듯이 한니발의 돌파도 그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로마군은 밤새 인공적인 모래톱을 만들어 놓았고, 한니발의 배가 거기에 걸려 좌초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배는 로마군에게 약탈당했습니다.
마고 (Mago, 45), 제독 - 마고는 카르타고의 해군 제독으로써, 에피로스의 피로스가 쳐들어왔을 때 맞서 싸워 이기고 그의 기함인 7단 노선(그리스어로는 헤프테레스)을 나포하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의 함대는 기원전 274년과 273년에 로마에 파견된 외교 사절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272년 카르타고 함대가 로마를 돕기 위해 이탈리아 남해안의 타라스 근처에 나타났을 때도 그 지휘관은 마고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데르발 (Adherbal, 19), 제독 - 1차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 카르타고는 해군 운용을 위해 주요 항구 몇 군데를 이용했는데, 예를 들자면 리파리, 릴리베오, 드레파나 등이 있습니다. 아데르발은 카르탈로와 함께 드레파나 주둔 함대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제독으로써, 기원전 249년 드레파나 해전에서 로마 함대를 격파한 것이 유명합니다. 로마 해군에 맞서기 전, 그는 뛰어난 연설로 용병들을 고무시켜 그들을 카르타고 함대의 수병들과 합세하도록 했고,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추가 보수와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데르발은 로마 집정관 풀케르가 이끄는 함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 허를 찔렀고, 로마 함대의 거의 대부분이 격침당했습니다. 로마인들이 해군력을 다시 재건하는 데는 7년이 걸렸습니다.
살아남은 풀케르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지만 유죄 선고는 피했고, 대신 신성모독죄로 (전투 전 점을 칠 때, 닭이 날뛰자 그 닭을 배 밖으로 집어던졌기 때문에) 유배되었습니다.
아데르발은 기원전 239년에 죽었습니다.
카르탈로 (Carthalo, 18), 제독 - 카르탈로는 드레파나에서 아데르발 휘하에 복무했던 해군 제독입니다. 그는 로마인들을 상대로 아데르발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 두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로마 함대가 시칠리아 남쪽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도록 유인하여 대부분의 배를 침몰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건 직후 로마군이 점령하고 있던 아그리겐툼을 잠시나마 수복한 것입니다.
게스코 (Gesco), 수행원 - 게스코는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 릴리베오 주둔 지휘관이었지만, 그보다는 종전 직후 벌어진 용병 반란에서 겪은 그의 비참한 운명이 더 유명합니다. 게스코는 시칠리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용병과 참전 군인들에게 밀린 보수를 지급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소규모로 나눠서 데려와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정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을 한꺼번에 데려왔습니다. 지지부진한 보수 지급 과정을 기다리던 용병들은 갈수록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마토스라는 리비아인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용병들이 게스코를 찾아가 이런저런 불만을 제기하자, 게스코는 짜증을 내며 "돈을 받고 싶으면 너희 대장 마토스한테나 가서 물어봐라" 라고 대답했고 이에 분노가 폭발한 용병들은 게스코를 포로로 잡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용병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게스코를 죽여 버렸고, 그는 용병 반란의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아카이아의 알렉소 (Alexon the Achaean), 수행원 - 1차 포에니 전쟁 중 벌어진 기나긴 릴리베오 공성전 때, 알렉소는 카르타고 측 방어군에 고용된 용병대장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용병대장 몇 명이 로마 측에 투항하려 한다는 음모를 알게 되자 이를 카르타고 측 지휘관인 히밀코에게 알렸고, 히밀코는 알렉소와 협력하여 주모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소는 1차 포에니 전쟁 이전 시라쿠사 측에 고용되어 있을 때도 이와 비슷하게 용병들의 배반 음모를 무산시킨 적이 있습니다.
보드멜카르트 (Bodmelqart), 수행원 - 바알한노(Baalhanno)의 아들이자 예하위엘론의 형제인 보드멜카르트는 기원전 3세기 경에 활동한 카르타고의 공공 도로 담당 최고 기술자였습니다.
예하위엘론 (Yehawwielon), 수행원 - 바알한노의 아들이자 보드멜카르트의 형제인 예하위엘론은 기원전 3세기 경에 활동한 카르타고의 채석공이었습니다.
아그리겐툼의 필리누스 (Philinus of Agrigentum), 수행원 - 아그리겐툼의 필리누스는 1차 포에니 전쟁 시대에 살던 인물이며, 친 카르타고적인 관점에서 포에니 전쟁사를 썼습니다. 폴리비오스는 1차 포에니 전쟁을 묘사할 때 필리누스의 서술을 기본 자료로 삼았는데, 다만 그의 서술을 인용하면서도 선입견과 오류가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필리누스는 1차 포에니 전쟁을 촉발한 로마의 시칠리아 문제 개입이 로마와 카르타고가 이전에 맺은 협약, 즉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주권을 가지는 대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지배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먼저 위반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ㅇ_ㅇb
이건 도데체 언제나오나..... 이거 나올쯤에 로마2 나올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기다림은 저버리시는게 제작자들끼리 재미나게 놀라고하죠. 기다리다못해 이젠 포긔
아아 EB2 ㅠㅠㅠ
뭔 이름이 전부 한노아니면 한니발이여 헷갈리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