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인용 :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
* 내용 모티브 : 드라마 <쇼핑왕 루이>, 드라마 <환상의 커플>
* 내용상 언어 유희를 위하여 본 제목은 맞춤법 '억만장자'가 아닌 '엉망장자'로 기재함을 밝힙니다!
엉망장자의 첫사랑
4
김영훈
9.
그렇게 셋의 동거가 시작됐다. 이 집의 주인인 나비, 나비의 장난감 셔틀 영식이, 그리고 가장과 나비의 캔따개 역할을 겸하는 나. 위험한 동거가 될뻔한 걸, 다행히 나비가 영식이를 간택해서 평화로웠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영식이. 어디 나가지 말고. 나비는 영식이 잘 보고."
"...응!"
"무슨 일 있으면 저 공기계나 노트북으로 연락하고."
"알았어!"
영식이의 대답은 나날이 활기차졌다. 나비가 있어서인지 차라리 걱정이 놓였다. 고양이는 공동육아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던데, 나비나 영식이나 서로를 돌보느라 시간을 할애할테니 사고칠 걱정은 안해도 된다. 다만 내가 문제다. 고작 나비랑 일주일 떨어져 있었다고 야행성을 잃었다. 밤마다 우다다를 해대는 통에 계속 잠을 설쳤다. 그냥 하면 몰라 뛸 때마다 침대 스프링이 탕탕 튈정도로 격렬하게 놀았다. 가끔 우다다 하다가 내 배 위로 착지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영식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나비가 날 영식이보다 높은 서열로 보는건지 내 배 가격을 다섯번하면 영식이는 열 번했다. 가끔 기겁하면서 깨면 영식이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집사의 숙명이었다.
"요새 뭐 부업해?"
"예?"
"더 피곤해보여서. 휴일 지날 때마다 이상하게 더 피곤해보인다."
"그래요? 다시 영양제 챙겨먹어야 될까봐요."
실장언니의 눈치는 5G급이었다. 대놓고 졸지는 않았지만 점심먹고 병든 닭마냥 고개를 한번씩 떨구는 걸 걸렸다. 그래 고양이에 외간남자까지 먹여살리려니 솔직히 마음에 짐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엄마와 제임스가 보내준 천만원. 그 천만원이었다. 이사와서 기초적인 걸 사느라 벌써 좀 까먹었지만 돈이 있다는 건 늘 든든했다.
"오늘도 고생햇고. 내일은 한시간 늦게나와. 청약 발표날이라 한시간 늦게 퇴근해야할듯."
"네. 그럴게요!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언니."
그나마 오늘은 한가한 날이었다. 요즘 송전 근처로 IT기업 데이터센터 설립이니, LH 주관 공공행복주택 설립이니 땅값 오를 일이 많았다. 돈 냄새는 기가막히게 맡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지역사람들도 있었고 외지인도 꽤 됐다. 나도 송전에 온지 얼마안됐지만 이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여기 정말 서울만큼 오르겠구나. 운전해서 한두시간 내에 서울로 갈 수 있고 아직 규제지역도 아니었다. 부동산 공부를 하고, 관련 회사를 다니고, 지금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있지만 늘 깨닫는다. 버는 사람이 다 쓸어가는구나. 나는 집 한켠 마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뭐 정 안되면 나중에 허름한 단독주택, 아주 외진곳에 법원경매로 나온 매물이나 살 수 있을정도로 벌어놨으면 좋겠다. 이런 헛된 상상을 자주 했다.
"나 왔어!"
퇴근길에는 꼭 뭘 사갔다. 예전에 혼자 살거나, 나비랑 살 때는 항상 저녁도 대충 떼웠었다. 아니면 자극적인 엽떡과 소맥으로 간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근데 같이 먹는 입이 늘어나니까 아무거나 먹을 순 없었다. 하루 온종일 내 퇴근만 바라고 있는 사람에게 배달음식을 먹일 순 없지. 체력이 좀 남는 날이면 마트에 들러서 당일 야채나 요리 재료를 사갔다.
"뭔 냄새야?"
"된장찌개!"
"어..."
영식이는 집에 잘 적응 중이다. 요즘 시키지 않은 요리를 한다고 나섰다. 영식이의 요리를 보면서 느꼈다. 너…… 요리 진짜 못하는 걸 보니 외식을 많이하면서 살았겠구나. 이런식으로 영식이에 대한 정보를 늘려갔다. 이번 쉬는 날에는 진짜 병원이든 상담소든 데려가야지. 나는 간조절에 실패한 된장국을 입에 밀어넣으며 생각했다. 영식이가 잠시 고개를 돌릴 때 재빠르게 물을 탔다. 보리차와 1:1 비율로 섞으니 그제야 간이 맞았다.
"오늘 뭐했어?"
"나비랑 오뎅꼬치로 놀고,"
"찾았어?"
"응. 이삿짐 상자도 좀 정리했어."
어쩐지 집이 넓어보인다 했다. 이사온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짐정리를 다못했다. 집에 오면 밥먹고 바로 뻗으니 할 겨를이 없었다. 휴일에 진짜 해야지 해야지 했지만, 영식이 옷사주고 나비 데려오니 다 끝나있었다. 모두 끝나버렸다. 나는 시작도 안해봤는데.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미룬 짐정리를 영식이가 조금씩 해나가고 있었다.
"어디에다가 둬야할지 몰라서...내가 치우기 좀 그런건 그냥 뒀어어..."
"그래. 잘했네. 나머지는 내가 치울게."
치우기 민망한 건 내 속옷 같은거겠지. 그래도 냉장고 옆에 내 키만큼 쌓여있던 상자의 높이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번 쉬는 날에는 진짜 치운다. 진짜. 나는 청양고추를 쌈장에 푹 찍고 입에 밀어넣었다. 역시 청양은 한여름 땡볕에 쬔게 제일 맛있다더니 틀린말이 아니었다. 다음부터 이 마트에서 맨날 사와야겠다.
"맛있어?"
"너...한테 매울텐데. 먹어봐."
영식이도 자기가 만든 된장국이 짠지 물을 넣어 먹고 있었다. 아예 청양고추 봉지를 풀어놓고 쌈장에 찍어먹는 날 보며 눈을 반짝였다. 니가 먹기는 아주 많이 매울텐데. 영식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다가 자기도 입에 넣었다. 하필 골라도 제일 매워보이는 걸 골랐다.
"...씁..하. 씁...너무. 너무."
"맵지?"
응. 너무...너무 매워. 영식이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찜닭에 올려진 홍고추처럼 붉어졌다. 그러게 맵댔잖아.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보리차를 잔뜩 떠왔다. 얼음까지 동동 띄웠다. 매울 땐 우유나 두유 먹어야하는데, 하필 냉장고에 뭐가 없었다. 내일은 더 많이 사와야겠다. 영식이는 손부채질을 하고, 인상을 팍팍 찡그러면서 괴로워했다.
"다음에는 아삭이 고추 사올게. 오이 고추는 안매워."
"...미워."
잔뜩 삐진 얼굴로 날 흘겨본다. 분명 난 맵다고 말했는데 먹은건 너다.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귀엽기도하고 웃기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끅끅대며 웃었다. 대놓고 웃기엔 영식이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보였다.
"...웃지, 마아. 씁."
"안 웃, 었는데?"
그러기엔 내가봐도 어깨를 너무 떨었다. 고개를 식탁에 처박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은 다 막을 수가 없었다. 꽤 시끄러웠는지 잠에 든 나비가 마약방석에서 고개를 슥 들었다. 언제 나비 옷을 빨아서 입힌건지, 꿀벌옷을 야무지게 입혀놨다.
"맨밥이라도 밀어넣어봐. 덜할걸."
"..쓰읍. 매워서, 못먹어. 못먹어..."
햐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려둔 얼음을 빈컵에 가득 담았다. 물 대신 얼음에 입을 물고 있으라고 했다. 영식이는 입 안으로 얼음을 와르르 쏟았다. 각진 모양으로 영식이 볼이 쭉 늘어났다. 뭔 성인 남자 볼이 저렇게 말랑하고 허얘…….
10.
새롭게 쌓은 정보. 첫째 영식이는 매운 걸 잘 못먹는다. 까르보 불닭볶음면정도는 가볍게 먹고 불닭은 치즈를 얹어야만 먹을 수 있다. 캡사이신의 매운맛은 그럭저럭 견디지만 고추나 고춧가루의 통각은 영 못견뎌했다. 그런 영식이를 위해서 선물을 샀다. 지난번 청양고추 먹은 날 영식이는 내내 눈을 벅벅 비벼댔다. 자기 전까지도 태양을 피하는 비 마냥 씁, 하를 반복했다.
"영식아. 집에서 할 거 없이 심심하지."
"...아니."
"외롭잖아."
"...쪼금?"
둘째. 영식이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얼굴에 "나 너무 심심해 출근 안하면 안돼?"하는 눈망울로 아니라고 거짓말을 친다. 근래에 청약 당첨이 발표나고, 매수매도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더 기가 빨려서 같이 저녁을 못먹는 날도 허다했다. 미안함의 보답으로 선물을 사왔다.
"짠. 옥상에 심자."
"이거?"
"응. 어차피 옥상정원 쓰는 사람 없어서 우리가 써도 된대. 관리인 분은 격주 수요일에 가끔 오시고. 그날만 올라가지 마."
셋째. 영식이는 무언갈 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특히 혼자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걸 선호하는 것 같다. 소파에서 베개를 껴안고 있다가 펄쩍 일어났다. 내가 준비한 게 별거는 아니지만, 무료함을 달래줄 친구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언니를 통해서 관리인분이 주신 옥상정원 비밀번호를 눌렀다. 역시 건물이 신식이라 그런가 정원도 비밀번호네.
"와. 잘꾸며져 있네... 월세가 비싸긴해도 괜찮다."
송전 도심도 아니고 꽤 외곽이었다. 그런데도 도심정도의 월세를 부르길래 의아했지만 건물이 워낙 좋아서 그러려니 했다. 집이 깔끔했고 달려있는 옵션들도 다 신식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두번째 입주였어서 집 상태가 양호했다. 그리고 오늘 옥상을 보자마자 바로 월세와 관리비를 납득했다. 진작에 올걸. K-옥상의 대표격인 초록색 시멘트가 아니라 정말 깔끔하게 꾸며져있었다. 곳곳에는 잘 관리된 식물들과 아기자기하게 키가 작은 나무들. 꼼꼼하게 잘 칠해져있는 나무색 벤치와 테이블이 있었다.
"날 좋은날 여기와서 저녁 먹으면 좋겠다."
"...응. 완전..."
"예쁘지."
"예뻐."
영식이도 예쁜 걸 좋아하는군. 옥상정원 상태가 꽤 감동적이었는지 이리저리 구경하고 다닌다. 뒤에서 쓱 보니 키는 180을 훌쩍 넘길 거 같고, 어깨고 떡 벌어져있었다. 저런 남성이 이런 작고 섬세한 거에 감탄할 줄 알다니. 분명 기억을 잃기전에도 꽤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많이 받았겠지. 그러다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영식이가 결혼을 했거나 혹은 누군가와 만나는 도중이었다면 어떡하지.
"...일로 와봐. 여기다가 심자."
"응! 여기다가 넣어?"
사온 화분과 흙, 모종을 잘 옮겨담았다. 내가 먹을 청양고추. 영식이가 먹을 오이고추. 같이 먹을 토마토. 그리고 나비한테 줄 캣글라스도 챙겼다. 사이즈가 중정도의 화분을 달라고 했는데 잘 사온거 같다. 나중에 키가 훌쩍 자라면 키 지지대 할 줄과 나무막대도 사왔다. 그때까지 영식이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영식이는 아예 옥상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때보다 집중한 표정으로 화분의 위치를 조정했다. 이제야 알게된건데 집중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뿌하고 내민다. 오래살고 볼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영식이는 계속 보게된다. 나비를 좇는 시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족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친구라고 하기엔 막 동등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말로 설명하기엔 아직 적합한 표현을 못찾았다. 그냥 마음 속으로는 일시적 동거인정도로 정리해두었다.
"여주!"
"어?"
갑자기 영식이가 고개를 돌렷다. 계속 내게 등을 보이고 화분만 봐서, 편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들킨 기분이었다. 나는 황급히 바닥에 널린 봉투와 남은 모종을 챙겼다. 괜히 얼굴이 낯뜨거웠다. 영식이는 부끄럼도 없는지 내쪽으로 훅 다가왔다.
"...왜?"
"잠깐만. 대봐!"
영식이의 커다란 손이 내 볼로 향해온다. 뭐야 얘. 뭘 하려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점점 내쪽으로 숙여오는 몸과 닿아오는 손이 이상했다.
"흙 묻어서, 닦아주려고!"
"어...그래. 닦아야지. 가서 세수할게."
깨끗한 손으로 내 얼굴에 있는 흙을 털어냈다. 뭘 기대해. 뭘 기대해 이 쓰레기야. 갑자기 재활용도 안되는 불연소 마대자루에 들어가야할 것 같았다. 나비같은 애한테 무슨 생각을. 무슨 상상을. 영식이는 강아지야. 내가 잠깐 돌봐주고 가족을 찾아주는 존재다. 그렇게 두 눈을 꼭 감고 되뇌었다.
11.
>>
>> 언제와?
>> ㅠㅠ
영식이의 일과는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면 두유와 시리얼 그리고 과일 꺼내기. 나랑 먹기. 나비 사료 부어주기. 출근길 배웅해주기. 수요일을 뺀 날은 모두 옥상정원에 가서 관리하기. 나비가 다 먹으면 캣글라스 또 꺼내서 심어놓기. 그리고 이제 익숙해진 노트북과 공기계로 나한테 조르기. 가끔 셀카도 보냈다. 옥상정원 관리하는 것도 금방 끝나니까 심심하긴 할거야. 나는 괜히 마우스 스크롤을 잔뜩 땡겨서 확대했다. 참나. 진짜 잘생기긴 했네.
"뭘 보고 그렇게 웃어?"
"어...야한, 야한거요!"
"왕성하네 여주."
급하게 ESC와 Alt+F4를 연타했다. 언니한테 영식이의 존재를 알기 도움을 구해야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아직 논리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이럴 때 들키면 어버버하다가 그냥 끝나는거였다. 언니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와 진짜 이번 청약 피 중개 끝! 오늘은 진짜 맥주 사줄게. 먹고가."
"어...네. 좋아요!"
언니는 기지개를 쫙 켜며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빠르게 카톡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그사이 또 보내온 메시지가 있었다.
>> (사진)
>> 나비 자는 중
참나. 나비 사진만 보내면 되지 왜 옆에 자기 얼굴까지 디밀어. 나는 또 저항없이 스크롤휠을 굴렸다. 나비를 확대하고 보다가, 점점 옆으로 이동해서 영식이의 얼굴을 봤다. 진짜 뉘집 자식인지 잘나긴 잘났어. 하지만 미남계와 미냥계는 맥주 앞에 무너졌다.
<< 나 오늘 늦어
<< 많이 늦게가니까
<< 먼저 밥 먹고 자
>> 응....
영식이의 표정이 상상간다. 눈꼬리와 입끝을 잔뜩 떨어드리고 어깨를 푹 숙이고 있겠지. 응이라고 보내온 답장 뒤에는 많은 행동과 표정들이 읽혔다. 눈곱이 낀 기분이라 모니터 옆 거울을 봤다. 아주 광대가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그래. 망상글 같은데서 보면 강아지가 카톡 보내고 그런거 귀엽잖아. 동물농장 보면 누구나 활짝 웃는거잖아. 그런 미소의 일환이었다.
"또 야한거 봐? 얼른 퇴근하자."
"예!"
언니가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는 자꾸만 솟아오르는 광대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애는 가라앉을 생각을 안하네. 그래도 오늘은 죄책감 없이 마실 때다. 실장 언니랑 청약 매수매도 거래 관련해서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았고, 또 언니가 사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 없었다. 가게 근처에 있는 깔끔한 치킨집에 들어갔다.
"여긴 치킨도 맛있는데 닭똥집이 진짜 맛있어."
"저 진짜 좋아해요!"
"생맥은 테라로?"
"역시."
테라가 나온 이후로는 카스나 오비 맥주를 안마셨다. 맥주 종류에 큰 의의를 두지 않지만 테라는 왠지 더 시원한 느낌이었다. 허옇게 냉기를 잔뜩 머금은 오백잔 앞에 놓였다. 둘이 잔을 짠 부딪히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요즈음 잊고 살았던 시원한 맛이었다.
"시원하지."
"넹. 완전 요새. 진짜 요즘 술도 안마시고 정신 없이 살았네요."
"또 넌 정신 없었으니까. 송전은 어때? 살만해."
"음..."
송전에 삼주 가까이 살면서 느낀 점은 꽤 좋다는 것이었다. 있을 거 있고. 급하게 서울이나 경기도 가야할 때 있으면 빨리 운전하면 금방 가고. 또 무엇보다 너무 복잡하지 않다는 점이 좋았다. 원래 동물은 인구밀집도에 따라서 예민도가 달라진다는데 확실히 여기와서 여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아마 서울에서 계속 회사 다녔으면 흰머리가 더 솟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새 맘은 좀 괜찮고?"
나조차도 가끔 놀란다. 결혼직전까지 갔다가 차인 사람이 이렇게 멀쩡할 수 있나. 운것도 거의 하루 이틀이고 애인 생각도 잘 안난다. 인연 앞에 세월 없다더니 이렇게 가볍게 잊을 수 있는 지 나도 신기했다.
"뭐...엄마랑 새아빠가 천만원 보내주셨어요."
"오. 금융치료?"
"네... 그걸로 맛있는거 사먹고 언니랑 일하니까 훨씬 좋아요."
연달아 한 잔을 더 시켰다. 언니는 늘 느끼지만 배울게 많은 사람이었다. 돈 많다고 으시대는 매도인이나 늘 더 싸게, 더 빨리를 종용하는 매수인 앞은 정신없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배울 게 있으면 꼭 짚어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주야가 아니라 여주 씨 혹은 실장님이라고 불렀다. 나도 당연히 고객 앞에선 언니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집들이는 언제 하게? 뭐 필요한 거 있음 말해. 사줄게."
"어...집들이요?"
"송전에 초대할 사람이 나말구 더있냐. 그냥 배달음식 시켜서 간단하게 술이나 먹자."
진짜 좋죠. 좋은데...집에 있는 한 남성을 생각했다. 아차 싶었다. 그렇다고 언니를 언제까지 초대안할 수는 없었다.
"그 언니. 있잖아요."
"왜?"
언니는 땅콩을 뒤적이면서 대답했다. 치킨 한마리 더 시킬까? 남으면 포장해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지금인가. 지금 말해야하나. 분명 방금 맥주를 마셨는데 더 갈증나는 기분이었다. 아예 잔에 있는 걸 다 입에 털어넣었다.
"어우. 목말라? 일단 한 잔 더시킨다."
"네! 언니 그..."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슬로우 모션을 거는 것 같았다. 일순간 치킨집이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방금까지 시끄럽게 울리던 댄스곡이 멎어간다. 마지막 코러스 후에 백그라운드 잦아지는 노래, 그 뒤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집에 베개를 껴안고 앉아있을 영식이를 생각했다. 차분한 흑발 생머리로 아직도 안자고 기다리려나.
비밀은 지켜질 때보다 깨어질 때가 더 존재와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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