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 평안도 | 황해도 | 함경도 | 경기충청 | 경남북도 | 전남북도 | 합계 |
1910 | 18,743 | 4,740 | 1,691 | 2,975 | 5,726 | 5,499 | 39,390 |
3. 총회설립 후 해방전까지(1912~1945)
총회가 설립되던 1912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는 3?1운동, 자유주의 도전, 신사참배문제 등 일련의 위협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상당히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한국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일제는 교회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장로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운동,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 강요와 일제의 신민화 정책으로 인한 직 간접적인 교회의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11년에 발생한 소위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고 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전혀 근거 없는 음모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통치를 긍정적으로 보던 이전의 견해에서 돌아서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해 내심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이 민족이 결집하여 민족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던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의 힘이 하나로 모여 태동된 자랑스런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1919년 삼일운동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장로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전국적인 교회 성장을 주도했고, 일련의 사회개혁운동도 전개했다. 금연, 금주를 비롯, 절제운동, 농촌운동, 청소년운동, 의료, 고안원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수탈로 인한 농어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길선주와 김익두는 부흥운동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우리의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총회는 국내외 선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다.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일본, 간도, 중국, 시베리아 선교를 총회적인 차원에서 전개하여 처음부터 한국장로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진면을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수탈로 인한 피폐된 경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일기 시작한 자유주의 도전 앞에서도 교회는 결연하게 대처, 전통적인 신앙을 재확인하고 처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정통개혁주의 신앙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 후 찾아온 신사참배 요구로 한국교회가 너무도 쉽게 배도의 길을 택했을 때에도 한국장로교회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 역시 집요하고 줄기찬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한국장로회는 여느 교단처럼 그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만약 이 시대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한상동을 비롯 신사참배 강요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양심의 소리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영광이었다.
1936년 5월 교황청이 신사는 종교적인 예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교황청의 발표가 있은 후 한국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제사제도도 수용하면서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937년 한국감리교회가 무너졌고, 다시 1938년 제 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와 총대들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런 가운데 외롭게 생명을 내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시대 폴리갑이었고, 존 낙스였다. 1938년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정통성을 상실하고 일제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 역할을 자처하고 있을 때 이들은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마벳느고 친구의 신앙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던 것이다. 기실, 이들 외에 얼마나 많은 양심의 소리들이 일선 현장에서 신사참배문제와 고투했었는가? 해방 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명을 무릅쓰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당당히 맞섰던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터툴리안이 말한바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진리는 여전히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장로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될 역사적 진실이었다.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 대부분이 처음 전해 받은 성경적인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른 신앙이 바른 행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참된 신앙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시금석이었고, 이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준 주인공들이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본래 가졌던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 곧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구현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에 충실할 수 없었다. 1
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착, 종말론 중심의 타세적인 신앙의 강조, 사경회의 확산, 신사참배문제 등 시대적인 요인과 선교정책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전기(1884년에서 1912년까지)에 찾아 볼 수 있었던 복음의 균형 잡힌 발전이 상당히 줄어들면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1930년대 총회가 일련의 자유주의의 도전과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등을 겪던 그 시대에 두드러졌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교회는 대 사회적인 문제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친히 이끄시고 성장시키셨다. 이 기간 동안 한국장로교를 주도한 곳은 평양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던 평양을 비롯하여 서북지역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평양은 한국장로교의 센터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총회설립 후 1942년까지 31회의 총회 중에서 22회가 북한에서 개최되었으며 총회장 31명중에서 거의 70%인 20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선교사 출신 4명의 총회장을 제외한다면 단지 7명만이 남한 출신이었던 것이다. 총회의 개최지나 총회장의 연고지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북한지역이 한국장로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노회의 수에 있어서도 북한지역이 단연히 앞서고 있었다. 북한에 14개의 노회가 있었으며 남한에 10개 그리고 만주에 4개의 노회가 있었다. 교역자 수에서도 분명히 차이가 있다. 194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장로교 전체 925명의 교역자 중에서 북한에 551명 남한에 374명이 있었다. 이것은 북한의 교세가 단연 남한의 교세를 압도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창동교회, 산정현교회가 교세에서 서울의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남대문교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지역별 교세는 다음과 같다.
연대 | 평안도 | 황해도 | 함경도 | 경기충청 | 경남북도 | 전남북도 |
1912 | 23,673 | 5,718 | 2,354 | 3,961 | 7,817 | 9,514 |
1922 | 34,965 | 8,767 | 4,560 | 3,818 | 12,057 | 7,979 |
1932 | 46,322 | 10,420 | 6,428 | 5,055 | 17,776 | 13,852 |
1942 | 49,456 | 17,204 | 7,868 | 5,714 | 16,284 | 13,476 |
위의 통계가 보여주듯이 1912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세례인 수 110,002명중 북한 지역에 약 67%에 해당하는 74,528명이 있었다. 그러나 경기. 충청, 경상도, 전라도 지역도 성장속도에 있어서는 북한 지역의 교회성장에 크게 뒤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지역에서 두드러지게 급성장한 곳은 경상도 지역이다. 1912년 총회 설립 시에 7,817명이던 세례교인수가 1938년에는 무려 22,697명에 이르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1942년에 16,284명으로 줄어들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북한의 교회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 상황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4. 해방이후 통합의 분리까지(1945~1960)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정치적인 분단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남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졌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정립하기도 전에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문제로 일련의 대립과 논쟁의 시기를 맞이하여야 하였다. 1946년에 남쪽 총회에 의하여 조선신학교가 공식적으로 총회의 인준을 받았고 이에 반대하던 출옥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해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을 우려한 51명의 복음주의 학생들은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 문제를 총회에 건의하게 되었고 총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만주에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세력과 세계적인 학문의 조류를 과감하게 수용하려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일련의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하였다. 진보주의 노선에서는 김재준 박사가, 보수주의 노선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신학적인 논쟁은 신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총회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중립을 지키기에는 이 신학적 논쟁이 너무도 심각하였다. 계속된 논쟁 후 한국장로교회는 세 차례의 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1952년의 고신총회의 분열, 조선신학교 문제로 인한 1953년 기장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뼈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다 1959년에 W.C.C.문제로 인하여 또다시 W.C.C.를 옹호하는 통합측이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세 번 째 분열을 경험했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두고 한국교회사가들은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교단이나 교파 중심적으로 분열의 원인을 분석하고 교파주의적이고 교단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자신이 서 있는 교단과 교파를 넘어설 수 없겠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할 역사적 시점에 와 있다. 분명 1952년의 분열의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였고, 1953년 기장의 분열은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변천, 그리고 1959년 통합의 분열은 WCC와 에큐메니칼이 분열의 일차적인 요인들이었다.
그 외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요인들이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과연 자신이 서 있는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국교회와 사회 앞에 자성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확실히 세 차례의 분열을 맞은 후 한국장로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고신, 기장, 통합, 그리고 본 교단은 신학적 방향을 달리하며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본 교단과 고신의 경우 큰 신학적 차이 없이 서로 유대를 가지며 지내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기 가는 방향이 다르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가 경험한 일련의 분열의 경험을 통해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이전에 가졌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문화적으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주도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여 한국개신교의 주도적인 위치를 지켜갔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한국 장로교회는 북부를 제외하고는 고른 성장을 하였다. 1953년에 예수교장로교 세례인 수는 250,000명이고 기장 세례인 수는 16,944명이었다. 고려파를 합친다면 장로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0년 동안에 약 3배가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6.25전쟁, 교회분열, 신학적 논쟁, 이단의 등장 등 일련의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5. 변혁과 도약의 시대(1960~2005)
이 기간 본 교단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중심축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광활한 양지캠퍼스 조정, 강남 대치동의 총회회관 건립, 한국 전체를 하나로 만든 통일찬송가 발간 등을 통해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쉽을 구축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1960년 이후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내외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던 것이다. 분명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1950년대에 일련의 분열을 겪은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적 색깔을 분명히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한국장로교회는 토착화신학, 신정통주의 그리고 정통주의로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진보주의를 표방하던 기장은 1960년 이후 기독교 사상 등 일련의 신학지를 통해 자신들의 개방적인 신학적 입장을 뚜렷이 표방하면서 진보주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 발흥한 토착화 논쟁, 민중신학 등 일련의 신학적인 작업을 통하여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을 수정하고 한국적 장로교라는 기치 아래 토착화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감리교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한편 통합측은 에큐메니컬이라는 세계적인 교회 연합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W.C.C.가 추구하는 신정통주의를 자신들이 걸어갈 새로운 장로교 신학의 방향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교수들이 신정통주의야말로 현대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방향이라고 생각하였다. 통합의 일부의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민중신학 등 토착화 신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1960년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신학적인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일련의 장로교 분열을 통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신학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한철하 박사, 마삼락 선교사 등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아세아연합신학원을 설립하여 좀더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이후에도 본 총회는 여전히 성경이 오류 없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신학교와 교단이 운영되어 왔다.
본 교단은 장로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 교단은 평양신학교의 사상을 전수하려는 충실한 장로교 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초대 선교사들이 전수한 성경중심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현대의 변천하는 한국의 상황에 복음을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은 칼빈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본 교단은 수정되지 않은 정통 칼빈주의를 교단의 신학적 입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의 남아있는 과업은 옛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가 성공적으로 했던 것처럼 신학교와 총회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 신학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한국장로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신학교가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신학교는 신학교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다. 신학교는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런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총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시한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전수받은 한국장로교회는 성경의 근본신앙을 파괴하는 현대주의를 관용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음전파와 교회의 대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책임을 동시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지난 총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1920년 김익두 부흥운동, 1950년대와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공유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한 셈이다. 특별히 통합측이 분열되어 나간 후 본 교단은 1만 교회운동과 국내외 선교에 전념하여 놀라운 교세의 신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침체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 본 교단은 그 옛날의 복음의 생명력과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여 다시 한 번 복음전도에 매진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복음전파 노력 못지않게 교회가 소홀할 수 없는 것이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 구현이다. 근래 교단 일각에서 여기에 대한 자성이 일면서 이 일에 자의식을 가지고 동참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반포사회복지관을 운영해온 옥한흠 목사의 사랑의 교회(현 오정현 목사)나 안산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학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간 안산동산교회(김인중 목사), 그리고 근래 국가적인 태풍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헌신적으로 앞장서는 광염교회(조현삼 목사)는 이 일에 있어서 본 교단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중요한 모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왔다.
이들 외에도 우리 교단의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전파와 더불어 대사회적 책임 구현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본 교단은 이 일에 있어서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이 삶의 실존 속에서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얼마가지 않아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개혁주의의 균형 잡힌 실천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개혁파 복음주의 역사가 나단 해취(Nathan Hatch)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포용하며 개인의 경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포함하여야 된다.” 기독교인의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청교도들의 신앙관과는 차이가 있다. 청교도들은 경제, 직업, 사회, 정부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성경적인 규범 아래로 가져가려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한국장로교회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책임을 총체적으로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총회 100년사를 점검하면서 한국장로교회사가 반성하며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교회, 역사를 도외시한 교회는 성장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한국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정확한 역사사료에 근거한 한국장로교 역사의 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총회적인 차원에서 역사사료를 수집, 정리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정리를 위해서는 지역을 초월하여 총회 산하 전국교회들이 총체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총회 100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분명한 사실은 선교 초창기나 1959년 통합이 분립된 후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본 교단이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놀라운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경관을 비롯한 역사적 청교도 개혁신앙을 견실하게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성경 중심의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초기선교사들의 개혁파 복음주의 신앙이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도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이 그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